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Ⅱ-83]“有朋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라!
어제 점심에는 오수(獒樹)에서 아주 흐뭇한 친구 모임이 있었다. 모임의 이름은 <운룡회>. 운룡(雲龍)은 임실의 옛이름 '운수(雲水)'와 남원의 옛이름 '용성(龍城)'의 첫 글자를 합한 것으로, 7-9년 전부터 고향으로 '원대복귀'한 고교 동창친구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다. 특별히 만나는 날을 정해놓은 것은 아니고, 누군가 좋은 일, 슬픈 일이 있으면 번개팅식으로 만나곤 했다. 송년회나 신년 인사회 등을 핑계로 간헐적으로 만나는 게 여러 가지로 얽매이지 않아 좋다고 할 수도 있다.
어제는 생활글 작가 친구(우천)가 요즘 세상 드물게 원고료를 좀 받았다며 호스트를 작정해 이뤄졌는데, 1년이라해도 모임이 잦지는 않지만 어쩌다 한번씩 모이면 너도나도 자기가 내겠다고 팔을 걷어붙이는 게 특징이다. 지난 2월말 미국 휴스턴에 사는 친구(휴암)가 임실 옥정호 세컨하우스에서 또 6개월 살겠다고 온 것을 축하도 할 겸, 어영구영 놓친 송년회와 신년 인사를 겸하자고 마련한 자리. '매운 불맛 족발'에 남원 맛집과 진배없는 추어탕집 안방에 17명이 모여 앉았다. 임실 운암면에 사는 경옥고 제조의 달인(갈뫼)은 친구들 집집이 선물한다며 경옥고를 갖고 달려왔다. 지리산 산사나이 아영면 친구(고룡)은 말린 헛개 열매 등을 봉지봉지 싸와 형수들에게 안겼다. 엉겅퀴 박사 친구를 둔 친구(우천)는 방금 펴낸 엉겅퀴 홍보책자와 비장의 상비약 엉겅퀴 리커버리 크림을 나눠주었다. 친구를 잘 둔 친구 덕분에 좋은 선물을 받았다며 일동은 박수를 쳤다. 또한 지사면에 딸기왕께서는 막 딴 A급 딸기 1박스를 배달해 오셨다. 한 친구(관천)의 형수(이정숙 시인)는 신작 처녀시집을 한 권씩 선물했다. 시를 아조 참하게 잘 쓰신다. 작가는 그 시집을 통독한 후 서평 비스무레한 글을 전라도닷컴 <문화야 놀자> 코너에 기고했다. 그날 3차 시인의 집(바람의 집) 비닐하우스에서 그 졸문을 낭송해 박수를 받았다.
6개월만에 다시 돌아온 미국친구 부부는 완전 기분이 up이 된 듯했다. 왜 아니겠는가. 전주에서도 101세 모친을 모시고 사는 원자력박사(원우)도 달려왔다. 멀리 광양에서도 감기로 빌빌하는데도 달려온 친구(우당-소선당) 부부도 박수를 받았다. 해를 넘어 만나는 친구들의 얼굴은 모두 맑았다. 어찌 2차를 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연전에 인근 사매면에 미술관이 생겼는데, 작품도 감상할 겸 커피를 마시러 우루루 몰려갔다. 불멸의 대하예술소설 최명희의 <혼불> 무대 노봉마을에, 남원시에서 <혼불문학관>을 세운 지 오래이다. 송하스님이 주지인 호성사(虎成寺) 바로 아래에 있는 <청하미술관>은 혼불문학관과 구색을 맟춘 듯했다. 역량 있는 화가인 송하 스님은 갑작스런 화재로 대웅전이 다 타버렸으나 절망하지 않고 꿋꿋이 중창불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지금도 청호저수지 주변에 문화예술촌을 조성하는 꿈을 꾸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3차까지 이뤄진 어제 모임의 포인트는, 단연 시인 부부의 <바람의 집> 밭가장자리에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이뤄진 막걸리 파티였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이렇게 멋진 대낮 파티를 가진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역시 모교는 대단하다고 서예가 친구(근봉)의 말에 모두 박장대소했다. 친구(우천)는 제 흥에 겨워 나훈아가 싫어져 부르지 않겠다던 <테스형>을 돼지 멱따는 소리로 불러제켰다. 한 친구(소천)는 여전히 현역으로 고액소득을 자랑하며 5월 중에 자기가 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읍소‘를 하기도 했다. 정말 이런 친구들의 모임이 생활의 비타민이 아니면 무엇일 것인가. 말수가 비교적 적은 인술(仁術)의 병원장(남악)은 여느 때처럼 말없이 빙긋빙긋 웃다가, 서울의 보살님(혜명행)을 보러 남원역에서 KTX를 탔다. 어제 모임에 맞춰 모처럼 창원의 아들집에서 휴양하던 친구(추산) 부부도 시간을 맞춰준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인증샷 면면이 모두 신수가 환한 듯해 보기에 좋았다. 낮술에 불콰하게 취한 친구들과 이런 모임은 자주 있어도 좋으리라. 인증샷을 동창 전체 단톡방에 올리니 ’부럽다‘는 전화가 여러 통이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벗이 있어 멀리서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역시 공자님 말씀이 맞았다. 후기를 쓰려다 불쑥 '기가 막힌' 척독(尺牘.옛사람들의 짧은 편지) 한 편을 발견해 전재한다. 원문 한자도 감상해 보기 바란다. <홍길동>을 쓴 조선시대 대표적인 천재 이단아(異端兒) 허균(許筠)의 편지다. 풍류남아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편지를 받은 친구는 마나님의 잔소리와 바가지를 무릅쓰고 비를 맞으며 친구들과 술 한 잔 마시려 달려갔을 것같다.
처마의 빗물은 똑똑똑 떨어지고
향로의 향냄새 솔솔 풍기는데
친구 두어 명과 소매 걷고 맨발 벗은 채
방석에 앉아 하얀 연꽃 옆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뇌를 씻어볼까 하네.
이럴 때에 자네가 없어서는 안되겠네.
자네의 늙은 마누라가 으르렁거리며
자네의 얼굴을 고양이상으로 만들겠지만 위축되지 말게.
문지지가 종이우산을 갖고 갔으니
가랑비쯤이야 족히 피할 수 있을 것이네.
빨리 빨리 오시게나.
모이고 헤어짐은 항상 있는 게 아니니,
이런 모임이 어찌 자주 있겠는가.
헤어지고 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네.
-1608년 7월 어느 날 허균이 벗에게 보낸 척독(尺牘.엽서식 쪽지편지)
簷雨蕭蕭 爐香細細
方與二三子 袒跣隱囊 雪藕剖瓜 以滌煩慮
此時不可 無吾汝仁也
君家老獅必吼 令君作貓面郞 毋爲老瓌畏縮狀
門者持傘 足以避霂霢
亟來亟來 聚散不常
此會安可數數 分離後雖悔可追
-許筠의 ’惺所覆瓿藁(성소부부고)‘중에서
처마 첨(簷), 소소(蕭蕭)하다: 바람이나 빗소리가 쓸쓸하다, 세세(細細)하다: 微微하다
소매 단(袒), 맨발 선(跣), 하얀 연뿌리(雪藕), 쪼갤 부(剖), 오이 과(瓜), 번려(번거로운 생각),
吾汝仁(나의 친구 仁?), 老獅(늙은 부인), 후(吼. 크게 화를 내다), 묘면(貓面, 고양이얼굴), 老
瓌(노괴. 늙은 부인), 문자(門者, 문지기), 목맥(霂霢, 가랑비), 극래(亟來, 빨리 오라), 취산(聚散, 모이고 흩어지는 것), 불상(不常, 항상 있는 게 아님), 어찌 안(安), 삭삭(數數, 자주 있다), 가추(可追, 뒤쫓다. 앞의 ’安‘ 부사와 함께 해석. 돌이킬 수 없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