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사와 불상, 법당의 형식에는 왜 저마다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첫 설법 장면을 떠올리면 대개 비슷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부처님께서 가사를 입고 앉아 계시고, 그 앞에는 머리를 말끔히 깎은 다섯 비구가 가지런히 앉아 법문을 듣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번 법문에서 큰스님께서는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 장면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하셨습니다.
그때 그 다섯 사람은 정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스님’의 모습이었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된 법문은 가사와 불상, 색깔과 전각, 가람배치까지 이어졌습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큰스님의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형식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
첫 설법을 들을 때부터 ‘비구’였을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뒤 처음 찾아간 사람들은 예전에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였습니다.
그들은 싯다르타가 극단적인 고행을 그만두자 수행에서 물러났다고 생각하고 그를 떠났습니다.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 사르나트의 녹야원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셨습니다.
중도와 사성제를 설한 이 첫 설법을 우리는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부릅니다.
경전에서는 이들을 흔히 ‘다섯 비구’, 즉 오비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간순서를 생각하면 첫 설법을 듣기 전의 그들은 아직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출가 제자라기보다 함께 고행하던 수행자들이었습니다.
법을 듣고 깨달음이 일어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승가가 형성되는 과정이 뒤따릅니다.
큰스님께서는 그래서 당시 다섯 사람을 오늘날의 스님처럼 삭발하고 정형화된 가사를 입은 모습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의 고행자답게 긴 머리와 수염, 흰옷을 걸친 모습.
오랜 고행으로 몸은 야위고 추레하지만,
구도에 대한 열망만큼은 눈에서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
큰스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떠올려보게 하셨습니다.
물론 당시 다섯 수행자의 머리 길이나 수염, 옷차림이 사진처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를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작은 질문 하나가 우리에게 더 큰 문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보는 불교의 모습들은 처음부터 그대로 있었던 것일까?
⸻
가사는 왜 생겼을까
제자들이 생기고 승가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불교 수행자의 모습도 갖추어져 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가사(袈裟)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이날 초기 가사에 관한 전승과 그 변화 과정을 상당히 길게 설명하셨습니다.
가사는 처음부터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오조·칠조·구조의 완성된 형태였던 것이 아니라, 수행자가 몸에 두르는 비교적 단순한 천에서 출발해 점차 형식이 갖추어졌다는 것입니다.
초기 수행자들에게는 버려진 천이나 얻은 천을 깨끗하게 손질하여 이어 입는 전통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분소의(糞掃衣)도 이런 수행문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사의 색 역시 중요한 이야기였습니다.
가사를 뜻하는 kāṣāya는 오늘날의 한 가지 정확한 색을 가리킨다기보다 세속의 화려한 옷과 구별되는 탁한 염색빛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지역과 전통에 따라 황색, 주황빛, 적갈색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정확히 어떤 색이 정답인가?”
만이 아닙니다.
더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그런 옷을 입었는가.
가사는 수행자를 더 멋있게 보이게 만드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세속의 치장과 소유에서 물러나 수행자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표지였습니다.
⸻
조각난 가사를 입으면 수행자가 되는가
큰스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한 출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아주 좋은 옷감이 들어왔는데,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일부러 가위로 잘라 다시 조각조각 이어 붙여 입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꽤 수행자다운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천을 그대로 쓰지 않고 일부러 잘라 기웠으니 검소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스님은 그 모습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사의 겉모양을 따라 하는 것과 가사의 정신대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을 매우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조각난 가사를 입는다고 마음의 집착까지 조각나는 것은 아닙니다.
낡아 보이는 옷을 입는다고 욕심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만큼 수행자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소박함을 연출한다면 그 소박함조차 또 다른 치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이날 법문의 중요한 기준을 보여줍니다.
화려한 것만 허식이 아닙니다.
화려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허식이 될 수 있고,
소박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역시 허식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모양이 아닙니다.
그 형식 안에 본래의 뜻이 살아 있느냐입니다.
⸻
그렇다면 불상의 가사는 왜 그렇게 화려할까
큰스님께서는 이어 불상의 가사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의 옷에서 시작한 가사가 불상에서는 때때로 몸보다 더 화려하게 표현되고, 비단옷과 같은 모습으로 장엄되는 것을 보면서
“가사가 본래 무엇이었는가?”
를 다시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화려한 불상이나 금빛 불상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상은 역사 속 석가모니 부처님의 실제 모습을 사진처럼 재현하는 데서만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후대 불교미술은 금빛과 광배, 장엄을 통해 부처님의 광명과 존귀함,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금색 자체가 아닙니다.
왜 금색인가를 알고 있는가.
왜 그 옷을 입혔고,
왜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왜 그 모습으로 부처님을 표현했는가.
본래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장엄과
남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하게 보이기 위한 장식은
겉으로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
불상의 손 모양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불상의 손 모양을 수인(手印)이라고 합니다.
수인은 단순한 포즈가 아닙니다.
설법, 선정, 보시, 두려움 없음 등 부처님의 가르침과 상태를 몸짓으로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초전법륜을 표현하는 불상에서는 법을 설하고 법륜을 굴리기 시작하는 의미를 담은 수인이 중요한 상징이 됩니다.
불상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앉아 있는지,
어떤 손 모양을 하고 있는지,
어떤 지물을 들고 있는지에는 저마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보면 불상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닙니다.
형식 그 자체가 법을 설명하는 언어가 됩니다.
반대로 그 뜻을 잊고 모양만 반복하면 불상은 어느 순간 하나의 장식품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이날 계속 경계하신 것이 바로 이런 지점이었습니다.
⸻
법당 이름도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법문은 불상에서 가람배치(伽藍配置)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사찰에 가면 여러 전각이 있습니다.
대웅전,
극락전,
무량수전,
관음전,
원통전,
지장전,
명부전….
왜 굳이 이름이 다를까요.
그저 건물을 구별하기 위해 붙여놓은 간판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하고,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 신앙,
관음전과 원통전은 관세음보살,
지장전이나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명부 신앙에 연결됩니다.
물론 우리나라 사찰의 가람배치에 하나의 절대적인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와 종파,
지형,
사찰의 역사에 따라 다양한 배치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놓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각 하나에도 그 공간이 맡은 역할과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을 배우고,
어떤 부처님과 보살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어떤 수행과 발원을 이어가는 공간인가.
큰스님께서 가람배치 이야기를 길게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
불교적인 것을 많이 가져다 놓으면 더 불교적인 절이 될까
큰스님께서는 사찰 안에 불상과 전각, 조형물과 상징물이 계속 늘어나는 모습에 대해서도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특정 사찰이나 특정 스님의 이야기를 굳이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큰스님께서 왜 그런 사례를 말씀하셨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불상이 하나 더 있다고,
전각이 하나 더 있다고,
조형물이 하나 더 있다고
그만큼 불법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왜 그것이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면서
“불교적인 것이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볼거리가 되니까”
계속 더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사찰은 수행의 공간이라기보다 불교적인 물건을 모아놓은 공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큰스님의 말씀은 꽤 날카로웠습니다.
특히 선찰이라면,
그곳에 들어간 사람의 마음이 더 복잡해지는 공간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하나씩 내려놓고 싶어지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건축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찰이라는 형식이 실제로 수행을 돕고 있는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
포대화상의 배를 만지면 복이 오는가
큰스님께서는 포대화상에 관한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큰 자루를 메고 다니며 어려운 사람과 아이들에게 물건을 나누어주던 포대화상의 모습을 설명하시면서,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비슷하다고 풀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포대화상의 커다란 배를 만지면 복을 받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식의 신앙으로 변해간 모습을 지적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방향이 묘하게 뒤집힙니다.
본래 이야기는
“나는 남에게 무엇을 나누어줄 것인가.”
였는데,
어느 순간
“저것으로부터 내가 무엇을 받을 것인가.”
가 되어버립니다.
상징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포대화상의 모습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그 상징이 가리키던 방향은 정반대로 바뀔 수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이날 여러 사례를 통해 반복해서 경계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형식이 본질을 잃으면
가사도 필요합니다.
불상도 필요합니다.
수인도,
법당도,
가람배치도,
단청과 장엄도 필요합니다.
큰스님께서 이런 형식을 모두 없애자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왜 그런 형식이 만들어졌는지 알고 제대로 지키자는 말씀입니다.
본래 뜻이 살아 있으면 형식은 불법을 전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본래 뜻이 빠져버리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장엄은 허식이 되고,
상징은 주술이 되고,
수행자의 옷은 과시가 되고,
소박함조차 연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날 법문을
“화려한 것은 나쁘고 소박한 것은 좋다.”
라고 받아들이면 큰스님의 말씀을 너무 단순하게 만드는 셈입니다.
더 날카로운 기준이 있습니다.
화려하냐 소박하냐가 아니라, 그 안에 불교의 본래 뜻이 살아 있는가.
⸻
처음 법이 전해지던 자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부처님이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 법을 설하시던 때를 떠올려봅니다.
지금과 같은 거대한 법당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불상도 없었습니다.
화려한 단청과 전각도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과
진리를 찾아 헤매던 다섯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법(法)이 전해졌습니다.
그 법을 듣고 사람이 변했습니다.
수행자가 제자가 되었고,
승가가 생겼고,
그 법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뒤 오랜 세월 동안 가사가 생기고,
불상이 만들어지고,
사찰이 세워지고,
수많은 의식과 상징이 발전했습니다.
그 모든 형식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형식들 덕분에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딱 하나입니다.
형식은 남았는데 그 형식을 만든 이유를 잊는 것.
⸻
형식은 본질을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이날 법문을 들으며 제가 생각해 본 부분입니다.
형식을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알고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가사는 수행자의 삶을 기억하게 해야 하고,
불상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드러내야 하며,
법당은 법을 배우게 해야 하고,
가람은 사람의 마음을 수행으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날 법문을 들으며 이런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형식은 본질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형식은 본질을 잊지 않도록 지켜주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큰스님의 강한 말씀을 듣고 나면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시대에도 법을 배우고,
수행의 뜻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
꾸준히 절에 나와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욕심 하나를 줄이고,
집착 하나를 알아차리고,
잘못된 습관 하나를 바꾸려고 다시 수행하는 것.
그것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질을 잊은 형식을 경계하는 것과 함께,
불법의 본래 뜻을 놓치지 않으려고 지금도 수행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법을 듣고,
서로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주며,
수행을 이어가는 도반들에게도 감사할 일입니다.
부처님의 첫 설법을 들었던 다섯 수행자와 지금 우리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중요한 것은 같을 것입니다.
불교의 모습을 갖추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모습이 가리키는 법의 본뜻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형식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