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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했던 두로의 파멸
겔 27:26-36
26 네 사공이 너를 인도하여 큰 물에 이르게 함이여 동풍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너를 무찔렀도다
27 네 재물과 상품과 바꾼 물건과 네 사공과 선장과 네 배의 틈을 막는 자와 네 상인과 네 가운데에 있는 모든 용사와 네 가운데에 있는 모든 무리가 네가 패망하는 날에 다 바다 한가운데에 빠질 것임이여
28 네 선장이 부르짖는 소리에 물결이 흔들리리로다
29 노를 잡은 모든 자와 사공과 바다의 선장들이 다 배에서 내려 언덕에 서서
30 너를 위하여 크게 소리 질러 통곡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며 재 가운데에 뒹굴며
31 그들이 다 너를 위하여 머리털을 밀고 굵은 베로 띠를 띠고 마음이 아프게 슬피 통곡하리로다
32 그들이 통곡할 때에 너를 위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애도하여 말하기를 두로와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적막한 자 누구인고
33 네 물품을 바다로 실어 낼 때에 네가 여러 백성을 풍족하게 하였음이여 네 재물과 무역품이 많으므로 세상 왕들을 풍부하게 하였었도다
34 네가 바다 깊은 데에서 파선한 때에 네 무역품과 네 승객이 다 빠졌음이여
35 섬의 주민들이 너로 말미암아 놀라고 왕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도다
36 많은 민족의 상인들이 다 너를 비웃음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화려한 배로 비유되어 번영을 누렸던 두로는 졸지에 패망하여, 주위의 사람들과 자기 백성들이 슬픈 노래를 부르고 적막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두로의 멸망으로 통곡(26-31) 화려한 재료로 만든 배로 비유한 두로였지만, 아름답던 배와 같은 두로를 ‘네 사공이 너를 인도하여 큰 물에 이르게’ 했다고 합니다. 두로의 지도자들이 인도하여 바다 중심부에 들어왔을 때 동풍으로 바다 한 가운데서 파선되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강대해진 나라라도 죄악을 쌓으면 결국 하나님의 벌을 받아 그 가장 부강한 때에도 별 수 없이 패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배가 파선할 때가 되니까 선장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는데 다급해서 부르짖는 소리가 물결 위에 흔들린다고 합니다. 파선될 때 몇 몇 사람들이 살아남아서 언덕 위에 올라서서 보니 절망으로 통곡하며 티끌을 무릅쓰고 재 가운데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살아남은 자도 죽은 자와 같이 굵은 베를 띠었다든지 머리털을 밀고서 마음 아프게 통곡한 이유는 그들이 뼈를 깎는 고통을 당하게 되고 죽은 자는 죽었다고 하지만, 살아남은 자도 죽은 자 못지않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절망의 상태입니다.
슬픈 노래를 부르는 백성(32-36) 찬란했던 문명, 아름답던 도시들이 한꺼번에 망하고 ‘두로와 같이 바다 가운데서 적막한 자 누구인고’라며 갑자기 망할 수 있느냐면서 통곡합니다. 두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두로에 와서 돈을 벌어가고, 두로에 와서 좋은 것을 살 수 있다는 덕을 봤는데 하루아침에 망하니 너무 너무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섬의 거민들도 자기들보다 강하고 경제력이 큰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망했다고 하며 저주한 대로 되었습니다. 두로를 비웃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두로의 범죄를 생각하고 비웃습니다. ‘공포의 대상이 되고’ 두로가 범죄 하더니 망하였다고 하여 자신들의 거울로 삼아 같은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이 세상의 물질과 세력으로 일시 왕성한다 해도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하여 온 세계를 분주히 돌아다닐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헛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큰 상업 도시들은 결국 죄악 도시들이며, 사람이 하나님 없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깊이 떨어질 날이 오게 됩니다. 성도의 삶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은혜로운 영향을 미치기를 원하십니다.
적용: 나는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삶의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욥기 1장 21절에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높이는 자의 삶 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나고, 사람 사이의 관계도 회복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에스겔 27:26-28 / 장석환 목사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어 보았는지요? 현대인들이 걱정하는 것이 많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현대인에게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의 사람에게든지 꼭 들어맞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는 두려워하는 것이 많은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쁨
오늘 함께 살펴볼 내용은 에스겔 시대 때 이스라엘 북쪽 해안가에 있었던 ‘두로’라는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두로는 작은 나라였으나 강하고 문명이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해상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고 있었습니다. “네 사공이 너를 인도하여 큰 물에 이르게 함이여 동풍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너를 무찔렀도다” (에스겔 27:26, NKRV) 바다로부터 많은 부를 얻었기에 두로라는 나라를 설명하면서 ‘배’로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두로라는 뛰어나고 거대한 배가 바다로 나갔는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바람이 불었습니다. 동풍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부서졌습니다. ‘파선’하였습니다. 곧 있을 미래의 일이지만 주로 과거의 일처럼 예언하고 있습니다. 동풍은 두로의 동쪽에 있었던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바벨론와 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공한 바로 그 자리에서 ‘바다 한 가운데서’ 무너졌습니다. 파선하였습니다.
배가 파선할 때 배에는 많은 것이 실려 있었습니다. “네 재물과 상품과 바꾼 물건과 네 사공과 선장과 네 배의 틈을 막는 자와 네 상인과 네 가운데에 있는 모든 용사와 네 가운데에 있는 모든 무리가 네가 패망하는 날에 다 바다 한가운데에 빠질 것임이여” (에스겔 27:27, NKRV) 엄청난 재물과 상품과 선장을 비롯한 선원과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완전 보물섬 같습니다. 배에 있던 것은 모두 값비싼 것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을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그러한 것이 있었기에 기뻤을 것입니다. 금이 쌓여갈 때 행복도 쌓여갔을 것입니다. 외국의 진기한 물건을 구하였을 때 얼마나 자랑하였을까요? 뛰어난 선장을 얻었을 때 더 많은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상인들과 인맥을 쌓기 위해 만든 술자리와 술의 양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배가 파선할 것입니다. 파선할 때 그들에게 큰 기쁨이었던 모든 것도 함께 바다에 빠지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생명도 잃을 것입니다. 두로의 백성들은 그들의 나라가 지금까지 패망하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패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 점령당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공의 자리에서 오랫동안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취하고 그렇게 성공했다 자부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공을 위해 열심히 달려간 사람들입니다. 성공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달려갔겠습니까? 그들은 기쁨이 가득합니다. 세상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성공의 자리를 부러워하며 성공의 자리를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성공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도 성공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조금 성공하여 기뻐하고 조금 성공하지 못하여 슬퍼하면서 그렇게 성공을 향해 달려갑니다. 기쁨을 위해 달려갑니다.
두려움
사람들은 즐거운 일을 찾고 즐거운 일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는 긍정적 사고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도 그래야 할까요? 사실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 속에서 빛을 찾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어둠을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슬픔이며 거짓입니다. 두로는 모든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즐거웠고,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잘못이었습니다. 그들의 거짓된 기쁨이 깨지는 것은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로의 배가 파선할 때 들렸던 소리에 대해 말합니다. “네 선장이 부르짖는 소리에 물결이 흔들리리로다” (에스겔 27:28, NKRV) ‘물결이 흔들리리로다’는 ‘해안가가 흔들리리로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선장의 절규와 공포의 외침이 참으로 커서 육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들린다는 의미입니다. 35-36절도 두로라는 배가 파선할 때 두로의 주변 나라들이 느낄 공포와 두로가 느낄 공포에 대해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공포의 실체는 두로가 망할 때만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두로가 매우 성공할 때도 두로가 두려워하는 그 실체는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모르고 있다가 멸망할 때만 잠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외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좋은 일을 생각함으로 공포를 직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장 외면하려고 하는 ‘죽음’은 사실 직면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누군가 쓴 문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그리고 결코 살아 본적이 없는 사람처럼 죽는다.(They live as if they will never die and die as if they had never lived)”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삶,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 삶은 매우 긍정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그가 죽는 순간 그의 모든 것도 함께 무너집니다. 그는 죽을 때 그가 이 땅에서 단 하루도 제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산 삶은 겸손을 잃은 삶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며, 가장 중요한 이정표를 놓치고 산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인생이 가치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산 삶, 곧 가장 중요한 진리를 외면하고 산 삶은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은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공포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된 세상에서 사는 공포,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공포,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아는 공포 등을 알아야 합니다.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두로와 그 주변 사람들은 죽으면서 ‘두려운 절망’으로서 공포를 느끼고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운 절망으로서의 공포가 아니라 ‘희망의 공포’를 느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공포를 여러 곳에서 느낍니다. 돈이 없음,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죽음, 의미 없음, 수치, 막연한 공포 등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공포는 거짓입니다. 하나님과 관련 있는 공포만 진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함으로 거짓 공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NKRV) 여기에서 ‘두려움’은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두운 저녁 갈릴리 바다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무서워’하였던 사건(마 14:26),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한 것(행 5:5)이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거짓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하는 참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리 안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산 사람은 죽음을 맞이할 때 모든 세상 고통 내려놓고 두려움이 없이 평안 가운데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모르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분명히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기쁨 가운데 살던 두로가 파선할 때 그 주변 사람들과 두로 백성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로라는 거대한 배가 파선할 때 그 안에는 수많은 귀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던 것들입니다. 그 물건들은 그것 하나에 일희일비하면서 지낸 수많은 세월이 있고 수많은 사람이 있으며 땀과 수고가 담긴 것들입니다. 그런데 파선할 때 그러한 것들은 말없이 바다에 묻히고 말 것입니다. 그 물건들과 더불어 그것을 위해 수고하였던 사람들의 인생도 함께 묻히는 것입니다. 기뻐하던 두로는 그때에서야 두려워하며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뻐하던 인생은 한 순간 두려움으로 바뀌어 마칠 것입니다.
두려운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인생을 살면서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 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이 땅의 삶을 마칠 때 두려움이 아닌 평안함으로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NKRV)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지 못하는 연약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보면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바다중심으로 살아간 두로의 운명
전준구 목사의 에스겔서 강해
두로는 바다를 중심으로 살았던 해양강국 도시국가였습니다. 두로에는 많은 지식인과 기술자들이 있었습니다. 풍부한 자본과 기술이 넘쳐났습니다. 16절 말씀에 보면, “너의 제조품이 풍부하므로 아람은 너와 통상하였음이여 남보석과 자색 베와 수놓은 것과 가는 베와 산호와 홍보석을 가지고 네 물품을 무역 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로의 마지막 운명은 비참했습니다. 26절 말씀에 보면 동풍이 바다 중심에서 불어 두로를 공격하였습니다. 27절 말씀에 보면 상품과 무역한 물건과 사공과 선장과 배의 틈을 막는 자와, 장수와 용사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무리가 다 바다 중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28절 이하에 보면, 선장과 노 잡은 자, 사공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고, 통곡하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로가 왜 이렇게 허무하게 망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다를 중심으로 살았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중심으로 살았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세상 풍요만을 붙들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에스겔서 27장 12절 이하에 보면 두로 사람들이 붙잡고 살았던 당대 명품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각종보화와 최고의 음식들, 향료들, 의복재료들이 나옵니다. 두로 사람들은 당대에 최고의 풍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상 풍요가 두로 사람들을 책임져 주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적 풍요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세상적인 부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풍요가 내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진리를 알고, 세상 풍요에 목숨 걸지 말고,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지켜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결사적으로 믿고 매달리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바다를 중심으로 살았다고 하는 것은 세상 실력만 의지하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두로에는 당대 실력자들이 많았습니다. 박사가 선장이 되고, 지혜자가 배의 틈을 막는 기술자가 되는 등 온갖 실력자들이 해양강국인 두로에 모여들었습니다. 당대 두로 사람들은 사도행전 27장에 유라굴라 광풍을 만난 사람들이 바울의 말 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듯이 세상 실력자들의 말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동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하니까, 선장과 사공과 배의 틈을 막는 실력자들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무리들과 함께 탄식하는 자로 두려워 떠는 자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세상 실력입니다. 성도는 진짜 지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진짜 실력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참 지식과 참 실력은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분으로부터 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 줄 알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풍랑도 헤쳐 나가는 실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중심으로 살았다는 뜻은 세상과 통하는 일에만 집중했다는 뜻입니다. 27장을 전체적으로 보면 두로는 세상과 통하는 국가였습니다. 여러 성과 통했습니다(3절). 애굽과 통하고, 시돈과 통하고 바사와 통하는 등 여러 민족과 통했습니다. 그러나 두로가 하나님과 통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성도는 진짜 통해야 할 분이 누구인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창조주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과 잘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과 잘 통해도, 하나님과 통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식이요, 실력입니다. 이 말씀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서울 경신교회 담임>
내 영혼의 생명은 오직 주님께 있다!
[여는 이야기] 두로는 자신의 부를 의지하며 해상 무역을 위해 국가의 모든 힘을 집중시켰으나, 하나님은 두로를 심판하여 갑작스럽게 망하게 하실 것이다. 이에 두로와 무역하던 나라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또한 두로의 멸망을 조롱하며 기뻐할 것이다. (쉬운큐티)
[묵상과 적용]
1.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26-27절)
두로는 해상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던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의 주요 활동지는 바다였다. 26절의 '너의 노를 젓는 사람들'은 두로의 국가로서의 향방을 좌지우지하던 사람들로서, 그들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많은 부를 얻을 것을 기대함으로 깊은 바다로 나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어느 날, 동풍이 불어와 그들이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바다 한가운데서 산산조각이 나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될 것을 예언하신다.
27절의 너의 재산과 물품들과 상품들, 네 뱃사람들과 사공들 그리고 배 일꾼들, 네 상인들과 너의 모든 군인들, 그리고 배에 탄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곧 두로가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다. 두로는 언제나 해상 무역으로 많은 부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드나들며,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멸망’이라는 것은 참으로 먼 얘기와 같았을 것이다. 두로는 매우 많은 것을 소유하였지만 두로가 믿었던 바다 한가운데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소유는 결코 그를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좌초되듯 두로라는 국가가 무너질 때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도 함께 바다에 빠져버리게 되어, 두로가 의지했던 그 모든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한 국가가 소유했던 모든 것들도, 나라를 폐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 앞에서는 결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로, 즉 고대국가 ‘페니키아’로 알려진 그 나라는 한 시대를 풍미하며 경제적, 문화적인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멸망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너무나 부강했던 두로였기 때문에 두로의 멸망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망할 것 같지 않던 국가도 이처럼 스러져 멸망할 수 있다면 일개 개인의 삶은 어떠할 것인가.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말씀해주신 것처럼, 사람이 아무리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 편히 쉬고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겠노라(눅12:19) 계획한다고 할지라도 당장 오늘 밤 주님이 그 영혼을 가져가신다면 그가 준비한 것을 누가 가져가겠는가?(눅12:20)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것(눅12:21)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온갖 욕심을 경계하고 주의해야 한다.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거기에 달려 있지 않으니(눅12:5), 두로의 멸망을 보면서 내 마음에도 이 땅의 것을 욕심냈던 것이 있다면 다시금 그 마음을 추스려야겠다.
2. 왕과 높은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며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 (28-32절)
갑작스럽게 두로에 멸망의 날이 닥쳤을 때, 두로라는 배를 이끌던 뱃사람들, 즉 두로의 지도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르짖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두로의 멸망을 보고 해변가의 사람들 역시 무서워 떨게 될 것이다. 노를 젓는 모든 사람들이 배를 버리듯, 두로의 지도자들이 망해가는 두로를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이고, 두로의 백성들은 바닷가에 서서 목소리를 높여 나라의 멸망을 애통해 할 것이다.
그들은 당시 사람들이 큰 슬픔을 표현했던 방법처럼 머리를 밀며 베옷을 입을 것이고, 나라의 멸망을 경험하는 고통 속에서 크나큰 소리로 슬피 울게 될 것이다. 두로 백성들은 망해가는 나라를 향해 통곡하며 두로를 위한 애도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슬퍼하며 부르짖어도 두로는 다시 회복되지 못하고 계속 침묵하며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두로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나라가 어느 날 갑자기 망하고 나의 삶의 터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말 할 수 없이 당황스럽고 힘겨운 상황일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은 그가 속한 국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를 받았던 시절에, 나라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어느 누구 할 것이 없이 대한민국에 속한 사람이라면, 본인이 속한 국가인 대한민국이 일제의 지배를 받는 중에는 자신도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아무리 한 개인이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이 여긴다 하더라도 그가 속한 국가의 지배 체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속한 나라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유지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왕과 높은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며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딤전2:2).
우리나라가 지금은 평안해 보이더라도 우리와 대치상태에 있는 북한이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나라의 국민은 어느 누구라도 그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국가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시고, 대한민국에 살게 하신 이상, 나는 이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 손에 붙들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두로의 백성들이 국가의 멸망 앞에서 애통해하고 부르짖어도 이미 하나님께 멸망의 심판을 받은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아직 평안한 중에 있을 때 더욱 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겠다.
3.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마라. (33-36절)
33절 말씀처럼 두로의 상품들이 바다로 팔려 나가며 여러 나라에 공급되었을 때, 두로는 많은 나라들을 만족시켰다. 두로의 커다란 재물과 물품들은 땅의 왕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결국 두로의 부강함은 이 땅의 것들을 만족시킬 뿐이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는, 썩어지고야 말 이 땅의 것들을 만족시키는데 두로의 모든 힘과 능력이 쓰였던 것이다.
두로가 아무리 자기가 가진 소유물들로 주변 국가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어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는 두로의 도움을 받았던 주변 국가들의 힘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로의 물품들이 바다에 빠질 때, 즉 그들의 소유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빌로니아에 의해 깨어지고 부수어질 때, 그와 함께 했던 동행자들 즉 두로의 부강함을 통해 함께 유익을 얻었던 자들도 함께 피해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5절은 바닷가에 사는 모든 자들, 즉 두로로 인해 부유함을 함께 누렸던 주변 국가들이 두로의 멸망을 보고 함께 놀라게 되고, 그 주변 국가의 왕들도 부강하던 두로가 어떻게 이렇게 하루 아침에 망할 수 있게 되는지 몸서리를 치며 그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두로가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며 주변 국가들에게 물건을 공급하고 그들에게 만족을 주었건만, 두로가 멸망하는 그 때에는 모든 나라의 상인들이 결국에는 두로를 비웃게 된다는 것(36절)이다. 두로가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좋은 물품의 공급처이자 재물의 통로로 위세 등등하게 지내왔지만 하나님께서 두로를 멸망시킬 때에는 그들이 과거에 자랑했던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으니 두로는 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고, 이 땅에 존재했던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두로와 주변 국가의 관계를 보면, 사람이 아무리 주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잘 맺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자기의 의롭다 여겨지는 행위로 만족함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정작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그 어떠한 인간관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로는 주변 국가들에게는 모든 필요의 공급처였으며 두로가 있었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그 부요함을 함께 누렸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는 그 주변 국가들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고, 도리어 그들은 두로의 멸망을 비웃기까지 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두로가 결국 자기를 높여주고, 자기에게 유익을 줄 것 같은 주변 국가들, 즉 땅의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왔던 것을 보면서, 지금 나의 삶은 무엇을 만족시키며 누구를 만족시키는 것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하늘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함이 마땅하다(골3:1). 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하는데, 잠시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하늘의 것보다 땅의 것이 내 마음을 산란하게 함을 느낀다.
내가 살아가는 목적은 ‘주님’이라고 찬양하고 고백하는 것처럼 그대로 살기를 바란다. 어느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함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기 위함도 아닌, 내 영혼의 생명이 오직 주님께 있으니 나의 삶은 주님을 위한 삶, 그리고 주님으로 인해 살아가는 삶이어야 마땅한 것이다. 나의 삶이 이 땅에서의 관계를 만족시키고, 또한 이 땅의 것으로 내 스스로도 만족하는 삶이 아닌, 오직 주님을 만족시키고 주님으로 인해 부요한 삶이기를, 그것이 정말로 내 심령에 새겨지고 내 뼛속에 새겨지기를 주님께 간구한다.
[오늘의 기도]
자신의 부요함을 믿고 자만했던 두로의 멸망을 보면서, 내 심령 깊은 곳에서도 나의 어떠함을 믿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참으로 내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썩어질 것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새기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영의 눈을 활짝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존귀함을 더욱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의 것에 마음을 줄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보화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결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땅의 것을 만족시키고 이 땅의 것으로 만족했던 두로의 멸망을 교훈삼아 날마다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의 모든 중심이 주님을 향하도록 날마다 저를 새롭게 하시고 주님의 의로운 길로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