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금요일 강론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강론>(2026. 7. 17. 금)(마태 12,1-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1-8)>
1) 이 이야기를 바로 앞에 있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에(마태 11,28)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조금 뜯어 먹었다가
바리사이들로부터 비난을 듣게 된 제자들에게는, 안식일
율법이 정말로 사람을 괴롭히는 멍에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물론 ‘배고픔’ 자체도 멍에로 느껴졌을 것이고...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제자들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에게도 안식일 율법은 무거운 멍에였습니다.
그들 자신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신념이었습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마카베오 상권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를 상대로 전쟁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군대는 일부러 안식일에 공격을 했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전투를 하지 않고 그냥 죽었습니다.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도 않고 자기들의
피신처를 봉쇄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한 채로
죽겠다. 너희가 우리를 부당하게 죽였다는 것을 하늘과
땅이 증언해 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
갔다. 죽은 이는 천 명이나 되었다(1마카 2,36-38).”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민족이 몰살당하지 않으려면
안식일에도 전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기로 결의했고, 실행했습니다(1마카 2,39-48).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다가 몰살당한 이야기만 기억하고, 안식일에도
전투를 하자고 결의한 뒷이야기는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2) 안식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은 ‘사랑’과 ‘자비’이고,
실천하는 방법도 ‘사랑’과 ‘자비’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계명들과 율법들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안식일을 안 지킨다고 비난하는
말만 한 바리사이들도 안식일을 안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안식일을 안 지킨
것은 사실이지만, 배가 고파서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안 지킨’ 사람들이 아니라 ‘못 지킨’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은 ‘죄 없는 이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면,
당연히 예수님도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그 상황은 8장에 있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3)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멍에를 없애 주셨으면서도
왜 ‘배고픔’이라는 멍에는 그냥 두셨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천 명의 군중을 위해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셨으면서도,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서는
그런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고, 그냥 내버려두셨습니다.
<“혹시 배반자 유다는 배고픈 생활을 참지 못해서
떠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부러 굶기신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에는 설명이 없지만, 제자들의 배고픔을 그냥
내버려두신 것을 ‘무언의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호의호식’하는
생활을 했다면? 그들을 파견하실 때 ‘빈손’으로 가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필요한 것은 모두 충분히 챙겨서
가라고 말씀하셨다면? 또 활동비를 넉넉하게 주셨다면?
지금의 상황이 너무 편안하고 좋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주저앉아 있기만 하는 것은, 너무 힘들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부러 고생시키신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고생은, 신앙생활의 목적지는 눈앞의 호의호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라는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깨달음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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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