내가 청년기에 가장 많이 부른 찬양이 안이숙사모가 옥중에서 작곡한 내일 일은 난몰라요이다. 그리고 "나의 갈길 다가도록"도 수없이 불렀다. 한가지에 꽂히면 올인하는 성격 때문이다. 성수주일이라는 절대적인 과제에 꽂힌 나의 청년기는 지금와 회상해보면 엄청난 시련과 도전이었다.
아쉬운 것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 기간 한국교회가 강제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엄청난 멘붕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청년기의 신앙형태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아마 목숨걸고 관철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만큼 한국교회는 주일성수에 대해 안식일과 혼동을 했고 주일에 대한 의미정립에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어떻든 주일성수라는 과제와 싸워야 했던 나의 젊은날은 인생의 방향을 전혀 예기치 못하게 인도했고 결국 목회자의 길을 인도해주었고, 뒤늦게 선교사의 길을 인도해 주었다.
오늘에 충실한 자는 결코 내일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의 욕심은 오늘에 만족하려 하지 않는다. 무언가 아쉽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모습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에 이끌림을 받게 된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 존재한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물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목표. 나의 인생에서 그런 시기가 잠깐 있었다. 선교지에서 재정의 고갈로 오늘을 버틸 수 없는 상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척교회를 목회할 때도 재정의 문제로 절벽감을 느낄 때 선택한 돌파구는 금식기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내가 원하는 시간표와 달랐을 뿐임을 나중에 깨달았다.
마이너스 통장이 바닥나고 이자부담과 생활비 조달을 책임져야할 가장으로서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저임금을 받더라도 경제활동을 통해서라도 발등의 불을 꺼야만 했다. 그리고 곧이어 코로나 봉쇄가 닥쳐 어쩌면 나의 마음이 짊어져야할 무거운 짐을 경감해 줬는지도 모른다.
하나님 어떤 것이 최선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