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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한복음 8:21-51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간에 심한 대립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요, 진리로 알아보지 못하고 미쳤다, 귀신들렸다고 하며 공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시며 욕망대로 살 뿐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왜 이토록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기를 강하게 거부하였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 말씀안에 거하심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거짓과 각종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그들은 잘못된 동기로 메시야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말씀을 영접치 않는 유대인들을 포기치 않으시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그들이 메시야를 찾는데 왜 찾지 못하고 죄 가운데서 죽게 되는 것입니까? 이는 그들이 잘못된 동기로 예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찾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중에는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강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고침 받거나 성격을 고치거나 사업이 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처음에는 좋아서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은 인간의 근본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요1:29).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적인 메시야인줄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서 죽게 됩니다.(24)
예수님은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연적인 이유를 23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 인간은 아래서 났고 육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아담의 죄성을 타고난 죄인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으로서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살다가 결국에는 죄 가운데서 죽게 됩니다. 사람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이는 죄로 인해서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 하는 둘째 사망이기 때문입니다(계 21:8).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이런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해결해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했습니다.(19) 그러다보니 그들은 또한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25-27).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8절을 보면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인자를 든 후'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사건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인 것과 또 그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줍니다. 그 후에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의 죄의 심각함을 깨닫게 되고 또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29절을 보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인식하셨으므로 조금도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동기와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미움과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마음 문이 열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30). 예수님은 이로 인해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 말씀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를 못했습니다. 31,32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리가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알려면 예수님의 말씀에 거해야 합니다.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말씀을 확고히 붙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배가 부둣가에 줄로 잘 묶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배를 잘 묶어두지 않으면 쉬 요동하게 되고 거센 파도에 떠내려 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묶어두면 파도에 약간은 흔들리지만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떠내려 가지도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말씀을 강하게 붙들 때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세상 조류에 떠내려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악의 파도가 흉흉합니다. 정욕과 욕심의 파도,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의 파도, 거짓 사상의 파도가 넘실거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말씀을 굳게 붙들지 아니하면 자신도 모르게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아담이 실패한 것도 말씀을 굳게 붙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말씀을 굳게 붙잡지 않았을 때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굳게 붙들 때 말씀이 그 사람을 지켜주고 진리되신 예수님을 알게 해줍니다. 또 말씀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말씀을 굳게 붙드면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게 됩니다(골 2:6,7). 말씀에 뿌리를 내릴 때 우리는 말씀의 영양분을 공급받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배우기만 하고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10년이 가도 아무런 성장이 없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길은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뿐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사람인가 마귀의 사람인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계속해서 성장하는가? 않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애쓸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이 됩니다. 제자가 됩니다. 제자는 스승의 모든 것을 배웁니다. 스승의 학문뿐만 아니라 인격과 사상, 심지어는 글씨와 목소리, 제스츄어까지 배웁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전 인격을 본받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참된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기 원하지만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원하는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란 진리를 알게 될 때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에 진리가 무엇인지 몰랐기에 미신에 얽매어 있었고 거짓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부적을 소지하면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며 거짓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리를 알게 되었으므로 그런 미신과 거짓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또 세상 권세에 얽매여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정과 사랑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밧데리가 떨어진 건전지와 같이 힘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지냅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얽매임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의 소욕에 얽매이면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정욕에 얽매이게 되면 정욕이 나를 사로잡아 추하고 더러운 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모든 것이 허무하고 운명적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얽매이게 되면 마음에 기쁨이 없고 생명력이 없습니다. 힘을 쓰고 싶어도 힘을 쓸 수 없고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나 마음에 참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를 얽어매는 것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게 될 때 진리가 우리를 속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케 해줍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하는 힘이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정욕의 사슬로부터 해방시켜주는 힘이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허무와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힘이 있습니다(골 1:13). 진리를 알 게 될 때 우리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하게 될 때 오는 축복들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내면에 참된 평화를 누리고 얼굴이 밝아집니다. 또 죄책감에 시달리면 성격이 삐둘어지고 이상하게 되지만 죄책감에서 해방될 때 성격이 원만해지고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재능이 개발되고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또 소심하던 데서 두려움 없이 담대히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면에 성령의 열매를 맺고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아무리 자유로워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울타리 없는 감옥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 씻음 받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내면에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셋째, 헛된 자부심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를 못했습니다. 33절을 보면 그들은 진리를 통해 자유롭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하며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등 많은 나라에 의해 통치를 받아 왔습니다. 현재도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 자부심 때문에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헛된 자부심이 강하여 자기가 의롭다고 여깁니다. 4대째 기독교 집안이라고 하며 겸손히 배우고자 하지 않습니다. 내가 큰 교회를 다닌다며 자부합니다. 나도 젊었을 때는 신앙생활 열심히 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우리집안에 목사님이 여럿이 있고 우리 친정아버지도 목사님이라며 목에 힘을 줍니다. 예전에 제자훈련을 다 받았다며 자부합니다. 이런 헛된 자부심으로 인해 더 이상 배울려고도 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따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 안다는 헛된 자부심으로 인하여 더 이상 믿음이 오지 않고 은혜도 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나를 위해서는 오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귀의 자녀가 되어 주의 종을 반대하고 반발하고 대적하게 됩니다. 37절을 보면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교만하고 반발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불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말하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할 정도로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겸손해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됩니다. 그러나 4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그들은 하나님께로 나지 아니하였고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들이였습니다. 마귀는 살인자요, 거짓말장이입니다.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 모두 거짓입니다(44).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심으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이 예수님을 책잡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주의 종들이 진리를 말씀하시는대도 믿지 않고 반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47).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다, 또는 귀신 들렸다 하며 무시했습니다(48,49). 예수님이 이들을 참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무시를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시며 또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50). 예수님은 반발하고 무시하는 이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영생으로 초대하셨습니다. 51절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됩니다. 허무, 무기력, 운명, 두려움과 같은 죽음의 요소도 맛보지 않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심판도 받지 않게 됩니다. 죽음 대신 영생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자 하고 잘 믿고 싶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말씀대로 살고자 애써야 합니다. 헛된 교만과 자부심을 버리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사랑의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얻고 영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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