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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산이씨종친회(光山李氏宗親會) 원문보기 글쓴이: 현덕 이병완
한국의 성씨(姓氏) 뿌리와 역사
성씨(姓氏) 시조(始祖)는 전설의 시작
경주 박씨·김해 김씨 알에서 태어나
한국인에게 성씨와 족보는 자긍심의 표상이자 왜곡된 양반 의식의 산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전 인구의 10% 정도인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족보는 현대에 들어와 각 가정의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문화일보는 한가위를 맞아 뿌리찾기와 조상숭배라는 미풍양속적인 측면과 신분제 의식의 소산으로 민주사회의 걸림돌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우리의 성씨와 족보를 조명하는 특집을 2개 면에 걸쳐 마련했다.
우리의 성씨는 누구로부터 비롯됐을까? 천제(天帝·하느님)와 중국 고대 전설 속 제왕(帝王), 서해 용왕(龍王), 베트남 왕족, 일본 장수, 현대에 들어와서는 다양한 국적의 귀화인까지…. 각종 사서와 족보에 나타나는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가면 유서 깊은 역사만큼이나 다채로운 얘기를 만날 수 있다.
13만여 개의 성씨를 가진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 성씨의 개수는 몇 백 개 안 되지만 성씨의 조상에 관한 한 풍부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신라의 시조이자 박(朴)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금관가야와 김해 김(金)씨의 시조인 김수로는 믿기 어렵지만 알에서 태어났다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은 천제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그런데 경주 김씨의 출자(出自)와 관련해서 최근 12세기 편찬된 '삼국사기'보다 무려 5세기나 앞선 7세기에 조성된 '문무왕릉비'를 비롯, 신라 김씨 관련 각종 비문(묘지명)들에서 이와 다른 내용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시조가 중국 고대 전설 속 제왕인 소호김천씨(少昊金天氏)이며 먼 조상이 김일제(기원전 134∼86)라는 것. 그는 흉노(훈족, 민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 헝거리 건국)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해 무제(武帝·재위 기원전 141∼87) 때 시중(侍中)에 임명되고 투정후(투후)에 책봉됐다. 사실 여부를 떠나 김씨의 조상을 중국 전설 속 인물과 흉노와 연결시키고 있어 흥미롭다.
한편,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신라 김씨 왕족들 사이에서 내물왕 4세손(이사부) 또는 5세손(거칠부), 7세손(사다함)이란 식으로 씨족(氏族·clan)의 조상인 김알지보다 씨족에서 분화한 가계(家系·lineage)인 내물왕계에 속한 혈족 집단임을 강조하는 의식도 나타난다.
본관은 많아도 김씨와 박씨의 계통이 비교적 단순한 반면, 우리나라 3대 성씨 중 규모 면에서 두 번째를 차지하는 이(李)씨의 유래는 다소 복잡하다. '사로6촌' 중 하나로 이알평을 시조로 하는 경주 이씨, 중국에서 시조가 건너왔다는 전주 이씨·연안 이씨·고성 이씨 등 그 기원이 다양하다.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은 베트남 왕족이었으며, 청해 이씨는 만주족에서 유래했다. 이씨 외에 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씨 등이 '사로6촌'과 연결된다.
고려를 건국한 개성 왕(王)씨의 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아버지가 당나라 황제 숙종이라고 전한다. 또 작제건과 서해 용왕의 딸 용녀 사이에서 왕건의 아버지 용건이 태어났다고 '고려사' 첫머리의 '고려세계'에 기록돼 있다.
이른바 중국 등 외국에서 유래한 성씨가 많은 것도 주목된다. 현재 가(賈)씨와 강(强)씨, 오(吳)씨, 염(廉)씨, 구(具)씨, 유(劉)씨 등 약 120개 성씨가 시조 유래를 중국에서 찾고 있다. 신라 말·고려 초 문사들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고승들의 탑비문에서 주인공의 부계 성씨가 최(崔)·이(李)·장(張)씨일 경우 모두 중국에서 동쪽으로 온 것처럼 적고 있다.
이 경우 예외도 있겠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모화사상의 산물로 간주한다. 연안 인(印)씨는 시조가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에 온 몽골인이며 경주 설(薛)씨의 시조 설장수는 위구르인이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 장수로 왔다가 투항한 왜장 사야가(沙也可)는 김해 김씨 성과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김충선(1571~1642)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정착해 산 탓에 원래 김해 김씨와 구별해 우록 김씨로도 불린다.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한국의 성씨제도도 변화하고 있다. 2005년 호주제도가 폐지되고 2000년대 들어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귀화인들이 늘어나면서 희귀 성씨가 급증하고 있다. 강전(岡田)·장곡(長谷)·저(邸)·루(樓)·뢰(賴)·소봉(小峰)씨는 물론 독일 이씨(이참)와 부산 하씨(로버트 할리), 구리 신씨(신의손), 몽골 김씨, 영등포 이씨 등 다양한 성씨와 본관이 생겨났다. 문화일보 최영창 기자
* 구한말 서양에서 온 학자가 한양 사람들을 관찰하고 놀라운 사실을 반견했다. 양반의 숫자가
10% 미만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양에 와서 보니 90% 정도는 자기가 양반이라고 하며 다닌다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것도 양반의 전유물로서 자신의 가문을 자랑하고 손님들을 접대하며,
하인들에게 좋은 음식들을 먹이기 취지로 시작된 것이다.
* 문무왕릉비의 소호금천 출자설이나 편년통록에서 나온 작제건의 당 숙종 후손설은 큰 나라의
인물이나 또는 신화적 인물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아 자신이 왕위에 오른 당위성과 왕권강화
를 위하여 사용된 흔적이 다분하다. 실제로 고려는 원간섭기 시절 원 한림학사에게 당 숙종은
잠저시절 밖으로 나돈적이 없는데 어찌 니네 왕실이 당 숙종의 자손이냐? 라고 물어 개망신을
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각 성들은 언제 생겼나?
삼국시대에 그 중에서도 고구려와 백제의 성씨들은 신라에 흡수 되면서 대개 사라졌고, 다만 신라시대의 성들만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성이 등장하면서 초기에는 아무나 성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왕족과 일부 재상들만 성을 가졌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성이 혈족을 구분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타났지만 일반 백성은 초기에는 성을 사용할 수가 없었으며, 당시 성은 권력자의 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사실상 반상(班常)의 징표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성이 일반화 되기 시작한 시기는 임진왜란(서기 1592∼1597년)과 병자호란(1636년∼1637년)을 거치면서 나라가 혼란해지자 반상(양반과 천민) 제도가 첨차로 약화 되면서 일반인들도 성이 보편화 되었으나, 천민들은 함부로 성을 가질 수 없었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성을 갖지 못한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해방이 되고서야 비로소 천민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 놀랠 일이지만 아직도 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성씨는 자생한 성씨이며 단일 민족인가? 결론은 '아니다' 다. 소위 김씨, 이씨, 박씨 하는 성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뒷날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계통을 소급하여 추부한 것에 불과하다고 전제하면서, 학자들은 모든 성은 중국에서 차용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모두 중국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성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에서 전래한 것이지만, 중국은 원래 서쪽의 한족(漢族)과 동쪽의 동이족(東夷族) 그리고 남쪽의 묘족(苗族)과 오월족 그리고 북방족이 하나로 통합된 국가이기 때문에 이 중의 하나 였지 중국에서 왔다고 다 중국인은 아니다.
* 상식 *
참고로 신라 중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서기 935년 신라가 고려에 흡수될 때까지, 통일 신라시대에 있었던 성씨들은 모두 54성(姓)으로 다음과 같다.
朴, 昔, 金, 李, 崔, 孫, 鄭, 裴, 薛, 張, 盧, 方, 毛, 白, 蘇, 辛, 王, 溫, 林, 周, 黃, 洪, 梁, 郭, 萬, 卞,
安, 嚴, 元, 陸, 丁, 蔡, 姚, 車, 羅, 公, 徐, 呂, 魏, 尹, 趙, 韓, 姜, 文, 成, 卜, 兪, 廉, 印, 曺, 丘, 南,
司公, 諸葛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 성이 고대부터 사용된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始祖)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 하면서 성을 고씨(高氏)라 하고, 동시에 신하인 재사(再思)에게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默居)에게 소실씨(小室氏)를 사성(賜姓)하였으며, 백제는 온조(溫祚)가 부여(扶餘)에서 나와 성을 부여씨(扶餘氏)라 하였다.
한편 신라에는 박(朴)·석(昔)·김(金) 3성의 전설이 있고, 제3대 유리왕(儒理王) 때는 6부(部)에 사성하였으니, 즉 양부(梁部)에 이씨(李氏), 사량부(沙梁部)에 최씨(崔氏), 점량부(漸梁部)에 손씨(孫氏), 본피부(本彼部)에 정씨(鄭氏), 한지부(漢祗部)에 배씨(裵氏), 습비부(習比部)에 설씨(薛氏)의 성을 주었다 하며, 가야국(伽倻國)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은 황금알에서 태어났으므로 김씨라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한국은 고대 부족사회 때부터 성을 사용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그것은 모두 중국문화가 수입된 뒤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문헌상으로 한국에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건국 초기인 1세기 무렵부터이고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부터이며 신라는 6세기 진흥왕(眞興王) 때부터라고 보여진다.
당시에는 성을 가질 때, 대개 왕실의 성을 따라 썼으니, 즉 고구려는 고씨, 백제는 여시(餘氏), 신라는 김씨를 쓴 사람이 가장 많고, 그 밖의 성을 가진 수효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고구려의 성으로는 을(乙)·예(禮)·송(松)·우(優)·우(于)·주(周)·연(淵)·명림(明臨)·을지(乙支) 등 약 20종, 백제는 진(眞)·해(解)·사(沙)·연(燕)·백()·국(國)·목(木)·협(夾) 등 8족을 비롯하여 부여·사마(司馬)·수미(首彌)·고이(古爾)·재증(再曾)·흑치(黑齒) 등 약 20종, 신라는 박·석·김 3성을 비롯하여 6부의 이·최·정·손·배·설과 장(張) 등 10여 종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들은 일반사람들이 모두 사용한 것이 아니고 주로 왕족과 귀족계급에서 사용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중국을 왕래한 사람들은 모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김인문(金仁問)·김지량(金志良)·최치원(崔致遠)·박계업(朴季業)·장보고(張保皐)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고려의 개국공신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도 처음에는 성이 없었다. 그들의 초명(初名)은 홍유는 홍술(弘述), 배현경은 백옥(白玉), 신숭겸은 삼능산(三能山), 복지겸은 복사귀(卜沙貴)로만 되어 있었는데,
뒤에 이들은 각 성의 시조가 되었으니 즉 홍유는 부계홍씨(缶溪洪氏), 배현경은 경주배씨(慶州裵氏), 신숭겸은 평산신씨(平山申氏), 복지겸은 면천복씨(汚川卜氏)의 시조이다. 그후 고려 중엽부터는 일반에서도 성을 널리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국의 성씨 중에서 청주한씨(淸州韓氏)·행주기씨(幸州奇氏)·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등은 기자(箕子)의 후손이라 하고, 문화유씨(文化柳氏)는 하우씨(夏禹氏)의 후손이며,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시조는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에 침입하였을 때 따라온 사람이라 하며,
남양홍씨(南陽洪氏)는 당태종(唐太宗)이 고구려에 파견하였던 학사(學士)라 하며,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칠 때 따라온 장군, 창원공씨(昌原孔氏)는 공자(孔子)의 후손이라 하며, 남원방씨(南原房氏)는 당나라의 명상(名相) 방현령(房玄齡)의 후손이라 한다.
이 밖에도 중국 고대의 위인들을 시조로 삼는 성씨가 많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있으나 그 중에는 후세에서 그럴 듯하게 꾸며낸 것도 있다. 또한 신라의 3성과 6성, 탐라(耽羅:제주도)의 고(高)·부(夫)·양(梁), 김해김씨 등은 그 시조가 전설에서 비롯되었으며, 후백제 견훤(甄萱)의 후손인 황간견씨(黃澗甄氏)는 조상의 이름을 성으로 삼은 특이한 예이다.
또 사성(賜姓)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나 귀화인(歸化人)에게 주었는데, 고려 이후 사성의 예를 들면 신라 말기 강릉(江陵)을 관장하던 명주장군(溟州將軍) 순식(順式)이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여 왕씨성을 받았고, 발해(渤海)의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귀순하자 그에게도 왕씨성을 주어 우대하였다. 신라 사람 김행(金幸)은 고려 태조를 보필하여 권능(權能)이 많았으므로 권씨성을 주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가 된다.
또 충렬왕비(忠烈王妃)인 제국공주(齊國公主)를 따라와서 귀화한 몽골인 후라타이에게 인후(印侯), 회회인(回回人, 위그르) 삼가(三哥)에게는 장순룡(張舜龍)이라는 성명을 내려 인후는 연안인씨(延安印氏), 장순룡은 덕수장씨(德水張氏)의 시조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이성계를 도와 개국에 많은 공을 세운 여진인(女眞人) 동두란(豆蘭)에게 이지란(李之蘭)이라는 성명을 주어 청해이씨(靑海李氏)의 시조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왜장 사야가(沙也可)는 정유재란과 병자호란에 큰 공을 세워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성명을 주어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경북 달성군 가창면(嘉昌面)에 많이 살고 있다.
고려 중엽부터 일반화하기 시작한 성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국민이 성을 지니게 되었으나 일부 천민들은 여전히 성을 갖지 못하다가 호적법의 시행과 함께 누구나 그 혈통과 가계(家系)에 따라 성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성의 수를 살펴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277성으로 적혀 있고, 고종 때 발간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문헌에 있는 모든 성을 넣었기 때문이다. 1960년 인구조사에서는 258성, 75년에는 249성, 85년에는 274성으로 나타났다.
국민 모두 성(姓)을 갖게 된 건 1909년부터 일제 통감부 '민적법' 도입 계기
후대에 기록된 각종 사서와 족보의 기록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2000년 전 삼국시대 초기부터 한자 성씨(姓氏)를 쓴 것은 아니다. 신라의 경우, 진흥왕(재위 540∼576) 때 건립된 4개의 순수비를 비롯해 당시 제작된 금석문 자료들을 보면 성을 쓴 인물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말 이름 뒤에 출신지역이라 할 수 있는 촌명(소속부명) 등을 사용했을 뿐이다.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시대 한자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5, 6세기 들어와서의 일로 추정된다. 한자 성씨도 처음에는 왕실에서 사용하다 귀족과 평민들에게까지 확산됐는데 우리 국민 모두가 성씨를 갖게 된 것은 일제 통감부 시절인 1909년 민적법이 도입되면서부터다. 조선시대에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대 40%에 달했던 노비나 천인계급은 성을 갖지 못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람의 혈족(血族)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칭호인 중국의 성씨제도는 4000년 전 하·은·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성은 모계 혈통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고 씨는 부계 혈통에 이어 귀족들이 분봉받은 국읍(國邑)의 지명이나 관직, 작위 등을 나타내다가 진한(秦漢) 시대 구별이 사라지면서 하나로 통합됐다.
일반적으로 성씨가 유래한 곳이나 시조의 거주지를 나타내는 본관(本貫)제도도 우리나라에선 신라 말·고려 초 지방호족들의 출현과 함께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성씨제도와 결합해 씨족의 발상지뿐만 아니라 그 씨족(동본)의 집단적 신분을 표시하는 역할까지 한 게 우리나라 본관제도의 특징이다.
고려 초기에 정착된 한국 성관(姓貫)제도의 구체적인 모습은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각 읍 성씨조에 실려 있는 15세기 초 전국 성씨는 250개 안팎에 본관 수는 총 4,477개였다.
이 같은 숫자는 통계청이 지난 2000년 실시한 인구 총조사 결과와 큰 차이가 없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가장 최근에 정부가 실시한 성씨·본관별 조사에서 우리나라 인구는 286개 성씨와 4179개 본관으로 구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족보는 소수 양반 전유물, 18세기 대량 위조 '너도나도 양반'
퇴계 이황(1501~1570)이 속한 진성(眞城) 이씨는 고려말 향리 가문에서 입신해 이황 대에 와서 명문사족으로 입지를 굳힌 가문이다. 진성이씨세보(世譜) 또는 1600년(선조 33) 경자(庚子)년에 편찬됐다고 해서 '경자보', '도산보(陶山譜)'로 불리는 진성 이씨 가문의 첫 족보도 퇴계의 손자인 이영도가 출판을 주관했다.
3권1책 256쪽으로 된 '경자보'에는 진성 이씨 내외후손 2800명의 이름과 사실이 기록돼 있는데 아들과 딸을 막론하고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퇴계는 진성 이씨 세계를 정리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을 기울였는데 친필로 시조 이석(李碩)부터 손자인 이안도 대까지 가계를 세계도 형태로 그린 '진성이씨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퇴계의 필적들을 모은 '선조유묵(先祖遺墨) 11'(보물 제548-2호)에 실린 것으로 친가인 진성 이씨뿐만 아니라 외가인 춘천 박씨 등 자신의 조상에 해당되는 인물들의 가계도를 모두 그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자료는 최근 재개관한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실 3관 ‘가족’ 부분에 전시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족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조선 초기의 일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족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안동권씨 성화보'가 1476년(성종 7)에 간행됐으며 이보다 조금 앞서 '문화유씨 영락보'(1441)와 '남양홍씨 정통보'(1441), '진주하씨 경태보'(1451) 등 몇몇 가문의 족보가 만들어졌던 사실이 문헌을 통해 확인된다.
‘한 족속의 계통과 혈통에 관계되는 것을 적은 책'인 족보는 성관(姓貫)별로 한 시조로부터 일정한 원칙에 의해 정해진 후손들을 가능한 한 모두 망라한 동시에 여러 가족 단위의 계보 자료들을 집적해 만든 계보 기록을 말한다.
고려시대 각종 기록에 가록(家錄)이나 세보(世譜), 가보(家譜) 등과 같은 용어가 보이나 현재 실물로 전하는 게 하나도 없을뿐더러 가족 단위 중심의 기록이란 점에서 족보라고 할 수는 없다.
중국의 족보문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15세기와 조선 사회가 본격적인 성리학 사회로 전환하는 17세기에 우리의 성과 본관에 대한 의식과 족보 편찬 체계도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다. 시조 권행(權幸)부터 후손들을 계보상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고 총계(總系) 원칙에 따라 정리한 조선전기 '안동권씨 성화보'의 경우 수록된 후손이 8,000여 명에 달한다.
같은 원칙에 따라 1565년 간행된 '문화유씨 가정보'에는 38,0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수록돼 있는데, 이 족보에 당시 지배층 대다수가 수록돼 있어 '나라의 공보(公譜)'로 불리기도 했다. 두 족보를 중심으로 15, 16세기에 간행된 족보는 20종 정도가 알려져 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는 '내외손 동족집단' 대신 동성만을 동족으로 보는 의식이 강화되면서 족보 편찬도 부계 자손에 국한된 동성보(同姓譜) 편찬이 중심이 된다. 외손 등 이성(異姓)에 대한 내용은 격감하지만 족보 편찬이 급증하면서 중간 조상을 정점으로 해 그 이하의 자손만을 기재하는 파보(派譜)와 한 성씨의 시조로부터 파생된 수천, 수만의 자손을 세대의 차례로 모조리 기재하는 성씨별 대동보(大同譜)가 만들어지게 된다.
17세기까지 10% 남짓 보유… 군역 면제·문벌 숭상 겹쳐
15~17세기 활발했던 족보 편찬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에서 이를 소유한 인구는 10% 남짓이었을 정도로 소수 양반의 전유물이었다. 17세기까지 전체 인구의 80~90%를 차지했던 평민과 노비 계층이 족보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300년이 지난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이 족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18세기 이후 군역(軍役)을 면제받기 위해 양반이 되고자 했던 평민과 노비 계층 가운데서 성장한 신흥세력의 노력에 양반들의 잘못된 문벌의식과 숭조(崇祖)사상이 겹쳐져 광범위한 족보 위조가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령 1900년 풍양 조씨 족보가 그보다 74년 전에 출판된 족보에 비해 분량이 두 배 이상 증가한 사실 등이 이를 입증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서 1929년까지 10년 동안 출판된 도서 가운데 매년 1위를 차지했던 족보 출판 열기도 당시의 분위기를 말해 준다. 참고로 현대 서유럽에서 귀족의 후손은 전체 인구의 3% 미만이라고 한다.
역사학자인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는 조선시대 관습에 기초한 양반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 족보였다며 18세기 이후 위보(僞譜)의 유행은 누구나 족보를 소유해 양반이 될 수 있게 한 측면에서 '차별의 해제'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일부 족보 편찬자·출판사들의 축재 수단으로 악용되고 전근대적인 차별의 철폐보다 새로운 차별을 낳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요소가 더 컸다고 밝혔다. 최영창 기자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중국은 고구려를 한국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바로 성씨 문제이다.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성씨들의 대부분이 신라 성씨이며 고구려계의 성씨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논리이다. 성씨로만 보면 사실 중국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유교문화가 많이 남아 있었다. 사실 많은 수의 한국사람들이 유교문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요즘 사람 중에 논어 맹자를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유교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 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고리타분하다고 욕먹을지 모르지만 사실 수십 년 전만 해도 족보 따지기 좋아하고 양반 상놈 나누던 사람들이 바로 한국사람이었다. 그러기에 한국인들에 성씨는 비록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핏줄을 결정짓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한국의 성씨는 성씨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본관이라는 것이 있어 비록 한자로 쓰여지는 성씨는 같다고 하더라도 본관이 다르면 그 조상이 다른 경우도 있다. 한국의 성씨의 대부분이 신라계 성씨라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는 김(金) 이(李) 박(朴) 삼성이다. 그 밖에 최(崔) 정(鄭) 등도 많다. 김씨의 대표적인 본관은 경주와 김해이다. 경주와 김해는 두 지역 모두 신라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경주는 신라를 김해는 신라에 합병된 가야를 대표한다. 경주 김씨는 신라의 왕족의 성씨이며 김해 김씨는 가야 왕족의 성씨이다.
김씨 중에도 유독 많은 성씨가 김해 김씨이다. 아마 잘은 몰라도 2000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하면 김해 김씨는 410만여 명이라고 한다. 한국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김해 김씨일 것이다. 지하철 좌석에 아마 7명 정도 앉을 것이다. 열 명 중 한 명이 김해 김씨라는 것은 지하철 좌석에 앉아 있는 일곱 명중에 한 명은 김해 김씨 일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경주 김씨의 경우는 2000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하면 170여 만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주 김씨의 경우 김해 김씨의 경우와는 다른 점이 있다. 지방에 파견된 경주 김씨가 그 곳에 뿌리를 내려 자신들이 터를 잡은 그 곳을 본관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 경주 김씨로 나뉘어질 김씨들의 수는 170여 만명을 훌쩍 뛰어 넘을 것이다.
이씨의 경우 대표적인 본관은 경주와 전주이다. 경주 이씨는 그 본을 신라 육두품에 두고 있다. 육두품은 신라 고급 귀족의 계급이다. 서양의 귀족제로 따지면 공작 정도 되는 위치이다. 경주 이씨도 결국 신라 계열인 것이다. 경주 이씨의 경우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140만 여명이라고 한다.
전주 이씨의 경우도 그 시초를 신라에 두고 있다. 시조 이한은 신라 문성왕 때 사공벼슬을 지낸 분이다. 전주 이씨의 경우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260여 만 명이라고 한다.
박씨의 경우 대표적 본관이 밀양이다. 비록 본관이 밀양이나 박씨는 박혁거세로 더 유명하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 말이다.
그러므로 박씨의 경우는 본관을 논하기 전에 신라 출신이라는 것이 자명하다고 볼 수 있다. 밀양 박씨의 경우는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300여 만명이라고 한다. 거의 남한 인구의 열 명중 한 명은 밀양 박씨라는 것이다.
최씨의 경우 대표적인 본관은 경주이다. 경주를 본으로 하는 최씨의 경우 시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24세손이다. 돌산 고허촌은 신라 사로 육촌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경주 최씨도 신라 계열이라는 것이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 최씨는 97만 여명이라고 한다.
정(鄭)씨의 경우 동래 정씨가 대표적이다. 동래 정씨 시조는 신라의 6부 촌장 가운데 하나인 자산진부 촌장 지백호(智白虎)이다. 그러기에 동래 정씨도 신라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동래 정씨는 44만여 명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신라 계열 성씨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러나 비록 본관은 다르다고 해도 그 시조의 시조를 찾아가면 신라계열의 성씨는 더욱 많아진다. 문제는 신라 계열 성씨가 많다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바로 고구려 계열 성씨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마 고구려 계열 성씨에서 유일하게 번성한 성씨는 강(姜)씨가 아닌가 한다. 고구려에는 강씨라도 있지만 백제의 성씨는 거의 없다. 그나마 백제계 성씨 중에는 전(全)씨가 번성하였다. 강(姜)씨에 대해서 알아보면 강씨의 대표적인 본관은 진주이다.
진주 강씨의 시조는 고구려에서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이다.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익히 보았던 강이식 대장군이 진주 강씨의 시조인 것이다. 진주 강씨의 경우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96만 여명이다.
전(全)씨의 대표적인 본관은 정선이다. 정선 전씨의 시조는 전섭이다. 전섭은 백제의 개국공신이다. 그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 때 오간 을음 등과 함께 온조를 도운 10명의 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정선 전씨의 경우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십사만여명이다.
분명 성씨만을 놓고 보면 현재 대한민국에는 고구려의 성씨가 많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허점이 있다. 그건 바로 고구려인들이 성씨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을지문덕을 보자.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장수였다. 역사서에 위지문덕으로도 나오는 장수로서 성씨의 유래로 선비족 출신으로도 본다. 을지문덕의 성은 을지씨인가? 확인된 바는 없다.
온달의 경우를 보자. 온달은 봉성 온씨의 시조로도 불린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온달의 성씨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온달에 이르러서야 온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경우 아버지의 이름이 대중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기에 자칫 잘못 알면 대조영의 성씨가 대씨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대중상은 걸걸중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대한민국 사람은 모두 성씨가 있다. 그러기에 성씨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성씨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조상이 귀족 출신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씨라는 것은 주로 왕에게 하사받는 것이다. 왕에게 성씨를 하사 받는다는 것은 그 만한 공을 세웠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그러기에 성씨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재미난 성씨들이 꽤 많다. 전중(田中)이니 고교(高橋)니 하는 성씨를 보았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경우는 굉장히 많은 성씨를 가지고 있다. 100여년 전만 해도 일본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성씨가 없었다. 국민을 관리하는 제도의 일환으로 성씨의 사용이 장려되었고 그 과정에 새로운 성씨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근대적인 성씨의 개념의 사용은 백 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다. 터어키도 마찬가지로 성씨라는 개념이 사용된 것은 백 여년이 되지 않는다. 징기스칸의 이름은 테무친이다. 테무친은 몽골의 왕족계급이었다. 그런 그도 성씨는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게이이다. 테씨가 아니었다. 이는 몽골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경우는 아니었다.
중국이나 유럽을 제외하고 그 밖의 국가에서는 오히려 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한국 성씨의 경우 중국의 제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씨를 표기하는 방법 자체가 한자이었고, 왕에게 성씨를 하사 받고, 조상을 모시는 방법조차 유교의 그 것을 따랐다.
현대에는 누구나 성씨를 가지고 있다. 고대와 다르게 현대의 성씨는 사회적 계급이나 출신 지역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부계혈통의 정보를 주고 국가가 국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런 현대의 개념을 가지고 과거의 일들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시대적 특성과 지역적 특성을 무시하고 모든 곳 모든 시기의 사람들이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는 오해를 한다. 계백의 성씨는 계씨가 아닐 수 있고 을지문덕의 성이 을씨가 아닐 수도 있는데 우리는 무심코 성과 이름을 분리하여 생각하려 한다. 이는 잘못이다.
성씨라는 제도가 고구려나 백제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제도가 아니었다면 중국이 주장하는 것은 틀릴 수 있다. 성씨는 기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부계성씨를 사용하기 때문에 모계의 혈연 관계를 알 수 없다.
두 가지 경우를 보자. 할아버지의 성씨가 김씨고 할머니의 성씨가 이씨라고 치자. 그럴 경우 아버지의 성씨는 김씨이다. 여기에 어머니의 성씨가 오씨라면 본인은 김씨일 것이다. 다른 경우에 할아버지의 성씨가 오씨고 할머니의 성씨가 김씨면 아버지의 성씨는 오씨일 것이다. 여기에 어머니의 성씨가 이씨라도 본인은 오씨일 것이다.
사실 이 경우 혈연관계로만 따지면 그 차이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한 명은 김씨고 한 명은 오씨가 된다.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에 길들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의문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혈연으로만 판단하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수 천년 동안 한반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든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또한 혈연이라는 것이 남녀의 문제이기에 그 사연을 모두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성씨는 자신의 혈연을 알려주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모든 정보를 알려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의 성씨 본관별 족보 검색
본관(本貫)과 관향(貫鄕), 고향(故鄕)의 구별
▶ 본관(本貫)은 시조 할아버지가 성씨(姓氏)를 가지고 자손을 퍼뜨리게 한 이를테면 창업지(創業地)를 말한다."김해김씨"이면 김해가 그들의 본관이다.
▶ 관향(貫鄕)은 윗대 조상들이 한 곳에서 여러 대에 걸쳐 살아 내려온 동네를 말한다.
내가 그곳에서 태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큰집도, 당숙네도 있고, 선산(先山)도 있으며 시제(時祭)도 거기서 뫼신다. 관향(貫鄕)은 어쩌면 본관(本貫)보다 더한 살아온 내력으로서의 고향(故鄕)이다.
▶ 고향(故鄕)은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 본 자연... 그 질박한 맑음. 꾸미지않은 천연색. 최소한의 사람의 도리를 가지게 만들어준 도덕. 술래잡기, 잣치기, 연날리기, 썰매타기, 수박서리, 메뚜기잡기, 초가지붕 끝의 고드름 따먹기등 어렸을 때 추억이 깃든 곳이다.
우리나라, 한반도의 전체 왕족을 정리하자면,
고조선시대
단군조선 : 성씨 없음
기자조선 : 행주기씨 (41대, 기준왕 : 위만에게 뺏김 / 남하, 마한건국 )
위만조선 : 성씨소멸 (장흥위씨: 당나라에서 신라로 온 사신/ 위만조선: 3대왕, 86년간 존속 )
삼한시대
마한 : 행주기씨, 청주한씨, 북원선우씨. (마한 원왕때, 백제 근초고왕에게 멸망)
부여 : 해씨 (소멸) (고씨, 부여씨로 이어짐)
진한 : (육촌)
알평 : 경주이씨, 합천이씨, 가평이씨, 평창이씨, 원주이씨, 아산이씨, 재령이씨, 우봉이씨, 우계
이씨, 성주이씨, 금구이씨, 차성이씨, 진주이씨,덕은이씨, 흥양이씨, 영천이씨, 진위이씨
소벌도리 : 경주, 개성, 삭녕, 동주, 전주, 함양, 청주, 충주, 영흥,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해주, 진주, 탐진최씨 등 모든 최씨, 진주소씨, 정씨(?)
구례마 : 일직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
지백호 : 낭야정씨, 서산정씨를 제외한 모든 정씨, 최씨(?)
지타 : (분성, 성산, 달성, 흥해, 협계, 화순, 함흥 등 모든 배씨
호진 : 순창설씨
변한 : (6가야에서 자세히)
삼국시대
고구려 : 고씨(소멸) - 현재 남아있는 고씨는 제주도 3성 중 하나이거나 발해·고려의 왕실이
고구려 왕실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음.
백제 : 부여서씨 (불확실)
신라 : 경주박씨, 경주김씨, 설씨
금관가야 : 김해김씨, 김해허씨, 하양허씨, 양천허씨 (등 모든 허씨), 인천이씨, 진주김씨, 수원
김씨, 영동김씨, 무장김씨, 함창김씨
고령가야 : 함창김씨
소가야 : 고성김씨
* 6가야(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or 비화가야)의 왕족들은
신라 진골로 많이 편입되었다.
* 참고 : 신라 왕실에서 분적된 성씨들
광산김씨, 금녕김씨, 강릉김씨, 의성김씨, 청도김씨, 상산김씨, 언양김씨, 서흥김씨, 울산김씨,
나주김씨, 원주김씨, 부안김씨, 안산김씨, 영광김씨, 도강김씨, 개성김씨, 청주김씨, 삼척김씨,
수원김씨, 희천김씨, 영천김씨, 금산김씨, 수안김씨, 우봉김씨, 광주김씨, 강화김씨, 진천김씨,
안로김씨, 교하김씨, 밀양김씨, 월성김씨, 함안김씨 등등....
후삼국시대
태봉 : 궁예, 광산이씨, 순천김씨
후백제 : 황간견씨, 상주견씨
고려시대 : 개성왕씨, 개성내씨
* 해주왕씨같은 하사받은 사성도 있다.
* 고려 멸망 이후 살아남은 왕씨들이 전씨, 옥씨, 용씨 등으로 성을 바꿨다고 하는데 불명확하다.
조선시대 : 전주이씨
첫댓글 좋은 자료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