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夕 / 장철문
저 둥글고 빛나는 것이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떠 있다 그날 저녁 내가 할머니의 수제비 반죽을 집어던진 것이 그만 저 먼 곳에 가서 빛을 얻은 것이다 저 크고 희게 빛나는 것이 딸아이를 향해 자꾸 수제비를 빛어 던진다
호두나무 잎사귀가 있는 저녁 / 장철문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 하늘에 막 생겨나는 달이 있었다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 마음에 막 생겨나는 사람이 있었다 어스름 속에서 막 돋아난 달처럼 막 피어난 호두나무 푸른 잎사귀 사이로, 돋아나는 사람이 있다는 데 놀라고, 그 사람이 지금 곁에 없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데 또 놀랐다 어스름 바람에 팔랑이는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로, 그 사람도 달을 보고 내가, 그 사람에게 생겨나는 달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사람의 씽긋 웃는 얼굴이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 하늘에 떠 있었다 어두워지는 호두나무 잎사귀 아래서 그 사람을 보고, 다시 보고 호두나무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이 살을 감고, 달이 싱거워지고 검은등뻐꾸기 소리와 호랑지빠귀 소리에 귀가 기울고, 하늘에 떠 있는 그 사람이 싱거워지고 검은등뻐꾸기 소리와 호랑지빠귀 소리와 놀다가 그 사람이 저문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에 달을 두고 들어왔다 사람의 체취를 가진 호두나무와 안는 꿈을 꾸었다
창을 함께 닫다 / 장철문
달이 참 좋다,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창을 닫다가 엉거주춤 딸아이를 불렀다
이런 건 왜 꼭 누구한테 말하고 싶어지는 걸까?
아이가 알아차렸는지 엉거주춤 허리를 늘여 고개를 내밀었다
무릎 위의 자작나무 / 장철문
자작나무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다
돋아나고 있다, 가슴에서도 피어나고 있다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한번도 채우지 못한 목마름의 샘을 자작나무가 틔우고 있다
자작나무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자작나무를 보고 있다
자작나무가 자작나무를 낳고 있다
구겨져서 납작하게 눌린 나무가 잎사귀에 피어서 주름들이 지워지고 있다
내가 자작나무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늦단풍 / 장철문
서른두 가마니의 참숯을 들이부었다
뻥 뚫린 풍구다
대장장이의 얼굴이 서쪽으로부터 발그레하다 늦단풍
길갓집 / 장철문
처마 밑에 빗방울이 물잠자리 눈알처럼 오종종하다
들녘 한쪽이 노랗다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세 그루
빗방울 몇이 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내린다 남은 물방울들이 파르르 떤다
은행잎이 젖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툭툭 떨어져 내린다 반나마 깔려서 노을이 이미 들녘 한쪽을 덮었다
빗방울 한쪽이 노랗다
------------------ 장철문 / 1966년 전북 장수 출생. 1994년 《창작과비평》 겨울호로 등단. 시집 『바람의 서쪽』 『산벚나무의 저녁』 『무릎 위의 자작나무』 『비유의 바깥』, 동시집 『자꾸 건드리니까』 등.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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