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NO! 고난 Yes!
“우리는 원치 않은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같은 일이라도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않기도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즐거운 마음이 아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서 어떤 행위를 선택하게 되면,
그 마음의 근저에 분노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지요.
‘내가 이렇게 일하는데 너희들은 뭐 하는 거야!’하는 분노의 소리가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 몰아넣을 것인가,
아니면 삶을 즐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도
다른 사람이 해 줄 일도 아니고 바로 자신이 선택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생 여정’안에서 주어지는 ‘고난’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고난 없는 삶이란 없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지만 삶의 과정에서 인간에게는 고난과 시련이 꼭 찾아오게
마련이고, 혹시라도 만나게 된 고난이 있을 때,
인간은 그 고난을 견디어 내든지, 아니면 이겨내야만 합니다. 특히
신앙인에게 고난은, 삶의 승리와 영광을 위한 ‘좁은 문’(루카 13,24)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잘 압니다. 주어진 고난을 피하려고 할 때 그 믿음은
헛된 믿음이 되기도 하고, 고난을 이겨내지 못한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게 됩니다. 이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외치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다이어트의 배고픔도, 운동의 고통도, 치유를 위한 아픔도
견디어 낼 줄 압니다. 삶의 윤택함과 건강한 삶, 일상의 행복과 삶의 질을
위해 건강한 삶을 선택한다면, 그에 따르는 수고는 기꺼이 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는 스트레스도 고난도 아닙니다. 당연한 수고일 뿐입니다.
이제 영혼이 건강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 안에는 이미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감히 선택하여, 주어지는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낼 것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을 통해 영혼이 건강해지는 과정입니다.
스트레스는 선택하지 마세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글 : 郭吉燮 Peter 神父 – 부산교구
‘시간’ 보다 ‘용서’가 약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습니다.
때로는 그 상처가 너무나 깊어 용서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로사(가명) 자매님 사건’이 그랬습니다.
로사 자매님의 남편이 상대 운전자의 커다란 과실로 교통사고를 당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로사 자매님은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어 매우 힘들어했고 우울감과 슬픔,
분노로 가득 찼으며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무색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몇 개월 뒤 운전자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위반(치사)’으로 형사재판에
넘겨졌는데, 자신의 범죄사실을 다 인정하면서 변호인을 통해 피해자
대리인인 제게 합의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과 분노가 로사 자매님의 마음에 가득 차 있었기에,
자매님에게 있어 용서는 불가능한 과제처럼 여겨졌습니다.
저 역시 자매님의 심정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약 한 달 정도 후 로사 자매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운전자를 용서하고 합의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계기가 있었기에 용서가 가능해진 것인지를 여쭙자, 로사 자매님은
“변호사님도 아시겠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저는 그 사람(운전자)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런데 지난주 미사 때 제 안의 분노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죄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고해성사를 하였죠.
고해소에서 신부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용서하라고….
하느님도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시는데 하느님이 그러신 것처럼
저도 이제는 그 사람을 용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로사 자매님이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와 치유의 은총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또, 자매님이 그 운전자를 용서했다고 해서 남편을 잃은 슬픔과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만, 용기 내어 용서함으로써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분노와 원한의 감옥에서 해방된 것도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해소에서 신부님의 말씀처럼,
로사 자매님은 그 운전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매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는
말씀이나,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35)라는 예수님 말씀이
솔직히 조금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원수가 예뻐서 용서하거나 사랑하라고 하신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행하게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수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그러면서 더더욱 우리의 영혼이
지옥 같은 삶을 사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시간’보다 ‘용서가 약’이라는 진리를 몸소 보여준 로사 자매님과
자매님 사건을 통해 이를 깨닫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글 : 성진욱 Peter – 법무법인 海星 辯護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