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인가,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 마트에서 닭을 반값에 세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 텔레비젼에서 그 뉴스를 전하면서 닭을 사서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었다.
나는 거기서 닭을 사서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심한 자괴감에 빠져 버렸다.
아마, 그 닭은 대기업에서 생산 농가를 압박하여 생산비에 못미치는 가격으로 샀을 것이고 (저가 축산학과를 나와서 동문들의 실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형마트는 경쟁업체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소비자를 불러 모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소비자는 싼 값에 닭을 샀기에 경제학 원칙에 따른 기회비용을 적절히 사용한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학 법칙에서, 소비자에게는 기회비용이 작동을 하고, 생산자는 희소성의 법칙을 강조해서 소비자의 기회비용에 맞아 떨어지게 되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자본가가 주장하는 희소성의 법칙은 거짓말이다.
우리가 그 동안 소비했던 수 많은 상품은 절대적으로 희소성의 법칙과는 상관없이 팔려나갔다.
희소성의 법칙은, 대부분의 나라와 부족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대부분의 재료를 자급자족에 의지했는데, 그 중에 특별하고 희귀한 물건들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에 겨우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근대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형성될 때, 유럽의 각국들이 제 3세계로부터 강탈해 온 것들은 보통의 인간들이 사용하는 일상용품이 아니었다.
금, 은, 커피 등 기호식품, 비단 등 사치품, 향료등 조미료....이런 것들은 일반 인민들과는 거리가 먼 특별한 것들이었다.
그런 물건들은 경제학 원론에서 이야기 했던 희소성의 법칙에 틀림없이 들어 맞는 거였다.
이렇듯, 세계무역은, 각국의 생존을 위한 보통을 물건 보다도 특별한 계층을 위한 특별한 물건을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자본주의 생산 기술이 발달하여, 그 희소성의 물건들이 보통의 인민들의 필수품으로 만들어 졌을 뿐이다.
인민들은 과거에는 전혀 필요도 없었던 새로운 상품이 현재는 필수품으로 착각을 하여 기회비용의 약삭 빠른 머리를 굴려 구매할 뿐이다.
내가, 닭을 구매한 노인의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낙담을 한 이유는, 노인의 그 모습은, 불과 십년 전만해도 우리나라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노인들이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게다가 싼 물건을 사기 위해 여자들과 경쟁을 하며 마트를 뛰어다닌다는 것은 동네 양아치나 할 짓이었다.
과거 노인들의 모습은 집안 일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고 그저 차려주는 밥이나 먹는 정도였다. 물건 값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없었다.
어쩌다 노인들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제, 노인들은 퇴직을 하고 다달이 지급되는 연금을 아껴서 살아야 하고, 그것 마저 여의치 않으면 주유소라도 나가서 알바를 해야 하고, 그 마저 여의치 않으면 추운 겨울 날, 세수도 못하고 뒤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가장 먼저 폐지를 주워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나는, 노인의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내 주변의 어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혹시나, 나의 미래 또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현재의 노인들은, 대기업의 희소성의 법칙을 이용한 상술에 당하여, 기회비용이라는 소비자의 권리를 찾는 대신에, 자신들이 과거에 갖추고 있었던 집안의 연장자로서의 품위와 예의와 의리를 전부 내던진 것이다.
얄팍한 소비자로서 전락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소비자로서의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하기 전에 19세기에서도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이 있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탄생한 프롤레타리아였다.
박정희 시대, 빈농의 아들들이 생존을 위해 도시로 나와 공돌이 공순이가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박정희 산업화 시대에 프롤레타리아들이 탄생하였다.
영국의 경우에는, 프랑스 프로랑스 지방의 양모산업에 양모를 공급하기 위해, 영국의 시골 영주가 자신들의 장원에서 농노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최소한의 토지였던 공유지에 말뚝을 박아 양을 키우기 시작했고, 농노들은 전국들 떠돌아 다니는 부랑자가 되었다.
공유지를 파괴한 엔크로져 운동이 일어났던 16세기 이후부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까지의 영국에서는, 전국을 떠돌아다녔던 이른 바 농노 출신의 부랑자 떼거지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시골영주들 입장에서는 비록 양을 치게 되어 그들의 경제적 지위는 획들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장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동력은 필요했다.
그리고 시골교구를 운영해야 했던 시골 캐톨릭 사제의 입장에서도 교구를 유지할 최소한의 인원이 필요했고, 영국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중앙집권적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도 그들을 도시로 불러 들여 수용한 최소한의 수용시설이 필요했다.
왕과 영주와 신부의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 왔고, 그들은 부랑자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현대 유럽 사회복지법의 효시가 되었다는 거짓말이 된, 구민법 빈민법등을 만든 것이다.
그후, 프랑스에 양모로서 원료를 공급하다가 그 마저 여의치 않았던 영국이 막대하게 증가한 양모를 스스로 처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것을 한 번에 해결 할 수 있었던 것이 산업혁명이라는 기술혁신이었다.
그곳에 그들의 공유지에 쫒겨난 부랑자들이 노동력을 공급했고, 각지에 세워졌던 그들의 수용시설이 도시로 몰리게 되었다.
부랑자들이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상품 생산의 한 단위로만 존재했던 새로운 형태의 인간형인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그 인간형은 과거에는 전혀 없었던 새로운 존재였다. 그들의 노동력의 크기는 상품을 판 돈으로 환산이 되었다.
전통사회에서의 노동은 단 한 차례도 돈으로 환산되어 진 적이 없었다. 노동이 상품 생산의 단위로 전락한 적도 없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탄생은 유럽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자본주의 형성의 조건, 희소성의 법칙을 갖추어주기 위해 그들이 노략질 했던 특별한 물건이었던 기호식품과 향료등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상품생산을 위한 플렌테이션 농업을 한, 제 3세계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그곳의 노동력을 현지에서 구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돈으로 유혹했으나, 돈이라는 개념에 생소했던 그들에게는 플렌테이션 농장의 노동자로서의 노동은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유럽인들은 그들의 생활양식을 뒤집는 방법을 쓰게 되었다.
드디어 원주민들은, 스스로 자급자족했던 전통의 경제적 시스템을 버리고, 유럽인들의 상품 생산을 위해 그들의 농장에서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아 그들이 일용할 생활 필수품들을 유럽인들을 통해 살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나마 프롤레타리아가 된 원주민든 다행이었다.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의 싸구려 노동력 마저 공짜로 얻기 위해, 노예를 사냥하고 그들을 신대륙으로 수출하기까지 한 것이다. 노예상인들은 유럽의 왕들에게 수수료를 내면 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중세까지 지구상에서 특별하게 존재했던 기호식품을 필수품으로 만들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의 일상용품이었던 금을 갑자기 늘어난 상품 생산이나 구매를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을 노략질 했던 것이다.
중세 이후, 유럽이나 제 3세계에서 일어났던 전쟁은 하나도 빠짐없이 여기와 관련이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는, 희소성에 의거한 특별한 물건으로 둔갑시켜 필수품으로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도저히 상품이 되어서는 안될 것 까지도 상품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것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살육하여 금을 빼앗아와서 금본위제도의 화폐량을 늘이고, 세계 2차 대전으로 달러가 세계의 기축통화가 되고, 베트남 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미국이 달러를 금과 교환하지 않게다고 달러를 명목화페로 선언을 하면서 지구상의 화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이라도 상품으로 만들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스스로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공유할 가치들이 전부 그렇게 되었다.
인간 스스로의 미래 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어 자연이 훼손되고, 자신들의 죽음 마저 상품으로 만드는 기발함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얼마 전 미국에서는 모기지론으로 생겨난 부채권 마저도 파생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기발한 사기도 보여주었다.
기술혁신과 정보통신의 발달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것은, 아무리 정부에서 일자리 창출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노동운동에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신, 무한히 늘어나고 있는 화폐량과 그것에 대응하는 소비를 늘여할 시점에 도달했다. 화폐량이 늘어나면 인플레이션이 되고 상품량이 늘어나면 공황이 일어난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인플레이션과 공황의 위험성을 늘 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 위험성이 억지로 감추어지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프롤테타리아의 희귀한 인간이 탄생되고 200년이 지난 지금, 자본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 단서를 반값을 닭을 사서 즐거워하는 불쌍한 노인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