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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묵상글 (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 법과 규칙, 상식의 준수 * 영성의 기초.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08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6:05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37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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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03.26 03:05
법과 규칙, 상식의 준수
영성의 기초
오늘 복음과 독서의 주제가 일치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이고, 독서는 하느님의 법입니다. 공동체 삶의 기초가 법과 규칙입니다. 공동체의 그누구도 법이나 규칙위에 있지 못합니다. 누구나 법앞에 평등은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지도자들에게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법이나 규칙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제가 1992년부터 지금까지 33년동안 금요강론을 멈춘적이 없는데 다룬 내용은 <베네딕도 수도규칙>이었고 저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그날까지 반복하여 이 규칙을 공부할 계획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자명하게 실천되어야 할 법이 유린됨을 목격합니다.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두려워할줄도 모르고 너무 뻔뻔하게 공공연히 법을 위반하면서 법위에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 많아 국민들의 신뢰를 잃으면 나라도 망합니다. 그래서 법을 가장한 도적 무리란 뜻의 ‘법비(法匪)’라는 말도, 온갖 법 지식을 이용해 성긴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추(法鰍;법꾸라지)’란 말도 회자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은 인간 누구나 공감하는 불문율입니다.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란 말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법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법없이는 못삽니다. 법이 있어야 생존경쟁치열한 약육강식의 시대에 약자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규칙이 준수되지 않으면, 특히 지도자들이 법을,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서서히 내적으로 무너집니다.
필연적으로 이런 불의하고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 공동체는 내적분열을 겪고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법이 잘 지켜져야 공동체의 성원들도 공동체를 사랑하며 효능감을 지니고 살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법과 규칙의 준수는 함께 하는 공동체의 성원들도 그대로 보고 배우기에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법과 규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옛 수도원을 창립했던 분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분들이요 삶자체가 살아있는, 걸어다니는 복음서라 할 정도로 보고 배울 법이나 규칙 자체였기에 규칙이 없어도 평화공존의 융성한 공동체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살아 생전에 우선 마련한 것이 법규와 규칙이었습니다. 카리스마와 관계없이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우선적인 것이 무엇보다도 공동체가 동의하고 합의한 법규나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삼학(三學)도 계정혜(戒定慧)의 순서입니다. 계울준수의 바탕위에 안정(安定)이 있고 관상의 지혜가 뒤따릅니다. 영성신학도 예전에는 수덕신비신학이었으니 수덕의 준수위에 바탕한 신비신학임을 말해 줍니다. 이런 법규나 규칙의 준수가 없는 공동체라면 사상누각, 모래위에 공동체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예전 장상의 언급도 있지 못합니다. 상식과 양식에 기초하지 않은 영성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말하기전에 우선 기본이 되는 상식부터 규칙부터 지키라는 것입니다.
제가 맨처음 베네딕도 수도자는 ‘평화의 전사’라는 말마디를 배운 것은 황춘흥 다미아노 선배수도사제였고 이분이 당신을 찾는 수녀들과 주고 받았다는 문답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분이 없었다면 제가 수도원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제 수도성소에 주님의 가교역할을 했던 결정적인 분으로 타계하신지 이미 오래지만 지금도 여전히 고마워하고 있는 분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까?”
물음에 신부님을 일언지하에 답변하신 내용은 단 하나였습니다.
“규칙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이치럼 잘 사는 것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요 단순합니다. 규칙대로 살면 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규칙을 사랑하고 존중하여 자발적 정신으로 규칙대로 살아야 공동체의 기강도 서고 견고한 공동체도 건설됩니다. 대통령이나 입법, 사법, 행정부 지도자들 역시 나라 공동체 질서의 기초와 기본이 되는 법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 제1독서의 모세야 말로 살아있는 법과 같은 분임을 봅니다. 모세가 우선적으로 강조한 것도 규정과 법규의 준수였습니다.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할 것이다.”
이런 종교가 명품종교요 이런 신자가 지혜롭과 슬기로운 명품신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단호하기가 추상같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존중의 표현입니다. 바로 그 사랑의 법이 오늘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입니다. 율법주의자가 아닌 율법정신의 사랑으로 살았던 ‘살아 있는, 걸어 다니는 복음서’와 같은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빛날 사랑의 율법이요,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모세처럼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법 준수에 철두철미한 율법정신의 사랑이 체화(體化)된 분입니다. 모세와 예수님, 이분들의 율법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요, 절대로 율법주의자가 될 수 없는 분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점차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살아 있는 걸어 다니는 사랑의 복음서’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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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26 04:59
- 큰 사람, 작은 사람
오늘 신명기는 큰 민족에 대해 얘기하고,
오늘 주님께선 큰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에 비춰볼 때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크신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인데
이는 하늘을 품은 호수가 가장 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위대하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어떤 사람을 칭찬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는 모세의 법을 지닌 민족이 위대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훌륭합니까?
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 더 훌륭합니까?
제 생각에 아무리 주님이 하느님 계명을 지니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해도
법 없이도 법이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법을 가지고 법에 따라 사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라고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을 함부로 어기고 무시하는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 학자가 하는 말은 지키되 그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일 겁니다.
사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주의가 문제이고,
율법주의자의 문제는 율법 준수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율법을 지키건 어기건 그것은 자기중심이고,
사랑이 있으면 율법을 지키건 어기건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율법을 어길 때는 언제나
사랑을 위해서이고 사람을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만일 율법에 사람과 사랑이 없이 법만 있다면
그것을 진정한 하느님의 계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요즘 제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단식재와 금육재의 준수 문제입니다.
저 혼자일 경우에는 이것들을 어길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와 같이 식사할 경우에는 이것을 쉽게 어기곤 합니다.
사제가 더 모범이 되어야 하나?
그래서 밥을 먹으러 가도 채식 식당을 골라서 가야 하나?
식사를 하면서 술은 먹지 않고 먹지 말자고도 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다 그가 또는 그들이 선택하는 곳에 가지만
실은 비겁하게 선택의 고민을 그들에게 미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이 먹기 싫었는데 그 때문에 먹은 것이 아니라
먹고 싶었는데 그에게 술 먹은 책임을 돌리고 제 합리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이나 하는 저는 작은 사람인 것이 틀림없고,
욕망을 숨기면서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기합리화나 하는 저는
작다 못해 찌질한 사람입니다.
하늘을 담은 호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담은 큰 사람이 되라고 도전을 받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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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향심 기도
하느님의 숨
2025.03.25. 17:02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25일 화요일 (호명환 번역) 열세 번째 주간: 향심(centering)과 침묵(silence), 고요(stillness)
향심 기도(Centering Prayer) 안에서 우리는 단순하게 우리의 생각을 하나씩 하나씩 떠나 보냅니다.
마리아의 가장 위대한 선물은 당신 삶 안에서의 하느님 현존과 행위에 마음을 맞추고자 하는 기꺼움이었습니다.
-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Mary, the Mother of God)
CAC의 은퇴 운영진 신시아 부르조(Cynthia Bourgeault)는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를 가르치는 데 수십 년의 삶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줍니다:
40년이 넘는 동안, 다음의 네 가지 지침을 통해 전 세계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향심기도가 성공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1. 여러분 내면의 하느님 현존과 행위에 마음을 맞추겠다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신성한 단어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2.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잠시 몸가짐을 바로잡으신 후 조용하게 여러분 내면의 하느님 현존과 행위에 마음을 맞추겠다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그 신성한 단어를 떠올리십시오.
3. 여러분의 마음에 [몸의 감각과 느낌, 생각의 이미지나 다양한 상(像) 등] 어떤 잡다한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그 신성한 단어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십시오.
4. 기도가 끝날 무렵에 약 2분 정도 눈을 감은 채 침묵 안에 머무십시오.
토마스 키팅 신부는 하루에 두 번 20분씩 이 기도를 바치라고 권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정말로 이 향심 기도를 통해 생각을 하나씩 하나씩 떠나 보냄으로써 깊은 묵상이나 명상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우리 기도 수양의 주관적인 경험일 수 있으며, 이는 정확하게 이 기도를 수양하는 초보자들이 경험하는 당혹스러움일 것입니다. 향심 기도 피정이 시작되던 초기에 키팅 신부가 직접 이끌었던 피정에 어느 수녀가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20분간의 향심기도에 맛들이려 노력하다가 좌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토마스 신부님, 저는 이 기도에 젬병인가 봅니다. 20분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거든요!"
"정말 훌륭해요!" 한치의 주저도 없이 키팅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로 돌아갈 오만 가지 기회입니다."
이 단순한 이야기가 향심기도의 정수를 말해 줍니다. 향심기도는 본질적으로 우리 마음이 어떤 특별한 아이디어나 감상에 젖어 있다가 거기서 떠날 때마다 우리가 더 작고 더 위축되어 있는 의식(consciousness)에서 벗어나 열려 있고 확장된 의식(awareness)으로 옮겨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열린 의식 안에서 신성한 현실에 들어서게 되며 여기서 모든 것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인지의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돌아섬의 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14세기의 익명의 저자에 의한 고전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쓸 때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이르르고 친밀하게 머물 수 있을 뿐이지, 생각을 통해서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2] "사랑"은 우리가 말하는 열려 있고 확장된 의식을 표현하는 이 저자의 애정이 담긴 단어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 전체 안으로 스며드는 더 깊은 앎의 길이 점차로 열리게 됩니다.
40년이 넘는 향심기도의 경험을 통해 저는 이 "사랑"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감정이나 느낌과는 정말로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마음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있는 비-이원론적 인지(non-dual perception anchored in the heart)에 대한 가장 가까운 표현이요 그에 해당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이 익명의 저자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 것은 옳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작용하는 너비는 존재들에 대한 친밀감의 정도이며, 이것이 바로 존재들과의 공감의 울림을 통해 내면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 자신의 시대보다 수 세기 앞서 전적으로 다른 인지 방식을 묘사하는 비유를 찾아낸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삶을 제 이름 때문에 고민해 왔습니다: 그레이스(Grace: 은총). 오늘의 묵상, 즉 [은총은 하느님의 이름입니다.]는 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 이 묵상 글은 제가 순간적으로 경험하고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들을 상기시켜 주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 다음에 주어지는 은총을 받기 위한 유일한 전제 조건은 이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라는 말에서 특히 이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80세인 저는 선물에 또 선물을 받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성장, 아름다움, 아픔, 경이로움, 기쁨, 그리고 알지 못함 등등.... 저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쁘고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선물이며, 저를 겸허하게 해 주고 놀라움으로 이끌어주는 선물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은총은 (그리고 Grace인 저도!) 참으로 놀라운 선물입니다.
—Grace R.
[1] Thomas Keating, “The Method of Centering Prayer: The Prayer of Consent,” Contemplative Outreach.
[2] The Cloud of Unknowing, trans. Ira Progoff (Delta Books, 1957), 72.
Adapted with permission from Cynthia Bourgeault, The Heart of Centering Prayer: Nondual Christianity in Theory and Practice (Shambhala, 2016), 28–29, 14, 120–12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xisbati, Untitled (detail), 2021,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침묵은 풀밭 위에 뻗져진 저 손처럼 지금 여기에서 살갗을 스치는 풀잎 하나하나를 단순하고 깊이 의식하듯이 현재의 순간에 깊이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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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전체이자 심장부이면서도 자칫하면 가장 작은 부분처럼 여기질 수도 있는 하느님 사랑!
하느님의 숨
2025.03.26. 05:5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한 자' '한 획'은 히브리 알파벳 중 열 번째 것인 "요드(י)"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느 영어 성경(New International Vesion)에는 "한 자 한 획"을 "not the smallest letter, not the least stroke of a pen", 즉 "가장 작은 글자, 혹은 글씨의 가장 작은 획"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가장 작은 글자'란 히브리어 알파벳의 "요드(י)"를 의미하고, '그 글씨의 가장 작은 획'은 "요드(י)"의 위쪽 끄트머리에 살짝 쳐 올라간 획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이 내용을 "한 자 한 획"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특별한 부분을 언급하시는 걸까요? 사실 이 '요드'은 '야훼'라는 단어의 첫 번째 자음이기도 하고, 또 "손", 즉 어떤 존재의 '힘'을 의미하는 "야드"라는 단어의 첫 번째 자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요드'라는 알파벳은 가장 작은 알파벳이지만 모든 존재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그 하느님의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인 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면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은 제쳐 놓고 그외에 핵심과 중심에서 벗어난 다른 많은 것을 우리가 마음에 두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핵심이 무엇일까요?! 그 답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율법의 완성은 하느님의 뜻이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란 모든 것이 당신이 창조해 주신 대로 사랑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성의 조화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율법은 단순히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의미와 목적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을 취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 하느님의 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율법은 사람들의 잘못과 허물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하였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율법, 즉 새 법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이들에게 용서와 은총을 허락해 주는 따스한 하느님의 손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율법은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하였고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지적해 주고 벌을 주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새 법은 비록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죄를 깊이 의식하며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하느님께 돌아서는 이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지적하시긴 하셨지만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와 목적인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지적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잘못된 행위 자체라기보다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인식부터 알게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그 사랑의 하느님과 참된 관계성을 맺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지향을 가지시고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우리와 더불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을 걸어가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마음에 깊이 새기고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앞 부분(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는 마태오 복음 마무리 부분,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확언은 당신의 아버지이시자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확신은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신뢰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서 나오는 확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고쳐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가장 먼저 마음에 깊이 새기고 품어야 할 것은 이 사랑의 하느님께서 '나'를 완전히 신뢰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확신이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깊이 인식하고 우리를 온 마음으로 끌어안아 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긍정적인 약속들을 우리가 깊이 새기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그 다음에 명백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그 죄나 어둠마저도 하느님과 그 놀라운 사랑과 빛에는 전혀 아무런 힘도 낼 수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제가 어떤 복음 묵상에서 몇 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던 말기 암 환자가 매일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긍정적 약속을 쓰고 외고 새기면서 암에서 치유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 드린 적이 있지요?! 하느님께서 그 자매를 치유해 주신 것은 그 자매가 선을 행하였기 때문도 아니고, 그 자매가 그 전에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 자매를 치유해 주신 유일한 이유는 그 자매가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굳은 신뢰심을 두고자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예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잘 시사해 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합니다!
만일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채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뉘우침과 회개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진정한 목표는 완전한 사랑이신 분과의 하나 됨인데, 하느님의 '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뉘우침과 회개는 여전히 그리고 오로지 '나'(에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뉘우침과 회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치유와 용서를 받았던 복음서의 인물들을 다시 한번 깊이 새겨 봅시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죄의 뉘우침이나 회개보다 먼저 하느님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죄인일지라도,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이 창조해 주신 당신의 자녀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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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26 06:10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르는 전화는 잘 받지 않는데, 책을 읽다가 전화벨이 울려서 습관적으로 받고 말았습니다. 보험 관련 전화였습니다. 노후 대책으로 의료비를 지원하는 보험이었습니다. 솔직히 자동차 보험 외에 어떤 보험에도 가입하지 않는 저입니다. 가족이 없으니 생명 보험 같은 것이 필요 없고, 건강하기도 하지만 의료비 지원을 교회 병원에서 해주고 있으니 이 부분 역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연금 보험도 있지만,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한 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교회에서 책임져주니 이 역시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 속 상담사는 ‘노후 대책’을 세워야 할 때라면서 강력하게 말했지만, 상담사가 말하는 대책을 이미 세운 상태였습니다.
보험회사에서 강조하는 ‘노후 대책’도 있지만, 더 시급한 노후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곳에 가기에 합당한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이 아닌 부정적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사랑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하느님과의 대화가 중요하듯이 이웃과의 대화에서도 사랑으로 소중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가장 훌륭한 노후 대책이 될 것입니다. 쓸데없는 대책으로 시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랑할지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바로 지금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한 행동과 말씀을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사랑에 연관된 말과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는 모습이라며 비판합니다. 특히 당시 사회 안에서 커다란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의 이런 비판에 일반 사람들도 동조할 수밖에 없었지요.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노후 대책이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에 집중하고 사랑의 완성을 이루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서의 큰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노후 대책을 잘 세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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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용서란 제비꽃이 자신을 밟은 사람의 뒤꿈치에서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이다(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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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아마도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복음’ 안에서 완성(성취)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고,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복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계명을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선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고, 그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그리고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행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사랑의 원의’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사랑하기를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지키고 가르치며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닌 행실로 사랑하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며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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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뭘 배울 때, 어깨너머로 배우곤 했습니다. 스키도 강습을 한 번도 받지 않고 남들이 타는 걸 보고 따라 했습니다. 많이 넘어지면서 나중에는 곧잘 탈 수 있었지만, 상급자 코스에서는 탈 수 없었습니다. 기본기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테니스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공을 주고받았습니다. 친구들과 노는 정도는 되었지만, 정식으로 게임을 할 수준은 되지 못했습니다. 당구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정도는 되었지만, 기본기가 약해서 실수가 많은 편입니다. 정식으로 배워서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 있습니다. ‘스킨 스쿠버’입니다. 물속에서 하는 운동이고, 자칫 잘못하면 큰 위험에 직면할 수 있기에 이론과 실습을 정확하게 배웠습니다. 지금도 스킨 스쿠버는 설명할 수도 있고, 바다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저와 달랐습니다. 스키도, 테니스도, 스킨 스쿠버도 강습을 먼저 받았고, 늘 기본기를 먼저 배웠습니다. 기본기가 탄탄한 신부님은 저와는 다른 차원에서 운동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갔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의 이유를 성찰하였습니다. 성전에서 제사 지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군대가 강한 것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느님의 계명과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정리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규정과 법규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다고 결실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는 밭에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어야 합니다. 가뭄에는 물을 주고, 장마에는 물길을 내 주어야 합니다. 한문으로 쌀은 ‘米’입니다. 이는 농부가 88번의 정성을 들여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입니다. 오늘 독서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기본기가 없는 사람은 엉뚱한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입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쳐내면서 성공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치장된 명예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우리를 축복의 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우리를 무한경쟁의 싸움터로 내몰기 마련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은 훼손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푸른 지구는 병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기도, 희생, 나눔, 봉사’를 충실하게 실천하여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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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율법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모세를 통해 내려 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는 것 중 나쁜 것은 없습니다. 불완전한 것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없습니다.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제 손에 종이 한 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백지입니다. 백지라는 말은 그 의미 안에 미완성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이 종이 안에 무엇인가를 채웠을 때 백지가 완성되었다고 말합니다.
제가 만약 이 백지 안에 내용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채우면 그것으로 백지는 완성된 것입니다. 반대로 종이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채워도 종이는 완성된 것입니다.
두 가지 다 완성된 것입니다만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차이이지요? 하느님이 들어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들어있나, 미움이 들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삶 속에서 율법의 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완성은 바로 사랑이 들어있는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이 곧 사랑의 행위가 되는 것이고 사랑이 곧 율법이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가 하얀색의 백지라면 그 안에 무엇을 채워 완성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하루가 사랑으로 가득하길, 하느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길, 형제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길 말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하루도 사랑으로 가득하길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인생이란?
사람들은 인생에 행복만이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슬픈 것과 고통스러운 것들은 사라지길 바랍니다.
어떤 이는 스스로 고통을 잘라내고 행복만을 바라보며
정신과 마음을 병들게 만듭니다.
인생은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진 반죽과 같습니다.
어우러져야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반죽은 면이 되고 빵이 되어 그 맛을 펼쳐냅니다.
행복만이 존재하는 인생은 없습니다.
인생은 밥 한 그릇 덩그러니 있는 상차림이 아닙니다.
인생은 모든 것이 어우러진 진수성찬(珍羞盛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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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끝내 이기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불신을
먹고 사는
불신의 세상
거슬러
믿음으로
끝내 이기리라
절망을
먹고 사는
절망의 세상
거슬러
희망으로
끝내 이기리라
증오를
먹고 사는
증오의 세상
거슬러
사랑으로
끝내 이기리라
저주를
먹고 사는
저주의 세상
거슬러
축복으로
끝내 이기리라
불의를
먹고 사는
불의의 세상
거슬러
의로움으로
끝내 이기리라
선동을
먹고 사는
선동의 세상
거슬러
올곧음으로
끝내 이기리라
가름을
먹고 사는
가름의 세상
거슬러
이음으로
끝내 이기리라
누름을
먹고 사는
누름의 세상
거슬러
섬김으로
끝내 이기리라
버림을
먹고 사는
버림의 세상
거슬러
품음으로
끝내 이기리라
어둠을
먹고 사는
어둠의 세상
거슬러
밝음으로
끝내 이기리라
굴종을
먹고 사는
굴종의 세상
거슬러
저항으로
끝내 이기리라
죽임을
먹고 사는
죽임의 세상
거슬러
살림으로
끝내 이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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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율법은 내 영혼을 지키는 보루와 같은 것스크랩 인쇄
강만연 [fisherpeter] 250326. 07:58 ㅣNo.181033
오늘도 보통 때보다 간략하게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세상 법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교양으로 법철학을 들었습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법이라는 건 왜 필요할까요? 언젠가 한번 올리겠습니다만 법 없이 살아도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할 때가 있습니다. 이건 좋은 의미도 있고 나쁜 의미도 있습니다. 대개가 다 좋은 표현으로만 생각합니다. 나쁘다의 의미는 실제 나빠서가 아니라 법이 더 잘 보호를 할 수가 있는데 법이 없다면 이 사람 같은 경우에는 나중에 없어서 피해를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나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필요할 땐 든든한 보호막이 될 수가 있었는데 그게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없으니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법이라는 게 없어도 괜찮은 게 아니겠죠. 있었더라면 자기를 지켜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30년 전에 아주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는데 이게 잘 복기가 되지 않습니다. 이건 제가 기본 맛보기 정도입니다. 나중에 그 내용을 복기를 한다면 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고 왜 필요한가를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개념입니다.
지금 그걸 결론은 알고 있는데 설명을 당장 해드릴 수가 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제가 나중에 어떻게 자료를 찾게 된다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법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게 구속이 될 수가 있고 또 아니면 자유를 줄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구속이란 말의 뜻은 매이게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강학상 의미입니다. 감금의 구속이라는 그 의미가 아닙니다. 법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교도소 안에 죄수와 교도관 둘을 비교해보겠습니다. 교도관은 직업상 있습니다. 자기가 근무 시간만 교도소 안에 있습니다. 만약 오전 근무를 하는 교도관이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물리적인 개념으로는 갇혀 있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각 사람의 심리를 본다면 심리도 똑 같이 갇혀 있다고 생각을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간적으로는 갇혀 있는 상황은 동일하지만 죄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 마음도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교도관은 자기가 공간은 페쇄 공간이라도 자기는 죄를 지어서 갇혀 있는 게 아니고 직업상 그곳에 있기 때문에 마음은 갇혀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환경인데도 상황은 다릅니다.
이 상황을 복음에 비유를 해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율법과 계명이 마치 공간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을 구속하는 장소의 의미처럼 제한을 하는 감방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언급한 구속의 의미는 말 그대로 구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라는 건 같은 단어이지만 여러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 미세한 차이를 잘 이해하셔야 되기 때문에 제가 부연설명을 드린 것입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게 얽매이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는 죄수의 경우가 될 것입니다. 이건 감금이라는 의미의 구속입니다.
하지만 교도관 입장에서는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죄수처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형태는 갇혀 있는 게 동일하지만 자기는 죄수처럼 죄를 지어서 갇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죄인에게 가하는 구속(감금)이라는 개념에서 탈피된 개념인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그 자체만의 액면적인 말씀으로만 해석을 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법이 미완성인 상태로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도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달리 바라보면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보면 보완, 보충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 의미는 나중에 결론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오늘 복음에서 또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후반부에 있습니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자의적으로 교회의 법규범을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쉽게 말해 쫀쫀하게 이런 걸로 우리에게 벌을 주시겠느냐 하는식으로 말입니다.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시고 봐주시겠지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절대적으로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자칫 잘못하면 이런 사고에 매몰돼 있으면 큰일이라고까지는 말하긴 어렵지만 영혼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 후반부를 잘 해석하면 답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법과 계명이 우리를 옭아매는 존재로 있기 위해서 법을 완성하시려고 하신 게 아닐 겁니다. 어떤 결함이 만약 그 결함 때문에 이 결함은 결여 즉 법이 없는 무법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면 제가 서두에 말씀해드린 것처럼 보호를 해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보호는 영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우리에게 율법과 계명의 존재 의미를 제시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결국은 율법과 계명은 우리의 영혼을 구속(얽매임)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보루와 같은 성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오늘 복음은 한결 이해가 잘 될 수 있으리리 봅니다. 어제도 여중생이 제 자리 옆자리에 앉았고 제가 10시 반 경에 피곤도 하고 해서 그만 집에 돌아왔는데 저보다 더 책을 보고 갔습니다.
마지막에 짐을 정리를 하면서 봤는데 열심히 공부를 하더군요. 이 여학생을 보며 정말 깊은 묵상을 한 게 있습니다. 이 내용을 집에 와서 올리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해 올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상상하지도 못할 중요한 내용을 묵상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쯤에 한번 올리겠습니다. 이제 이 아이의 입장에 제가 빙의된 상태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그런 내용을 묵상한 것입니다. 정말 유익한 묵상인 것 같습니다. 기대해보셔도 괜찮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s
강만연 (fisherpeter) 08:01
찬미예수님! 간단하게 하려고 했는데 어찌 하다보니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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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사랑의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 /
박윤식 [big-llight] 2025-03-25 ㅣNo.1810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이다. 하늘과 땅이 다 없어지기 전, 모든 게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율법 완성은 사랑자체이신 하느님 삶과 가르침이다. 오직 하느님 사랑과 그분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우리 이웃에 대한 것이었다. 율법 그 자체를 부정하신 게 아닌, 율법 본질인 사랑보다 세속 규정을 더 강조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신 게다.
유다인들의 율법은 613개 조항에 이른다. 이를 거슬러보면 십계명이고, 다시 더 줄이면 하느님과 이웃 사랑, 마지막으로는 ‘작은 이 사랑’인 최후의 심판 조항이다. 그것은 하느님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어 사랑 자체가 되셨기에. 그분 사랑 안으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 녹아들었기에. 법만으로 사는 시대는 지났단다. 이는 몸에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감동이 없는 삶이기에 그렇다. 사랑 실천을 통해 이웃과 함께 다 그분 사랑이, 계명의 근본이다. 이것이 그분 창조의 본래 의도였고, 이게 그분 보시기에 참 좋은 모습이었기에. 이것을 망각했기에 모든 게 엉뚱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단지 글자 그대로만 보려고,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본 셈이다.
어떤 법이든 지켜야 할 건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리라. 사람을 법에 옭아맨다면, 그건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이 아니다. 참된 율법은 해방과 자유를, 기쁨과 편안을 제공하리라. 이러한 율법이 사랑의 계명일 게다. 사랑만이 변화를 일으키리라. 소극적인 율법 준수를 적극적인 실천으로 바꾸는 것일 게다. ‘하지 말라.’라는 율법을 ‘하라.’라는 계명으로 만드는 거다. 사실 우리 일상에도 하지 말라는 강압적인 게 너무너무 많다. 그 많은 금지 사항이 있음에도 현실은 나아지지 않는다. 사랑으로 다가가지 않기에. 그러니 사랑을 가슴 한 편에 담아야만 할 게다.
종교생활의 두 핵심에서 첫째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둘째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다 하느님 뜻이다. 우리는 그 뜻을 정확히 알아야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게다. 예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란다. 이것은 커다란 대원칙이다. 이를 하느님 뜻에 가장 맞게끔 생활에 응용해야 하리라.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이에 만족하지를 못해 추가 규율을 만들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여러 금지 조항이 있다. 예를 들어, 불붙이기, 빵 굽기, 망치질, 바느질, 공공장소에서의 운반 행위마저도 금지했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돈벌이를 할 수 없기에, 가난한 이들은 안식일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나. 그러나 오늘 예수님 말씀은 모든 일에서 하느님 뜻을 찾으란다. 우리는 형식적, 기계적으로 계명을 지키려 하나,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 뜻을 먼저 찾아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역시 바리사이와 같은 위선과 형식주의에만 빠지게 될 게다.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받아들이면 금방 바뀐다. 이 사랑 실천으로 산 우리가 먼 훗날 주님 앞에 갔을 때, 당신께서도 단지 사랑 질문만 하시리라. 오직 한 가지, ‘너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였느냐?’라는 그 물음만. 그분은 분명 사랑일 테니까. 율법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이다. 내 존재 자체가 온통 사랑이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게다. 예수님은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 오직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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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나 행동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께서 율법을 아예 없애시려 한다고 생각하였을까요?
바오로 사도의 말에서 그 까닭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15)라고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으로 이민족과 자신들을 구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구별은 단순히 서로의 다름이 아니라, 이민족에 대한 적개심이 그 밑에 깔린 구별인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적개심이 가득한 상태에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시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반면에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2,16)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갈등을 빚는 상황들을 보면, 반목과 불신을 넘어 적개심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적개심을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의 길을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의 완성인 하느님의 사랑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사람이 이 시대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초대받은 소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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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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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말씀은
소위 산상 설교라고 말하는 부분의
거의 앞부분에 있습니다.
여덟 가지 행복을 말씀하시고
세상의 소금과 빛을 말씀하신 다음
오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이어서
마태오복음 5장 내용은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해석하시는데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 다르다보니
예수님께서 계명을 어기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도
다른 사람이 계명을 어기게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니에서 수난의 잔이 비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또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라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는
마태오복음 6장에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도 나타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는 예수님이신데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긴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다보니
율법이 지닌 뜻을 찾기보다는
말마디에 집착했습니다.
규정이 말하는 것은 지켰기에
할 일을 다 했다는 안도감은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도 없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율법의 정신이 사랑인데
사랑 없이 율법을 지키다보니
율법은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잘 지키려고 하다보니
섣불리 내 마음대로 해석하기보다
조금 맞지 않더라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그 뜻을 찾아가면 좋은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뜻을 알고 지키기가 힘들다면
가장 큰 뜻인 사랑의 기준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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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 19)
평화로운
우리의
일상이
무너지고
흩어진
혼란스러운
이 시간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율법과
예언서들도
스스로 지키고
삶으로 가르치는
이들이
완성합니다.
돌아가야 할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입니다.
지키는 율법이
지키는 참된
행복이 됩니다.
삶의 빛깔은
율법의
폐지가 아닌
완성으로
더욱
아름답습니다.
율법과
예언서가
제시하는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최상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가르침을
한 데 모으면
사랑의 십자가가
됩니다.
십자가가
가르쳐준
값진 교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하느님의
좋으신
가르침도
우리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귀한 것은
몸소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우리 시대가
잃어가는 것은
스스로 지키고
삶으로 가르치는
진실된 삶입니다.
지키고
가르치는
진실한 삶이
주는
참된 가치를
다시 만나는
사순입니다.
힘들수록
하느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야 합니다.
스스로
지키고
삶으로
가르치는
큰사람이
많아지는
건전한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드리는
소중한
오늘입니다.
하늘 나라의
진실한 인격은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실천하는
인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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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힘든 일을 기쁘게 할 때, 그 일이 곧 복음의 길입니다!
사순시기를 맞아 특강을 다니면서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주제요 화두인 회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회개라고 하면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십니다.
지난 잘못에 대해 크게 가슴 치는 것, 하느님과 이웃에게 소홀했음을 뉘우치는 것,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서 새삶을 모색하는 것...
그런데 또 다른 스타일의 회개가 있습니다. 참된 하느님의 얼굴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왜곡되고 그릇된 하느님 상을 깨트리는 일입니다.
저 역시 돌아보니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상이 많이도 엉뚱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분, 너무 크신 분이어서 이토록 작고 부족한 나와는
상대도 하지 않으시는 분.
그런데 오늘 신명기 저자가 소개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길이 너무 힘겹고 혹독할 때면,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면서,
즉시 응답하시는 하느님이시랍니다.
루카 복음 사가가 소개하는 하느님의 모습도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분, 대단한 분이셨지만,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일관되게 작고 겸손한 모습을 유지하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큰 사람들, 높은 사람, 고관대작들과 어울리지 않으셨고, 언제나 작고 가난한 사람, 세리, 죄인들과 기쁘게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죄인들과는 완전 동떨어진 엄청 대단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조차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재미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 역시 특별하고 대단한 행위를 통해서라기보다 일상의 작은 계명에 충실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요즘 마음이 하도 울적하고 거시기해서 시간 될 때 마다 피정 센터 구석 구석 봄맞이 단정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돌아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가 생각해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배수로 낙엽 치우기, 병들어 죽은 나무들 잘라내기, 매실나무 전지 작업, 쓰레기 분리수거...
머릿 속이 복잡할 때는 역시 단순 작업이 최고입니다.
일에 온전히 몰입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니, 기분이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별것 아닌 일이 없습니다.
특히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다들 하기 싫어하는 궂은 일들, 짜증내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얼굴로 할 때, 그 일이 곧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요, 복음적인 일,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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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 율법과 예언서는 둘 다 중요하다. 이 책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둘 다 완성하셨다. 거룩한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해서도 고쳐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며 잘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그 계명들을 모두 가르치셨고 또 지키셨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율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완성해 갈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표현이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19절)는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으로, 마지막 날에 가장 작은 자, 내쳐진 자요, 말째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순시기를, 부활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부활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광스러운 나 자신의 하느님 안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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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늘에서 정해질 나의 위치: 나는 타인에게 어떤 비전을 주는가?
얼마 전 어떤 모임을 하는데, 한 자매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드릴 예화가 그에 해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 앤디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런웨이라는 유명 패션 잡지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의 비서로 일하게 됩니다.
미란다 프리슬리는 패션계의 교황이라 불릴 만큼 영향력이 큰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미 미란다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에밀리가 있었습니다. 에밀리는 처음 앤디를 무시하며, 그녀의 부족함을 지적하고는 “그렇게 옷도 못 입고, 여긴 그런 사람을 위한 자리가 아니야”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에밀리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보여주려 애쓰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더욱 경쟁적으로 행동합니다.
하지만 앤디는 점차 일을 배우고 실력을 쌓으며 에밀리와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에밀리가 못하는 일들을 해내고, 미란다에게 더 많은 신뢰를 얻기 시작합니다.
에밀리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앤디를 경계하며, “너, 나를 밟고 올라서려는 거지?” 라고 묻습니다.
그 순간, 앤디는 자신도 모르게 에밀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승진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잘 해내는 거예요.”
그런데도 앤디는 미란다에게 점점 더 인정받으며, 더욱 많은 책임을 맡게 됩니다.
윗사람의 눈에는 남을 밟고 올라가 잘 보이려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앤디는 점차 미란다의 방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왜 내가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하나?” 경쟁적이고 냉정한 미란다의 업무처리 방식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녀의 방식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앤디는 마음을 정하고 미란다에게 그만두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무리 악랄한 미란다지만, 그래도 그녀의 눈에 여전히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하며 경쟁자를 끌어내리려 하는 부하직원은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제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많은 신자를 만나게 되고 인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를 매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도 있습니다.
일을 매우 잘하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본인은 그 이유를 모를지 모릅니다.
그 신자가 다른 신자들에게 “그냥, 이 정도만 하면 돼!”라며 그 신자가 사제의 인정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사제는 모든 봉사자가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사제가 본당 전체를 생각할 때 그 한 사람만을 좋아하기보다는 전체가 잘 돌아가게 하는 사람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와 반대로 누군가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예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이와 똑같이 자리가 매겨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도 높낮이가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내 주위 모든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등학교 때 매우 공부를 잘하는 한 친구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난 치과의사가 될 거야. 다른 의사들은 환자가 오면 밤에도 나가야 하지만, 치과의사는 정시 출근, 정시에 퇴근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거든.”
저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려고 하는지보다는 자기 안위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이에게 이런 생각을 누가 품게 하였을까요?
그런 부모나 선생은 세상에서 기억될 수 없습니다.
반면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님의 사례는 참 좋습니다.
만약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를 완전하게 키워내려 하지 않았다면 지금 설리반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설리반 선생님은 헬렌을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자신도 깊은 만족과 성장을 경험하며, 헬렌을 돕는 일이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하였는지 알면 나의 위치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주일미사만 빠지지 않고 나가라.” “성당 나가는 게 다 너에게 좋은 거야.”라는 식은 나의 위치도 하늘에서 낮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어라.” 등의 완전한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부모라야 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가르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비전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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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1)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은, 율법에 불완전한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의 율법 실천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실천’을 가르치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은
‘율법 실천의 완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율법 실천의 완성’은 ‘사랑 실천의 완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 실천의 완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여기서,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라는 말은, “사랑은 항상 빚으로 남아 있다.” 라는 말이고, 이 말은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했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사랑의 완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7-18).”
사랑 없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사랑으로’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은 없고
기쁨만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으로’ 율법을 지키고,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삶은 기쁨만 가득한 삶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의 삶에는 기쁨이 없기 때문에 그 삶은 삭막하고 어둡고 피곤하고 불행하기만 합니다.
또 속마음과는 다르게 겉으로만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위선 죄’를 짓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게, 또 진심으로 율법을 실천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말만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 또 생각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는 것, 그런 것은 모두 위선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은, 그렇게 위선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올바른 실천을 하도록 바로잡으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2) 유대인들은 안식일 문제나 정결 예식 문제 등으로 예수님과 충돌하면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지하려고 하시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음식에 관한 규정과
이혼장에 관한 규정 등을 당신의 권한으로
폐지하셨습니다(마르 7,19; 마르 10,5-9).
그러나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계명들과 율법들을 폐지하신 적은 없고, 바리사이들이 만든 규정들이나 유대교에서 만든 규정들만 폐지하셨을 뿐입니다.
그런 규정들이, 인간들에게 계명들을 내려 주신 하느님의 본래의 의도와 사랑을 거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은 종말이 될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영원히 변함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즉 인류 구원 사업이 완성된 다음에는,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 있는 나라입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계명들을 자기 마음대로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류해서, 작은 것은 무시하고 안 지키는 자”입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자기 혼자서만 위선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잘못된 길로 이끌고 가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큰 죄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자기 자신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충실하게 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잘 인도하는 신앙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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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5,17-19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안전 불감증’입니다. ‘괜찮겠지’, ‘설마 별 일 없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사소한 문제라고 대충 넘어가고 중요하지 않은 규정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위반하면 당장은 쉽고 편할 지 모르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안에서 곪고 썩어들어가 큰 사고로 이어지게 됩니다. 채 꽃 피워보지도 못한 생때 같은 아이들이 차디 찬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 불과 11년 전입니다. 앞날이 창창했던 꽃 같은 청춘들이 어른들의 무신경과 무관심에 짓눌려 길바닥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지 채 3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보기에 부끄럽게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직도 시간에 쫓겨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하다 과로로 죽는 청년들이 있고, 무리하게 준공 일정을 맞추려다 무너진 아파트에 사람이 깔려 죽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상황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 마음에 경종을 울리시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저히 지켜야 할 율법 규정들은 613가지에 달합니다. 게다가 위대한 조상들이 전해준 유산이라는 이유로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법들도 수두룩했지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늘 율법을 어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았습니다. 때로는 율법 규정들끼리 서로 상충되어서 하나를 지키면 다른 하나는 어기게 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율법의 핵심규정이 무엇이고 굳이 안지켜도 되는 부수적인 규정이 무엇인지를 해석하고 식별하는 것이 율법학자들에게 커다란 숙제가 되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스승이신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이나 손 씻는 전통 같은 것들에 연연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이시니, 제자들은 자연스레 그런 사소한 것들은 별로 중요치 않으며 굳이 지킬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시고자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킴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을 어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런 계명들을 지키라고 주신 이유와 뜻을 헤아리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이 바로 ‘자발성’이지요. 즉 하느님이 시키시니 마지못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 내가 잘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 걱정과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기꺼이 지키는 겁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계명을 대하면 ‘선만 넘지 않으면 되는’ 최소한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그분 뜻을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되지요. 그리고 사랑에서 우러나는 그 진실된 노력이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참된 기쁨과 행복을 하느님과 함께 누리기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니 남은 사순 시기동안 만이라도 그렇게 변화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는 죄 안지었으니 괜찮다’는 안일함과 나태함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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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신학교에서 매일 저녁기도 후에는 대침묵입니다.
그런데 몇몇은 그 침묵을 참으로 큰 짐으로 여기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침묵을 깨는 것이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으로 여기는 그들은
주위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제 피정에서도 그 사람들은 침묵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침묵은 사실 한편으로는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합니다.
침묵 중에서 사람은 내면으로 나갈 수 있고 그곳에서 하느님을 뵙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웃과 더불어 함께 지내는 기쁨도 큽니다.
그런데 때로 대침묵을 지키는 것은 나를 볼 수 있고 또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게해주는
중요한 선물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제들 사이에서 ‘성숙한 사람만이 침묵을 지킬 수 있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지요.
침묵하는 법은 한편에서는 고마운 것이고 또 한편에서는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가 전해주는 공통적인 법이 하나 있습니다. 법에 충실한 사람은 살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징벌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신명 4,1)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법규에 충실 할 것을 당부합니다.
법은 자기 자신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고 남들에게 적용하는데에 사람들은 쉽게 적응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에 ‘솔선수범(率先垂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법을 지키며
모범을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솔선수범이’에서 참다운 권위와 지도력이 나오는 것이기에 항상 어느 공동체이든지
지도자의 모범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혁명가들이 가장 힘든 것은 자기들이 내세우는 ‘올바른 소리’ 또는 ‘정의의 말’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떠들 때에는 영웅이 되는 기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께서 너무 자유로워 법과 관습을
무시하는 ‘자유주의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들 식대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잘못을 바로 잡으시는 것입니다.
‘아전인수’라는 말은 농경시대의 배경에서 나온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의 논이야 어떻든 간에
‘자신의 논에 물 대기’라는 의미이지요, 자기에게만 이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그래서 주님께서는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지 말고 성실하게 지키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19절)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지요. 말 그대로 이웃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내적으로는 엄격해야 하는 것이지요.
남의 허물을 덮어줄 줄 알지만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작은 허물이라도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세상은 주님의 가르침과 반대로 흐르지요. 남에게는 너그럽고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엄격하게 사는 것이 사실 삶에 있어서 조화를 아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법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은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솔선수범의
삶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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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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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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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6.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과분한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
<2025.3.26>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5:11~32절)
❝과분한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
❚ 절망의 끝에서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때, 참 사랑과 회복의 은혜를 받습니다.
✔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아버지를 떠나갈 때 행복을 상실하게 됩니다(11~19절).
생존해 계신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주어질 분깃을 요구한다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그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립니다(11~14절). 한 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그 끝은 어디까지일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방인에게 빌붙어 살길을 찾는 행동,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를 치는 일을 하면서까지 살 궁리를 찾게 되었다는 것은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상실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15~16절).
하나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 자유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결국 찾아오는 것은 영적 궁핍함뿐만 아니라 참담한 삶의 결말을 가져오게 됩니다. 일시적인 쾌락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고,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 전보다 더한 참담한 현실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자격 없는 나에게 과분한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 돌이켜서 회개할 때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20~24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행복한 것은 어떤 처지에 이르더라도 작고 미약하게나마 희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그런데 아들의 신분이 아닌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돌아갑니다(17~19절). 배은망덕하여 제멋대로 살다가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는 멀리서 보고 달려와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며 대성통곡하는 아들을 향하여 아버지는 여전히 존귀한 아들로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어다가 다시 얻었노라...’(24절)...
어쩜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어질 그때가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때 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향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있었기에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자녀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이 오늘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도록 합니다. 날마다 아버지의 품 안에 거할 때, 참된 평안과 안식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행복을 삶 가운데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 영적으로 무능할 때 감사를 멀리하게 됩니다(25~32절).
한참 잔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쯤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옵니다. 종을 통해 자초지종을 듣고선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해도 오히려 아버지께 그의 불만만 늘어놓습니다(25~30절). 집을 떠났던 동생이 돌아왔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이 돌아왔다고 해서 아버지가 이처럼 큰 잔치를 베풀었으리라고는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큰 아들은 늘 아버지의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 집을 나갔던 아들을 영접하고 잔치까지 베푼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큰아들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인 예수님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제한된 지식으로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도대체 하나님이 보여주신 모든 일이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족속에게 공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내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 안에 가둬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하시기를 원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엄청난 것들을 내 손안에 쥐어 주셨습니다. 나의 무능한 믿음이 그것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그 은총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아버지의 곁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큰 아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멀리 있는 아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적인 마음을 열고 보니 주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주님이 주신 은총이 얼마나 많고, 감격스러운지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과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능에서 벗어나 아버지가 주시는 참된 기쁨이 회복되고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달아 회개를 통해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늘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받은 사랑만큼 주변으로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5:11~3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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