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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무 담당 최주사
최 순 태
1987년 가을 나는 중구 남산4동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첫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남구 대명3동 계명대학교 맞은편에 위치한 남산4동은 인구가 25,000명이고, 직원이 25명이나 되는 관할지역이 넓은 큰 동이었다.
동사무소에 부임하고 나서 제일 처음 한 일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국민투표를 위한 선거인명부 작성이었다. 요즈음은 전산으로 선거인명부를 작성하지만 그 당시는 먹지를 대고 5장의 명부를 직접 손으로 작성하고, 선거인 성명은 반드시 한자로 기록을 하였다.
대구광역시의 인사발령으로 동사무소에 왔으나, 나의 보직은 없었다. 6개월간 무임소 공무원으로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주민등록등본과 인감증명 발급 보조 등을 하다 우리 동의 직원이 구청으로 인사발령이 남에 따라 자리가 생겨 주민등록 등․초본 발급업무를 맡게 되었다.
내가 발령받은 동에는 고등학교 후배가 선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낮선 타향 땅에서 동문을 만나니 반가웠고 의지가 되었다. 그가 상급기관인 구청으로 발령이 나자 후배가 맡은 병무업무를 내가 담당하게 되면서 비로소 병무담당 최주사가 탄생하게 된다.
지금은 병무청에서 온갖 업무를 취급하지만 내가 동에 근무할 때는 국가사무인 병무에 관한 업무를 각 지방자치단체가 위임받아 하고 있었다. 그 업무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업무이다.
징병검사 대상인 대한민국 장정의 호적부 발췌로부터 징병검사 지원업무, 예비군 자원 관리, 징병검사 및 현역입영, 예비군훈련 통지서를 교부하는 실로 방대한 업무였다.
그 당시 동사무소에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이라 4벌식 타자기로 모든 공문서를 처리 하였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타자기를 다루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매일 같이 밀리는 업무를 처리하자면 타자기 사용법을 익혀야 했다.
다행히 우리 동사무소에는 여자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사회복지전문요원이 타자기를 능숙하게 다루었으므로 그녀에게 타자하는 방법을 배워 각종 병사관계 서류를 처리하였다. 몇 개월 연습을 하니 능숙하게 타자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동에 병역 및 예비군자원이 많아 향토예비군 중대본부에서 병무보조로 단기사병(일명 “방위”) 두 명이 내게 배치되었다. 그 중 선임인 J상병은 후임인 S일병과 함께 나의 업무를 도와 차질 없이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동사무소를 거친 또 한명의 단기사병인 C는 내가 비산4동에서 죽전2동 으로 이사할 때 자진하여 이삿짐을 날라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업무를 하던 중 중대본부 사병들과 함께 두류야구장에서 축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지금도 내 방에는 그때의 사진이 있다. 최근에 서문시장 4지구에서 내의 장사를 하는 J를 만나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며 한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병무업무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있다. 그 중 남산4동 시절 이야기다. 어느 따뜻한 봄날 현역입영 대상자의 현역입영통지서를 교부하려고 당사자를 찾으러 거주지에 갔으나 대상 자원이 출타하여 난처한 지경이 이르렀다.
거주지 통장의 말을 들어보니 성주 수륜에 있는 고향에 갔다는 것이었다. 급히 출장 명령을 내어 시외버스를 타고 성주로 향하였다. 그 곳은 성주의 오지로서 고지대였다. 동네 사람들께 수소문 하여 그의 고향집을 찾았으나 잠시 전 다시 대구로 갔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대구까지 돌아와서 누나의 집에 머물던 입영대상자에게 통지서를 입대 하루 전 전달하고 훈련소에 입영시킨 일이 있었다. 동에서 병무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인사발령으로 구청으로 전보되어 여러 가지 업무를 보던 중 승진하여 관내에 대규모인 서문시장을 관할하는 대신1동으로 발령이 났다.
사무장님은 나에게 병무업무를 맡겨 두 번째로 병사업무를 맡게 되었다. 대신1동은 먼저 일했던 남산4동 보다 자원이 많지 않았으나 중대본부에서 병무보조로 1명의 단기사병이 파견되어 나의 업무를 도왔다.
병무업무는 엄격한 병역법 내지 향토예비군설치법의 적용을 받아서 도무지 담당자가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대상자들이 법을 위반하면 즉시 경찰에 고발을 해야 하며 수시로 경찰서에 출두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고발을 하면 반드시 징역 내지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나의 업무는 병역 관계법령 위반으로 수많은 전과자를 양산하는 일이 주된 업무가 되어 때로는 심한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만일 나의 재량으로 위법사항을 묵인하면 어김없이 1년에 한번 병무청에서 실시하는 업무감사에서 불이익을 당하곤 하였다.
때로는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동에서 다시 업무를 볼 때 관내에 거주하는 예비군자원에게 훈련통지서를 전달하려고 단기사병을 보냈으나 주소지에도 고향에도 거주하지 않아 도무지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훈련일이 다가왔으나 소식이 없어 참으로 난감하였다.
향토예비군법 위반자에 대한 고발을 하려고 공문을 작성하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출근하여 예비군 훈련대상자의 주민등록부를 보고 있던 내게 예쁘장하고 덩치가 큰 아가씨 한명이 찾아왔다.
내가 무슨 용무로 왔냐고 물어보니 그 사람은 내가 보던 주민등록부를 손으로 가리키며 가만히 웃음 지었다. 본인의 얼굴과 주민등록부 사진을 대조해 보니 남자가 여자로 바뀌었을 뿐 훈련대상자가 분명하였다.
잠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까지 나는 남자에게 훈련통지서를 발부했는데 웬 여자가 왔을까? 궁금해 하던 내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면서 본인이 원래 남자였으나 성전환 수술을 하여 지금은 여자가 되었고, 따라서 훈련을 받으러 갈 수 없었다 한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남자들과 훈련을 받을 수 있겠는가!즉시 구청 병무 담당자에게 연락하여 이러한 일은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병무청이 지정한 병원의 진단서를 첨부하여 병역면제 신청을 하면 된다고 하였다.
달성공원 방향에 소재한 가라오케에서 일하던 대상자에게 연락을 하여 진단서를 가져오면 병역면제 신청을 올려 보겠다고 전하니 며칠 후 그가 진단서를 가지고 왔는데 병무청 지정병원이 아닌 일반병원에서 수술한 기록이었다.
더 이상 다른 병원의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여 그가 제출한 진단서를 첨부하여 병무청에 상신하여 병역면제 조치를 받아낸 기억이 있다. 그 외에 같은 업소에서 일하던 동일한 예비군도 비슷한 조치를 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볼 때 대한민국의 남자로 훈련소를 거쳐 병역의 의무를 완수할 때 까지는 건강한 남자였으나, 점차 성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 밤업소에 근무하며 남자가 아닌 여자의 삶을 살았을 그들의 삶을 생각하니 매우 안타까웠다.
이렇게 병무업무를 마치고 동사무소의 다른 업무를 맡게 되었으나 때마침 나의 후임으로 그 업무를 맡은 여직원이 출산휴가를 가는 바람에 휴기기간 동안 업무대행을 하게 되었다.
마침 병무청의 업무감사 시기라 하는 수 없이 감사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대본부 및 병무보조와 같이 내 나름대로 열심히 감사준비를 하였으나, 적지 않은 지적사항이 나왔다.
종전에 이야기 한바 있지만 병무업무를 취급하다보면 병역법 등을 위반한 사람들에 대한 사법당국 고발로 많은 전과자를 양산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으므로 당사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법망을 벗어나려고 한다.
담당자인 내게 이야기 하소연 하였으나 내가 거절을 하자 상급자에게 직접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압력을 가하는 등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병무업무는 동사무소와 예비군중대본부가 연결되어 있어서 중대본부의 협조가 필요했다.
병역의무를 완료한 현역이나 보충역은 전역 후 1달 이내에 반드시 향토예비군대원 신고가 필수이나 단 하루만 늦어도 고발되어 사법처리를 받으므로 중대본부의 예비군신고대장 변경이 필요했다. 이러한 일은 수없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 때 인연을 맺은 단기사병들은 하나같이 성실한 친구들이었다. 그 중 한명은 중앙로 염매시장에서 떡집을 하는 친구도 있고, 서문시장의 상인으로 열심히 사는 친구도 있다. 특히 서문시장에 갈 때는 J와 자주 만난다.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반드시 병무는 거쳐야 하는 업무이다. 그만큼 국가안보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남북이 분단된 유일한 국가이다. 요즈음 한반도 정세를 살펴볼 때 결코 가볍게 하면 안 되는 중요한 업무이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은 심히 걱정스럽다. 만일 전쟁이 나면 기꺼이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사람이 적다고 한다. 과연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대한민국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울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나는 믿고 싶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이스라엘 청년들처럼 조국에 위기가 닥치면 나라를 위해 희생할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간절한 나의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나라도 튼튼해지고 북한도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고 통일도 되지 않겠는가!
첫댓글 참 어려운 업무를 잘 치루셨네요. 보통 사람들은 전혀 생소한 분야의 일을 처리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셨을 그때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한때 병무사무를 본적이있어 선생님의 글 을 읽으니, 옛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병무청에서 직접관장 하지만 그 때는 일이 매우많고 비교적 어려운 업무었습니다.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남북으로 분단된 국가의 아픈 단면을 보는듯합니다. 만약 해방과 함께 통일이 되었드라면 그와같은 병무업무는 없었겠지요.
국방이 무엇보다 엄중한 현실이니 하루빨리 독일과 같이 통일이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업무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옛날엔 동사무에 일 보러가서 많이 기다려야했던 적이 생각납니다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병무행정은 법률을 다루는 업무이고 시간을 지켜야 하는 일이라 융통성이 없고 잘못하면 책임이 따르는등 힘든일을 잘 수행한것 같습니다. 업무를 보조하는 방위병들과 지금까지 교우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과 좋은 인연을 맺은것은 선생님의 인품이 좋아서 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잘 읽었습니다.
수십년 지난 일을 이렇게 세세하고 정확하게 글로 써 주시고 재미난 에피소드도 곁들여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병역업무 참 중요하고 힘든 업무군요 어떤 다른 일을 맡으셨어도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잘 해내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