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정유정 장편소설... 2007...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읽은날 : 2011. 2. 18
세계청소년문학상 심사위원 : 김주연(문학평론가), 서영은(소설가), 김경연(문학평론가), 이순원(소설가), 원종찬(문학평론가), 은희경
(소설가), 안도현(시인)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소리 지르지 않고 버티기엔 너무나 많은 적과 홀로 싸우고 있었다. 루스벨트에 대한 공포, 노소의 지치지 않는 실랑이, 정아의 무관심, 기사에게 들킬 거라는 불안감,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이 부당한 상황에 대한 격분.
"그만들 해. 우리 이제 개밥이 될 거야. 그물이 찢어졌단 말이야."
뭘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비명 대신 내보낸 음성에 불과 했다. 그것이 거짓말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두 인간이 몸싸움을 멈췄고 애타게 기다리던 정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 귀를 물어 버려."
그 말에 실망한 나머지 욕을 퍼부어 줄 뻔했다. 내가 원한건 개장수의 딸다운 전문적인 처방이었다. 온몸이 오줌 범벅인 개를 물어뜯으라는 더러운 처방이 아니라..
....피곤이 독처럼 온몸에 퍼져 갔다. 자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몽롱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꾸벅꾸벅 졸며 생각했다. 아이젠 하워, 아니 아인슈타인이었나. 아무튼 나보다는 더 똑똑한 사람이 말했어. '문제의 해법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와 동일한 수준의 이해력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건 졸릴 땐 자라는 뜻도 돼. 한숨 자고 나면 머리가 맑아져서 상황이 명확히 보일 테고 보이는 만큼 명쾌한 해결책이 떠오를 테니까. 그러니 세상없어도 자야겠어. 딱, 오분만.
...."어떻게 잘 할까?"
정아가 뾰족한 턱을 치켜들었다. 박격포를 메고 적진으로 돌진하려는 포병 같은 표정이었다. 머릿속에서 빨간 불이 깜박였다. 빨리 수습해.
"아니, 난..... 어쨌든 식구들이 아빠 성격 제일 잘 알 거 아냐. 조금 조심하면 덜...."
"너, 어떤 인간을 미친개라고 하는 줄 알아?"
정아가 내 말을 가로챘다. 표정은 밀랍처럼 굳어졌고 날 쏘아보는 눈동자에 파란 불길이 일었다. 비로소 낯선 정아가 사라지고 익히 보아 온 암고양이 정아로 돌아와 있었다.
"조심해서 덜 물면 미친개가 아냐. 그냥 개지. 제정신이 아니라서 얘기가 안 되는 건 미친개가 아니야. 제정신인데 얘기가 안 되는 게 미친개야. 물겠구나, 할 때 물면 미친개가 아냐. 예상도 못할 시점에서 기발한 방식으로 물어뜯는 게 미친개야. 한번 이빨박으면 피 맛을 보기 전엔 빼지 않는 게 미친개야."
정아는 맘먹고 시작한 것 같았다. 따발총을 난사하듯 다다다다 쏘아붙였다.
"너, 그런 미친개를 아빠로 가져 봤어? 이빨 자국, 담뱃불 자국, 허리띠 자국, 목 졸린 자국, 그런 거 때문에 학교 못 가 봤어? 살겠다고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내달리고 남의 집 담장 훌떡훌떡 넘어 본 적 있어? 머리채 잡혀 끌려 다니느라 가르마 옆이 텅 비어 봤어? 맞고 살다 반편이가 된 엄마 붙들고, 나를 낳은 엄마가 증오스럽다고 퍼부어 본 적 있느냔 말이야!"
아무려니, 했다. 정아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다 믿기지도 않았다. 걸핏하면 얻어맞고 도망 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친아버지가 그 정도로 악랄할까 싶었다.
"아니지? 꿈에서도 안 당해 봤지? 내 말 믿기지도 않지? 그럼 그런 충고 하지 마. 그건 귀하게 자란 부잣집 외아들이 날마다 그러고 사는 개장수 딸한테 할 말이 아냐. 세상에는 자기가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 있는 법이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게 혜택 받은 자의 예의야. 알아들어 김준호?"
나는 선생님에게 야단맞는 국민학생처럼 두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한순간에 정아와 짝이었던 이 년 전 봄날로 돌아가 버린 기분이었다.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말해 줄게. 내게 맞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딱 하나뿐이야. 맞장 뜰 힘이 없어 맞아 줄 수밖에 없다는 거. 내가 남자였다면, 아니 덩치가 조금만 더 컸어도, 그 인간은 벌써 내 손에 죽었어."
정아는 몸을 돌리고 앞서 가 버렸다. 열 발짝쯤 앞에서 놀란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승주와 할아버지도 허둥 지둥 등을 돌렸다. 나는 뒤로 처졌다. 혼자 걸으며 내 실수가 뭔지 깨달았다. 해서는 안 될 말, 공격으로까지 간주될 수 있는 최악의 참견, 맞을 짓을 하니까 맞는다는 말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 버린 것이다.
미안하다고 할까, 하다 그만뒀다. 농담이라도 건네 볼까, 하다 그만뒸다. 그런다고 해서 한번 깨져 버린 우호적인 분위기가 회복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럴 만한 숫기도 없었다.
다시 등 뒤에서 루스벨트가 짖었다. 맨 먼저 돌아봤던 정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루스벨트!
비명을 듣고 돌아본 나는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푸른 포장 트럭이 상향등을 번쩍이고, 웽 하는 굉음을 내며 무시무시한 순간가속으로 루스벨트를 덮쳐 가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습격하는 푸른 뱀처럼 보였다...
....승주는 구 여사 나이 마흔을 넘기고 얻은 늦둥이였다. 그것도 오 대 독자.. ..그러니 또래 아이들처럼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일, 한데 몰려 동네를 돌아다니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공중목욕탕은 물에 빠질까 봐, 놀이터는 놀이기구에서 떨어질까 봐, 바깥 음식을 먹는 건 세균에 감염될까 봐, 운동을 하는 건 심장이 멎을까 봐, 여행을 가는 건 교통사고가 날까 봐, 승주의 부모는 승주를 대저택에 가둬 놓고 고이고이 키웠다. 엎어지면 이마가 닿는 학교까지도 까만 승용차에 태워서 구 여사가 직접 데려오고 데려갔다.
소문에 의하면 승주는 항상 '곧 죽을 몸' 이었다. 책가방 속엔 책보다 약이 더 많았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그 가짓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죽을지 모른다는 구 여사의 강박관념도 점점 병적으로 변해 갔다..
....목소리는 잠잠해졌다. 그러나 다그치는 존재가 없다고 해서 홀가분해지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떨쳐 버리려 할수록 더운 쫓기는 심정이 되어 갔다.. ..환영은 잘라내면 돋아나고 잘라내도 돋아나는 도마뱀의 꼬리 같았다. 꼬리는 자를 때마다 비약적으로 커지고 튼튼해지다가 결국엔 공룡 꼬리가 되어 앞을 가로막았다..
....승주는 다리가 아니라 입으로 걸었다. 발 아프고, 숨 차고, 배 고프고, 덥고 쓰러질 것 같다..
....누군가 지켜보는 가운데 태연하게 걷는다는 게 너무도 어려웠다. 돌아보고 싶은 걸 참기도 어려웠다. 뛰고 싶은 걸 참기는 더 어려웠다.
....승주의 턱에 어퍼컷을 먹였다, 라고 생각했는데 숨이 턱 막히고 내 머리가 뒤로 꺽였다. 권투글러브만 한 주먹이 내 턱을 강타한 것이었다.
....성질대로 하면 확, 들이받아 버리고도 남았지만 손익계산서를 뽑아 보고 흥분을 가라 앉혔다. 놈에게 성질대로 했다가 얻은 거라곤 혹 몇개와 멍 자국 뿐이었다.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발전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법이다.
....몸 속에 든 206개의 뼈들이 206개의 방향으로 일어나 살을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미움과 증오, 왜 이 길을 가는가에 대한 의문도 사라졌다. 생각 자체가 사라졌다. 몸은 이제 관성으로 움직였다. 머리와 몸의 교신이 끊긴 것이었다.
....우리의 황톳길 여행은 더 이상 침울하지 않았다.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수레는 절도 차량의 속도를 되찾았다. 절반은 아드레날린의 힘이었고 절반은 희망의 힘이었다.
....하나님은 참 괴상한 방식으로 공평해. 사랑이 있는 쪽에선 사람을 빼앗아가고 사람이 있는 쪽에선 사랑을 빼앗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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