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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1-12)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말씀의 초대 엘리야 예언자는 불충한 백성에게 내릴 하느님의 징벌과 가뭄을 아합 임금에게 예고하고, 주님의 명을 따라 백성을 위해 참회의 예를 갖춘다. 엘리야는 ‘나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호칭은 엘리야의 인생 전체와 관련된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인 ‘참행복’을 선언하신다. 이 산상 설교는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가 만들어 내는 변화에 관한 것이며, 인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 주실 하느님의 뜻에 관한 선포이다. 이 행복 선언은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선언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오늘 갈릴래아의 한 산 위에서 인류를 위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대헌장을 반포하십니다. 이 헌장의 주된 내용은 인간의 참된 행복에 관한 선언입니다. 행복 선언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현존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뺏고 빼앗기는 재력과 억누르고 억압당하는 권력에 바탕을 둔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불필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 정의는 이러한 불의한 사회 구조가 개선되기를 바라는 삶을 위한 정의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마음의 가난’이었습니다. 어떠한 마음이겠습니까? 욕심 없는 마음일는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욕심 없는 마음이라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에도 어느 정도의 욕심은 필요합니다.
두 개의 독에 쥐 한 마리씩을 넣고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한 후 한쪽 독에만 바늘구멍을 뚫었습니다. 즉, 한쪽 독에서만 한줄기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이 점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조건 하에서, 완전히 깜깜한 독 안의 쥐와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독의 쥐는 어떤 차이를 보일까요?
결과를 먼저 말씀드리면, 완전히 깜깜한 독 안의 쥐는 1주일 만에 죽었지만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독의 쥐는 그 두 배인 2주일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그 한 줄기 빛이 독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되고, 그 희망으로 인해 생명을 연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 세상 안에서 행복하며 살아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위해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도 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통해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복권에 당첨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결국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는 것을 매스컴을 통해서 자주 들으셨을 것입니다. 처음에 당첨된 순간은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았지요.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서야 깨달으며 말합니다. 당첨으로 인해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말이지요. 또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도 말년에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라는 고백을 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행복이란 희망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즉,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행복의 유무가 결정됩니다. 앞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독의 쥐가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을 통해 주어지는 한 줄기 빛으로 인해 세상의 어떤 고통과 시련도 다 극복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깨닫게 됩니다. 예 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참된 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참된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다고 하십니까? 만약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참된 행복이 있다면, 예수님 스스로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우리들이 지향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야기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습이 주님께서 주시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희망을 통해서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모두가 주님 안에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희망을 두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참된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현명해지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착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책망하는 사이 상대방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톨스토이).
참행복 -강우현 신부-
우리는 행복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한 생애를 행복하게 살아가길 염원하지만 그 행복을 찾는 길은
하느님을 뵙게 될 그날을 그리며 - 김기곤 신부 -
요즘처럼 나뭇잎이 무성한 때면 나뭇잎 사이로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뭇잎이 하늘을 볼 수 없게 가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하느님을 뵙지 못함 또한 하느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분을 보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 곧 교만과 욕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들이 치워지면 우리도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행복의 단계 -전삼용신부-
오늘을 주일이고 내일 복음, 즉 예수님의 진복팔단을 묵상하며 하루 동안 감정의 변화를 잘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우선은 몸의 피곤을 풀기 위해 아침에 내리 잤습니다. 편히 낮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자다가 전화가 와서 깼습니다. 통화하고 싶던 사람이라 처음엔 기뻤지만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끊고 나니 오히려 통화하기 전보다 기분이 별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후에는 혼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하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하늘이 잔뜩 찌푸려있었습니다. 비가 오려는 것 같아서 우산을 들고 가까운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나갈 때는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걸어가는 도중에 같은 기숙사 신부 둘이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우산을 들고 가는 것을 보며 비는 절대 안 온다고 하며 우산으로 누구 잡으러 가냐며 농담을 했습니다. 웃어넘기고 그냥 걸어가는데 정말 하늘이 개이고 햇빛이 내리쏟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일부러 좀 오래 걸으려고 버스를 타지 않았는데 그것도 후회 되었고 우산을 계속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게 생각되어 짜증이 나려고 하였습니다. 우산이 아니라 선크림을 바르고 나왔어야 했던 것입니다. 별것도 아닌데 감정이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정말 어떤 사람들은 더운 날씨에 접히지 않는 큰 우산들을 들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접히는 작은 우산이니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 비가 올 수도 있으니 잘 한 것일 수도 있다고 스스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영화는 재밌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선글라스를 가져왔으면 좋았을 걸!’하며 운동 삼아 다시 걸었습니다. 오다보니 같은 기숙사에 사는 한 아프리카 신부님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일이라 버스가 잘 오지 않아 매우 오래 기다려야 했다고 했습니다. 또 차가 한 대 왔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탈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신부는 커다란 짐 세 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날도 더워서 마음은 그냥 혼자 오고 싶었지만 생각하니 다음 버스도 사람이 가득 차 있을 것 같고 또 언제 올지도 몰라 함께 짐을 들고 걸어가자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낑낑대며 짐을 들고 기숙사까지 왔습니다. 그 신부님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 하루 종일 느껴보지 못한 뿌듯한 만족감이 솟아올라왔습니다. 주관적일 수는 있겠지만 제가 하루 종일 느낀 것으로는 잠을 자며 육체를 쉬게 할 때보다, 영화를 보며 즐길 때보다 마음에서 솟아나는 만족감이 제일 크고 오래갔습니다.
모든 사람 마음 안엔 양심이 있어서 항상 자신을 심판합니다. 양심은 주님께서 새겨 내 맘 깊숙이 넣어주신 법이기 때문에 그 법대로 살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심판을 해서 슬퍼지게 만들고, 그 사랑의 법대로 살면 칭찬을 해 주어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산으로 부르시어 행복선언을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 바라는 사람들,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여 슬퍼하는 사람들, 항상 용서하고 참아내는 온유한 사람들, 주님께서 원하시는 옳은 일만 하기를 원하는 의로운 사람들, 자비로워 모두 이해하고 용서하고 도와주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하여 거짓이 없는 사람들,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모두가 주님의 뜻대로, 즉 양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이고 감정적이고 지성적인 행복이 아닌, 마음에서 솟아나는 행복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하고 슬퍼하며 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슬퍼지는 이유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양심입니다. 감정과 정신적인 것보다도 마음 깊숙이에서 올라오는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짧은 묵상>> 한 번은 중고등학생들 강론 중에 만원자리 몇 장을 찢어보였습니다. 아이들은 찢지 않기를 바랐고 안 찢을 줄 알았지만 저는 계속 찢었습니다. 아이들은 매우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어차피 너희 줄 돈도 아닌데 왜 안타깝니?”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안타까운 이유는 그 돈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까지도 결국 사라지고 나면 안타까운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세상 것을 바라고 있고 또 아이들에게 그런 것을 바라도록 교육시키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자가 원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영혼은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육신은 세상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세상을 더 그리워하도록 교육받고 있습니다. 중고등학생 때가 되면 학원가야 하기 때문에 성당에 나오지 않게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먼저 세상에서 성공해야 성당에 나오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대한 욕망은 마치 마약처럼 더 가질수록 더 목말라지게 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그때서야 두 번째로 밀쳐 두었던 하느님을 찾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육의 욕망을 따르면 짧은 짜릿함은 있지만 오랜 우울함이 오고, 영의 바람을 따르면 짧은 고통은 있어도 오랜 평화가 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랜 평화가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아도 이런 증거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의사의 직업을 버리고 아프리카 수단에서 고생고생 하다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신 이태석 신부님 같은 분이 계신가 하면, 세상의 인기를 바라며 돈도 많이 벌었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연예인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십자가에 다는 것이 참 생명이고 행복이고 이런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부자이고 강하고 속이는 것보다 가난하고 온유하고 솔직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함을 선포하시고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직접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행복을 먼저 선포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행복입니까, 하느님나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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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제 낮에 너무나 피곤해서 낮잠을 좀 잤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딱 1시간만 자고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몇 시간을 잔 것입니다. 낮잠을 밤잠처럼 잔 것이지요.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리 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잘 잤다’라는 생각과 함께 개운함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 낮잠의 결과는 밤에 나타나더군요. 잠을 자려고 하는데 잠이 와야 말이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뒤척일 뿐 점점 정신이 말똥말똥 해 집니다. 점점 화가 납니다. ‘왜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거야? 왜 낮잠은 그렇게 길게 자가지고서 이 고생인거야? 내일 새벽미사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이렇게 잠 잘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지?’
결 국 저는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좀 지루한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잠이 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지요. 하지만 저의 바람과는 달리 그 책을 다 읽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지루했는데, 점점 흥미진진해서 결국은 끝까지 다 읽은 것이지요. 그리고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새고 말았지요. 그렇다면 제가 잠을 자지 못했다고 억울할까요? 아닙 니다. 계속 미루기만 했던 책을 다 읽은 것과 함께 이 책에 담긴 좋은 내용들을 간직하게 되어서 오히려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지요. 그러나 잠이 오지 않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책을 읽으면서 좋은 시간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이 쉽게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 어쩌면 이 행복은 쉽게 말하는 만큼 쉽게 얻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행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행복은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옵니다. 문제는 스스로 행복이 없다고 판단하고 결론내리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행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곧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특정한 사람만이 행복하다는 착각 속에 살 때가 참으로 많지요.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의 만족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것으로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을 받아 간직하면서,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과연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을까요? 혹시 내게 다가오는 행복을 보지 못하면서 힘들고 어렵다는 불평과 불만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행복한 이유를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적어 보세요. 없다고 생각했던 행복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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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행운 -김영수 신부-
길가에 무성하게 피어 있는 토끼풀을 보면, 그 풀무더기 속에 숨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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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 조용상 신부-
명동성당에 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성당 들머리나 마당 또는 가톨릭 회관 쪽에 터줏대감처럼 계신 자매님들이 있다. 이분들은 정신적으로 평범하지 않은 분들이다. 이분들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그중 몇 분이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좋게 생각하면 불쌍하고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기 싫어하고 귀찮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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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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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의 8가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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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풍을 타지 마라 -김찬선신부-
요즘 참으로 마음 아픈 것은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양승국신부-
<밑으로 내려서니>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니 감사할 일들, 행복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 그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하루’라는 은총의 선물을 지속적으로 주고 계시다는 것, 죄인임에도, 나약함에도,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비록 티격태격하지만 홀로 고독에 밥 말아먹으며 외롭게 살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자세를 낮추니 세상만사가 은총꺼리들입니다. 밑으로 내려서니 모든 것이 감사꺼리들입니다. 손에 쥔 것을 놓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군요. 그렇다면 얼굴을 활짝 펴야 되겠습니다.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렇게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 여덟 가지를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인 돈보스코께서 저희 후배들에게 남겨주신 아주 소중한 유산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방교육영성입니다.
예방교육의 여러 요소들 가운데 낙관주의와 기쁨이 있습니다. 낙관주의와 기쁨은 살레시오회원들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보스코는 철저한 낙천주의자였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언제나 기쁨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대체로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언제나 행복에 겨워있었습니다.
돈보스코의 기쁨, 행복, 그 배경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있었습니다. 에서 나온 결실이었습니다. 돈보스코의 기쁨의 원천은 한 마디로 기도였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지녔던 기쁨은 육적인 기쁨, 말초적 기쁨,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복음적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사목적 기쁨이었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느끼는 기쁨이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하느님 자녀로서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신뢰함을 통해 얻는 기쁨이었습니다. 결국 돈보스코의 기쁨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흘러나온 기쁨이었습니다.
행복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라는 얼굴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끝도 없이 올라가기만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올라가서는 절대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기 때문입니다. 한번 차지한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또 얼마나 고생들이 많겠습니까?
반면에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밑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바닥에서 기어 다니니 추락할 위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서있으니 심신이 편안해서 그렇습니다. 플러스알파로 하느님 안에 살기 때문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 맡기고 나니 그렇게 행복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희망이기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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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많 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스포츠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월드컵 경기 보는 것으로 얼마나 큰 즐거움을 얻는지 모릅니다. 2002년 월드컵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열렸기에 그 열기가 더욱 더 뜨거웠었지요. 빠다킹 신부 ![]()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
-이봉하수사-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행복하십니까?’이고, 가장 많이
하는 말 또한 ‘행복하십시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기준점이 없기 때문에 일상 안에서 매순간 행복을 느끼며 산다 하여도 어제보다,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 사람살이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행복의 척도는 외적으로 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지만, 그 행복의 기준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에덴동산이 모델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면서 행복의 의미도 변해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도 사람은 일생 동안 원초적인 행복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보이는 행복을 먼저 찾으며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고 전부인 것처럼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사람은 돈을, 권력과 명예가 있어야 행복하다는 사람은 권력과 명예를, 여행을 해야 행복하다는 사람은 평생 여행을 하면서 행복을 찾아가지만 과연 어느 누가 만족하리만큼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요? 2004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선종하시기 전에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안에서의 사랑 고백이며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김지영 신부-
◆ 오늘부터 우리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설교’(마태 5,1-7,29)의 말씀을 듣는다. 그리스도교 사랑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 나는 진정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유다인 지혜의 저수지라고 할 수 있는 탈무드에 보면 ‘사람은 태어날 때 두 손을 불끈 쥐고 태어나는데 세상을 떠날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펴고 간다. 왜 그럴까?’라고 묻는다. 탈무드의 가르침은 이렇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든 것을 다 두 손 안에 넣겠다고 두 손을 불끈 쥐고 태어나지만 결국에는 모두 비우고 버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손을 가지런히 펴게 된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적인 가난을 뛰어넘는,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진정 행복하다는 말씀인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풍요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욕심을 버리고 물질적인 집착을 떨치고,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 사랑으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로 살아가려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우고 소유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내주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다.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깊이 반성하며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항상 기도해야 하겠다. ![]() 흐르는 강물처럼
![]() 복되다, 그 임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1열왕 17,1-6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엘리야) 복 음 : 마태 5,1-12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오 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기울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는 그 어떠한 시대보다도 여러 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찾아 잘 먹고 잘 입으며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지요. 그런데 힘들게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하고 허전하며 평화롭지 못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의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대보다도 훨씬 전인 지금으로부터 이천 오백 년 전 그리스 로마시대는 특히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아주 깊이 연구하고 활발하게 토론했던 시기입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행복론에 관하여 깊게 연구했고 책 또한 많이 썼지요. 그 당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행복론에 대한 대표적인 학파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있습니다. 일 반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또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알려져 있는데 중요한 것은 두 학파 모두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더 파고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흔히 쾌락주의의 선봉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 행복의 출발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추구해 보고 그것이 나쁘면 다시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식으로 인간의 욕구에 따라 움직였지요. 그래서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옷을 입으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등 행복의 출발을 육체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오감에서부터 시작했지요. 그에 비해서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좋은 것을 먹고 입는 등 오감을 만족시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욕망을 자제하여 정신과 영혼을 풍요롭게 할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금욕주의가 발달했지요. 이렇게 각자 다른 관점으로 출발한 두 학파 중에 오래지 않아 에피쿠로스학파가 없어지고, 스토아학파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의 바탕이 되어 천주교 신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많은 수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의 신학을 형성하였지요. 궁극적으로 사람은 입고 먹는 등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데에서는 행복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 속에서 많은 철학가나 신학자들에 의해 내려진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면서 가끔 저는 마치 250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 같은 사람들로 온통 넘쳐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원하며 더 좋은 것, 또 더 좋은 것을 끝없이 찾아 헤매면서 행복해지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또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고 있지요. 그렇게 먹고 입고 소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밤낮없이 노력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늘어난 것은 걱정거리요, 두려움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먹고 마신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고혈압과 비만, 당뇨병 등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제는 먹는 것을 자제하느라고 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마치 수도자들처럼 살아야 병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국민 건강을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비만과 싸우는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지요. 또 많은 재산과 사회적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끝없는 피곤과 불안감뿐입니다. 그 결과 ?이래서 되겠는가? 정말 삶의 참된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하는 심각한 성찰이 터져 나왔지요. 19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이나 요즈음 우리 시대의 웰빙 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사꾼들의 잇속이 개입되어 이 웰빙 문화가 좀 천박해졌지요. 실은 정신과 영혼의 안락함을 위해서 추구한 것이 웰빙 문화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덜 먹고 덜 입으며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며 요가와 기 수련을 통해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보장받으려고 본능적으로 매달리고 있지요. 그러나 그 결과 또한 기대했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헌신해서 자녀 교육에 바쳤는데 얻은 것은 외로움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투자하고 노력했지만 노후에 노력한 만큼의 뒷바라지를 받기는커녕 늙어서도 계속 자식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물려줄 재산이 없으면 소외되어 길거리에 나가 앉는 경우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불행한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그러면 참된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재산이나 건강, 자녀 교육에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기본인데 그것을 떠나서 어디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행복이 있는 그 곳에서 우리는 왜 불행만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이 없이 단지 현세적인 안락함만을 위하여 재물을 추구하고 건강을, 자녀 교육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인격과 도덕이 밑받침되지 않은 재물은 이웃에게 아픔을 주고 본인에게는 갈증만을 줄 뿐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효가 바탕이 되지 않은 재물은 언제든지 그 관계를 해칠 수가 있지요. 건강도 마찬가지고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없이 이기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아이로 키우는 것이 어떠한 결과가 가져오는지를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바탕이 된 재물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모두를 잘 살게 하지요.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자녀 교육은 인류를 평화롭게 하고 번성시키는데 기여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 시대에 참된 행복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가장 중요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지요. 오 늘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핵심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만 미래의 희망을 두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재산과 건강, 자녀 교육과 출세는 참된 평화와 영원한 삶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인간의 삶이 힘겨운 이유는 그 방향과 기본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았기에 열심히 노력할수록 오히려 어려움만 가중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재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출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권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자아내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누누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며 소비해 가는 행복 추구로는 결국 우리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오염되고 파괴된 지구가 가리키고 있는 생명시계가 절망의 끝인 12시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고 하지요. 스토아학파의 자기 절제, 정신과 영혼을 키우는 노력들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바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 질서를 잡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재물과 건강, 모든 출세와 자녀 교육도 그 때 더 풍요로울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행복을 찾아 누리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 산상설교의 첫 계단 : 진복선언 † -박상대 신부- ![]() <산으로 오르셨다>(마태5,1-2)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 * * * * * *
오 늘 복음은 신앙인들의 대헌장이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신 내용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예수님한테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이 제시해주신 행복의 길을 다시 한번 보면서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그 길을 걸어가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왜 산으로 오르셨는가? 라는 질문을 해 보게 된다.
성서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이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시고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밝혀주시겠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갔다."는 말은 당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마치 임금이 어떤 중대한 것을 선포하기 위해 옥좌에 앉으시고 그 선포 내용을 듣기 위해 신하들이 임금 앞에 도열하고 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 앉으시고 입을 열어 가르치신 내용은 앞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할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모 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나이 산으로 인도하였고 그곳에서 산에 올라가 야훼 하느님을 만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할 십계명을 받았다. 이 십계명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지침이 되었고 그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야훼 하느님께 충성하는 것이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는 하나의 길잡이었다.
그 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을 따라서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늘 산에서 가르쳐 주신 내용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내용이고 그 내용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진복팔단이라고 말하는 5장 3절에서부터 시작하여 7장이 끝까지이다. 이것을 우리는 산상설교라고 말한다. 즉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 대헌장인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과 같은 것이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갔다."라 는 것은 산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제자들의 자세이다. 예수님이 먼저 산에 오르셨듯이 우리도 산에 올라 가야 한다.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의 가르침이 선포되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계신 산으로 오르는 사람들이고 그곳에서 밝히신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며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것을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 우리가 산에 오르는 길은 어떤 길인가?
즉 예수님이 산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갔다면 오늘 우리가 산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 다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인가?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이 계신 산에 오르는 길은 여덟가지 길이다.
즉 예수님이 산에 앉으셔서 가르쳐 주신 여덟가지 진복팔단은 오늘 우리가 산에 오르는 길인 것이다. 여덟가지 길이 있지만 그 중에서 어느 한가지만이라도 열심히 오르면 산에까지 오를 수 있다. 과연 나는 여덟가지 길 중에서 어떤 길을 통해서 하느님이 계신 산으로 오르고 있는가? 처음에는 조금 혼란스럽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오르다보면 여덟 개의 길이 결국 하나로 모아질 것이며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서도 정상까지 오르게 될 것이다. 한꺼번에 모든 길로 오르려고 하지 말자. 내가 오를 수 있는 길부터 오르기 시작하자. 그러나 제일 먼저 올라야 할 길은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라는 길을 걷는 것이 좋다. 마음이 가난하다면 다른 일곱가지 길은 휠신 쉽게 오를 수 있으리라.
오늘 복음은 또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공짜로 복을 주시지 않는다. 복을 받을 만한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 또 복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걸으면 복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을 받고 싶어도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걷지 않으면 복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한 이들"이 라고 하였다. 즉 복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이들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온유하지 않으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으면 등 복을 받을 수 없다. 즉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서 있는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의 큰 문제점은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걷지 않으면서 공짜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복을 받기 위해서 자기가 할 일을 열심히 하면 복은 가만히 있어도 굴러 들어오는 것인데 그런 복을 받을 수 있는 생활은 하나도 하지 않고 복만 받으려고 하니 그런 얌체가 어디 있는가? 묵주기도 몇 번하고 미사 참례 몇 번했다고 복이 그냥 굴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구체적으로 행복해지게 해주는 일들을 한가지씩 실천할 때 복을 받는 것이다. 칸트는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모 든 인간은 행복한 삶을 바란다.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여기 저기에 가서 배우고 행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는 방법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사실 예수님도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진복팔단이라고 하는 여덟가지 내용들은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반드시 걸어가야 하고 실천해야 하는 내용들이다. 이 행복은 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행복과는 다르다. 또 이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관과도 다르다.
증 권투자가가 설명회에 나와서 하는 말이 "분명히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증권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투자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투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증권에 투자하는 사람이 꼼꼼히 따져보고 알아보고 투자해야지 남의 말만 듣고 투자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행복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그러한 인간이 되는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은 다른 사람한테서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노력해서 획득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셨다. 돈을 벌기 위해서 증권에 투자한다면 하늘에 복을 쌓기 위해서 어디에 투자를 하는가? 하늘 나라는 공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행복관 가운데 어떤 것을 지키고 있는가?
여덟가지 가운데 몇 가지나 실천하고 있는가? ![]()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행복은 마음의 영이 가난함에서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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