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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묵상글 (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 주님, 사랑합니다!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10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7:57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57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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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03.28 02:14
주님,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임종어는 무엇이겠는지요?”
불암산 배경의 요셉 수도원에 37년째 정주하면서 날마다 매일 수없이 눈들어 바라보는 저의 사랑 불암산입니다. 작년 9월부터 지금도 여전히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 오는 불암산 앞에 설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짧은 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8>
사랑하는 주님앞에 설 때 가슴 가득차는 행복감도 이럴 것입니다. 또 요즘 산같은 정주의 삶에 자족自足, 자위自慰하며 바치는 고백시입니다.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은 산이예요”<2025.2.12>
오늘 말씀 묵상중 문득 떠오른 성인들의 임종어입니다. 성녀 소화데레사와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는 같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의 임종어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양손을 들고 기도하며 임종하던 베네딕도 성인의 임종어는 전해지지 않습니다만 성규57장9절에 근거한 다음 고백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받으소서”
이분들의 임종어는 그대로 평생 좌우명이었고 묘지가 있다면 묘비명으로해도 좋겠다 싶습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대개는 살아온 대로 살고, 살아온 대로 죽습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선종은 없습니다. 시종여일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음을 입증하는 임종어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임종어는 무엇이겠는지요?
미리 정해서 좌우명삼아, 미리 묘비명삼아 살아도 참 좋겠다 싶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보고 배웁니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도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분이 “사랑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물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이야기는 사랑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사랑입니다. 회개를 통해 사랑의 주님께 돌아가 체험하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 사랑을 새로이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이런 회개와 사랑의 달인이자 대가인 성인들이요 제1독서 호세아 예언자가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라.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이어지는 회개의 구체적 고백입니다.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저희 손으로 맏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곧장 이어지는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사랑의 신비가이자 시인이요 예언자 호세아를 통한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회개한 또 하나의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감미로운 고백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호세아처럼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깨닫고 분별있는 사람은 사랑을 압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사랑의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립니다.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입니다. 모두가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주어진 선물인생이자 명품인생입니다.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문, 하늘문입니다.
회개도 사랑도 행복도 자발적 의식적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넘치도록 차고 넘치게 받은 사랑의 체험이 저절로 사랑의 응답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경천애인 사랑의 이중계명이요 황금률의 사랑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예수님 말씀에 어느 율법학자는 전폭적으로 공감하며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다’ 화답합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여 정말 하느님의 사랑에 감복, 감동한 자라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황금률의 사랑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방대한 신구약 성경도 경천애인敬天愛人 사랑의 이중계명과 황금률黃金律의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사랑해서 비로서 사람입니다. 사랑밖에는 답이, 길이 없습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 사랑의 학생인 우리들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수록 날로 정체성 또렷한 자존감 높은 행복한 삶, 내적 부유와 자유의 충만한 삶입니다. 날마다 바치는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사랑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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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28 04:39
-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가,
율법 학자 가운데서 주님께 칭찬받은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선 같은 내용의 다른 두 복음을 보면 율법 학자가 주님께 질문하는
이유는 다른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시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는 시험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사두가이의 교묘한 질문에 현명하게 답하는 것을 보고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도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의 답에 그도 동감을 표하면서
율법의 핵심을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내고,
주님께서도 그런 그에 대해 칭찬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이 아리송하기도 하고 저로 하여금 더 생각게 합니다.
왜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멀리 있지 않다는 식으로 주님께서 답을 하실까?
이왕 칭찬하시는 것 화끈하게 넌 하느님 나라에
아주 가까이 와있다고 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혹시 이 사람이 저와 같아서 그러신 것일까요?
제 생각에 저는 하느님 나라에 멀리 있지 않지만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것입니다.
저도 오늘 율법 학자처럼 주님 말씀에 맞장구는 칩니다.
하느님께든 이웃에게든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주님 말씀에 저도 맞다고 생각하기에 즉시 동감을 표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을 아는 것만도 대단하고
하느님 나라에 멀리 있지 않고 상당히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제일 처음 말씀하신 것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이셨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가까이 오셔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어도
그것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를 보면 곧 저의 실천을 보면 아주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이 먹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점점 다가오니
사랑할 날도 많지 않은데 왜 미워하는 데 시간을 허비할까 하는 생각에
미움보다 사랑이 더 많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느님 나라의 사랑에
가까이 있지 못하고 그렇다고 아주 멀리 있는 것은 아닌 그런 상태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요?
하느님 나라에 멀리 있지도,
그렇다고 아주 가깝지도 않은 우리 사랑이지요?
실망할 것은 없고 분발할 필요가 있는 우리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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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를 지탱시켜 주는 빛!
하느님의 숨
2025.03.27. 16:28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27일 목요일 (호명환 번역) 열세 번째 주간: 향심(centering)과 침묵(silence), 고요(stillness)
빛과 사랑은 우리 삶의 시금석이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 활동가 로즈매리 프리니 하딩(Rosemary Freeney Harding: 1930-2004)은 자신이 관상적 의식(contemplative awareness)을 어떻게 경험했는지, 그리고 이 관상적 의식이 그녀의 삶 전체에 걸쳐 그녀를 어떻게 지탱시켜 주었는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그녀는 이 관상적 의식을 "빛"(the Light)이라고 부릅니다:
어디에서 그 빛이 들어왔는지, 그리고 그 빛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별안간 그 빛이 저와 함께 있었습니다. 햐얀 빛, 너무 밝아서 바라보면 제 눈을 다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이 제 눈에 전혀 상처를 내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빛이 커져서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싸게 되자, 저는 너무도 놀라울 만큼 보호받고 있고 평화롭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빛이 저를 온전히 둘러쌌기에 저는 참으로 기쁘게 그 빛 안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 빛 속에, 그 공간 속에 얼마나 오래 감싸여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 방에서 나왔을 때, 제 가족이 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저에게서 들었답니다....
저는 퇴근하고 돌아와서 잠시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는, 쉬기 위해 제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나 봅니다. 바로 그때 저는 빛 안에 있었습니다....
그 빛은 제 삶에 있어 일종의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한한 동정심과도 같았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매우 소중하고 친밀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 빛은 저로 하여금 온통 경외심을 느끼게 했습니다. 정말로요. 그리고 제가 제 방에서 나왔을 때 모든 것이 달라 보였습니다. 명료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도 집 바깥에서도, 교실에서도, 직장에서도 모든 것이 더 예리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현존에 대해 대한 느낌이 들어높여진 듯했습니다. 빛나는 광채처럼요.
프리니 하딩은 심오한 영적 기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수많은 길이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길이 모두 참으로 고귀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영적 기반은 그 "빛"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모든 경험이 저로 하여금 어떤 길을 걷게 하였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오랫동안 저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저는 그 빛이 저에게 안전함을 느끼게 해 주었고, 제가 하느님과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걸었던 이 모든 여정, 이 모든 영적 수양과 전통 - 메노나이트 교회와 바와 무하이야드 수피, 그리고 달라이 라마에 이르기까지 - 명상, 기도 등.... 이 모두가 그랬습니다; 저는 그 빛이 저에게 선사해 준 것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 빛이 일깨워 준 것과 저에게 보여준 모든 것을 말입니다. 제 생각에 "영성"의 정의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빛이 저를 수년간 지탱시켜 주었듯이 우리를 지탱시켜 주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바로 영성이 아닐까요?! 그것이 빛과 비슷하지 않나요? 아니 그것이 바로 빛이 아닐까요?!
제가 가족에게서 떠나 몇 년간 예상치 못한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저는 그 빛이 주는 안정과 보호와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 심오한 포용 에너지 안에는 여러분에게 용서의 마음과 적대감이 전혀 없는 마음으로 살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말하듯이, 우리가 겪어낼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동정심을 지니고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동정심의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동정심의 영성이 아주 일상적인 사람들을 통해 올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이르는 길은 참 많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비파사나 명상을 통해 거기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부처님을 만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표현을 하든, 그들은 도움을 주는 존재를 만난 것입니다. 격려해 주는 존재를 말입니다. 이 삶에서 정말로 깊은 격려가 되는 존재. 저에게는 그것이 바로 그 빛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한동안 매일 묵상 수신을 중단하였다가 다시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묵상 글을 읽을 때마다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전도 받습니다. 여기에 함께할 수 있음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Nancy M.
Rosemarie Freeney Harding with Rachel Elizabeth Harding, Remnants: A Memoir of Spirit, Activism, and Mothering (Duke University Press, 2015), 1–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xisbati, Untitled (detail), 2021,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침묵은 풀밭 위에 뻗져진 저 손처럼 지금 여기에서 살갗을 스치는 풀잎 하나하나를 단순하고 깊이 의식하듯이 현재의 순간에 깊이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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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사랑은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우리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28. 05:29
오늘의 사순시기 전례는 사랑을 하느님의 자기-통교의 가장 깊은 뿌리라고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의 억제할 수 없는 발출로 인해 그 사랑의 모습(모상)으로, 그 사랑과 유사하게 창조된 우리의 사랑 역시 우리 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영혼은 언제나 무언가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혼이 창조된 이유 그 자체이고 그 사랑을 통해 영혼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우리의 세상적 개념에서 모든 능가하는 물리적 힘이 아니라 어떤 것도 예외 없이 모든 것을 감싸는 전지전능한 사랑의 차원에서의 최고의 힘, 무한한 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배제된 전능은 하느님의 전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전능하신 사랑이시고 무극(無極)의 사랑이시기에 그 사랑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는 사랑이십니다.
그러니 사랑 이외에는 다른 무엇이 아니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서 그런 사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째가는 계명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10,12; 11,13; 13,4; 26,16; 30,2; 30,6; 30,10 참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질투하는 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탈출 20,5; 34,14; 신명 5,9)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히, 갈림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으시는 것이 하느님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본질을 우리 인간의 감정이 섞인 언어로 표현할 때 이 사랑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허용하지 않는 [질투]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첫째가는 계명에 덧붙여서 둘째 계명, 즉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계명을 첫째가는 계명 못지않은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카타리나 성녀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그 온전하고 무한한 사랑으로 창조되었고, 또 그 사랑이 우리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의지에 의해 강제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본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명이라는 것은 어떤 강제성이 들어있는 말 아닙니까?! 그리고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사랑하는 것이 정말 사랑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여기서 말하는 명령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내부의 명령, 즉 우리가 배가 고플 때 먹고 싶어 하고 목마를 때 물을 마시고 싶어 하며, 졸릴 때 잠자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본능의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우리 존재 깊숙한 곳에 이미 들어있는 본능을 의식하고 인식하여 그 사랑을 우리 존재의 힘으로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영어에 'holistic'(전체적인, 온전한, 모두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1926년 이래로 쓰이기 시작한 단어라고 합니다. J. C. Smuts(스머츠)라는 철학자가 [홀리즘(holism)과 진화]라는 저서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모든 존재에 이미 들어있는 본질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자연을 한 번 봅시다. 그러면 어떤 것도 반쯤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전심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무기물까지도 말입니다. 갈라진 시멘트 바닥이나 아스팔트 바닥에서 싹을 틔우는 잡초나 커다란 바위 틈에서 자라난 소나무를 한 번 바라보십시오. 반쯤인 마음으로는 그리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일전에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아주 자그만 새 중 하나인 굴뚝새를 사람 크기만하게 하여 그 소리를 듣게 되면 지진계에 잡힐 정도의 큰 소리로 들린답니다. 이렇게 가장 작은 피조물들도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의 하루인 오늘 이 [사랑]을 화두로 삼아보면 어떻겠습니까?!
이 사랑은 해야 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본능인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말의 '사랑하다'와 '살다', '사람' 등의 단어는 다 하나의 어원을 갖습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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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28 06:05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부탁드려요.’와 ‘고마워요’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아요.”
‘정말 그런가?’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어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에 아이들도 따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항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기가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 감사의 말을 잘 못하는 모습을 어른들이 먼저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자기의 기도를 살펴보면 간단합니다. 평소에 겸손된 마음으로 청원의 기도를 바치고, 또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은 모두 자기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당연하고, 나쁜 것들은 모두 주님께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배운 아이들 역시 당연히 그런 모습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보면 상대에 대해 감사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사함이 줄어드는 순간 사랑도 식어가지요. 결국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없이 사랑하면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사랑을 키워야 합니다. 사랑이 커질수록 감사함도 커질 것입니다. 좋은 것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나쁜 상황에서도 함께해 주심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이 자기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게 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모세 법에서 수를 세어, 248개의 명령과 365개의 금지를 정해놓았습니다. 바로 이 613개의 계명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를 인용하시어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둘째 계명을 덧붙이십니다.
그 세부 조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의 핵심이 중요했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고, 그 감사의 마음이 지금을 더욱 기쁘게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보다 다른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 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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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아침에 마지못해 일어난다면 이 점을 명심하라. 나는 인간으로서 할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난다(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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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오늘 <입당송>에서도,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도, <복음>에서도, 같은 내용의 말로 반복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올렸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그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먼저 밝히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
이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시라는 그분의 존재차원을 밝히고 있는 동시에,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라는 존재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곧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그렇게 내 이웃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계명으로 주어집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어쩌면 율법학자에게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그가 인간의 행동규범으로서의 계명을 깨닫고 있을 뿐, 그 계명의 이유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먼저 사랑 받은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곧 그는 ‘자신의 사랑’을 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15,12)는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의 시금석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 환호송>에서 말하는 회개는 한 마디로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호세 14,2) 입니다(회개를 나타내는 ‘metanoia’의 구약성경의 단어인 ‘tesubah’의 원래 뜻).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본질적으로 단지 윤리적 행동의 뉘우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돌아옴 곧 존재에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사랑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께로 돌아와 찬양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내 몸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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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로 오기 전에 저는 미주가톨릭 평화신문에서 일했습니다. 며칠 전에 책을 읽으면서 신문과 민주주의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문의 기능과 복음서의 기능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늘은 신문과 방송이 민주주의에 이바지한 점을 생각해 보고, 이것이 복음서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과정과 어떻게 닮았는지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특별히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진리를 전하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문과 방송은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닙니다. 진실을 알리는 도구이자,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1972년 베트남 전쟁 당시 유명한 사진이 있습니다. 한 베트남 소녀가 옷이 타버린 채 울면서 도망치는 장면입니다. ‘네이팜탄 소녀’ 사진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사진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되면서, 많은 사람이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높아지면서, 전쟁이 종식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문과 방송이 진실을 전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부당한 전쟁도 멈출 수 있고, 억울한 사람도 구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알릴 힘"입니다.
신문과 방송은 정치와 사회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있습니다. 이 소설이 원래 신문에 연재되던 것이었습니다. 신문 연재 소설은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조금씩 연재되었고,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광수의 ‘무정’과 같은 작품이 신문에 연재되면서 한국 근대 문학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황석영의 장길산은 1974년부터 1984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존했던 의적 장길산을 주인공으로 하여 민중의 저항과 해방을 다룬 역사 소설입니다. 최인호의 상도는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소설로, 상인의 도(道)와 성공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문 연재 소설이 복음서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복음서도 한 번에 세상에 퍼진 것이 아니라, 조금씩 기록되고, 전해지고, 읽히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문이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진리를 전하듯, 복음서도 세상에 조금씩 퍼져 나가며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통해 진리를 전한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일까요?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하고, 편지를 써서 신앙 공동체를 이끌었습니다. 바오로가 쓴 편지, 즉 로마서, 고린토서, 갈라디아서 같은 서신들은 지금도 우리가 신앙을 배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믿었고,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매를 맞고도, 배가 난파되어도 결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저는 오늘날 언론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정권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협박을 받아도 진실을 보도하려는 기자들처럼, 바오로 사도도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진리를 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정보가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가짜 뉴스, 조작된 정보, 편향된 보도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처럼, 민주주의를 지켜온 언론인들처럼,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복음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짜 뉴스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 사랑과 자비의 가르침을 전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랬듯, 우리도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복음의 진리를 전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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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배우고 닮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무엇을 가장 중히 여기셨는지 그리고 무엇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사셨는지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계명의 우선순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모습을 아주 자세히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끔 그렇지 못한 우리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는 나를 더 사랑하는 모습, 내 안위를 더 살피는 모습들 말입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기보다는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이기적인 말들과 세상의 유혹을 따르는 모습들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첫째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합니다. 늘 함께 머무르기를 원하고 그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하느님 사랑이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제 삶 안에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자치기
자치기 놀이는 한국에서 아이들이 마당이나 골목 등에서 긴 막대로 짧은 막대를 치며 노는 놀이로 메뚜기 치기·오둑테기·막대·마때라고도 한다. 주로 겨울철에 많이 즐기던 놀이로써 오늘날에는 자치기하는 아이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긴 막대를 채라 하는데 20-30cm가량이고, 알 또는 메뚜기라고 하는 짧은 막대는 7-10cm가량으로 양 끝을 뾰족하게 깎아 사용한다.
시작하는 때, 몇 동 내기를 할 것인지 미리 정한 다음, 채를 쥐고 공격하는 편을 포수, 수비하는 편을 범이라 한다. 땅바닥에 약간 구멍을 파서 알을 비스듬히 세워 놓고 떠 있는 쪽을 채로 쳐서 공중으로 튀어 오르면 힘껏 쳐낸다. 알(작은 막대) 이 날아가면 그 거리를 재어 승부를 결정하거나, 짐작으로 거리를 부르고 확인해서 승부를 정하기도 한다.
-위키 백과-
어릴 적 겨울철 동네 친구들과 했던 ‘자치기’
갑자기 생각나서 검색해 보니 잊었던 이름들과 모습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한 번쯤 다시 해 보고 싶습니다. 그 시절 동네 친구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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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딱 그만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하느님을
닮는 만큼
딱 그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딱 그만큼
하느님을
닮는 것이겠지요
내가
되는 만큼
딱 그만큼
나를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나를
사랑하는 만큼
딱 그만큼
내가
되는 것이겠지요
당신처럼
되는 만큼
딱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딱 그만큼
당신처럼
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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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0-31)
다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그대에게 바라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방식대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 그분의 계명을 완수할 준비도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는 상대방의 사랑을 얻고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우리도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분의 계명을 수행하고, 사랑하는 이가 언짢아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며 선의 기쁨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분을 진심으로 합당하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우리 동료 종들을 향한 큰 사랑의 증거를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진실할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주님, 당신께서는 이 탄생이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즉 당신의 아드님이 내 안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이 탄생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는 징조가 있기나 한지요,그렇습니다. 세 가지 믿을 만한 징조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 가운데 하나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종종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과연 우리는 시간이 더 이상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고, 다양성이라든가 물질적인 재화가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는 지점에 이를 수 있을까요? 실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 탄생이 실제로 일어나면, 어떠한 피조물도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이 여러분을 자극하여 하느님과 이 탄생을 향해 돌아서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번개 속에서 이와 유사한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번개가 번쩍이면, 나무이건 동물이건 사람이건 간에 번갯불을 통해 돌아섭나다. 어떤 사람이 번개를 등지고 있을지라도, 번개의 불빛은 순식간에 그 사람의 얼굴을 돌려세울 것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에 달린 수천 장의 나뭇잎도 번개가 번쩍일 때 번개 쪽으로 돌아섭니다. 이 탄생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자신들 앞에 있는 것이 제아무리 하찮을지라도, 그 속에서 순식간에 이 탄생을 향해 돌아섭니다. 전에는 여러분에게 걸림돌로 작용하던 것이 이제는 여러분에게 이로움으로 작용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은 완전히 이 탄생을 향해 돌아설 것입니다. 실로 여러분이 보거나 듣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여러분은 만물 속에서 이 탄생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실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모든 것 속에서 하느님만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태양을 바라보다가 다른 사물을 볼 때 태양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고, 모든 것 속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이 탄생을 놓치고 말 것입니다.(359)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그러나 선한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의 삶에서 이미 풍부한 위안을 나누어줍니다. 이들은 궁핍이 지배하는 경우에, 슬픔이 사람들을 내리누르는 경우에, 육체적 고통이 심하여 편안할 날이 없을 때에, 고향을 떠나 외로움과 슬픔 속에 잠겨 들어 있을 경우에, 이 외에 어떤 종류이건 불행이 고통스럽게 할 때에 그곳에 달려와 있습니다. 이들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기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며 따뜻한 말을 건네줍니다.
이렇게 하여 딱딱하게 경직된 것들이 부드러워지고, 무거운 것들이 가벼워지며, 걸림돌들이 극복됩니다. 당신의 성령을 통해 선한 일을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선한 일을 좋은 사람 안에서 행하시고. 좋은 사람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어떤 사람이 넘치는 재물 속에서 어떤 궁핍도 겪지 않으며 살고, 건강하여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지 않으며 , 어떤 위협도 받지 않고 자신의 고향에서 산다고 해도, 나쁜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어 이들을 조금도 신뢰할 수 없고.이들이 일으키는 술책, 사기, 분노, 불화, 함정들을 도저히 견딜 수 없거나 두려워해야 할 경우에는. 이 모든 것이 어떠한 기쁨이나 즐거움도 가져오지 못하고 결국에는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친구를 한 사람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인간적인 모든 상황에서 기쁨을 가질 수 없습니다.(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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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50328. 18:20 ㅣNo.181091
오늘 복음은 아주 쉬운 복음이지만 실천하기가 어려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어떻게 하는 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지는 단 하나로 정의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원론적인 말을 탈피해 다른 걸 묵상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가지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어떤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은 마음입니다. 인간적인 행동을 하고 싶지만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시는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한 번 꺾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써보려고 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영세를 받고 김웅렬 신부님 카페에서 활동을 열심히 할 때 카페에 올린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개신교 다닐 때부터 아주 싫어하는 게 있었습니다. 성전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언제 한번 그때가 아마 겨울이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감기 때문에 아마 휴지를 사용한 것을 그대로 성전에 떨어져 있거나 장괘틀 사이 같은 곳에 놓고 가거나 의자에 놓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최근에도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물론 놓고 나중에 챙기고 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걸 하지 않고 무심코 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에 대해 우리 모두가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그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걸 사용했으면 왜 자기 호주머니에 넣을 생각은 하지 않는가 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고 자기 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넣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혹시나 성전에 작은 휴지 하나도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마음을 쓰는 그런 마음이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한 10년 전에도 그렇고 언제 몇 번 성전에 떨어진 휴지 같은 게 있으면 줍는데 몇 번은 제가 관찰을 했습니다. 그것도 성전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그당시 미사 참례자 수가 약 400명 정도 됐습니다. 제가 미사 마친 후에 입구에서 관찰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떨어진 휴지조각을 줍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못보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400명이나 되는 신자가 지나가면서 그걸 다 못 보고 갔다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분명 본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봤는데도 왜 휴지가 그대로 있을까요? 그런 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성전에 휴지조각이 떨어진 것 같은 그런 일은 아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미사 참례하고 영성체만 영하면 최고의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인들도 미사의 은총에 대해 많은 주옥 같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미사 참례하고 은혜를 받고 나왔는데 나오면서 성전에 휴지가 떨어져 있는데 그냥 보고도 지나친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이 조금 전에 미사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속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말짱 도루묵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미사 때 고해성사를 보지 못해 모령성체를 하면 되지 않아서 그날 미사 때 영성체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 가정을 하겠습니다. 근데 그 사람이 미사 후에 어떻게 그 떨어진 휴지조각을 발견하고 손수 주어서 휴지통에 버리고 갔다고 한다면 저는 그 사람은 실제 미사 때 영성체를 하지 않았지만 그는 떨어진 휴지조각을 보고도 줍지 않고 간 신자보다도 하느님의 생명책에는 더 좋은 기록으로 남겨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분명 하느님의 천사는 그렇게 기록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니 그럼 그게 미사보다도 더 대단하단 말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문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렇게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다시 한 번 더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인 저도 그 사람이 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생각되는데 하느님께서는 더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작은 것 하나를 보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대단한 걸 의미하지는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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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배우 김혜수님의 사람 판단 안목
강만연 [fisherpeter] 250328. 20:19 ㅣNo.181092
개인적으로 저는 배우 김혜수님을 좋아합니다. 제가 그 배우를 좋아하는 이유가 보통 남자들이 좋아하는 이유와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김혜수님의 인터뷰 기사를 봤습니다. 27세 때 우연히 잡지에서 기사 하나를 보고 충격 먹었습니다. 생각이 일단 보통 사람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저는 그때 그 기사를 본 이후 김혜수님에 대해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졌습니다.
오랜 기간 김혜수님 관련 기사를 보면서 항상 느낀 게 있습니다. 연애인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봐도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 하는 격이 다른 사고방식 때문에 저는 김혜수님의 매력에 빠지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짧은 기사 하나 봤는데 역시 김혜수님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대표적인 하나의 사례만 언급하겠습니다. 사람을 판단한다기보다는 주목해서 보는 것 중 하나가 나한테 대하는 태도를 보는 것보다 남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며 그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는 데 참고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며 묵상한 게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도 살지만 또 다른 세상 바로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갑자기 왠 하느님 나라가 무슨 말씀인가 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완전 하느님 나라는 아니지만 신앙공동체 안에서 미리 우리는 가상의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며 산다는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곳에서도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평가를 받고 판단의 대상도 됩니다. 판단이야 그건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대부분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어떻게 대하고 그 대하는 태도가 자신에게 유리하면 좋은 감정을 가지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내심 서운한 감정을 가지는 게 보통 일반적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보다는 김혜수님처럼 그런 태도를 가져야 어떤 사람을 어떤 개인적인 편견없이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번 마음이 바뀌는 존재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항상 좋기만 한 게 아닙니다. 서로 관계가 좋을 땐 자기에게 좋게 대하면 누구나 좋은 호감을 가지지만 사람이라는 게 항상 그럴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반대되는 상황으로 그 사람이 자신을 대할 땐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상대방에 대한 감정에 손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신앙 안에서는 상처라면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김혜수님의 사고가 얼마나 좋은 생각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평소 자신에게 대하는 상대방의 모습만 보면 객관적으로 일관된 그 사람의 본질적인 요소를 보지 못할 수 있는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달리 말하면 그런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본 자신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것 때문에라도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신앙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김혜수님의 사람을 판단하는 여러 대목 중 하나인 이런 걸 우리에게도 적용해보면 좋은 점도 많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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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한 여학생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상상해 본 묵상글입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50328. 01:16 ㅣNo.181070
자정이 지나 이제 금요일입니다. 어제 제가 새로운 묵상글을 올리겠다고 했는데 이제 올립니다. 기대해도 좋으실 것 같다고 했는데 시간상으로는 거의 이틀 전이라 그때 떠오른 영감을 바로 작성해야 좀 그 느낌을 잘 전달될 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제가 최대한 그때 그 느낌을 살려보려고 해보겠습니다. 오늘도 조금 전 자정을 몇 분 남기고 여중생이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고 갔습니다. 이유는 뭔지 모르겠지만 계속 제 옆자리에 앉는군요.
이틀 전에 책을 보다가 이 애 때문에 중간에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젠 제가 하느님도 아니지만 하느님에 빙의를 해서 이 애가 마치 우리와 같은 죄를 짓는 죄인처럼 역할을 분담해 가상 상황을 설정해 묵상했던 것입니다. 앞전에 올린 글을 보신 분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냥 다른 설명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전에도 보니 이 애가 스터디카페를 퇴실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가방을 챙기고 일어서면서 의자를 살포시 밀어넣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은 행동을 하나 보면서도 이 애는 확실히 가정교육이 잘 된 애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아마 참고서를 보니 중2 여학생 같습니다. 제가 이 카페를 2년 전 이맘때 몇 개월을 이용했고 작년에 한 달 정도 가을에 이용하고 지금 틈틈이 시간 내 옵니다. 그동안 보면서 저는 천주교 신자도 이용하는 걸 봤습니다. 여기 몇 사람 이용하는 걸 가지고 전체를 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부끄러운 모습도 여러 차례 봤습니다. 사용 매너가 정말 완전 깡인 신자도 있습니다. 이런 건 원래 이 글에서는 전하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 전 그 애를 보면서 전하게 되었습니다. 애는 고작 해봐야 열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성인이고 또 성당을 다니면서 같이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동의 장소에서 매너가 참 엉망인 사람을 보면 너무나도 부끄럽습니다. 이런 것을 언급하면서 하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신앙인이라면 세상 사람들보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못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식 학문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세상 공동체와 같은 곳에서 최소한 지켜야 하는 매너 같은 걸 말합니다. 어쩌다 보니 삼천포로 흘렀습니다.
다시 이 애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애의 인상은 차분한 이미지입니다. 어제도 보니 수학과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애가 카페 규정을 어기긴 했지만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자기 공부만 열심히 하고 가는 스타일입니다. 조금 전에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중학생이 그 시간까지 하고 가는 걸 보면 성실한 학생처럼 보였습니다. 짐의 일부를 사물함을 사용하는 걸 보니 정기권을 구매한 것 같습니다. 잠시 와서 공부를 하고 가려고 카페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한 달 단위로 사용하는 사람에게만 사물함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틀 전 그때 한 생각이 왜 잘 떠오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멍을 때리면서 생각했습니다. 사람인 나도 이렇게 물론 카페 이용 수칙을 위반한 것이지만 위반한 것보다는 그렇다고 그 애가 규정을 어긴 것이 나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애가 오히려 애가 남이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습니다. 집에서 게임을 한다든지 아니면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낭비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일반 신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봤습니다. 이건 이해를 돕기 위한 예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허용된다면 평일미사에 참례하려고 애를 쓰는 신심 깊은 신자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최소한 주일만 지켜 최소한의 의무만 이행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얼마든지 미사를 참례하고 또 신심단체 활동을 할 수도 있는데 자기 개인 여가 시간을 선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단순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처럼 이 여학생도 이렇게 카페에 와서 규정을 위반하긴 했지만 성실하게 학생인 본분을 잘 간수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평일미사에 다른 여가를 선용하며 보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꺼이 미사참례를 하며 영혼을 가꾸는 사람처럼 그 애도 그렇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제가 오랜 세월 애들을 지도해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튼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그래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얼마나 그 정도 나이 같으면 유혹 아닌 유혹도 있을 텐데 그런 것도 뿌리치고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니 평일미사 참례를 열심히 하는 신자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입니다.
이 애는 물론 자기가 아마 제가 봤을 땐 부모님을 통해 카페 사장님과 어떻게 협의가 돼서 이용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혹 그랬기 때문에 어쩌면 규정 위반에 대해 그게 개의치 않을 수도 있지만 이런 전제를 배제하고 이 애 입장을 마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라고 생각해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카페 수칙을 어겼으니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짓고 마음이 편치 않은 것과 같습니다. 서두에서 제가 하느님은 아니지만 하느님으로 빙의를 해서 묵상해본다고 했습니다. 만약 제가 하느님이고 애가 우리와 같은 죄인입니다. 제가 이 아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살펴보시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까?
아주 좋은 평가를 하는 걸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좋은 평가를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어서 규정 위반이 별 중요하지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애가 분위기를 흐리고 엉뚱한 짓이나 한다면 어땠을까요? 그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상상이 가실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애가 규칙을 위반한 걸 우리가 마치 죄를 지은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비유를 한다면 우리도 죄를 지었다고 해도 실제 하느님은 우리가 지은 죄도 죄지만 그 죄를 지은 것을 상쇄시킬 만한 다른 좋은 행동을 하게 된다면 하느님의 눈에는 그 죄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못 본 채 하신다고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이건 보셔도 다른 이쁜 모습을 보이면 그 모습이 하느님 눈에는 더 눈길을 끌기 때문에 그래서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희망일까요? 일부러 죄를 짓는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가 비록 나약한 인간이라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실망을 시켜드리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런 부분에 연연하지 말고 다시 심기일전해 마음을 다잡아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다시 묵묵히 걸어가게 된다면 제가 이 여학생을 예쁘게 보는 것처럼 하느님도 그런 우리를 어여삐 보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의기소침하지 않고 밝게 신앙생활에 매진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틀 전 그 느낌을 그대로 살리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최대한 전해드리려고 애를 썼긴 했지만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새벽 한 시 십분입니다. 근 한 시간을 타이핑했습니다. 이제 저도 묵상글을 올린 후에 내일을 위해 귀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묵상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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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온 정성으로 이웃 향하면 하느님이 자연 곁에서 /
박윤식 [big-llight] 2025-03-27 ㅣNo.181069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물었다. “모든 계명에서 첫째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께서 이르셨다. “첫째는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온 마음,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니,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예수님은 온 정성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시며, 당신마저 실제 그리 사셨다.
봄철엔 바람이 유독 많이 분다. 이처럼 자주 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단다. 나무는 가지마다 새싹을 틔우려 할 게고, 그러려면 물을 끌어 올려야 하리라. 이 때 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그 물 끌어올림을 쉽게 도와준다나. 그래서 봄철에는 대체로 바람이 많단다. 소위 자연의 신비인 봄바람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자연의 바람처럼, 사랑의 싹을 틔우라시며 은총의 물을 주신다. 그러니 우리도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는 봄바람이 되어야만 할 게다. 사실 우리도 때로는 바람을 탄단다. 가끔씩 선한 감정과 아름다운 느낌에 가슴 울렁이면서, 어딘가에 휩싸인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봄바람 덕택일까, 그들과의 관계를 촉촉하게 하라는, 그분의 배려일까!
그리하여 나라는 하나가 둘이 되고, 우리라는 둘이 더 많아지는 것 같은 부푼 감정이 어느 날 문득 솟구친다. ‘사랑은 하나이되 그 대상은 둘, 곧 하느님과 이웃이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외침 역시 신선한 봄바람마냥 스며온다. 하느님 섬기면서 이웃을 소홀히 하지 않고, 이웃 섬기면서 하느님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게 균형 잡힌 ‘신앙인의 자세’다. 십계명에는 이 두 가지가 담겼다. 앞의 세 가지는 하느님이고, 나머지 일곱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절대 계명이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게 아닌, 신앙인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의무다.
가끔 우리는 하느님을 찾지만,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를 잘 모른단다. 율법은 본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 우리의 만남, 그리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 만남을 규정하는 것일 게다. 일상에서 하느님 경배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닌, 늘 만남이다. 그분께서는 신선처럼 다가오시는 게 아닌, 삶 안에서 늘 체험되시는 분이시기에. 위로와 보살핌이 필요한 이들, 영혼과 육신이 지쳐 있는 벗들에게 손 내밀 때 자비심이 나온다. 그 속에 머물러야만, '사랑이신 하느님'을 몸소 체험한다.
회개와 새로운 변화를 소망하는 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확신하는 것일 게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회개하고 돌아오려는 죄인에게 분노를 거두시며, 그 생명이 다시 향기내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 그렇지만 두려움 일색의 하느님 모습이 지배할 때 우리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무거운 마음은 사랑의 계명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부담을 덜고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출발일 게다. 우리가 그분 자비를 믿으면서 기꺼이 회개를 바란다면, 찐한 묵상, 어린아이와도 같은 무조건적 신뢰, 순수한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 사순의 시기에도 자연 오는 봄은 어김없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분다. 무심코 바라보는 바람이지만, 나무에게는 고맙기 그지없는 바람일 게다. 우리도 그런 바람이 되어야만 하느님 기운을 전하리라. 하느님 음성이 봄바람을 탄다. 사랑한다면서 상대를 짓밟는지를 가끔 돌아보자. 온 정성으로 사랑한다면, 그 정성으로 참을 줄도. 오늘 우리는 나의 이웃은 과연 누구이며, 또 누구까지가 진정한 내 이웃으로 생각되고 받아들이는지를, 늘 새롭게 묵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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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 학자에게, 그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이르십니다.
엄청난 칭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마르 12,38-40 참조).
이 율법 학자에게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구분되는 점이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슬기로운 율법 학자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12,30-31 참조) 대답하십니다.
율법 학자는 그에 더하여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다른 이가 없으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12,32-33 참조) 대답합니다.
이웃 사랑을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은 유다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다인들은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이웃 사랑을 뛰어넘어 하느님에 대한 최상의 경배와 예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슬기로운 율법 학자가 율법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죄악에 비틀거릴지라도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 주시는 하느님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 율법 학자는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성숙시켜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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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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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첫째 가는 계명을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대상은 셋입니다.
첫째는 하느님이고
둘째는 이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둘이지만
사실 둘째는 이웃이 아니라 나 자신이고
이웃은 셋째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 자신 그리고 이웃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의 대상에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랑의 모습을 볼 때 더 확실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나 자신을 미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을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너그럽지 않은 사람은
옆 사람에게도 너그럽지 못합니다.
즉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 대상이 누가 되었든지
사랑받으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사랑받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에서 느끼는
어려움의 방식은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도 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받는 것에서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때에 따라 받다가도 못 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우리가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나를 사랑해 주겠지하는 마음으로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랑받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이미 나를 향해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이미 나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받는 사람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내가 사랑받는 사람임을
알아차리는 것에
초점을 맞춰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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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첫째는 이것이다."(마르 12, 29)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한
저의 사랑을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사랑이란
하느님을
사랑해야
알게 되는
첫째가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름 아닌
사랑하는
우리 마음
안으로
오십니다.
우리
존재에 대한
참모습을
깨닫게 하는
사랑입니다.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끝없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개인과
공동체의
여정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중심이 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최선의
지혜이며
모든 관계의
바탕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더 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게 될 때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계명의
첫째도
둘째도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계명은
삶을 가리키고
우리의 삶은
사랑을
향합니다.
사랑을 행(行)하는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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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을 마음을 잡읍시다. 그분을 감동시킵시다!
제 어린 시절 집집마다 가축을 키워 내다팔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경험많은 어르신들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닭을 잡을 때는 날개를 잡으면 끝이다. 토끼를 잡을 때는 귀를 잡으면 꼼짝 못한다.
고양이는 목덜미를 잡으면 쉽다.”
그 대목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개는?
같이 사는 개들에게 실험을 해봤습니다.
꼬리를 꽉 잡았더니 엄청 으르렁댔습니다.
개는 잡지 말고 그냥 쓰다듬어주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를 잡아야 할까요?
손목을? 머리를?
요즘 시대가 바뀌어서 그 어떤 부위든 신체 접촉을 아예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다만 사람은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감동을 줘서 마음을 사로잡으면 다 잡는 것입니다.
그 어떤 교육적 노력도 먹히지 않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그 어떤 작은 변화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은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 순간, 즉 감동을 통해 마음을 사로잡은 때였습니다.
때로 마음이란 것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담길때와 마음이 전혀 없을때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과 사랑, 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마음과 정성, 진정성이 당긴 기도는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 안의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니 더 은혜롭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나 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저 형식적, 습관적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기도 생활이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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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신명 6,4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29절) 하신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며 인간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으로 여기심을 알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확증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한 율법 학자의 대답은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룬다. 사순절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 말씀은 율법 학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직도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신다. 율법 학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씀을,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아직 멀리 있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상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부의 모습이 닮은 것도 서로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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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면 무엇이 좋은가?
오늘 복음은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잘 알지만, 잘 하지 않는 계명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나의 무엇을 바치고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나의 무엇을 희생하고 있나요?
이 계명에 목숨을 걸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봐야 무슨 이득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 『그랜 토리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하고 주연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는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에서 수십 년간 일한 후 은퇴한 참전 용사로,
보수적이고 고집이 세며, 인종차별적 성향을 지닌 노인입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전쟁 중 저지른 과거의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며, 특히 한국전쟁에서 자신이 저지른 살상과 폭력에 대해 깊은 죄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부에 그의 아내가 사망하고, 월트는 더욱 폐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성당에 다니기는 하지만, 고해성사를 피하거나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에게 성당의 젊은 사제인 야노비치 신부는 죽은 아내의 유언이라면 끊임없이 진정한 고해성사를 권하지만, 월트는 이를 냉소적으로 무시하며 마음속 깊은 죄책감과 분노를 억누르며 살아갑니다.
어느 날, 월트의 옆집에 몽족 이민자 가족이 이사를 오면서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월트는 처음에는 이웃이 동양계라는 이유만으로 극도의 불편함과 혐오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옆집의 십 대 소년 타오가 동네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우연히 타오와 그의 누나 수를 구해주는 사건을 계기로 이들과 서서히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특히 타오가 갱단의 위협 속에서 범죄에 휘말릴 위험에 처하자, 월트는 타오에게 자신의 소중한
자동차인 포드 그랜 토리노를 관리하게 하고 집안일을 돕게 하며 타오를 보호하려 애쓰고,
점점 깊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웃을 돕고 보호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갖고 있던 인종적 편견과 증오를
반성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특히 그는 타오와 함께 몽족 가족의 식사에 초대받아 어색하지만 따뜻한 시간을 보내면서,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가족적인 사랑과 환대를 경험하게 됩니다.
월트는 자신이 평생 느끼지 못했던 사랑과 존중을 받으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차가운 증오와
편견에서 점차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타오의 가족이 계속해서 갱단으로부터 폭력적인 위협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월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진정한 자기 희생과 이웃 사랑을 통해 자신의 죄를 씻고자 합니다.
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는 야노비치 신부를 찾아가 생애 처음으로 진정한 고해성사를 봅니다.
이번 고해성사에서 그는 형식적인 죄가 아닌, 전쟁 중 저지른 진정한 죄악과 평생 품고 살아온
증오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회개하며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그의 영혼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들고,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화해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월트는 갱단 앞에 서서 총을 들지 않은 채 일부러 그들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의 죽음은 이웃을 위한 궁극의 희생이며, 그로 인해 갱단은 체포되고 이웃들은 안전을 되찾게 됩니다.
영화는 주변의 이웃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월트의 장례식 장면으로 마무리되며, 그의 유언에 따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 소년 타오에게
자신의 소중한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워런 버핏’은 인생에서 성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많은 재산이 성공이 아닙니다. 돈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줄 때 그게 성공입니다.
사랑받는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25세 전까지는 결혼해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사랑받는 가장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들어보니 남편을 존중하는 아내들은 좀처럼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사랑받는 게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가족이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고해성사를 해야 가족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가족에게 인정받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사랑은 나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고 이웃이 나를 사랑해줍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여러분들은 높이 오른 정치인들을 좋아합니까? 여러분들은 부자를 좋아합니까?
여러분들에게 자신을 희생한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대전의 ‘성심당’은 이런 마인드로 성공한 대표적인 가톨릭 신자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심당의 창업자인 임길순과 한덕수 부부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무료로 빵을 제공하며
시작했습니다.
창업 초기, 성심당은 주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며 상업적 이익보다 이웃 돕기를 우선시했습니다.
또한, 지역 농민들과 협력하여 질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기부와 봉사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성심당은 장애인 시설, 독거노인, 저소득층을 위한 후원 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지역 사회에 이바지했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지금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매일 신경 쓰고 살아야 할 전부라는 것을 인정할 때 참 행복의 문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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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마르 12,28ㄱㄷ-34).”
1)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는 율법학자의 대답은,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을 꾸짖을 때 했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2-23).”
주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 ‘사랑’으로 바뀌었지만, 율법학자의 대답과 사무엘 예언자의 말은, ‘같은 말’입니다.
순종은 무서워서 복종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을 꾸짖었을 때, 사울 왕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군사들이 두려워서 주님의 분부와 어르신의 말씀을 어기고 그들의 말을 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라고 변명했습니다(1사무 15,24).
임금이 부하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이상한데,
그 말은 그냥 핑계일 뿐이고, 하느님의 말씀은 안 듣고 부하들의 말만 들어 준 것은, 사울 왕이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제대로 섬기지도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고, 다윗을 임금으로 새로 뽑으셨습니다(1사무 16,1).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의 대답을 들으시고 그를 칭찬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율법학자가 그 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한 명 더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타나엘’이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예수님 말씀은, “나타나엘은 진실하고 충실한 신앙인이다.
그는 위선자가 아니다.” 라는 칭찬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이렇게 율법학자들 가운데에도 칭찬을 들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들이긴 했지만, ‘모든 율법학자들’이 다 위선자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세리들이 대부분 죄인들이긴 했지만, ‘모든 세리들’이 죄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4) 모든 것을 다하여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신명기 6장 4절-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대화는 서로 자기 의견을 말한 대화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나눈 대화입니다.
5) 그런데 사무엘 예언자가 했던 말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고 그 율법학자만 알고 있었을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율법학자들만 구약성경을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라면, 특히 성인 남자라면 모두 다 읽고 있었고, 성경의 가르침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지만, 잊어버렸거나, 덜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무시하고 있었거나, 실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는 것’이 아는 것으로만 그치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은, 분명히 칭찬이긴 한데, “알고 있는 것을 잘 실천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칭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칭찬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10,28).
이 말씀을 반대로 표현하면, “실천하지 않으면,
너는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한다.”입니다.>
성경은 지식을 쌓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읽고 묵상하고 삶으로 실천해서 구원과 생명을 얻는 책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표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고, 모든 계명들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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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2,28ㄱㄷ-34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과 참된 부활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시던 자리에 함께 있던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가 말하는 ‘첫번째’란 순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중요도, 다른 율법 규정들보다 먼저 지켜야 할 우선순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613개나 되는 율법 규정들에 유다인들이 역사적으로 지켜온 여러 전통과 관습법들까지 더해지다보니 실생활에서 신경쓰고 지켜야 할 규정들이 너무나 많아진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복잡하고 세부적인 내용이 담긴 여러 규정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경우도 있어서, 하나를 지키자면 부득이 다른 하나는 지키지 못하게 되는 일도 생겼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율법학자에게 더 중요하고 귀한 계명을, 다른 것들보다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규정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는데, 그것을 식별해내는 건 율법학자에게도 어려운 일이다보니 수많은 이들이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예수님께 자문을 구한 겁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에 대한 규정, 혹은 속죄 예식에 대한 규정 중에 하나를 말씀하실거라 생각했습니다. 유다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기며 우선적으로 지켰던 규정이 그런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의외의 답을 내놓으십니다. 신명 6,4와 레위 19,18을 복합적으로 인용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우리가 지켜야 할 제1계명으로 선포하신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되 적당히 대충 남들 눈치 봐가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도 최선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만큼 후회와 죄책감이 남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하고 아담처럼 그분을 피해 숨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기쁨과 행복을 맘껏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 모든 것을 걸고 혼신의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느님만' 열심히 사랑하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주일미사에 빠짐 없이 참석하고 혹시나 부득이하게 빠지게 되면 고해성사를 꼭 받습니다. 그 누구보다 경건하고 거룩한 자세로 미사에 참여하며 혹시라도 주변의 누가 떠들거나 부주의한 행동으로 집중을 방해하면 도끼눈으로 째려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계명을 어기지 않고 잘 지키고 있으니 그 정도면 열심한 신자라고, 나중에 꼭 하느님 나라에 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성당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자신이 더 갖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몫까지 욕심내고,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짓밟습니다. 자신을 귀찮게 만들고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비난하며 단죄하려고 듭니다. 내가 상처입히고 짓밟은 이들, 내가 단죄한 이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는 소중한 존재임을, 그들에게 잘못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 잘못한 것과 같다는 것을 모른 채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이라는 계명에 한 가지를 덧붙이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느님께 직접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없으니, 그분께서 당신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내로남불’하는 인간적 경향성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인 모습이 되지 않도록, 이웃을 항상 나 자신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어하는 건 이웃도 싫어하니 억지로 강요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어하는 건 이웃도 원하니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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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법”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이 서민들보다는 율사들의 특권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토라에 대한 율법학자들은 법률 전문 해석 인으로 서민들에게 해석을
해주는 것인데, 전체 성경의 내용보다는 조목조목 율법에 저촉되는지에 대한
유권적 해석인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법무사와 법률관계로 여길 수 있겠습니다. 서민은 법 정신보다는
자기의 입장에서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당면한 문제를 해석하는 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법무사에 가면 돈을 내듯이 율법학자들에게 문의하는 데에도 많은 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서민은 이래저래 어렵고 토라에 대해 무식한 부류의 사람들로 취급당하기
십상이었습니다.
토라를 일상생활에서 해석했던 후대 장기간의 작품인 탈무드를 보아서도 서민이 안식일 법에
무게를 두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6개의 항목에서 또 다시 안식에 대한 규정이
독립해서 한 권의 책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읽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긴 겉옷을 입고 다니고 사람들로부터 권위있는 사람,
높은 사람으로 대접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존경 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서 무료나 저가로
율법을 해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 뿐만 아니라 토라에 대해 권위를 갖는다는 바리사이들도 여기에 합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율법학자들 뿐 아니라 바리사이의 위선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권위 있는 대답을 하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 중에
한 사람은 토론을 벌여 자신의 입지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공개토론이 되어 버린
자리에서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법을 대라고 주님께 질문합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명석하게 하느님 사랑(신명 6,4-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을
설명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자부심을 가졌던 율법학자도 주님의 말씀에 감탄을 합니다. 형식적인 번제물과
희생제물 보다는 하느님과 이웃사랑의 실제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하는
율법학자를 보시며 그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칭찬하십니다.
율법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말씀 을 가르쳐
주셨을 뿐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입으로 하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거룩한 사순절을 보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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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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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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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천국의 가치를 깨닫는 삶
<2025.3.28>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6:14~31절)
❝천국의 가치를 깨닫는 삶❞
❚ 천국의 가치를 알고, 천국의 가치를 믿는 삶이 복된 성도의 삶입니다.
✔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의 삶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4~18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반발하며 비웃습니다(14절). 단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눈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 마음을 다 아신다.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15절,우리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돈과 부를 의의 표식으로 삼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기 위해 위선과 가식적인 모습들을 보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고, 모든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쓸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울 것(16~17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의 효용성을 강조하시기 위해 이혼 문제를 예로 드셨습니다(18절).
구제와 자선 행위가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옳다 하심으로 인정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고, 구제에 힘쓰고 있으며, 또한 어떤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주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과 성실함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천국의 가치를 알고, 믿고 사는 삶입니다. 천국은 어찌 되었든 믿고, 인정하는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소망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기준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받을 위로를 꿈꿔야 합니다(19~26절).
세상 속에서 값비싼 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며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한 부자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며, 심지어는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을 정도로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사로의 모습이 소개됩니다(19~21절). 거지 나사로와 부자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이들은 놀라운 반전의 결과를 맞이합니다(22~23절). 세상에 부자로 살았던 그는 음부(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나사로로 하여금 손 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와 부자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서로 왕래할 수 없습니다(24~26절).
부자로 살아간다고 해서 결코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입니다. 부자는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풀기는커녕 오히려 병들어 고통 중에 있는 나사로를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입술로는 ‘사랑하노라...’ 말하면서도 실제 생활의 현장에서는 사랑과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땅에서는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죽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이 있고, 여러 고통 가운데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면 하늘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삶은 우리 자신의 인생을 역전시켜줍니다. 죽은 후에 부자는 고통을, 나사로는 위로를 받게 되는 뒤바뀐 운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말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끝까지 부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지거나 없앨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며, 결정된 운명은 다시 번복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야 합니다. 천국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집 안에서 잔치를 즐기든지 아니면 밖에서 이를 갈며 통곡하든지 이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속에서의 화려함이 아니라 천국에서 누릴 위로와 화려함을 소망하고 꿈꾸며 살아가는 인생이 천국의 가치를 알고, 믿고 사는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 하나님 앞에서 누릴 안식을 믿어야 합니다(27~31절).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어 다섯 명의 형제들로 하여금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27~28절). 죽었던 사람이 다시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30절)이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믿지 않는 자는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거절해 버리십니다(29,31절)..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끝끝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말씀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어서 이 나라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기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내 눈 앞에 어떤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들을 봅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을 믿을 때, 내 자신이 가야 할 그 길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기적을 경험하고, 기이한 환상을 보았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고백할 때 천국의 길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길은 지금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서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무명할지라도 천국에는 내 이름이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이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인생이 천국의 가치를 알고, 믿고 사는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땅에 있는 가치에 나의 열정과 관심을 쏟는 삶이 아니라 하늘 소망에 가치를 두고서 전심전력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충만한 은혜 안에 잠겨,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과 함께 받은 은혜와 복음의 능력을 밖으로 그리고 가까운 이웃에게 흘러 보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6:14~3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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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평소보다 일찍 잤고 2시간여 일찍 일어났기에 졸립다.
매일 밥(묵상글 모아 게시하는 것)을 짓고 차려 놓고, 거의 매번 먹지도 못하고
새볔 바람(?, 미사참례)을 맞는 시간이 아직은 ----, 눈을 부쳐보자.
평화와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