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유오디아입니다.
“요지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때 모 가수가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를 불러서 전국이 들썩인 적 있기에 요지경 앞에 세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요지경이란“알쏭달쏭하고 묘한 세상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모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마을 주민이자 노인회장님의 부인되시는 분의 전화입니다.
사연인즉, 한달 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을회관을 찾아왔었고, 각 지역의 토속 음식을 촬영하여 방송하는 방송제작사로만 밝혔나 봅니다.
강원도 음식인 올챙이 국수를 만드는 법을 촬영하기로 했다가 며칠전 갑자기 양구 시래기 밥으로 정정하였고,
어제(8월 12일) 5명의 제작진이 노인회장님 댁에세 5시간 동안 촬영하였다 합니다.
경황없이 촬영을 마쳤고, 출연료를 입금할 계좌번호와 출연하신 할머니의 인적사항만 적더니 급하게 떠나갔다 합니다.
그야말로 번개불에 콩 볶아 먹듯이 정신없이 카메라 앞에서 음식을 만들었고, 3시간 걸린다던 제작 시간이 5시간만에 마치자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답니다.
그런데 한잠을 자고 나니 그제서야 사리 판단이 되기를, 촬영한 방송사나 제작진들의 연락처나 홍보 자료등이 전무한 상태로 개인정보만 알려준 것이 걱정이 되었답니다.
혹시라도 명의 도용이나 개인정보로 장난을 치는 사기 조직에 걸려든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으로 날 밤을 새운 이분이 고심 끝에 목회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급하게 그분의 댁으로 가서 그분을 모시고 은행과 파출소를 찾아 다니며 2차 피해 예방 차원에서 백방으로 알아보느라 두세 시간 진땀을 흘렸습니다.
상식적인 기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무슨 방송사에서 제작 촬영을 하게 되면 적어도 자신들의 소속 회사와 방송되는 채널과 날짜 그리고 자신들의 연락처는 기본적으로 알려 줄 터인데, 자신들의 흔적은 깨끗이 지우고 자리를 떠났다는 점이 의아스럽고 개운치가 않습니다.
그분을 모시고 다니면서 인생공부와 경험은 끝이 없구나 싶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더불어 그래도 가장 위급한 순간에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목사님이라면 해결에 도움을 주실 것이다” 고 생각했다는 고백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요지경 같은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더욱이 사도바울은 혼란하고 갈등이 심했던 고린도 교우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린도후서 2;15)
흥미로운 것은 “향기라는 말의 헬라어가 유오디아”입니다.
개역개정판에서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 되어 있지만,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하나님께 바치는 향기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금성경에 따르면 유오디아는 유(G2095: 좋은, 질)와 오조(G3605: 냄새가 나다)의 합성어라 합니다. 그러니까 유오디아는 좋은 냄새가 나다를 뜻하기에 향기라는 의미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향기라는 표현은 약 70여 차례 언급되지만, 유오디아라는 단어는 빌립보서 4;2절이 유일무이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좋은 냄새, 향기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을 가지고 빌립보 교회를 섬겼던 유오디아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4;2절 이외에는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불협화음의 원인과 이유는 알수 없지만, 분명한 점은 두 사람은 같은 마음을 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좋은 냄새 곧 향기를 발하려면 낮아짐과 하나됨은 필수 사항이라는 사실입니다.
소금과 빛의 존재는 어쩌면 부패하고 어두움이 극에 달할 때 더욱 요구되는 모습들일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요지경 같다고 아우성치기 보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 삶의 자리에서“나는 하나님께 (바치는, 앞에서) 유오디아입니다.”라며 살아가는 신자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린도후서 2;15)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