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 두향(杜香)이냐, 매화(梅花)더냐
류 근 홍
‘저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1570년 음력 12월 눈 내리는 추운 겨울임에도 퇴계 이황이 향년 70세로 세상을 뜨면서 한 마지막 말이다.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長淮里)는 제비봉 아래 단양팔경인 구담봉과 옥순봉을 품고, 남한강이 휘감아 돌아 청풍호와 어우러지는 수려한 경관(景觀)을 자랑한다.
볼수록 신비한 기암괴석과 바위 틈새로 뒤틀어 꼬고 앉은 고고한 소나무의 자태와 남한강 푸른 물에 비친 또 다른 절경 역시 모두가 신비경(神秘境)이다.
바위가 소나무를 키운건지, 소나무가 바위를 키운건지, 수백년 세월 서로가 한 몸 되어 기교(技巧)한 자태로 우리를 홀리는구나.
월악산과 금수산도 서로 차지하려한 천혜의 비경(秘境)이며, 천재화가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도 화폭(畵幅)에서 극찬한 산수풍경의 백미(白眉)이다.
이곳 장회나루에는 이 같은 절경(絶景)에 견줄만한 역사속 애닮고도 애절한 사랑이야기 절경 또한 숨은 비경이다.
바로 退溪 李滉과 기생 두향의 짧은 사랑에 긴 이별로 이루지 못한 비운의 사랑터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이며 꼿꼿한 성품의 퇴계 이황의 이미지가 기생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그들의 사랑이 궁금하다.
조선시대에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선비와 기생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많이 전해온다.
특히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선비와 기생과의 사랑 이야기로는 서경덕(화담)과 황진이, 이황(퇴계)과 두향, 그리고 정철(송강)과 진옥, 이이(율곡)와 유지의 사랑이야기라고들 한다.
두향은 단양의 관기로 장회나루 위쪽 제비봉아래 산골마을인 두항리 출생으로 양반출신임에도 16세 초혼을 사별한 후, 양모(養母)에 의해 기적(妓籍)에 올려져 관기(官妓)로 변신한 기구한 비운의 여인이다.
두향과 퇴계 이황의 사랑 인연은 1548년 1월 퇴계 이황이 48세에 단양군수로 부임 30살의 나이 차이에도 18세 두향이 퇴계 이황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연분을 맺는다.
두향은 미모가 뛰어나고 총명하며, 시문(詩文)과 가야금에도 능하여 조선 최고의 선비 퇴계 이황과의 교분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 후 두 사람은 구담봉과 옥순봉의 절경에 취하고, 사랑에 빠져 남한강이 어디로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10개월의 짧은 만남에 영원한 이별을 맞는다. 아마도 두향은 영영 다시는 못 만날 이별임을 예감 했는지, 수석 2개와 어머니가 물려 준 매화 화분1개를 퇴계 이황에게 전한다. 이후 두 사람은 21년 동안을 서로가 그리워만 하는 이별사랑에 갇혀 죽을 때까지 한번도 만나질 못한다.
두향은 퇴계 이황과의 갑작스런 이별에 구담봉과 옥순봉을 바라보며 소식만을 기다린다. 안동에서의 퇴계 이황은 매화를 두향 보듯, 매화 사랑에 빠져 107수의 매화시(梅花詩)로 매화시첩(梅花詩帖)을 남길 만큼 서로가 그리움의 가슴앓이를 한다.
두향은 단양에서 함께한 10달의 사랑 댓가로는 가혹한, 21년의 기다림 끝에 퇴계 이황의 죽음 소식을 접한다.
나흘을 걸어 200여리 안동으로 달려갔으나, 조문도 하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이승을 떠나는 퇴계 이황과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이별을 한다.
그 후 두향은 단양에서 퇴계 이황과 함께 노닐던 말목산 아래 강선대에서 홀로 지내다.‘나 죽거든 님과 노닐던 강선대 아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남한강으로 몸을 날려 매화꽃으로 님을 따른다.
강 건너 제비봉 정상(721m)에서 두향의 묘를 내려다보니, 두 사람의 사랑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기생의 길과 죽음으로 다시 만나는 사랑의 길 모두가 기구했고 안타깝다.
누군가‘선비는 기생이 삶의 일부였지만, 기생은 선비가 生의 전부였다’고 했는데, 퇴계 이황과 두향은 분명 서로가 자기의 삶에 전부였을 듯싶다.
그래선지 지금까지도 두향의 순정을 기려 퇴계 이황의 후손들이 청풍호 수몰로 두향의 묘를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여, 산소를 잘 관리해 오고 있단다. 또한 단양문화보존회에서는 두향의 넋을 기려 매년 두향제를 지낸다니, 두 사람의 사랑이 후손들에 의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람선상에서는 두향의 묘가 잘 보이질 않는다.
심산유곡 기암계곡임에도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안동을 바라보는 두향 묘는 물길(뱃길)외에는 닿을 길이 없다.
두향은 기생임에도 오직 한사람 퇴계 이황만을 향한 설중매(雪中梅) 절개로 죽어서도 혼자 외롭다.
퇴계 이황에 대한 기생 두향의 애절한 역사속 사랑이 청풍호 전체를 물들였건만, 유람선 관광객들은 두향은 못보고, 옥순봉과 구담봉의 기묘한 층암절벽 절경에만 취해 환호성이다.
오늘도 남한강 강물은 450년 세월속에 퇴계 이황과 두향이 함께 노닐던 강선대 바위터를 덮고, 안동과는 점점 더 멀어지며 흘러간다.
두향의 이별 선물인 안동 도산서원 앞 매화도 두향을 기다리다 1986년에 가뭄으로 고사했다니, 너마저 슬픔을 더 하는구나.
두향 묘로부터 10여리 떨어진 두향의 출생지인 두항리를 둘러보니, 10여호 산골마을은 가을인지라 매화향은 찾을 길 없고, 가을걷이로 산도 들도 모두가 분주하다. 마을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두향의 모습을 그려보려니 세월이 너무도 멀리 왔다.
두향은 분명 그 시대에 진정 자기 자신을 사랑한 여인이다.
나이와 신분과 체면을 초월한 퇴계 이황과 두향의 숭고하고 고결한 사랑은 오랜 세월속에 숙성되어, 전설적 사랑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서 진행 중이다.
장회나루 선착장에서 두향의 묘와 마주하니, 나는 여전히 애절한 의문이 남는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발령이 났을 때 두 사람 모두가 혼자의 몸이었는데, 퇴계 이황은 왜 두향을 데려가지 않고 이별을 택했을까? 그리고 두향은 왜 같이 따라간다고 하질 않았을까?
기구한 관기의 운명이라서 일까? 아니면 다음의 굳은 약속을 너무 믿어서일까? 세월을 넘어 이황과 두향의 그 시절 사랑이 요즈음의 젊은 사랑을 만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무어라고 할지도 궁금하구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