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59
12월1일[대림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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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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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5oZO61___g
[인천교구 이용옥 요한보스코(청라3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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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저희 공동체 전례 담당자이신 어르신 신부님께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대림 시기 시작하는데, 대림환 어쩔거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저는 부랴부랴 창고에서 아이 키 만한 큰 초들을 쇠톱으로 자르고 칼로 다듬었습니다. 시골스럽게 대성당과 소성당에 대림환을 설치해놓으니, 그제야 어르신 신부님 얼굴에 화색이 환하게 돌았습니다.
대림환 장식은 초기 양성기 형제들이나 젊은 형제들, 아니면 봉사 오시는 자매님들의 몫이라 생각했는데, 깊은 시골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웬만한 것은 직접 다 해야 합니다. 열심히 초를 자르고 깎던 제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 초를 깎는 마음으로, 나를 깎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늘을 찌르는 교만을 깎고, 나태함과 게으름의 나를 깎고,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불충실한 나를 깎으며 그렇게 한 달을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늘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 돌아보니, 지난 한 해도 어김없이 결핍과 상처투성이의 삶, 실패와 부끄러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제 깊은 상처 그 틈 사이로 크신 주님의 자비가 흘러들어왔음을 실감합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당부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 날이 너희를 덫처럼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21장 34절)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시간을 헛되고 의미 없이 보냈습니다. 내 인생 여정에서 앞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금쪽같은 시간을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시는데 소모했습니다. 모든 것 하느님 자비하신 손길에 맡겨드리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오랜 시간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듭니다. 한 치 앞만 내다보게 되니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듭니다. 남아있는 시간, 남아있는 인생을 주님 권고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장 36절)
깨어있음은 언제나 기도와 연결돼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일정 시간은 잠을 자야 하는 인간이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생업에 몰두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잠드는 순간, 잠자는 순간조차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역시 주님께서 내 옆에서 내를 지켜보시고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면 그 역시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 기도함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재림의 날에도 굳건하고 기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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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74iDEb6x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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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인격적으로 만나는 법: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 빛이 떠오른다>
오늘 복음은 실상 세상의 마지막 때를 예언하고 계십니다. 세상 마지막 때는 고통의 때 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사람의 아들이 권능을 떨치며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법입니다.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목동들은 그 마지막 때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시 목동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보이시는 주님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엔 이런 이사야서의 인용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별은 밝은 도시가 아니라 깜깜한 시골에서 더 잘 보입니다. 우리가 죽음 직전까지 가지 않으면 생명이신 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들어갔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면 죽여달라는 마음으로 일주일 단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한번의 만남의 힘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란 책에는 봉하령 요셉 신부의 기도 체험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결정적인 사건, 죽을 고비」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봉하령 신부는 부모의 낙태 시도를 이기고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돌도 되기 전,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1월 동네 할머니가 아기를 업고 우물물을 길으려다 20미터 우물 속으로 떨어져 돌아가셨습니다. 아기도 죽었지만, 그를 구한 분이 침을 놓아 살렸습니다.
열 살 때는 친구들과 놀다가 경운기에 끼여 왼 팔은 잘렸고 오른 팔은 처참할 정도로 뭉게져버렸습니다. 오른 팔은 하루 꼬박 걸린 수술로 회복할 수 있었으나 왼 팔은 잃었습니다. 그 무렵 성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팔을 감추고 본심도 감추었습니다. 그러다 ‘선택’이란 청년 피정에 가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되었고 그때 자신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장애로 인해 취업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합니다. 장애인을 받아주는 수도회가 없었지만, 갓 만들어지기 시작한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작은예수 수도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8년 서른셋의 나이에 한국 신학교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2008년에 부제품을 받았으나 15년 동안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제품을 받지 못했습니다. 2023년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 부제로 15년 정도 살아야 했습니다. 이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뛰쳐나가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숨을 쉴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봉 신부는 이때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늘 입에 이 노래를 달고 살았습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생명의 하느님을 그리워하나이다.”
결국 숨이 막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도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도 다 “너를 위해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봉 신부는 “고통이 없었다면, 아픔이 없었다면, 좌절이 없었다면 나는 그토록 애절하게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그분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죽을만큼 원해야 생명이신 분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엄마 찾아 3만리’를 보십시오. 엄마는 아들 마르코를 살리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먼 아르헨티나까지 돈을 벌러 갔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만큼 멀리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려면 나도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너무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단식하시며 광야에서 기도하신 만큼 절실히 주님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한 5년은 가슴이 저미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성체조배를 하면 잠깐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바라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생명의 빛을 보고 싶다면 최대한 어둠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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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행기를 타면서 가끔 웃지 못할 일이 생기곤 합니다. 포트워스 신부님과 하와이엘 갈 때입니다. 전날 확인했을 때는 터미널 A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럴 줄 알고 터미널 A로 갔습니다. 게이트는 39번이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전화했습니다. 게이트 39번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도 39번에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신부님이 없었습니다. 다시 전화해서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터미널 D에 있었습니다. 게이트는 같은 39번이지만 터미널이 달랐습니다. 알아보니 아침에 터미널이 변경되었습니다. 저는 터미널 D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다행히 터미널 D로 가는 기차가 있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과 전화 통화를 해서 다행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만, 제가 아는 주교님은 게이트가 바뀐 걸 모르고 있다가 비행기를 놓치고, 다음날 비행기를 탔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내 영혼이 평안하지 않나이다.” 깨어 있어야 하는 데는 주교님도, 사제도, 수도자도, 평신도도 예외가 없습니다.
같은 지구지만 우리는 ‘시차’가 있습니다. 서울은 이곳 달라스보다 15시간 먼저 하루가 시작됩니다. 뉴욕은 이곳 달라스보다 1시간 먼저 하루가 시작됩니다. 교회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보다 1달 정도 먼저 시작됩니다. 교회의 시간은 태양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12월 25일이고,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4주간의 대림 시기를 정하였습니다. 오늘은 12월 1일이고,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1주일을 새로운 한 해의 시작으로 정했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1달 먼저 새해를 시작했으니 더 감사하며, 더 기뻐하며, 더 나누며 살면 좋겠습니다. 저는 2025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사목 지침을 정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사목 지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025년 본당 사목 지침)
1. 사랑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 신앙생활, 사랑과 배려가 공존하는 공동체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모든 구성원은 서로를 존중하고 도우며, 상호 간의 관심과 배려를 나눕니다. 소그룹 모임, 친목 모임, 그룹 공동 활동 등을 통해 교회 구성원들의 상호작용과 유대감을 증진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합니다.
2. 다양한 교육 및 활동, 교회는 다양한 연령층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교육 및 활동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각 개인의 영적 성장과 친교를 나누며,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 지원과 협력을 도모합니다. 구역모임, 성경 공부, 기도 모임, 성가대 활동, 봉사활동 등을 통해 교회 구성원들은 서로를 도우며 신앙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세대 모임을 활성화 하도록 합니다. 소그룹과 단체에 가입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합니다.
3. 순교 정신과 사회봉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본보기로서 지역사회에 봉사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손을 잡아 봉사하는 문화를 정착시킵니다. 지역사회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지원 활동, 재난 구호 봉사, 장애인 센터 방문 등을 통해 교회는 순교 정신과 사랑의 행동을 실천합니다.
4. 미사와 기도의 중요성 강조, 미사와 기도는 교회 생활의 핵심입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꾸준한 미사 참례와 개인적인 기도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영적인 성장을 이룹니다. 온라인 미사, 주일 미사, 평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교회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를 통해 영적으로 충전됩니다.
5. 본당 설립 50주년 준비 위원회 발족, 2027년은 본당 설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다가오는 50년을 준비할 수 있도록 준비 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이런 사목 지침을 통해 달라스 성 김대건 성당은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나누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교회로 거듭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와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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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25-28.34-36: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대림이란 인류가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평화를 주시는 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준비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요한 1,14) 그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그분이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분은 이제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대림을 살아야 하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서는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다윗의 정통 왕손(싹)”(예레 33,15)으로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희망인 생명의 싹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메시아를 일으켜 주실 수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바로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 정의와 평화를 이룰 사명, 정신적 육체적 모든 악을 치유해야 할 사명은 우리가 느끼듯이 성취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림이란 신앙인의 본질적 차원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도 기다림의 자세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 기다림은 성탄을 넘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담화의 내용이다. 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들어 신앙인들의 준비된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25-26절)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7절) 이때 세상은 새로워져, 낡은 세상은 가고, 악과 죽음의 세력은 더는 그 영광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28절).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지만, 인간의 거룩한 삶과 깨어 기다림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절) 말씀하신다. 세상 걱정에 휩싸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것에 매여 하느님께로 가기보다 죽음의 길로 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날은 어느 때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영광스러운 만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깨어있는 삶을 언제나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36절).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계속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대림의 삶인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계속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분이시며, 이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하여 잘 준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 준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쓸데없는 마지막 날에 관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이 순간을 잃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까지 잃을 수도 있다. 주님께서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사는 현재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노력한다면 우리가 시간 안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이 순간의 삶은 바로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새로운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참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이러한 선물도 인간의 협력이 없으면 주어지지 않는다.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 역시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생활이어야 한다. 현재의 이 삶은 구원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사랑의 삶을 노력해야 한다. 이 사랑의 삶이 곧 깨어있는 삶이며, 깨어있을 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이 사랑의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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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일상에서 기도가 사라져 버린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이 갈수록 버겁게 느껴지고 짐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1테살 3,13)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 삶에서 기도가 사라져 버렸고, 고해성사도 하느님과 함께하는 미사 시간도,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삶을 살았다면,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순간이 어떻게 느껴질까요? 우리 구원을 위한 속량이 이루어지는 희망 속에서 그분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무너졌다면 기도하는 삶을 시작하십시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여전히 나를 떠나시지도 포기하시지도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해 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우리 삶이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시작됩니다. 기도하는 삶과 함께 그분을 우리 구원자로 맞이할 수 있는 영적 힘을 키워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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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대림 시기는 ‘믿음’을 점검하고 바로 세우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25-28.34-36)
1) 여기서 ‘방탕과 만취’ 라는 말은, ‘세속 생활의 즐거움과 재미’ 같은 것에 취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5-9)
무슨 죄를 짓는 것은 아니더라도, 사는 것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고, 생활에 부족하거나 불편한 일도 없고, 하느님께 특별히 뭔가를 청할 일도 없을 때, 그런 때도 ‘취해 있는 때’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는 그런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날마다 생활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할 때에는 그 상황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게 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게 그렇게 안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잊어버리거나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우리는 하는 일마다 잘 될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도 마귀가 파 놓은 함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일상의 근심’은 앞에서 말한 것과는 반대 상황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불안, 근심, 걱정 등이 계속 생길 때, 그런 일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더 간절하게 잘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런 일들만 생각하느라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상의 근심’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4) <‘인생의 걱정’과 ‘일상의 근심’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 근심거리들, 고민거리들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시덤불을 제거하든지, 아니면 그것에서 빠져나가든지 해야 하는데, 첫 번째 해결 방법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ㄱ)
주님 말씀을 믿으려고 노력하면 지금 숨 막힐 정도로 나를 억누르고 있는 가시덤불을 제거할 수 있고,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한 번에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꾸준히,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3) 대림 시기는 각자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더욱더 단단하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방탕과 만취’에 빠지면 ‘믿음’이 희미해집니다. <‘믿음’이 희미해지면 더욱 쉽게 방탕과 만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믿음’을 다시 세우는 것이 곧 방탕과 만취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고, 또 그런 것에 빠졌더라도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일상의 근심’에 억눌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심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기도 하고,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근심에 억눌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믿으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게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믿고, 그 말씀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기도’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도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믿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믿음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이고,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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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손광배 도미니코 신부님]
<싸라기에서 알곡으로!>
누런 황금물결이 바람에 일렁인다. 봄부터 못자리에서 싹이 튼 볍씨들이 누런 껍질 속에 탐스러운 알곡을 키워가고 있다. 풍요롭고, 평화롭고, 자유가 충만하다. 갑자기 황금벌판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란한 엔진소리. 그 기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벼들이 쓰러져간다. 벼를 베는 기계는 누렇게 익은 볍씨들을 사정없이 훑어 버리니 벼들이 맥없이 떨려 나간다.
이렇게 떨려 나간 벼들은 방아 찧는 기계에 빨려 들어가 처참하게 짓이겨진다. 곧이어 껍질이 벗겨지고 흰 살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가는 절망의 자리에서 방아 찧는 기계는 하얀 알곡들을 쏟아 낸다. 여름 내내 햇볕과 바람과 물 … 자연이 빗어낸 작품이다. 기계 뒤쪽에서는 싸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벼가 익다가 만 불량한 알곡들이다. 알곡들은 곡간(穀間)에 들여져 양식이 되고, 싸라기들은 돼지 밥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루카 21,25) 평화롭던 세상에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께서는 추수를 시작하시기 위해 낫을 휘두르신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떨려 나갈 것이다.
알곡이 짓이겨져 껍질을 벗듯, 모든 사람이 철저하게 하느님 앞에서 살아온 삶이 발가벗겨질 것이다. 이때 의인은 곳간(庫間)에 들어가게 되고, 악인은 사탄의 밥이 될 것이다.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누가 알곡이고 누가 싸라기인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 사람”(루카 21,34)은 싸라기이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 사람”(루카 21,37)은 알곡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그날’은 알곡에게는 축복의 날이고 싸라기에게는 저주의 날이다.
그날이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싸라기입니다. 그날이 기다려집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알곡입니다.
며칠 전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깨어 준비한 알곡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날입니
다. 그들은 시험을 치르고 평화와 기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 방탕한 생활을 하다 준비 없이 시험을 치른 학생들에게는 혹독한 심판의 날입니다.
그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능시험에 실패했더라도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 년간 깨어 준비하면 내년에는 알곡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내내 방탕하게 생활하다
싸라기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선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불타는 지옥에는 재시험이 없으니까요.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 깨어 기도하며 그날을 준비합시다. 그러면 알곡이 되어 주님의 환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 희년이 시작되는 이 대림절에
저희들이 싸라기에서 알곡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을 수 있는
복된 자녀가 되 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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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서시몬 시몬 신부님]서시몬 시몬 신부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을 준비하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고하며, 그분의 탄생과 재림을 신비롭게 겹쳐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탄생과 재림을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곧 재림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탄생과 재림 사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이 올 때까지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2독서에서 언급하듯,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하느님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오실지 모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기도하고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세속의 욕망에 정신이 팔려 하느님을 놓치거나, 세상일에 매달리다 마음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물러지는 일이 생길 수 있 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시며,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의탁하며 그분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탄과 재림의 때에만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매일 우리 곁에 오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 속에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매번 미사에서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의 오심을 체험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함께하심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분주하고 약해져 피상적인 삶을 살고 있어도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그분은 늘 우리 곁에 오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는 그분 덕분에 우리는 깨어 기도하며 준비할 수 있고, 이를 위해 그분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를 걱정하기보다 지금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그분을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준비입니다. 일상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소박한 삶과 흔한 일상, 만나는 모든 사람이 소중하고 경이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마련해주신 삶 속의 작고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고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현존 속에서 그분의 재림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받으며 희망으로 깨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다시 오심을 평화롭고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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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21,28)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다림으로 깨어 준비해야 하는 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 시기의 핵심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을 마침 하는 순간까지 기다림의 나날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세상의 어둠 가운데서도 희망으로 기다리는 존재들입니다. 희망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그 기다림의 목적이 분명하고 명확하기에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기다림이고, 사랑으로 기다리는 존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기다림도 있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역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이 돌아서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고 또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간절히 기다리는 법입니다. 제 어머니 살아 계실 때 그분은 제가 사랑하는 것보다 저를 더 사랑했기에 늘 저를 기다렸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기다리십니다.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서의 주제와 예언자들이 외쳤던 외침은 한결같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18,2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곧 세상의 심판관이신 당신이 다시 오실 날을 예고하시면서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21,28)하고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에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설렘과 기쁨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속량이란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나 포로에게 자유를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누군가 신분상 구속받는 경우가 생길 때 가족 또는 친척 가운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를 속박에서 해방시킬 의무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에 있을 때 하느님께 그 의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관점에서 속량은 온갖 형태로 당신 백성을 구속하거나 억압하는 모든 상황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속량이라는 말은 구원 또는 해방이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바로 그러한 속량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십니다. 당신이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하고 최종적인 속량이 실현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약속된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와 힘을 줍니다. 구원에 대한 말씀보다 더 반갑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복음이란 바로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인간을 사랑하시어 구원해 주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현세적인 행복과 물질적인 재화에 몰두하고 만족하려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고리타분하고 비생산적인 소리로만 들릴 것입니다. 때로는 신앙인들도 영원한 생명이나 천상 복락 등에 대한 말씀보다는 세속적인 관심사를 충족시켜 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구원 불감증’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당신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속량의 날인 동시에 준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냉혹함에 대하여 오늘 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21,26) 하지만 구원을 희망하며 충실하게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은 그날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21,28) 될 겁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늘 깨어 기도하여라.”(21,36)라고 가르치십니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깨닫는 점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남이 해주어야만 하는 일도 있습니다. 신앙의 측면에서 후자를 구원이라고 한다면, 전자는 구원을 위한 우리의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라는 표현이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선택 결정권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나아가지 않을 건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할 것인지 준비하지 않을 건지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세상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갈팡질팡 혹은 우왕좌왕하면서 살아가기에 오늘 제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4,1)라고 당부하고 권고합니다. 물론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은 늘 자기 나름대로 핑계나 논리로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여하튼 이러한 사고방식의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이들을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종교인이 아닌 참 신앙인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시되는 참 신앙인의 첫 번째 생활방식은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는 것”(21,34참조)입니다. 일상의 근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늘 해야 하는 일과 크고 작은 근심과 걱정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근심과 걱정이 깊어지면 때로는 체념으로, 때로는 자포자기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의 걱정이 내세 영원의 행복을 위협해서는 아니 될 겁니다. 두 번째 생활방식은 “늘 깨어 기도하는 것”(21,36참조)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기도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 없이 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일이 아니라 종교인의 일일 뿐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한 기도,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한 기도가 삶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상의 근심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아빠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의 아들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참 신앙인의 생활방식을 삶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25,8-9)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다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왕좌왕할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이제는 한눈팔 것이 아니라, 정해주고 알려준 그 길을 따라 충실히 걸으면 됩니다. 또다시 감금 상태에 놓인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의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욕망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둘째, 사람들은 싫어함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셋째, 사람들은 망상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넷째,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대림 시기는 주님께서 오실 때,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방탕이 오신 주님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만취가 주님이 오신 것조차 모르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근심 걱정이 오신 주님께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눈길을 주님 오시는 쪽으로 돌리고, 깨어 기도하면서 올바른 길을 걷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며 대림 시기를 시작합시다. 우리의 속량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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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86년 데이비드 스노든은 75세 이상의 가톨릭 수녀 678명을 대상으로 ‘노화와 알츠하이머에 관한 수녀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를 했습니다. 사후 수녀들의 뇌를 검사한 결과, 살아 있을 때 치매를 유발할 수 있었을 정도의 뇌 손상이 심한 수녀들이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이 수녀들이 삶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에 따라 치매에 걸리는지 안 걸리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무엇보다 영적으로 삶의 더 많은 면에서 활동적으로 참여했고, 노년기까지 그런 삶의 방식을 유지했던 수녀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 생성과 신경 가소성을 자극했습니다. 이런 수녀들의 뇌는 일부 손상이 되었어도 건강한 삶의 발판이 되어 줄 수 있었습니다.
치매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열정을 가지고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연구였습니다. 그만큼 열정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열정을 멈추고 시들시들한 삶을 사는 사람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나름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과연 자기를 망가트릴 정도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활기차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이 자기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충실한 삶을 당신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모범을 따라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망가트리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기를 완성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날이 갑자기 들이닥치고, 죽음이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닥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심판관이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산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을 산 사람이 과연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오늘부터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대림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회개와 속죄로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이 시기를 잘 보낸 사람만이 당당하게 기쁜 성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활기차게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쁜 성탄이 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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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다림>
루카 21,25-28.34-36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기다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오시는 분을
맞이하는
설레는 기다림
오시는 분을
믿는
오롯한 기다림
오시는 분을
바라는
애틋한 기다림
오시는 분을
사랑하는
따뜻한 기다림
오시는 분을
닮아가는
살가운 기다림
오시는 분께
나아가는
벅찬 기다림
오시는 분께서
기다리시는
우리의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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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 어디 있느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혼자 두지 않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임금이십니다.”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이며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대림(Avvento)이라는 말은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했으며 ‘현존’, ‘도착’, ‘오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오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마음의 힘을 북돋아 주시어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테살3,13) 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히브 12,14-15) 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하느님의 숨을 받은 사람이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해서 거룩한 사람으로 축성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거룩함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우리는 깨어 기도 함으로써 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의 현존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보라, 그날이 온다…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예레33,14)고 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잊어버리거나 저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시고 꼭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1테살4,1)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일상 안에서 철저히 준비하면 종말이 오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종말이 영원한 상급이 주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이 나타나고…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고 …사람들은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루카 21,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루카 21,27)라고 했듯이 두려움과 공포 중에도 준비된 사람은 영광의 모습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기도하면, 불필요한 많은 일들로 산만해 지거나 불평 불만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맞이하는 마음, 주님의 사랑과 용서, 그분의 말씀, 그분의 식탁에 다가가고 기도할 공간을 찾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의 요청에 앞서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림시기 동안 우리의 나태함을 떨쳐버리고 잠에서 깨어나도록 합시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가? 나는 깨어 있는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가? 나는 일상적인 상황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사에 정신이 팔려있는가? 오늘 그분의 오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마지막 때에 그분께서 다시 오시더라도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깨어 있으십시오! 주님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길 기다리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도록 합시다. 대림은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 곁을 지나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여정입니다”(2022,11)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왜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마음에 쏙 들도록 노력하는 대림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마음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아름답고, 모든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내가 바뀌지 않은 채 남이 바뀌기를 바라면 설사 남이 바뀌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변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가 바뀌기를 바란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음의 문은 꼭꼭 닫아 둔 채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내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사연을 안고 있으며 어렵고 힘든 일이 많지만, 내색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고달프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기도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힘든 게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일반 사람들과 다른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숨었을 때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찾아 나서시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신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시며 자신의 마음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고자 모세를 선택하시고(탈출3장)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비추어 주셨습니다 (탈출13,22). 그분은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8,10) 물으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와 여건 안에서도 주님은 함께 하시면서 물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지금은 실망과 좌절에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에 앞서 우리보다 먼저 애타게 기다리며 “너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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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대림절의 마음 관리>
오늘 첫째 독서 예레미야서는 “보라, 그날이 온다.”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날이고, 오늘은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첫날입니다.
그리고 이 첫날에 복음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우리가 해야 할 것 두 가지를 얘기해줍니다.
하나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것인데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겠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마음 관리입니다. 한자어로는 조심(操心)입니다.
그런데 조심이란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조(操) 자가 ‘잡다, 쥐다, 조종하다’라는 뜻이니 마음을 잡는다는 뜻이고, 내 마음을 내가 조종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꽉 잡는 것이요, 핸들을 꽉 잡듯이 내 마음을 꽉 잡고 내가 조종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는데 우리는 자주 조심하지 않고 방심합니다. 방심(放心)은 조심의 반대말인데 잡았던 마음을 다시 놓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은 마음을 놓게 하고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 세 가지를 꼭 짚어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방탕인데 방심하면 방탕하게 되고, 방탕하게 되면 마음이 물러지게 되겠지요. 마음을 꽉 잡지 않고 놓으면 마음이 제멋대로 날뛰어 방탕하게 되고, 이 방탕이 뭘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취인데 이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사실 술처럼 마음을 무장해제 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술 먹을 때 더 조심해야 하는데 우리는 역으로 마음의 긴장을 풀기 위해 술을 먹기도 하지요.
셋째는 근심 걱정입니다. 방탕과 만취가 마음을 물러지게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데 근심과 걱정이 마음을 물러지게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어지는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과 연결해 이해해야 합니다. 일상의 근심과 걱정이 많을수록 그 근심과 걱정에 매몰되지 않고, 다시 말해서 근심과 걱정에서 빠져나와 주님 앞에 서고, 주님께 기도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근심 걱정이나 하곤 합니다.
근심 걱정은 마음이 세상에 있는 것이요, 그러므로 주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기라는 노래가 있듯이 그러므로 우리는 근심 걱정거리가 있을 때 롯의 아내처럼 뒤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근심 걱정에서 빨리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빠져나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올해는 조심하여
방탕하지 않고,
만취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깨어
기도하며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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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믿음의 힘!>
오늘 복음(루카21,25-28.34-36)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말씀과 '깨어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달력인 전례력으로 새해인 '다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인사드립니다.
"새해에는 믿음의 힘으로 은총과 평화가 충만하고, 영과 육이 더 건강한 은혜로운 한 해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새해의 첫 주일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대림(待臨)'은 '도착'을 뜻하는 라틴말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온 말입니다.
'대림시기'는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재림)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대림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례'는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12월17일부터 12월24일 성탄 전야까지의 전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대림시기는 '회개와 속죄의 시기'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대림시기 동안 회개와 속죄의 의미를 담고 있는 '자색(보라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집전합니다.
대림시기는 '용서와 화해의 시기'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회개와 속죄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용서와 화해가 없으면 영원한 생명도 없고, 내 안에 주님께서 탄생하실 수 없습니다.
대림시기는 '깨어 기도하는 시기'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다시오심과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좀 더 커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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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예수님 성탄을
기다리는 새해
첫날,
새아침이다.
어제가 흘러
새로운 속량의
오늘이 되었다.
우리의 속량은
다름아닌
주님의 탄생을
만나는 행복이다.
주님의 탄생은
행복해야 할
우리를 회개와
변화의 삶으로
이끈다.
우리의
신앙또한
새로운 탄생이
필요한 새로움의
간절한 여정이다.
새로 태어나는
마음들이 모여
우리신앙을
자라게한다.
묵은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워지는
사랑이다.
새로움이란
좀더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만나는 행복이다.
좀더 낮은 곳에
좀더 좋은
행복이 있다.
내려오시는
주님의 행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사람이 행복이고
사람이 말씀이다.
이 새로운 한 해가
서로가 서로에게
참된 기쁨이 되는
한 해이길
기도드린다.
주님께서는
아낌없는 사랑을
새로이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사랑을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
자신이 바로
우리가 맞이하는
새 해
새아침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희망과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대림(待臨)의
존재이다.
기다림이
사랑이고
기다림이
설레는 행복이다.
하느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 삶의
자리에
하느님께서
탄생하실 것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라는
새 해
새 아침의
맑은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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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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