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혼밥
세상의 일반적 흐름서 탈피하려는 또다른 자기 주장… 홀로 밥 먹으면서 정신이 방해받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 해
김지하는 혼밥서 ‘독점’을 보았고 프루스트에겐 고독의 다른 행위… 황지우는 밥에 절실히 매달려야 하는 가난을 발견
혼밥은 우리 시대의 한 특성인 듯하지만 실제로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사진은 서울 신촌의 한 일본식 ‘혼밥식당’에서 칸막이가 쳐진 독립공간에 앉은 혼밥족이 점심을 먹고 있다.
혼밥의 시대다. 혼밥은 개인화된 삶의 중요성을 드러내며 우리 시대의 한 특성을 표현하는 듯도 하다. 그러나 혼밥이 특정 세대만의 전유물일까. 혼밥은 수많은 의미와 맥락을 지니며 인간의 삶 속에 스며들어와 있다.
혼밥이 인간의 이기성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랜들 월리스 감독의 영화 ‘아이언마스크(The Man in the Iron Mask)’(1998)에서 악역을 맡아 루이 16세로 분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한 여성과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난 후 “배고프다”고 말한다. 여자가 음식을 가져오겠다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혼밥의 신념을 밝힌다. “나는 혼자 먹는 게 좋아(I like to eat alone). 그나저나 당신은 내일 떠나.” 사랑을 나눈 후에도 먹는 쾌락은 혼자 독점하겠다는 것이다.
밥은 함께 나눠 먹는 데 그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들어왔으며 이는 결코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이광수 ‘무정’의 뒷부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의 주인공인 젊은이들은 수재를 겪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자선음악회를 연다. 여기서 영채 등 세 처녀가 부르는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국에 말아 드립시다” 타인의 손을 붙잡아주는 일,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은 밥을 나누는 데서 시작한다.
나누는 밥의 가치에 관한 생각의 한 단면을 우리는 오래전에 나온 책인 김지하의 ‘밥’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혼자서 밥을 먹으면 밥맛이 없다’는 말의 뜻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밥맛이 없는 이유는 바로 ‘독점’ 때문입니다. 혼자서 걸게 처먹으려 하기 때문에 원래 밥상에 둘러앉아 나누어 먹도록 되어 있는 밥을 혼자서 처먹기 때문에, 본래 밥의 본질과 먹는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함께 나누는 밥은 혼밥과 대립한다.
그러나 혼밥이 밥의 거룩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홀로 밥 먹는 이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밥이 공동체의 것임을 증언한다. 황지우의 시 ‘거룩한 식사’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판을 가리고서/등 돌리고 라면 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몸에 한세상 떠넣어 주는/먹는 일의 거룩함이여/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풀어진 뒷머리를 보라/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이 혼밥에는 식도락을 혼자 즐기는 사람의 여유 같은 것은 없다. 어떤 여유도 없이 밥에 절실히 매달려야 하는 이가 있고, 그의 어깨에는 고단한 삶이 놓여 있다. 그의 마음에는 양푼을 앞에 놓고 함께 밥을 떠먹던 가난한 날의 동생에 대한 안쓰러움이 있다.
다른 차원에서 또한 혼밥은 예술가와 사상가의 고유한 고립을 표현하기도 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 엘스티르는 소설의 주인공이 다니는 레스토랑 리브벨에 저녁 늦게 혼자 식사하러 오는 화가다. 그는 “레스토랑에서 손님들이 다 돌아가기 시작할 무렵에 들어와서 식탁에 앉는”다. 예술가의 과업에 몰두하는 엘스티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고독을 실천하는 중에 고독을 사랑하게 됐다.”(김희영 역) 혼자 식사하는 그의 습관은 그림 그리기 말고는 눈길을 주지 않는 그의 고독의 얼굴이다.
단지 소설 속의 예술가만이 혼밥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실존하는 예술가와 사상가들도 혼밥을 통해 그들 삶의 색깔을 드러낸다. 우리가 차례로 살펴볼 베토벤·쇼펜하우어·스피노자의 공통점은 독신이고, 어찌 됐든 혼자서 식사할 기회를 비교적 많이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얀 카이에르스는 전기 ‘베토벤’에서 베토벤의 혼밥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 그는 옷차림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의 집도 보통 때보다 훨씬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했다. 그는 여전히 단골 식당을 찾아가긴 했지만 사람들과의 교류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형편없는 식탁 예절로 주변 사람들의 밥맛을 뚝 떨어지게 만들곤 했는데 그런 그에게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홍은정 역)
다음 구절은 베토벤의 “형편없는 식탁 예절”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려준다. “보통 빈 사람들은 시간이 나면 집에 혼자 있지 않고 카페나 술집을 찾았다. 베토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거의 항상 같은 곳을 찾아왔고 조용한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신문을 읽었다. 특히 굴, 칠면조 고기, 거위 간 파테를 좋아했는데, 평일에는 훈제 청어나 레버케제(간으로 만든 치즈)를 곁들인 빵처럼 간단한 음식을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종종 옆자리 손님들과 다투게 되는 일이 생기곤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건 그들의 존재가 그에게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그는 일부러 바닥에 침을 뱉어 다른 사람들이 혐오감을 갖고 피하게 만드는 방법을 쓰곤 했다.” 옆 테이블 손님과 싸우고, 침을 뱉는 심술을 부리는 베토벤의 혼밥 습관은 청력을 잃고서 다소 괴팍하게 늙어가는 그의 모습, 창작에서는 독창적인 개성으로 꽃피웠으나 다른 이들에겐 불편하던 그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한 사람이 먹는 음식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고도 하지만, 그의 식사 습관 역시 그의 초상화를 그려 보여준다.
유럽 정신사에서 심술궂은 한 사람을 더 찾자면 쇼펜하우어다. 그는 사상가일 때는 염세주의자였지만,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기적인 탐욕을 가지고 삶에 집착했다. 그의 식사만은 이 점을 숨기지 못한다.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쇼펜하우어 전기’가 묘사하는 그의 혼밥은 이렇다. “점심 식사는 집 밖에서 한다.……이 철학자의 식욕은 너무도 왕성해서 옆 탁자의 사람들이 놀라워할 정도다. 기름진 소스를 그는 숟갈로 떠먹는다. 이따금 그는 2인분을 주문하기도 한다. 식사를 하는 동안은 방해받는 것은 싫어하지만 커피를 마실 때는 옆 사람과 즐겨 대화하며 오후 다섯 시까지 앉아 있는 적도 있다.”(정상원 역) 밥 먹는 자로서 쇼펜하우어는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낙천적인 쾌락주의자다. 그는 방해받지 않고 혼자 마음껏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식사가 끝나면 말을 나누며 놀아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혼밥과 정반대의 혼밥을 스피노자의 검소한 식탁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스피노자 전기에서 콜레루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가 사망했을 때 내가(콜레루스) 발견한 몇 장의 서류에서 그가 온종일 3센트에 해당하는 버터로 만든 우유 수프로 살았으며 1.5센트에 해당하는 맥주 한 병을 마셨다는 것이 나타난다. 그는 어떤 날은 4센트와 8페니에 해당하는 건포도와 버터로 만든 묽은 죽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한 달 내내, 나는 그의 계산서에서 1파인트의 포도주만을 발견했다. 비록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서 식사 초대를 받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빵을 먹는 것을 좋아했다.”(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김호경 역)에서 재인용) 스피노자는 그날 벌어서 그날 먹고사는 것에 만족했던 사람이고, 감각적 쾌락에 의해 정신이 방해받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자 했던 사람인데, 그의 혼밥 메뉴는 이런 스피노자의 삶과 생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렇게 혼밥은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의 마음의 빛깔을 드러내 보인다.
혼자서 먹는 밥은 말 그대로 홀로 됨, 어떤 이유에서든 이루어진,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소외를 표현하기도 한다. 나쓰메 소세키가 시코쿠(四國)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도련님’에는 근대인으로서 재래적인 것과 불화할 수밖에 없던 소세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바로 현지에 동화되지 못하는 주인공 도련님의 혼밥이 그것을 보여준다. 교사로 시코쿠에 부임한 주인공은 어느 날 국숫집에 들러 혼자 튀김국수를 네 그릇이나 먹는다. 식당 안에는 그가 가르치는 학교의 학생들도 손님으로 있었는데, 다음 날 수업에 들어가 보니 칠판에 크게 ‘튀김선생’이라고 써 있는 게 아닌가. 다른 교실 칠판에는 ‘튀김국수를 먹으면 억지를 부리고 싶어진다’고 쓰여 있었다. 고약한 따돌림이다. 그다음에는 혼자 당고를 사 먹었는데, 역시 교실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놀림을 당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한, 따돌림의 결과로서 혼밥이 있는 것이다.
이와 결을 달리하며, 혼밥을 통해 자발적인 고립을 표현할 수도 있다. 최근 젊은이들의 초상화에서도 목격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이 혼밥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1987)의 주인공인 대학생 와타나베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강의가 끝난 다음 나는 학교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으로 가서 오믈렛과 샐러드를 먹었다. 레스토랑은 번잡한 곳에서 조금 벗어났고 가격도 학생에게는 조금 비싼 편이었지만, 조용해서 마음이 편했고 오믈렛 맛도 꽤 괜찮았다.”(양억관 역) 그는 창가 자리 1인석에 앉아 식사한다. 혼술 역시 즐겁다. “그리고 잠이 올 때까지 브랜디를 마시면서 ‘마의 산’을 마저 읽었다.” 그는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자발적인 고립을 통해 자기주장을 하는 중인 것이다. 혼밥은 함께 먹는 밥만큼이나 예외적인 식사법이 아니다. 인간들이 다채로운 운명을 지니는 것처럼 혼밥은 수많은 얼굴을 보이면서 인간의 삶을 증언한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본문 가운데 언급된 전기물
본문 가운데 언급된 전기들이 있다. 얀 카이에르스의 ‘베토벤’,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쇼펜하우어 전기’, ‘스피노자’ 등이다. 베토벤, 쇼펜하우어, 스피노자 등 서구 지성사의 핵심을 차지하는 인물들을 매우 잘 고증된 자료를 동원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사상과 삶의 세세한 면모를 잘 그려진 한 시대의 풍경을 배경으로 펼친다. 전기는 하나의 사상 또는 예술을 다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 인물을 통해 한 시대에 생생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독서의 대상이다.
첫댓글 나는 나이가 들면서 거의 혼밥을 먹었어요.지금도 그렇고,,,그게 편해요.
눈치도 안보고,같이먹으면 꼭
과식하게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