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산업화 시대, 시골에서 잡초 처럼 쑥쑥 뽑혀서, 그들은 시골의 빈농에서 도시의 빈민이 되었다.
그들이 갈 곳은 달동네 무허가 판잣촌. 시골의 삶보다 나아진 것은 약간의 돈.
도시는 점점 거대해져가고 빌딩은 높아져 가는데, 그들은 점점 초라해져 갔다. 아니, 더욱 높은 곳으로 밀려 올라갔다. 달 동네로.
90 년대 중반인가. 텔레비젼 드라마로 [서울의 달]을 재미있게 봤었다. 달 동네에서 벌어지는 서민들의 이야기인데, 지금은 그런 리얼리티가 가득찬 드라마는 보기 힘들다. 도시형 현대판 신파가 가득찬 저질스런 드라마만 화면 가득 차 있을 뿐.
서울의 달동네 이야기는, 그 속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가난한 삶 속에 풋풋한 휴머니즘. 휴머니즘이 리얼리티로 살아나고, 그 속에서 그들은 서울의 자본주의를 지켜주는 작은 실핏줄이었다.
동맥경화에 걸려 버린 서울을 진정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그들의 고마움을 모르고 있었다.
가끔 서울로 올라가 지하철을 타면, 열차 안에서 난장을 치는 장삿꾼들을 본다.
나는 그들의 상품을 어김없이 사준다. 그들의 아이디어 상품보다,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는 그들의 몸부림이 예술에 가깝다.
리얼리티는 바로 그들이었다.
순식간에 천원짜리 몇 장을 손에 움켜쥐고 다음 칸으로 향하는 그들의 등 뒤에 항상 박수를 보냈다.
도시는 그들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는 계획을 하면서 그들을 떠나보낸다. 더 외진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더 어두운 곳으로.
도시계획이 그 동안 보여준 것은, 부동산 투기와 건설재벌의 이익 뿐이었다.
그들은 도시의 진정성을 모르고 있다.
도시는 항상 깨끗하고 정리된 것으로만 있어서는 안된다.
도시는 더럽고 천박하고 힘 없고 왜소한 것과 같이 있어야 한다.
도시의 풍요로움이 유지되자면 그러한 빈곤한 것들이 같이 있어줘야 한다는 것을 도시계획자들은 모르고 있다.
자본주의 난장판인 도시에서 착취할 것이라고는 도시의 빈민이다. 부자들은 그들을 내쫓고 더 이상 누구로부터 착취를 할 것인가.
이제, 도시계획이란, 부유층과 권력층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수 많은 방법 중에 하나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도시계획은 필요없다.
도시에 단 하나 남은 휴머니티 공동체 달 동네가 사라지면 도시는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로 남을 뿐이다.
멕시코의 콜로니아 프롤레타리아, 페루의 바리아다, 튀니지의 구어비빌, 인도의 부스티, 터키의 게세콘두, 베네수엘라의 란초 등 모두 서울 달동네의 다른 이름들이다.
마지막으로 ‘바바라 워드’의 [페루의 바리아다]를 연구한 결과를 읽어보자.
“이곳에서는 혼란과 붕괴를 찾아볼 수 없다.
폭력적인 경찰 진압에 맞선 공유지 점거는 고도로 조직적 양상을 띠고 있고, 내부에 정치조직이 있어서 해마다 선거를 치른다. 수천명의 주민들은 경찰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공공설비의 혜택도 누리지 못하지만, 질서를 유지하며 더불어 살아간다.
점거 초기에는 짚으로 집을 짓지만, 곧 벽돌 집과 시멘트 집으로 바뀐다.
여기에 들어가는 노동력과 재료를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만 달러는 될 것이다.
취업률, 임금, 식자율, 교육수준은 도심의 스럼보다 높으며, 전국 평균보다 높다. 범죄, 청소년 비행,매춘,도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좀도둑은 좀 있지만, 도시의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