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명수는 고종 황제가 즉위하던 1897년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만나 개발되었는데요. 우리가 현재 많이 섭취하고 있는 청량감 있는 까스활명수는 1967년 발매되었습니다.
현재까지 판매된 활명수의 병 높이를 기준으로 길이를 재보면 지구 25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데요. 이 수치만으로도 꾸준하고 많은 사랑을 받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국내 제약산업에 의미가 깊은 활명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국내 제약산업 시작의 계기가 된 활명수!
활명수는 1897년 궁중 선전관 노천 민병호 선생이 궁중에서만 쓰이던 조선 최고의 한의학 비방에 최신 서양의학을 더해 개발한 의약품인데요. 활명수 개발로 급체와 토사곽란으로 목숨을 잃는 시대가 사라지게 되고 한국 제약산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달여먹는 탕약이 전부였던 시기에 활명수는 효과가 탁월하고 복용이 간편해 고가의 귀한 약임에도 불구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활명수는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의약품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활명수가 갖는 의미가 잘 알려지진 않았는데요. 우리나라 제약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활명수! 정말 대단하죠?
여기서 잠깐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에 대해서 알아보고 끝내겠습니다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의 민강 사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독립운동가 사이 연락을 담당하는 '서울 연통부'의 책임자를 맡아 활동했는데, 활명수를 팔아 얻은 이익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댔습니다.
일제의 감시로 돈을 전달하기 어려울 때는 활명수를 직접 중국으로 보내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게 했다. 당시 활명수 한 병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고가였다고 합니다.
약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던 민강 사장은 임시정부에 발송할 비밀문서를 목판에 새기다 발각되는 등의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 때문에 건강이 악화해 1931년 48세의 나이로 독립을 보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습니다
이후 동화약품의 5대 사장인 윤창식 선생은 민족 경제 자립을 목표로 하는 '조선산직장려계', '신간회' 등을 지원했고, 7대 사장인 윤광열 명예회장은 주호지대 광복군 5중대 중대장직을 맡기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