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 본질로부터의 자유
by정지영Feb 06. 2025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Existence precedes essence)(장-폴 샤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중에서)
어느 날 아침,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혹은 “나는 이런 삶을 살 운명이야.”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본질을 가지고 살아가는 걸까요, 아니면 매일의 선택 속에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걸까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성격이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으며, 변화의 가능성을 쉽게 포기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사전에 결정된 본질을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형성하는 존재입니다. 철학자 장-폴 샤르트르는 이를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본질'과 '실존'이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철학적 논의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서양 철학에서는 본질(essence)이 실존(existence)에 선행한다고 보았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은 사물이나 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하기 이전에 일정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모든 개별 사물은 '이데아'라고 불리는 본질적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은 고유한 목적(텔로스, telos)을 향해 나아간다고 설명했습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신이 인간에게 특정한 본질과 목적을 부여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철학자들은 이러한 본질 중심의 사고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키르케고르와 니체는 인간의 존재가 사전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과 선택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을 통한 개인적 결단을 강조했으며, 니체는 기존의 본질 개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유는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장-폴 샤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즉,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질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정의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물들은 본질이 먼저 결정된 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연필은 ‘글을 쓰는 도구’라는 본질이 먼저 정해진 후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고정된 본질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선택을 통해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 갑니다. 샤르트르는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샤르트르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원래부터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즉, 우리는 자신을 ‘어떤 존재로 만들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 명제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에게 엄청난 자유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책임도 안겨 줍니다. 만약 인간이 미리 정해진 본질을 따라 사는 존재라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운명이나 본성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샤르트르는 인간에게 그런 변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환경이나 조건을 탓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샤르트르는 말합니다. "네가 그 자리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 놓여 있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물론 이 자유는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택이 곧 우리 자신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샤르트르는 이를 ‘앙가주망(engagement, 실존적 헌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선택할 때마다 스스로를 규정하며, 그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샤르트르가 자주 언급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 젊은이가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입할지, 병든 어머니 곁을 지킬지를 고민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정답은 없습니다. 만약 본질이 정해져 있다면, 그 본질에 따라 결정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본질이 없으며,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바로 ‘그 자신’을 만들어 갑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선택을 합니다. 취업, 연애, 결혼, 이직 등 중요한 순간마다 우리는 무엇이 ‘정답’인지 모른 채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은 실존적 선택을 회피하며 이미 정해진 본질에 따라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니까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잘할 수 없어."라거나 "우리 집안은 대대로 가난했으니 나도 부자가 될 수 없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기보다, 운명론적 사고에 빠져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기 발전을 가로막고, 삶의 가능성을 축소시킵니다.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면, 더 나은 선택을 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게 됩니다. 샤르트르는 이러한 태도를 ‘자기 기만(bad faith, mauvaise foi)’이라고 부르며, 인간이 본능적으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유를 회피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샤르트르는 우리에게 "네 삶을 스스로 만들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첫 번째 행동은 무엇인가요?
출처
https://brunch.co.kr/@jyjoung/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