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와 자유의 여신상, 우디 앨런과 스파이크 리, 브로드웨이와 센트럴 파크, 양키 스타디움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위에 열거한 모든 단어들은 하나의 도시를 설명하는 단어들입니다. 바로 뉴욕이죠.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이지만 미국을 상징하는 도시는 뉴욕입니다. 미국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메트로폴리스이기도 하죠.
어렸을적 명화극장에서 보았던 '킹콩' 이라는 영화에서 뉴욕의 마천루를 타고 오르며 포효하던 거대 고릴라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 고릴라는 영화속에서 안타깝게 죽어갔지만 훗날 뉴욕에서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등번호 33번에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이만명에 가까운 팬들의 열광을 싣고서 말이죠. 예. 이번 글의 주인공은 미국의 심장인 뉴욕의 heart & soul, 패트릭 유잉입니다.
아름다운 카리브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전설적인 레게 뮤직의 전도사 밥 말리의 고향인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패트릭 앨로이셔스 유잉은 태어났습니다. 11세때 미국으로 이주한 유잉은, 고등학교 2학년때 이미 키가 6피트 10인치에 달하는 거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농구는 하늘이 내린 신체를 잘 살릴 수 있는 운동이었고 당시의 코치는 유잉에 대해 공격력이 뛰어난 빌 러셀이 될 수 있을것이라 말했을 정도로 뛰어난 잠재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7피트의 신장과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그는, NCAA에서 첫손꼽히는 빅맨들의 고향, 조지타운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의 조지타운 대학의 코치 존 톰슨은 우연찮게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우개로 불리는 셀틱스의 전설, 빌 러셀의 백업 센터였습니다. 수비력을 강조하는 존 톰슨의 지도에 발맞추어, 상대팀의 공격의지를 꺾어버린다는 뜻으로 'HOYA PARANOIA' 라고 불리던 조지타운 팀에서 유잉은 수비의 핵심이었으며 'HOYA DESTROIA'란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는 NCAA에서의 4년간 1번의 우승과 두번의 준우승을 차지합니다. 쉽게 말해서 당시의 조지타운팀은 NCAA최강의 팀중 하나였죠. 그리고 그의 NCAA우승은 또다른 최고 전력의 팀중 하나인, 하킴 올라주원과 클라이드 드렉슬러의 휴스턴 쿠거스를 물리치고 일구어낸 것이라 더욱 값진 우승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를 꺾고 우승을 맛본 노스 캐롤라이나의 마이클 조던을 포함하여 바클리와 올라주원이 NBA에 조기입성한 반면에 유잉은 대학 4년을 모두 마치며 당당히 학위를 받고 졸업합니다.(그의 유인원스러운 외모에서는 쉽게 예측하기 힘들지만, 유잉은 미술을 전공하였다고 합니다^^;;)
1985년 드래프트의 주인공은 당연히 유잉이었습니다. 유잉 로터리라는 말이 나올만큼 NBA 모든 팀들의 관심이 쏠렸던 드래프트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뉴욕 닉스는 1985년 이전에도 5년간 세번의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던 만큼 최약체팀은 아니었습니다. 216cm의 센터 빌 카트라이트가 지키는 골밑 역시 닉스의 큰 약점은 아니었구요. 하지만 팀의 주축인 빌 카트라이트와 버나드 킹의 부상때문에 닉스는 승률 3할에도 못 미치는 기대이하의 성적을 기록합니다. 윌리스 리드와 월트 프레지어가 뛰었던 팀의 전성기 이후로 오랜시간 우승을 맛보지 못한 뉴욕 팬들에게는 불만이 터져나올법한 일이었지만, 성적이 좋은 팀이 드래프트에서 높은 순위를 받기는 힘든 일이겠죠.
당시의 나쁜 팀 성적이 오히려 기회로 작용하여 극적으로 1번 픽을 행사하게 된 닉스는 당연히 즉시전력감이자 미래의 빌 러셀로 평가되어온 패트릭 유잉을 뽑게 됩니다. 그리고 유잉은 리그에 데뷔하자마자 신인답지 않은 골밑의 킹콩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무릎 부상으로 인하여 32경기를 결장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평균 20점과 9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며(물론 신인으로써는 두 부문에서 모두 최고의 성적이었죠) 윌리스 리드 이후 처음으로 닉스 출신의 신인왕 자리에 오릅니다.
또한 바로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비록 무릎 부상으로 인해 출전은 못했지만 말이죠. 예전의 득점 리더였던 버나드 킹이 부상으로 거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동안 팀은 유잉을 중심으로 성공적인 리빌딩을 이룩하게 됩니다. 빌 카트라이트와 유잉은 상대팀에게 악몽같은 포스트 플레이를 선사하였고 또다른 신인왕 출신 마크 잭슨은 평균 10어시스트를 넘기며 안정적인 운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로써 88-89시즌, 팀은 우승을 맛본 72-73시즌 이후 가장 높은 승수인 52승을 기록하면서 뉴욕 팬들에게 뭉클한 기대를 안겨주게 됩니다. 빠르고 공격적인 농구를 선호하는 릭 피티노 감독의 전술에 따라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다득점 팀이었던 닉스는 116.7점이라는 팀 평균득점을 기록하지만 동시에 112.9점을 허용하는 다실점 팀이기도 했습니다. 포스트시즌에서 요구되는 강력한 수비력을 갖지 못한 닉스는 플옵에서 기대만큼의 성적을 낼 수 없었기에 팀으로써는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할 상황이 오게 됩니다.
89-90시즌에 릭 피티노 감독은 켄터키 대학의 감독직을 위해 자리를 옮겼고, 스튜어트 잭슨이 자리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유잉으로써는 가장 든든한 오른팔로 기억되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블루워커이자 터프가이인 찰스 오클리가 빌 카트라이트와의 맞트레이드로 닉스에 합류합니다. 오클리는 시카고 시절에도 이름난 수비수이자 최고 수준의 리바운더였고, 조던을 비롯한 팀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강인한 맏형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유잉과 함께 닉스의 질식수비를 이끌며 팀을 한층 업그레이드하는데 일조하게 됩니다.
91-92시즌, 닉스는 팻 라일리라는 당대 최고의 명장을 맞아들이게 됩니다. 라일리는 잘 아시는 레이커스 왕조를 지휘하며 팀에 몸담았던 9년간 9번의 지구 우승과 5번의 +60승 시즌을 일구며 당시 NBA 감독중 사상 최고 승률을 기록하던 감독이었습니다.(73.3%의 승률입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군요) 그리고 닉스는 또 하나의 보석을 얻게 되는데요. NBA의 하부리그라 할 수 있는 CBA에서 올라온 입지전적인 사나이, 누구보다도 강한 승부욕으로 똘똘뭉친 가드 존 스탁스를 팀에 합류시킨 것입니다.
그는 비록 식스맨으로써 출발하였지만, 정확한 3점슛과 팀원들 모두에게 전염되는 뜨거운 경쟁심을 가지고 팀에 열정을 보태주었습니다.(그리고
조던만 만나면 초샤이어인 모드로 변신했죠^^;;) 물론 유잉은 팀의 지주이자 센터로써, 가장 신뢰할만한 사나이로써, 득점과 리바운드, 블록슛에서 모두 NBA 10위안에 드는 멋진 기록을 팀에 선사하였습니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불스를 맞아서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아쉽게 패합니다. 92-93 시즌, 닉스는 팀 역사상 두번째로 60승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찰스 스미스, 닥 리버스를 팀에 합류시켰으며 휴버트 데이비스를 드래프트합니다. 감독 팻 라일리는 예전의 릭 피티노 감독과는 달리 수비를 강조하는 전술로 팀을 성공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당시의 닉스는 상대팀을 평균 95.4실점이라는 리그 최저의 실점률로 꽁꽁 묶으며 '질식수비'로 대표되는 터프한 수비력을 장착합니다. 유잉은 980리바운드(평균 12.1리바운드)라는 팀 역사상 두번째의 기록을 세우며 NBA 7위, 24.2득점으로 NBA 6위를 기록하며 변함없이 팀을 이끌었습니다. 닉스는 포스트시즌에서 페이서스와 호네츠를 침몰시키고 숙적 불스와 다시 맞붙게 됩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열광적인 응원속에서 닉스는 불스를 2-0으로 앞서며 폭발적인 관심을 받게 됩니다. 과연 이번에는 불스를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말이죠. 당시의 언론들은 조던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도박을 했다는 등 NBA를 대표하는 롤 모델로서의 자세와 리더쉽에 문제가 있다는 둥 말이죠.
오히려 그것이 조던에게는 더 큰 자극이 되었는지, 불스는 첫 두게임을 진 이후 깨끗이 4연승하며 닉스와 언론에게 앙갚음합니다.(그리고 유잉에게 결정적인 블록을 가하기도 했죠. 원맨 속공을 ?i아가서 걷어내버리던 기억이 나는군요) 조던의 충격적인 은퇴 발표가 있던 93-94시즌, 닉스는 지난 4년간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불스를 이길 기회를 갖게 됩니다.
닉스는 57승으로 디비젼 우승을 차지했으며 91.5점이라는, 24초 룰이 시작된 이래 4번째로 낮은 팀 실점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백보드의 두 콤비, 유잉과 오클리는 각각 24.5점과 11.8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습니다. 물론 NBA 6위와 7위에 랭크되는 뛰어난 기록이었죠. 시즌중 주전 포인트가드였던 닥 리버스를 부상으로 잃었지만 데릭 하퍼를 데려오며 자리를 잘 메꾸었습니다. 그리고 유잉과 함께 존 스탁스는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장하는 영광을 안게 됩니다.
그리고 운명의 포스트시즌에서 역시 대 혈전이었습니다만 드디어 불스를 이기고 인디애나와 동부 우승을 다투게 됩니다. 레지 밀러와 릭 스미츠를 상대로 역시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동부의 패권을 차지한 닉스는 서부의 최고 센터, 하킴 올라주원의 로켓츠와 우승을 다투게 됩니다. 올라주원 개인적으로는 대학시절의 빚이 있기에 더더욱 불타올랐을 것으로 사료되는 이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동안 단 한번도 100점을 넘긴 팀이 없는 사상 최고의 수비농구 시리즈였습니다.
물론 시청자 입장으로써는 약간 재미가 없었던 시리즈였지만 다시보기 힘든 하프코트 농구의 진수였습니다.(그리고 두 팀의 골밑은 전쟁터 그 자체였습니다) 5차전까지 데릭 하퍼가 분전하며 앞서가던 닉스는 존 스탁스의 알수없는 부진으로 6.7차전을 내주며 로켓츠에게 우승을 넘겨주고 맙니다.
94-95시즌, 팀은 55승을 기록하며 여전히 강팀이었지만, 예전과는 반대로 공격력에 문제를 제기받으면서 빈약한 공격력으로는 우승할수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그로 인해 감독 팻 라일리의 위상마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즌에 닉스는 농구팬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데요, 첫번째로 꼽는 게임은 아마 마이클 조던의 복귀후 처음으로 뉴욕에서 가진 경기라고 생각됩니다. 이 경기에서 조던은, 무려 55점을 기록하고 위닝샷을 어시스트하며 닉스를 침몰시켰죠. 그리고 닉스는 동부지구 준결승전에서 새로운 라이벌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다시보기 힘든 명승부를 농구팬들에게 선사합니다.
닉스의 단골 레퍼토리인 7차전 혈전은 기본이었고(갈데까지 가보자! 라고나 할까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최고의 장면중 하나인 레지 밀러의 클러치쇼가 있던 시리즈였습니다. 1차전, 닉스는 16초를 남기고 5점차로 여유있게 앞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밀러에게 공이 넘겨지고, 10초도 안되는 시간동안 전광판에 '8'이라는 숫자가 더해졌습니다. 뉴욕 팬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엄청난 장면이었죠. 그리고 운명의 7차전, 패트릭 유잉의 마지막 슛이 림을 돌아 나오며 페이서스가 시리즈를 가져갑니다. 팻 라일리는 시즌 후 전격적으로 워리어스의 감독이었던 돈 넬슨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쓸쓸히 뉴욕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유잉은 다시한번 눈물을 삼켜야 했죠.
95-96시즌은 닉스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해입니다. 5년만에 처음으로 50승을 밑도는 성적을 기록했으며. 로스터에도 많은 변동이 있었습니다. 찰스 스미스와 루키 몬티 윌리엄스를 J.R 리드와 브래드 로하우스와 바꾸는 트레이드를 시작으로, 허브 윌리엄스와 덕 크리스티를 지금은 생각도 안나는 윌리 앤더슨과 빅터알렉산더와 트레이드합니다. 돈 넬슨은 전년도 식스맨상의 주인공 메이슨에게 볼 배급을 맡기는등 여러가지 시험을 계속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코치 제프 밴 건디에게 자리를 넘기고 뉴욕을 떠나게 됩니다. 리그에서 가장 꾸준한 플레이어중 하나인 유잉은 여전히 득점 리바운드 블록샷 부문에서 리그 탑 텐이었으며 앤소니 메이슨은 평균 42분이라는 믿어지지 않는 출장시간을 보이며 유잉을 보좌하였습니다.(아, 당시 닉스의 어시스트 리더이기도 했습니다) 밴 건디 체제에서 13승 9패를 올리며 플옵에 진출한 닉스는, 캐브즈를 가볍게 스윕하지만 90년대 최강의 팀, 72승의 불스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4승 1패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 닉스는 제프 밴 건디 체제를 굳히게 되고, 팀의 살림꾼이었던 데릭 하퍼와 휴버트 데이비스, 그리고 앤소니 메이슨을 트레이드합니다.(그리고 래리 존슨을 받아옵니다)
96-97 시즌, 유잉과 오클리, 스탁스가 다져놓은 반석 위에 새로운 멤버인 래리 존슨과 앨런 휴스턴, 크리스 차일드와 벅 윌리엄스등이
가세하며 닉스는 전년대비 10승을 추가하며 디비젼 2위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유잉 개인적으로는 사상 23번째 20,000득점을 기록하게 되며 11번째 올스타에 뽑힙니다. 포스트시즌에서 닉스는 시카고 불스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며 호네츠를 스윕하지만, 히트와 또다시 7차전 씨리즈를 벌이게 됩니다. 5차전에서 벌어진 난투극으로 유잉을 포함한 4명의 선수가 6차전을 출장금지 당했으며, 유잉이 벤치에서 경기를 바라보는 동안 팀은 패배합니다.
7차전에서도 팀은 패배하며 히트는 당시까지 오직 5팀만이 달성한 1승3패를 뒤집고 시리즈를 승리한 여섯번째 팀이 됩니다. 다음 시즌 닉스는 팀의 기둥인 유잉의 부상으로 인하여 많은 경기를 그가 없이 치르게 됩니다. 유잉은 없었지만 팀 멤버들의 끈끈한 플레이로 닉스는 플옵에 진출하였고, 43승이라는 성적으로 동부 7위를 기록하여 또다시 히트와 만나게 됩니다. 모든 팀원들의 허슬플레이와 벌떼농구로 히트를 제압한 닉스는, 래리 버드가 이끄는 인디애나와 만나게 됩니다. 2차전에서의 유잉의 극적인 컴백에도 불구, 인디애나는 5게임만에 시리즈를 가져가고 닉스는 또다시 패배합니다.
98-99 시즌, 닉스는 스탁스와 오클리를 내보내고 스프리웰과 마커스 캠비를 데려옵니다. 스프리웰은 휴스턴과 트윈 테러를 만들었으며 젊은 캠비는 유잉의 보험역 이상으로 좋은 플레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팀은 변화의 여파로 5할 승률을 겨우 넘기며 동부지구 8위로 플옵에 진출합니다. 또다시 히트를 만난 닉스는 언제나처럼 5차전까지 가는 승부끝에 휴스턴의 극적인 위닝샷으로 2라운드에 진출하고 여세를 몰아 호크스를 스윕해버립니다. 숙적 인디애나와 동부 우승을 다투게 된 닉스는 2차전에서 유잉을 잃게 됩니다. 아킬레스건 부상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참으며 팀을 이끌었던 킹콩의 시즌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3차전에서 래리 존슨의 역시 극적인 끝내기 4점 플레이로 1승 1패의 균형을 깬 닉스는 6차전만에 페이서스를 꺾고 사상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한 8번 시드팀이 됩니다. 그러나 킹콩이 없고 래리 존슨이 부상을 안고 뛰던 닉스에게 던컨-로빈슨의 스퍼스는 너무 강했습니다. 트윈 테러가 평균 47점을 합작하며 활약했지만 킹콩이 없는 골밑은 트윈 타워에게는 무인지경이었습니다.게다가 캠비 역시 가정문제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기에 더욱 아쉬운 시리즈였습니다. 그리고 벤치에서 팀의 패배를 지켜봐야 했던 유잉은 누구보다도 훨씬 더했겠죠.
97-98시즌의 부상 이후 확연히 운동능력이 저하된 유잉은, 또다시 팀을 플옵으로 이끌며 닉스 소속으로써는 마지막으로 히트와의 시리즈를 즐기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결승에서 인디애나에 패했고 닉스는 유잉을 시애틀로 트레이드하게 됩니다. 초록색 유니폼을 입은 33번은 더이상 뉴욕의 킹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전 센터였지만 고작 26분 정도를 뛰는데 그쳤고 항상 더블-더블을 기록해주던 득점과 리바운드도 크게 낮아지게 됩니다.
유잉의 몸상태는 더이상 서부의 센터들을 감당하지 못하였고 그는 조금이라도 선수생활을 연장하려는 마음으로 올랜도로 팀을 옮기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그의 올랜도에서의 시즌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팬들은 그냥 은퇴하라고 종용할 정도로요.
유잉의 선수생활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90년대를 풍미한 명 센터로써의 영광을 뒤로 하고 말이죠. 그는 비록 최고의 센터는 아니었습니다만 특이한 외모만큼이나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올라주원의 동물적 움직임이나 로빈슨의 피딩능력, 샤크가 가진 파워를 가지지 못한 유잉이었습니다만 '정통' 센터에 가장 부합되는 이미지를 가진 선수는 저에게는 항상 유잉이었습니다. 또한 4대 센터중 유일하게 반지를 가지지 못했습니다만 유잉은 가장 꾸준한 센터였으며 최고로 열정적인 플레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턴어라운드 점퍼는 아무도 막지 못하는 그만의 리셀웨폰이었으며 그가 이끄는 닉스는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팀은 아니었습니다만 리그의 어떤 강팀들에게도 쉽게 꺾이지 않는 투지있는 팀이었습니다. 시카고, 마이애미, 인디애나같은 강팀들과 항상 물고 물리는 명승부를 연출하면서(닉스의 상대팀들은 항상 7차전을 각오해야했죠)뉴욕의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올해 메이저리그의 가장 인기있었던 시리즈는 사실, 보스턴이 스윕한 월드시리즈가 아니라 뉴욕과 7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벌였던 아메리칸리그 결승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의 닉스팬들은 거의 매 시즌 그런 짜릿함을 즐길수 있었죠) 요즘 NBA의 인기가 많이 식었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당시 미국의 가장 큰 도시이며 빅 마켓이었던 뉴욕과 시카고의 팀들이 90년대 이후 성적이 많이 하락한것도 그 중요한 원인이라하겠습니다.
패트릭 유잉은 저에게 있어서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아니지만 가장 정이 가는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덩크후 포효하는 장면이나, 코트에 나뒹구는 장면이나, 팀 동료와 가슴을 부딪히는 장면에서, 그리고 자신이 블록한것 만큼이나 아찔한 인 유어 페이스를 맞고 허탈해 하던 모습이나. 고릴라를 연상시키는 얼굴과 큰 덩치와는 걸맞지 않는 거칠지만 순박한 면도 좋았구요. 그는 비록 투박한 외모였지만 NBA선수노조위원장이었으며 코트 밖에서는 많은 선수들의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백만불짜리 살인미소도 빼놓을수 없겠군요^^;;)
변방의 섬나라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흑인 소년은 미국의 심장인 뉴욕의 상징이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그리워 합니다. 유잉의 33번이 결번되던 2003년 2월 28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모처럼 관중으로 꽉 채워졌으며 장내 아나운서의 '패트릭 유잉~' 멘트와 함께 수많은 닉스의 팬들은 젖은 눈시울로 지붕으로 올라가는 33번을 바라보았습니다. 90년대의 영광스런 닉스의 모습을 뒤로 하고, 유잉은 휴스턴의 코치로서 NBA의 미래로 성장할 센터, 야오 밍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비록 선수로써 우승반지를 가지지 못했지만 좋은 지도자로써, 90년대 못지 않은 센터농구를 다시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팀의 우승도 같이 말이죠. 가장 믿음직한 사나이였던 당신이기에, 꼭 가능할거라 믿습니다.
첫댓글 좋은 글이긴 한데 자신이 쓴글이 아니라면 상대에게 허락을 받고 올리신건지요;;
어디선가 본것같아요,,
이게 왜...이종카페에서 스크렙이된거지...-_-;;
유잉은 정말 후덜덜ㄷㄷㄷㄷ
유잉님하가 야오를 가르치고 계셨군요 ㅋㅋ
근데, 정작 야오가 유잉으로부터 센터 스킬을 배운다던가 그런 건 아니었죠. ㅎㅎ 유잉도 헤드 코치직을 원하기 때문에 빅맨 코치로 이미지 굳어지는 거 싫어하구요. 지금은 또 올랜도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있습니다.
지금은 하워드 키우는중임,
저기요, 지금 올랜도 코치인데요, 올랜도가 우승하면 코치진도 반지주나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4대 센터중 가장 정이 가는 센터인 유잉...(동정일지도 모르겠네요. 유일하게 우승도 못했고 포스면에서 네명중 가장 뒤쳐졌으니... 뭐, 그래도 지금 NBA라면 지존!!)
아, 그리고 미술학 전공이였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네요. 역시 사람은 외모로만 판단하면 안된다는....;; 이러나 저러나 당신이 그립습니다!!
위의 내용 중에 유잉이 대학시절 우승할 때의 상대팀이 올라주원과 드렉슬러의 휴스턴 쿠가스였다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죠. 드렉슬러는 이미 프로에 입단한 뒤였습니다.
유잉이 4대 센터중에 가장 인정을 못받은거 같내요... 유잉은 점퍼와 공격 스킬등 다 우수 했으나... 정작.. 팀이 플옵에서 부진 했던지라,, 비운의 스타라고 보여지내요,,, 바클리와 더불어...
4대 센터중에 가장 저평가를 받는 유잉이지만 전 이상하게 농구에서 센터라는 포지션을 생각할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건 유잉이네요,
4대 센터중 저평가는아니라 생각함.. 정말 농구에서 "센터" 라는 포지션을 생각하면 저도진정 패트릭 유잉이생각나네요..
저도 그냥 전통 센터하면 떠오르는건 유잉..나머지 4대센터들은 센터지만 센터같지않은 자기만의 무기들을 가지고 있어서인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