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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구? 안돼, 안돼, 되뇌며 다짐하며 걷는 이 길
2024년 12월 서울학교는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
먼저, 알립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는 지난 10월 제104강으로 제6기를 마감하고, 11월 제105강으로 제7기를 시작했습니다. 제7기는 모두 12강으로 진행되며, 열두 번의 강의가 끝나면 아쉽지만 2012년 4월 문 열었던 서울학교는 13년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려 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은 곳곳이 역사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는 현장박물관입니다. 시대별로는 한성백제,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각 시대의 특징적인 통치기반 시설들이 남아있고 더하여 그 시기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이 구상하는 열두 번의 ‘마지막 강의’는 이렇습니다.
2024년
11월 - 조선의 법궁 경복궁 톺아보기
12월 - 망국의 한이 서린 대한제국의 길
2025년
1월 – 사대의 상징 중국 사신맞이 길
2월 – 병자호란, 남한산성 회한의 47일
3월 – 기미년,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4월 - 진달래 능선엔 독립과 민주의 넋이 잠들고
5월 - 아차산 군에 깃든 문화유적들
6월 -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시설
7월 – 청계천 물줄기를 따라서
8월 – 북한산 이야기
9월 - 한성백제의 자취를 찾아서
10월 – 동궐과 후원 그리고 종묘
▲대한제국 탄생과 소멸의 현장 덕수궁. 원래 경운궁이었으나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장수(長寿) 기원의 의미로 덕수궁(徳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국가유산청
사대의 멍에는 벗었으나 결국 나라를 잃어버렸던 대한제국! 12월 서울학교 제106강(제7기 제2강)은 다사다난했던 갑진년을 마무리하며, 지난 시기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으나 결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빼앗기는 안타까운 현장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서울학교 제106강은 2024년 12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세종로사거리 광화문교보빌딩 앞 비전(碑殿,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앞에 모입니다(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4번출구).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광화문교보빌딩 앞에 있는 비전(碑殿).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전’으로, 이날 답사의 시작점이다.Ⓒ서울학교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전-성공회성당-양이재-영국대사관-원구단(삼문/황궁우/석고단)-덕수궁(대한문/석조전/즉조당/석어당/정관헌/함녕전/덕홍전)-배재학당-정동제일교회-중명전-미대사관저-돈덕전-고종의길-선원전터(흥덕전/흥복전터)-러시아공사관터-프랑스공사관터-이화학당-손탁호텔터-상림원터-구름다리터-독립문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함께 합니다.
▲12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열한 번 남은 ‘마지막 강의’ :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대한제국의 탄생
조선 말의 정치 상황은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의 세도정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왕권은 권위를 잃고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삶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분노는 잦은 민란으로 분출되다가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틈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서구열강은 이권을 얻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조선 5백 년 동안 큰 나라로 모셔온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다시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인 건양을 사용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손을 잡자 일본은 자국 낭인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시해하는 을미왜변을 일으킵니다. 일본군의 만행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그동안 머물렀던 경복궁 건청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1년 남짓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의 지원으로 중국과 오랫동안 지속된 사대의 동아줄을 끊으려고 칭제건원(称帝建元)을 추진합니다. 연호를 광무로 하고 황제가 하늘에 고하는 원구단을 세운 다음, 1897년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올립니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대한제국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강들의 이해관계로 핍박받는 국제정치 상황은 대한제국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열강들은 대한제국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조선 영토에서 자국의 이권을 관철하려는 조약들을 다투어 체결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은 서구 열강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숙소, 교회 등으로 잘려 나갔고,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경운궁을 아예 복원할 수 없도록 철저히 훼손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황제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종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게 탄생한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잃어갔는지, 더하여 대한제국의 궁궐인 경운궁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제천단으로, 현재 황궁우 등만 남아 있다.Ⓒ국가유산청
고종, 황제에 즉위하고 하늘에 고하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기 위한 수순을 밟는데, 먼저 경운궁 동쪽에 있는 남별궁 터에 황제 즉위식과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원구단을 만듭니다. 고종은 1897년 그곳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国)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칭하였습니다.
원구단(圓丘壇)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모시는 제천단을 일컬으며, 환구단(圜丘壇)으로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본래 ‘환’은 ‘원’의 이체자로 구별 없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건물이 세워질 때는 ‘원구단’이 맞습니다. ‘圜’이 구한말 화폐 단위의 이름으로 쓰였는데, 1910년 발행된 ‘구한국 은행권’을 보면 한자로 ‘圜’이라 하고 한글로는 ‘환’이 아니라 ‘원’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즉, 애초에 ‘圜’은 ‘원’으로 읽었습니다. 1953년 화폐개혁 시 화폐 단위를 ‘圓’에서 ‘圜’으로 바꾸고 음독을 '환'으로 변경한 이래 사람들이 '원구단'을 '환구단'으로 바꾸어 읽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4년 11월 24일, 1925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분명히 ‘원구단’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는 삼국시대부터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 그 시초인데, 제도화된 원구제(圓丘祭)는 고려 성종 때부터 거행되었습니다. 조선은 천자의 나라 중국의 제후국이므로 제천의례를 할 수 없어 세조 때 원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에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중국풍 별관이자 조선 왕실의 별궁인 남별궁을 훼철하고 그 자리에 몇백 년 만에 다시 원구단을 짓습니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은 이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때부터 원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부상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동지와 새해 첫날에 제천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899년(광무 3)에 원구단 내에 황궁우(皇穹宇)를 설치하여 안에 신위판을 봉안하였고 1902년(광무 6)에는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석고단(石鼓壇)을 설치하였습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의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원구단은 없어지고, 대신 원구단의 상징물 격인 황궁우만 남았습니다. 현재 원구단 본단 자리에는 웨스틴조선호텔이 세워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동아시아 전통 건축물과 달리 환구단은 둥글거나 혹은 원에 가까운 팔각정 같은 형태를 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일반적인 기와집 건물들은 사각형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므로 둥글게 지은 것입니다.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国 大皇帝 宝齢望六旬 御極四十年 称慶紀念碑)는 고종의 보령 51세 때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송비를 만들어 기로소 앞에 세웠는데 지금의 교보문고 앞에 자리한 비전이 그것입니다. 비의 전액은 황태자였던 순종이 썼고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하고 황제의 큰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라 했으며, 특히 올해 임인년(1902년)은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 되며, 보령은 망 육순이 되어 기로소 안, 어첩 보관소인 영수각에 참배하고 기로소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비로소 기로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짓고 황태자 순종이 쓴 ‘紀念碑殿’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일반적으로 비각이라 부르는 것과는 달리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전’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기념비전 앞에 있는 도로원표는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를 셈하는 도로의 기점입니다.
▲덕수궁 덕홍전에 내려앉은 살구꽃.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국가유산청
경운궁은 정릉동 행궁, 대한제국의 황궁 그리고 덕수궁으로 바뀌었습니다.
경운궁(慶運宮)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떠난 선조가 환도하고 보니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이 철저히 파괴되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부근에 있던 성종의 손자 계림군의 집과 주변의 민가까지 편입시켜 만든 임금의 임시 거처인 시어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곁에 있던 청양군 심의겸의 집은 동궁, 영의정 심연원의 집은 종묘로 삼았습니다. 그후 병조판서 이항복이 일대를 정비하여 남쪽 울타리를 큰길까지 넓히고, 동쪽과 서쪽에 담장을 둘러친 다음 북쪽에 별전을 새로 지음으로써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이때부터 이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습니다. 선조는 정릉동 행궁에서 16년간 지내다가 승하하였으며,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3년 만에 전각들을 다시 세운 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이때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 하였습니다.
그후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경운궁에 유폐되었을 때는 서궁이라 불렸습니다.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이곳에서 등극하였으나, 바로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선조가 거처하였던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경운궁에 속했던 땅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궁궐로서의 격이 무너지게 됩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고종은 경운궁의 전각을 복구 증축하도록 명하고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합니다. 하지만 경운궁 터의 일부는 1880년대부터 이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서구열강이 공사관 부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운궁은 각국 공사관에 포위된 형국이었습니다.
1904년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놓였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구름다리가 놓였던 위치를 지금의 경향신문 사옥 주변 능선쯤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이곳은 경희궁의 앞동산이자 경운궁의 뒷동산인 상림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1904년(광무 8) 함녕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 경운궁의 중심 건물과 그곳에 있던 집기와 보물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고종은 화재 후에도 다른 궁으로 이어하지 않고 경운궁에 강한 애착을 보였습니다. 이에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흠경각이 급하게 복구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의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동문의 이름이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뀐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이 비밀리에 시행한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퇴임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고종은 일본에 의해 경운궁에 강제로 유폐되었습니다. 태상황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물러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덕수궁이라고 칭하였는데, 그때 바뀐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운궁은 현재의 덕수궁 영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뉩니다.
덕수궁의 전체 영역은 현 덕수궁 권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 서, 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 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 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구? 안돼, 안돼, 되뇌며 다짐하며 걷는 이 길
2024년 12월 서울학교는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
먼저, 알립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는 지난 10월 제104강으로 제6기를 마감하고, 11월 제105강으로 제7기를 시작했습니다. 제7기는 모두 12강으로 진행되며, 열두 번의 강의가 끝나면 아쉽지만 2012년 4월 문 열었던 서울학교는 13년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려 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은 곳곳이 역사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는 현장박물관입니다. 시대별로는 한성백제,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각 시대의 특징적인 통치기반 시설들이 남아있고 더하여 그 시기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이 구상하는 열두 번의 ‘마지막 강의’는 이렇습니다.
2024년
11월 - 조선의 법궁 경복궁 톺아보기
12월 - 망국의 한이 서린 대한제국의 길
2025년
1월 – 사대의 상징 중국 사신맞이 길
2월 – 병자호란, 남한산성 회한의 47일
3월 – 기미년,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4월 - 진달래 능선엔 독립과 민주의 넋이 잠들고
5월 - 아차산 군에 깃든 문화유적들
6월 -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시설
7월 – 청계천 물줄기를 따라서
8월 – 북한산 이야기
9월 - 한성백제의 자취를 찾아서
10월 – 동궐과 후원 그리고 종묘
▲대한제국 탄생과 소멸의 현장 덕수궁. 원래 경운궁이었으나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장수(長寿) 기원의 의미로 덕수궁(徳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국가유산청
사대의 멍에는 벗었으나 결국 나라를 잃어버렸던 대한제국! 12월 서울학교 제106강(제7기 제2강)은 다사다난했던 갑진년을 마무리하며, 지난 시기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으나 결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빼앗기는 안타까운 현장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서울학교 제106강은 2024년 12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세종로사거리 광화문교보빌딩 앞 비전(碑殿,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앞에 모입니다(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4번출구).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광화문교보빌딩 앞에 있는 비전(碑殿).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전’으로, 이날 답사의 시작점이다.Ⓒ서울학교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전-성공회성당-양이재-영국대사관-원구단(삼문/황궁우/석고단)-덕수궁(대한문/석조전/즉조당/석어당/정관헌/함녕전/덕홍전)-배재학당-정동제일교회-중명전-미대사관저-돈덕전-고종의길-선원전터(흥덕전/흥복전터)-러시아공사관터-프랑스공사관터-이화학당-손탁호텔터-상림원터-구름다리터-독립문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함께 합니다.
▲12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열한 번 남은 ‘마지막 강의’ :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대한제국의 탄생
조선 말의 정치 상황은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의 세도정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왕권은 권위를 잃고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삶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분노는 잦은 민란으로 분출되다가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틈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서구열강은 이권을 얻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조선 5백 년 동안 큰 나라로 모셔온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다시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인 건양을 사용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손을 잡자 일본은 자국 낭인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시해하는 을미왜변을 일으킵니다. 일본군의 만행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그동안 머물렀던 경복궁 건청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1년 남짓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의 지원으로 중국과 오랫동안 지속된 사대의 동아줄을 끊으려고 칭제건원(称帝建元)을 추진합니다. 연호를 광무로 하고 황제가 하늘에 고하는 원구단을 세운 다음, 1897년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올립니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대한제국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강들의 이해관계로 핍박받는 국제정치 상황은 대한제국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열강들은 대한제국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조선 영토에서 자국의 이권을 관철하려는 조약들을 다투어 체결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은 서구 열강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숙소, 교회 등으로 잘려 나갔고,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경운궁을 아예 복원할 수 없도록 철저히 훼손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황제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종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게 탄생한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잃어갔는지, 더하여 대한제국의 궁궐인 경운궁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제천단으로, 현재 황궁우 등만 남아 있다.Ⓒ국가유산청
고종, 황제에 즉위하고 하늘에 고하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기 위한 수순을 밟는데, 먼저 경운궁 동쪽에 있는 남별궁 터에 황제 즉위식과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원구단을 만듭니다. 고종은 1897년 그곳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国)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칭하였습니다.
원구단(圓丘壇)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모시는 제천단을 일컬으며, 환구단(圜丘壇)으로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본래 ‘환’은 ‘원’의 이체자로 구별 없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건물이 세워질 때는 ‘원구단’이 맞습니다. ‘圜’이 구한말 화폐 단위의 이름으로 쓰였는데, 1910년 발행된 ‘구한국 은행권’을 보면 한자로 ‘圜’이라 하고 한글로는 ‘환’이 아니라 ‘원’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즉, 애초에 ‘圜’은 ‘원’으로 읽었습니다. 1953년 화폐개혁 시 화폐 단위를 ‘圓’에서 ‘圜’으로 바꾸고 음독을 '환'으로 변경한 이래 사람들이 '원구단'을 '환구단'으로 바꾸어 읽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4년 11월 24일, 1925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분명히 ‘원구단’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는 삼국시대부터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 그 시초인데, 제도화된 원구제(圓丘祭)는 고려 성종 때부터 거행되었습니다. 조선은 천자의 나라 중국의 제후국이므로 제천의례를 할 수 없어 세조 때 원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에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중국풍 별관이자 조선 왕실의 별궁인 남별궁을 훼철하고 그 자리에 몇백 년 만에 다시 원구단을 짓습니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은 이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때부터 원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부상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동지와 새해 첫날에 제천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899년(광무 3)에 원구단 내에 황궁우(皇穹宇)를 설치하여 안에 신위판을 봉안하였고 1902년(광무 6)에는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석고단(石鼓壇)을 설치하였습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의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원구단은 없어지고, 대신 원구단의 상징물 격인 황궁우만 남았습니다. 현재 원구단 본단 자리에는 웨스틴조선호텔이 세워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동아시아 전통 건축물과 달리 환구단은 둥글거나 혹은 원에 가까운 팔각정 같은 형태를 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일반적인 기와집 건물들은 사각형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므로 둥글게 지은 것입니다.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国 大皇帝 宝齢望六旬 御極四十年 称慶紀念碑)는 고종의 보령 51세 때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송비를 만들어 기로소 앞에 세웠는데 지금의 교보문고 앞에 자리한 비전이 그것입니다. 비의 전액은 황태자였던 순종이 썼고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하고 황제의 큰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라 했으며, 특히 올해 임인년(1902년)은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 되며, 보령은 망 육순이 되어 기로소 안, 어첩 보관소인 영수각에 참배하고 기로소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비로소 기로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짓고 황태자 순종이 쓴 ‘紀念碑殿’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일반적으로 비각이라 부르는 것과는 달리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전’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기념비전 앞에 있는 도로원표는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를 셈하는 도로의 기점입니다.
▲덕수궁 덕홍전에 내려앉은 살구꽃.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국가유산청
경운궁은 정릉동 행궁, 대한제국의 황궁 그리고 덕수궁으로 바뀌었습니다.
경운궁(慶運宮)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떠난 선조가 환도하고 보니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이 철저히 파괴되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부근에 있던 성종의 손자 계림군의 집과 주변의 민가까지 편입시켜 만든 임금의 임시 거처인 시어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곁에 있던 청양군 심의겸의 집은 동궁, 영의정 심연원의 집은 종묘로 삼았습니다. 그후 병조판서 이항복이 일대를 정비하여 남쪽 울타리를 큰길까지 넓히고, 동쪽과 서쪽에 담장을 둘러친 다음 북쪽에 별전을 새로 지음으로써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이때부터 이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습니다. 선조는 정릉동 행궁에서 16년간 지내다가 승하하였으며,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3년 만에 전각들을 다시 세운 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이때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 하였습니다.
그후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경운궁에 유폐되었을 때는 서궁이라 불렸습니다.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이곳에서 등극하였으나, 바로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선조가 거처하였던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경운궁에 속했던 땅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궁궐로서의 격이 무너지게 됩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고종은 경운궁의 전각을 복구 증축하도록 명하고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합니다. 하지만 경운궁 터의 일부는 1880년대부터 이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서구열강이 공사관 부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운궁은 각국 공사관에 포위된 형국이었습니다.
1904년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놓였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구름다리가 놓였던 위치를 지금의 경향신문 사옥 주변 능선쯤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이곳은 경희궁의 앞동산이자 경운궁의 뒷동산인 상림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1904년(광무 8) 함녕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 경운궁의 중심 건물과 그곳에 있던 집기와 보물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고종은 화재 후에도 다른 궁으로 이어하지 않고 경운궁에 강한 애착을 보였습니다. 이에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흠경각이 급하게 복구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의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동문의 이름이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뀐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이 비밀리에 시행한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퇴임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고종은 일본에 의해 경운궁에 강제로 유폐되었습니다. 태상황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물러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덕수궁이라고 칭하였는데, 그때 바뀐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운궁은 현재의 덕수궁 영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뉩니다.
덕수궁의 전체 영역은 현 덕수궁 권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 서, 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 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 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구? 안돼, 안돼, 되뇌며 다짐하며 걷는 이 길
2024년 12월 서울학교는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
먼저, 알립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는 지난 10월 제104강으로 제6기를 마감하고, 11월 제105강으로 제7기를 시작했습니다. 제7기는 모두 12강으로 진행되며, 열두 번의 강의가 끝나면 아쉽지만 2012년 4월 문 열었던 서울학교는 13년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려 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은 곳곳이 역사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는 현장박물관입니다. 시대별로는 한성백제,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각 시대의 특징적인 통치기반 시설들이 남아있고 더하여 그 시기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이 구상하는 열두 번의 ‘마지막 강의’는 이렇습니다.
2024년
11월 - 조선의 법궁 경복궁 톺아보기
12월 - 망국의 한이 서린 대한제국의 길
2025년
1월 – 사대의 상징 중국 사신맞이 길
2월 – 병자호란, 남한산성 회한의 47일
3월 – 기미년,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4월 - 진달래 능선엔 독립과 민주의 넋이 잠들고
5월 - 아차산 군에 깃든 문화유적들
6월 -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시설
7월 – 청계천 물줄기를 따라서
8월 – 북한산 이야기
9월 - 한성백제의 자취를 찾아서
10월 – 동궐과 후원 그리고 종묘
▲대한제국 탄생과 소멸의 현장 덕수궁. 원래 경운궁이었으나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장수(長寿) 기원의 의미로 덕수궁(徳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국가유산청
사대의 멍에는 벗었으나 결국 나라를 잃어버렸던 대한제국! 12월 서울학교 제106강(제7기 제2강)은 다사다난했던 갑진년을 마무리하며, 지난 시기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으나 결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빼앗기는 안타까운 현장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서울학교 제106강은 2024년 12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세종로사거리 광화문교보빌딩 앞 비전(碑殿,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앞에 모입니다(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4번출구).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광화문교보빌딩 앞에 있는 비전(碑殿).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전’으로, 이날 답사의 시작점이다.Ⓒ서울학교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전-성공회성당-양이재-영국대사관-원구단(삼문/황궁우/석고단)-덕수궁(대한문/석조전/즉조당/석어당/정관헌/함녕전/덕홍전)-배재학당-정동제일교회-중명전-미대사관저-돈덕전-고종의길-선원전터(흥덕전/흥복전터)-러시아공사관터-프랑스공사관터-이화학당-손탁호텔터-상림원터-구름다리터-독립문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함께 합니다.
▲12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열한 번 남은 ‘마지막 강의’ :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대한제국의 탄생
조선 말의 정치 상황은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의 세도정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왕권은 권위를 잃고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삶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분노는 잦은 민란으로 분출되다가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틈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서구열강은 이권을 얻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조선 5백 년 동안 큰 나라로 모셔온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다시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인 건양을 사용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손을 잡자 일본은 자국 낭인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시해하는 을미왜변을 일으킵니다. 일본군의 만행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그동안 머물렀던 경복궁 건청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1년 남짓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의 지원으로 중국과 오랫동안 지속된 사대의 동아줄을 끊으려고 칭제건원(称帝建元)을 추진합니다. 연호를 광무로 하고 황제가 하늘에 고하는 원구단을 세운 다음, 1897년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올립니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대한제국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강들의 이해관계로 핍박받는 국제정치 상황은 대한제국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열강들은 대한제국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조선 영토에서 자국의 이권을 관철하려는 조약들을 다투어 체결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은 서구 열강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숙소, 교회 등으로 잘려 나갔고,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경운궁을 아예 복원할 수 없도록 철저히 훼손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황제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종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게 탄생한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잃어갔는지, 더하여 대한제국의 궁궐인 경운궁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제천단으로, 현재 황궁우 등만 남아 있다.Ⓒ국가유산청
고종, 황제에 즉위하고 하늘에 고하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기 위한 수순을 밟는데, 먼저 경운궁 동쪽에 있는 남별궁 터에 황제 즉위식과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원구단을 만듭니다. 고종은 1897년 그곳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国)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칭하였습니다.
원구단(圓丘壇)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모시는 제천단을 일컬으며, 환구단(圜丘壇)으로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본래 ‘환’은 ‘원’의 이체자로 구별 없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건물이 세워질 때는 ‘원구단’이 맞습니다. ‘圜’이 구한말 화폐 단위의 이름으로 쓰였는데, 1910년 발행된 ‘구한국 은행권’을 보면 한자로 ‘圜’이라 하고 한글로는 ‘환’이 아니라 ‘원’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즉, 애초에 ‘圜’은 ‘원’으로 읽었습니다. 1953년 화폐개혁 시 화폐 단위를 ‘圓’에서 ‘圜’으로 바꾸고 음독을 '환'으로 변경한 이래 사람들이 '원구단'을 '환구단'으로 바꾸어 읽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4년 11월 24일, 1925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분명히 ‘원구단’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는 삼국시대부터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 그 시초인데, 제도화된 원구제(圓丘祭)는 고려 성종 때부터 거행되었습니다. 조선은 천자의 나라 중국의 제후국이므로 제천의례를 할 수 없어 세조 때 원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에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중국풍 별관이자 조선 왕실의 별궁인 남별궁을 훼철하고 그 자리에 몇백 년 만에 다시 원구단을 짓습니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은 이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때부터 원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부상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동지와 새해 첫날에 제천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899년(광무 3)에 원구단 내에 황궁우(皇穹宇)를 설치하여 안에 신위판을 봉안하였고 1902년(광무 6)에는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석고단(石鼓壇)을 설치하였습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의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원구단은 없어지고, 대신 원구단의 상징물 격인 황궁우만 남았습니다. 현재 원구단 본단 자리에는 웨스틴조선호텔이 세워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동아시아 전통 건축물과 달리 환구단은 둥글거나 혹은 원에 가까운 팔각정 같은 형태를 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일반적인 기와집 건물들은 사각형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므로 둥글게 지은 것입니다.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国 大皇帝 宝齢望六旬 御極四十年 称慶紀念碑)는 고종의 보령 51세 때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송비를 만들어 기로소 앞에 세웠는데 지금의 교보문고 앞에 자리한 비전이 그것입니다. 비의 전액은 황태자였던 순종이 썼고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하고 황제의 큰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라 했으며, 특히 올해 임인년(1902년)은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 되며, 보령은 망 육순이 되어 기로소 안, 어첩 보관소인 영수각에 참배하고 기로소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비로소 기로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짓고 황태자 순종이 쓴 ‘紀念碑殿’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일반적으로 비각이라 부르는 것과는 달리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전’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기념비전 앞에 있는 도로원표는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를 셈하는 도로의 기점입니다.
▲덕수궁 덕홍전에 내려앉은 살구꽃.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국가유산청
경운궁은 정릉동 행궁, 대한제국의 황궁 그리고 덕수궁으로 바뀌었습니다.
경운궁(慶運宮)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떠난 선조가 환도하고 보니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이 철저히 파괴되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부근에 있던 성종의 손자 계림군의 집과 주변의 민가까지 편입시켜 만든 임금의 임시 거처인 시어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곁에 있던 청양군 심의겸의 집은 동궁, 영의정 심연원의 집은 종묘로 삼았습니다. 그후 병조판서 이항복이 일대를 정비하여 남쪽 울타리를 큰길까지 넓히고, 동쪽과 서쪽에 담장을 둘러친 다음 북쪽에 별전을 새로 지음으로써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이때부터 이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습니다. 선조는 정릉동 행궁에서 16년간 지내다가 승하하였으며,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3년 만에 전각들을 다시 세운 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이때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 하였습니다.
그후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경운궁에 유폐되었을 때는 서궁이라 불렸습니다.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이곳에서 등극하였으나, 바로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선조가 거처하였던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경운궁에 속했던 땅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궁궐로서의 격이 무너지게 됩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고종은 경운궁의 전각을 복구 증축하도록 명하고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합니다. 하지만 경운궁 터의 일부는 1880년대부터 이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서구열강이 공사관 부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운궁은 각국 공사관에 포위된 형국이었습니다.
1904년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놓였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구름다리가 놓였던 위치를 지금의 경향신문 사옥 주변 능선쯤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이곳은 경희궁의 앞동산이자 경운궁의 뒷동산인 상림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1904년(광무 8) 함녕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 경운궁의 중심 건물과 그곳에 있던 집기와 보물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고종은 화재 후에도 다른 궁으로 이어하지 않고 경운궁에 강한 애착을 보였습니다. 이에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흠경각이 급하게 복구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의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동문의 이름이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뀐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이 비밀리에 시행한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퇴임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고종은 일본에 의해 경운궁에 강제로 유폐되었습니다. 태상황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물러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덕수궁이라고 칭하였는데, 그때 바뀐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운궁은 현재의 덕수궁 영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뉩니다.
덕수궁의 전체 영역은 현 덕수궁 권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 서, 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 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 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구? 안돼, 안돼, 되뇌며 다짐하며 걷는 이 길
2024년 12월 서울학교는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
먼저, 알립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는 지난 10월 제104강으로 제6기를 마감하고, 11월 제105강으로 제7기를 시작했습니다. 제7기는 모두 12강으로 진행되며, 열두 번의 강의가 끝나면 아쉽지만 2012년 4월 문 열었던 서울학교는 13년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려 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은 곳곳이 역사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는 현장박물관입니다. 시대별로는 한성백제,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각 시대의 특징적인 통치기반 시설들이 남아있고 더하여 그 시기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이 구상하는 열두 번의 ‘마지막 강의’는 이렇습니다.
2024년
11월 - 조선의 법궁 경복궁 톺아보기
12월 - 망국의 한이 서린 대한제국의 길
2025년
1월 – 사대의 상징 중국 사신맞이 길
2월 – 병자호란, 남한산성 회한의 47일
3월 – 기미년,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4월 - 진달래 능선엔 독립과 민주의 넋이 잠들고
5월 - 아차산 군에 깃든 문화유적들
6월 -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시설
7월 – 청계천 물줄기를 따라서
8월 – 북한산 이야기
9월 - 한성백제의 자취를 찾아서
10월 – 동궐과 후원 그리고 종묘
▲대한제국 탄생과 소멸의 현장 덕수궁. 원래 경운궁이었으나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장수(長寿) 기원의 의미로 덕수궁(徳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국가유산청
사대의 멍에는 벗었으나 결국 나라를 잃어버렸던 대한제국! 12월 서울학교 제106강(제7기 제2강)은 다사다난했던 갑진년을 마무리하며, 지난 시기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으나 결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빼앗기는 안타까운 현장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서울학교 제106강은 2024년 12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세종로사거리 광화문교보빌딩 앞 비전(碑殿,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앞에 모입니다(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4번출구).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광화문교보빌딩 앞에 있는 비전(碑殿).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전’으로, 이날 답사의 시작점이다.Ⓒ서울학교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전-성공회성당-양이재-영국대사관-원구단(삼문/황궁우/석고단)-덕수궁(대한문/석조전/즉조당/석어당/정관헌/함녕전/덕홍전)-배재학당-정동제일교회-중명전-미대사관저-돈덕전-고종의길-선원전터(흥덕전/흥복전터)-러시아공사관터-프랑스공사관터-이화학당-손탁호텔터-상림원터-구름다리터-독립문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함께 합니다.
▲12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열한 번 남은 ‘마지막 강의’ :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대한제국의 탄생
조선 말의 정치 상황은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의 세도정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왕권은 권위를 잃고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삶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분노는 잦은 민란으로 분출되다가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틈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서구열강은 이권을 얻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조선 5백 년 동안 큰 나라로 모셔온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다시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인 건양을 사용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손을 잡자 일본은 자국 낭인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시해하는 을미왜변을 일으킵니다. 일본군의 만행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그동안 머물렀던 경복궁 건청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1년 남짓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의 지원으로 중국과 오랫동안 지속된 사대의 동아줄을 끊으려고 칭제건원(称帝建元)을 추진합니다. 연호를 광무로 하고 황제가 하늘에 고하는 원구단을 세운 다음, 1897년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올립니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대한제국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강들의 이해관계로 핍박받는 국제정치 상황은 대한제국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열강들은 대한제국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조선 영토에서 자국의 이권을 관철하려는 조약들을 다투어 체결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은 서구 열강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숙소, 교회 등으로 잘려 나갔고,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경운궁을 아예 복원할 수 없도록 철저히 훼손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황제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종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게 탄생한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잃어갔는지, 더하여 대한제국의 궁궐인 경운궁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제천단으로, 현재 황궁우 등만 남아 있다.Ⓒ국가유산청
고종, 황제에 즉위하고 하늘에 고하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기 위한 수순을 밟는데, 먼저 경운궁 동쪽에 있는 남별궁 터에 황제 즉위식과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원구단을 만듭니다. 고종은 1897년 그곳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国)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칭하였습니다.
원구단(圓丘壇)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모시는 제천단을 일컬으며, 환구단(圜丘壇)으로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본래 ‘환’은 ‘원’의 이체자로 구별 없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건물이 세워질 때는 ‘원구단’이 맞습니다. ‘圜’이 구한말 화폐 단위의 이름으로 쓰였는데, 1910년 발행된 ‘구한국 은행권’을 보면 한자로 ‘圜’이라 하고 한글로는 ‘환’이 아니라 ‘원’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즉, 애초에 ‘圜’은 ‘원’으로 읽었습니다. 1953년 화폐개혁 시 화폐 단위를 ‘圓’에서 ‘圜’으로 바꾸고 음독을 '환'으로 변경한 이래 사람들이 '원구단'을 '환구단'으로 바꾸어 읽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4년 11월 24일, 1925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분명히 ‘원구단’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는 삼국시대부터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 그 시초인데, 제도화된 원구제(圓丘祭)는 고려 성종 때부터 거행되었습니다. 조선은 천자의 나라 중국의 제후국이므로 제천의례를 할 수 없어 세조 때 원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에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중국풍 별관이자 조선 왕실의 별궁인 남별궁을 훼철하고 그 자리에 몇백 년 만에 다시 원구단을 짓습니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은 이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때부터 원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부상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동지와 새해 첫날에 제천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899년(광무 3)에 원구단 내에 황궁우(皇穹宇)를 설치하여 안에 신위판을 봉안하였고 1902년(광무 6)에는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석고단(石鼓壇)을 설치하였습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의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원구단은 없어지고, 대신 원구단의 상징물 격인 황궁우만 남았습니다. 현재 원구단 본단 자리에는 웨스틴조선호텔이 세워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동아시아 전통 건축물과 달리 환구단은 둥글거나 혹은 원에 가까운 팔각정 같은 형태를 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일반적인 기와집 건물들은 사각형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므로 둥글게 지은 것입니다.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国 大皇帝 宝齢望六旬 御極四十年 称慶紀念碑)는 고종의 보령 51세 때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송비를 만들어 기로소 앞에 세웠는데 지금의 교보문고 앞에 자리한 비전이 그것입니다. 비의 전액은 황태자였던 순종이 썼고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하고 황제의 큰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라 했으며, 특히 올해 임인년(1902년)은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 되며, 보령은 망 육순이 되어 기로소 안, 어첩 보관소인 영수각에 참배하고 기로소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비로소 기로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짓고 황태자 순종이 쓴 ‘紀念碑殿’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일반적으로 비각이라 부르는 것과는 달리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전’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기념비전 앞에 있는 도로원표는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를 셈하는 도로의 기점입니다.
▲덕수궁 덕홍전에 내려앉은 살구꽃.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국가유산청
경운궁은 정릉동 행궁, 대한제국의 황궁 그리고 덕수궁으로 바뀌었습니다.
경운궁(慶運宮)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떠난 선조가 환도하고 보니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이 철저히 파괴되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부근에 있던 성종의 손자 계림군의 집과 주변의 민가까지 편입시켜 만든 임금의 임시 거처인 시어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곁에 있던 청양군 심의겸의 집은 동궁, 영의정 심연원의 집은 종묘로 삼았습니다. 그후 병조판서 이항복이 일대를 정비하여 남쪽 울타리를 큰길까지 넓히고, 동쪽과 서쪽에 담장을 둘러친 다음 북쪽에 별전을 새로 지음으로써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이때부터 이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습니다. 선조는 정릉동 행궁에서 16년간 지내다가 승하하였으며,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3년 만에 전각들을 다시 세운 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이때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 하였습니다.
그후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경운궁에 유폐되었을 때는 서궁이라 불렸습니다.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이곳에서 등극하였으나, 바로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선조가 거처하였던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경운궁에 속했던 땅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궁궐로서의 격이 무너지게 됩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고종은 경운궁의 전각을 복구 증축하도록 명하고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합니다. 하지만 경운궁 터의 일부는 1880년대부터 이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서구열강이 공사관 부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운궁은 각국 공사관에 포위된 형국이었습니다.
1904년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놓였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구름다리가 놓였던 위치를 지금의 경향신문 사옥 주변 능선쯤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이곳은 경희궁의 앞동산이자 경운궁의 뒷동산인 상림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1904년(광무 8) 함녕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 경운궁의 중심 건물과 그곳에 있던 집기와 보물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고종은 화재 후에도 다른 궁으로 이어하지 않고 경운궁에 강한 애착을 보였습니다. 이에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흠경각이 급하게 복구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의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동문의 이름이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뀐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이 비밀리에 시행한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퇴임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고종은 일본에 의해 경운궁에 강제로 유폐되었습니다. 태상황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물러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덕수궁이라고 칭하였는데, 그때 바뀐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운궁은 현재의 덕수궁 영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뉩니다.
덕수궁의 전체 영역은 현 덕수궁 권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 서, 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 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 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구? 안돼, 안돼, 되뇌며 다짐하며 걷는 이 길
2024년 12월 서울학교는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
먼저, 알립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는 지난 10월 제104강으로 제6기를 마감하고, 11월 제105강으로 제7기를 시작했습니다. 제7기는 모두 12강으로 진행되며, 열두 번의 강의가 끝나면 아쉽지만 2012년 4월 문 열었던 서울학교는 13년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려 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은 곳곳이 역사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는 현장박물관입니다. 시대별로는 한성백제,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각 시대의 특징적인 통치기반 시설들이 남아있고 더하여 그 시기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이 구상하는 열두 번의 ‘마지막 강의’는 이렇습니다.
2024년
11월 - 조선의 법궁 경복궁 톺아보기
12월 - 망국의 한이 서린 대한제국의 길
2025년
1월 – 사대의 상징 중국 사신맞이 길
2월 – 병자호란, 남한산성 회한의 47일
3월 – 기미년,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4월 - 진달래 능선엔 독립과 민주의 넋이 잠들고
5월 - 아차산 군에 깃든 문화유적들
6월 -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시설
7월 – 청계천 물줄기를 따라서
8월 – 북한산 이야기
9월 - 한성백제의 자취를 찾아서
10월 – 동궐과 후원 그리고 종묘
▲대한제국 탄생과 소멸의 현장 덕수궁. 원래 경운궁이었으나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장수(長寿) 기원의 의미로 덕수궁(徳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국가유산청
사대의 멍에는 벗었으나 결국 나라를 잃어버렸던 대한제국! 12월 서울학교 제106강(제7기 제2강)은 다사다난했던 갑진년을 마무리하며, 지난 시기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으나 결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빼앗기는 안타까운 현장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서울학교 제106강은 2024년 12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세종로사거리 광화문교보빌딩 앞 비전(碑殿,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앞에 모입니다(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4번출구).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광화문교보빌딩 앞에 있는 비전(碑殿).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전’으로, 이날 답사의 시작점이다.Ⓒ서울학교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전-성공회성당-양이재-영국대사관-원구단(삼문/황궁우/석고단)-덕수궁(대한문/석조전/즉조당/석어당/정관헌/함녕전/덕홍전)-배재학당-정동제일교회-중명전-미대사관저-돈덕전-고종의길-선원전터(흥덕전/흥복전터)-러시아공사관터-프랑스공사관터-이화학당-손탁호텔터-상림원터-구름다리터-독립문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함께 합니다.
▲12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열한 번 남은 ‘마지막 강의’ :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대한제국의 탄생
조선 말의 정치 상황은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의 세도정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왕권은 권위를 잃고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삶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분노는 잦은 민란으로 분출되다가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틈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서구열강은 이권을 얻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조선 5백 년 동안 큰 나라로 모셔온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다시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인 건양을 사용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손을 잡자 일본은 자국 낭인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시해하는 을미왜변을 일으킵니다. 일본군의 만행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그동안 머물렀던 경복궁 건청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1년 남짓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의 지원으로 중국과 오랫동안 지속된 사대의 동아줄을 끊으려고 칭제건원(称帝建元)을 추진합니다. 연호를 광무로 하고 황제가 하늘에 고하는 원구단을 세운 다음, 1897년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올립니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대한제국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강들의 이해관계로 핍박받는 국제정치 상황은 대한제국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열강들은 대한제국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조선 영토에서 자국의 이권을 관철하려는 조약들을 다투어 체결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은 서구 열강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숙소, 교회 등으로 잘려 나갔고,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경운궁을 아예 복원할 수 없도록 철저히 훼손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황제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종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게 탄생한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잃어갔는지, 더하여 대한제국의 궁궐인 경운궁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제천단으로, 현재 황궁우 등만 남아 있다.Ⓒ국가유산청
고종, 황제에 즉위하고 하늘에 고하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기 위한 수순을 밟는데, 먼저 경운궁 동쪽에 있는 남별궁 터에 황제 즉위식과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원구단을 만듭니다. 고종은 1897년 그곳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国)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칭하였습니다.
원구단(圓丘壇)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모시는 제천단을 일컬으며, 환구단(圜丘壇)으로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본래 ‘환’은 ‘원’의 이체자로 구별 없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건물이 세워질 때는 ‘원구단’이 맞습니다. ‘圜’이 구한말 화폐 단위의 이름으로 쓰였는데, 1910년 발행된 ‘구한국 은행권’을 보면 한자로 ‘圜’이라 하고 한글로는 ‘환’이 아니라 ‘원’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즉, 애초에 ‘圜’은 ‘원’으로 읽었습니다. 1953년 화폐개혁 시 화폐 단위를 ‘圓’에서 ‘圜’으로 바꾸고 음독을 '환'으로 변경한 이래 사람들이 '원구단'을 '환구단'으로 바꾸어 읽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4년 11월 24일, 1925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분명히 ‘원구단’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는 삼국시대부터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 그 시초인데, 제도화된 원구제(圓丘祭)는 고려 성종 때부터 거행되었습니다. 조선은 천자의 나라 중국의 제후국이므로 제천의례를 할 수 없어 세조 때 원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에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중국풍 별관이자 조선 왕실의 별궁인 남별궁을 훼철하고 그 자리에 몇백 년 만에 다시 원구단을 짓습니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은 이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때부터 원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부상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동지와 새해 첫날에 제천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899년(광무 3)에 원구단 내에 황궁우(皇穹宇)를 설치하여 안에 신위판을 봉안하였고 1902년(광무 6)에는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석고단(石鼓壇)을 설치하였습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의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원구단은 없어지고, 대신 원구단의 상징물 격인 황궁우만 남았습니다. 현재 원구단 본단 자리에는 웨스틴조선호텔이 세워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동아시아 전통 건축물과 달리 환구단은 둥글거나 혹은 원에 가까운 팔각정 같은 형태를 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일반적인 기와집 건물들은 사각형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므로 둥글게 지은 것입니다.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国 大皇帝 宝齢望六旬 御極四十年 称慶紀念碑)는 고종의 보령 51세 때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송비를 만들어 기로소 앞에 세웠는데 지금의 교보문고 앞에 자리한 비전이 그것입니다. 비의 전액은 황태자였던 순종이 썼고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하고 황제의 큰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라 했으며, 특히 올해 임인년(1902년)은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 되며, 보령은 망 육순이 되어 기로소 안, 어첩 보관소인 영수각에 참배하고 기로소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비로소 기로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짓고 황태자 순종이 쓴 ‘紀念碑殿’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일반적으로 비각이라 부르는 것과는 달리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전’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기념비전 앞에 있는 도로원표는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를 셈하는 도로의 기점입니다.
▲덕수궁 덕홍전에 내려앉은 살구꽃.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국가유산청
경운궁은 정릉동 행궁, 대한제국의 황궁 그리고 덕수궁으로 바뀌었습니다.
경운궁(慶運宮)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떠난 선조가 환도하고 보니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이 철저히 파괴되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부근에 있던 성종의 손자 계림군의 집과 주변의 민가까지 편입시켜 만든 임금의 임시 거처인 시어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곁에 있던 청양군 심의겸의 집은 동궁, 영의정 심연원의 집은 종묘로 삼았습니다. 그후 병조판서 이항복이 일대를 정비하여 남쪽 울타리를 큰길까지 넓히고, 동쪽과 서쪽에 담장을 둘러친 다음 북쪽에 별전을 새로 지음으로써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이때부터 이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습니다. 선조는 정릉동 행궁에서 16년간 지내다가 승하하였으며,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3년 만에 전각들을 다시 세운 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이때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 하였습니다.
그후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경운궁에 유폐되었을 때는 서궁이라 불렸습니다.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이곳에서 등극하였으나, 바로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선조가 거처하였던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경운궁에 속했던 땅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궁궐로서의 격이 무너지게 됩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고종은 경운궁의 전각을 복구 증축하도록 명하고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합니다. 하지만 경운궁 터의 일부는 1880년대부터 이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서구열강이 공사관 부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운궁은 각국 공사관에 포위된 형국이었습니다.
1904년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놓였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구름다리가 놓였던 위치를 지금의 경향신문 사옥 주변 능선쯤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이곳은 경희궁의 앞동산이자 경운궁의 뒷동산인 상림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1904년(광무 8) 함녕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 경운궁의 중심 건물과 그곳에 있던 집기와 보물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고종은 화재 후에도 다른 궁으로 이어하지 않고 경운궁에 강한 애착을 보였습니다. 이에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흠경각이 급하게 복구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의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동문의 이름이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뀐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이 비밀리에 시행한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퇴임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고종은 일본에 의해 경운궁에 강제로 유폐되었습니다. 태상황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물러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덕수궁이라고 칭하였는데, 그때 바뀐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운궁은 현재의 덕수궁 영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뉩니다.
덕수궁의 전체 영역은 현 덕수궁 권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 서, 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 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 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