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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中正)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곧고 올바름 또는 그런 모양을 말한다.
中 : 가운데 중(丨/3)
正 : 바를 정(止/1)
다도(茶道)는 차와 물과 불이 최적의 조합으로 만나 이뤄내는 지선(至善)의 경지를 추구한다. 초의(艸衣) 스님은 차 안의 신령한 기운을 다신(茶神)이라 하고, 다신을 불러내려면 차와 물과 불이 중정(中正)의 상태로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먼저 좋은 찻잎을 제때 따서 법대로 덖는다. 찻잎을 딸 때는 계절을 따지고 시간과 날씨도 가린다. 덖을 때는 문화(文火)와 무화(武火), 즉 불기운의 조절이 중요하다.
물은 그 다음이다. 좋은 물이라야 차가 제 맛을 낸다. 다만 알맞게 끓여야 한다. 물이 덜 끓으면 떫고, 너무 끓으면 쇤다.
이제 차와 물이 만난다. 차를 넣어 우린다. 적당량의 차를 적절한 시점에 넣고, 제때에 따라낸다. 이러한 여러 과정 중의 하나만 잘 못 되어도 다신(茶神)은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찻잎을 따서 덖고, 찻물을 길어 끓이며, 찻잎을 넣어 우리는 모든 과정에 중정(中正)의 원리가 적용된다. 더도 덜도 아닌 꼭 알맞은 상태가 중정(中正)이다. 다도는 결국 이 각각의 단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얻는 데 달렸다.
인간의 삶에 비춰 봐도 중정의 원리는 중요하다. 차가 정신이면 물은 육체다.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유지하고, 문무를 겸비하며, 때의 선후를 잘 판단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세상이 나를 알아줘도 내가 그에 걸맞은 자질을 못 갖추었다면 물은 좋은데 차가 나쁜 것이다. 내 준비가 덜 됐는데 세상이 나를 부르거나, 내가 준비되었을 때 세상이 나를 돌아보지 않음은 문무(文武)가 조화를 잃은 것에 해당한다.
차와 물과 불이 조화를 얻어도, 너무 서두르거나 미적거려 중정을 잃으면 차 맛을 버린다. 과욕을 부려 일을 그르치거나, 상황을 너무 낙관하다가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경우다.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에서 노래한다. '체와 신이 온전해도 중정 잃음 염려되니, 중정이란 건(健)과 영(靈)이 나란함에 불과하네.'
차 좋고 물 좋아도 중정을 잃으면 차가 제 맛을 잃고 만다. 중정은 차건수령(茶健水靈), 즉 물이 활기를 잃지 않아 건강하고, 차가 신령스런 작용을 나타내는 최적의 상태를 뜻한다.
다신은 그제야 정체를 드러낸다. 사람 사는 일도 다를 게 하나 없다. 삶이 중정의 최적 상태를 유지하려면 어찌 잠시인들 경거망동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다도. 중정(中正)
차를 마실 때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마시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둘이서 차 한 잔씩을 앞에 놓고 마주보며 얘기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좋습니다. 그 상대가 친구나 연인이면 더 좋고, 부부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친구끼리라면 세상 돌아가는 얘기가 화두가 될 것이고, 연인 사이라면 장래의 부푼 꿈을 꾸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부부라면 당연히 집안 얘기를 하면서 정감을 나누면 됩니다.
다신전(茶神傳) 음다(飮茶)편에도 차 마실 때 손이 적어야 귀하다(飮茶以客少爲貴)고 하여 차를 마실 때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고 말했습니다.
차를 마시는 손(客)이 많으면 소란스러워 아담한 정취가 모자란다. 세넷이면 그냥 마시는 취미처럼 되고, 대 여섯이면 분위기가 들뜨며, 일곱 여덟이면 술잔을 주고 받듯이 베풂과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혼자 앉아 마시는 것도 이상(신령)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마주하고 마시는 것이 으뜸이다고 하여 둘이서 마주보며 차를 마시는 것을 제일로 치며 권장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과 정감을 나누면서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어디에다 비할 수 있겠습니까. 다신전의 말이 아니더라도 찻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세상 돌아가는 큰 얘기나 주변의 잡다한 작은 얘기들을 주고 받으며 차를 마시는 그림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 집니다.
차(茶)라는 것을 알고 생활화 하면서 내방하는 손님께 차를 내는 일이 이제는 제법 이력이 붙었습니다.
얼마 전에 절친하게 지내는 이웃분이 찾아와 차를 대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손님을 찻자리로 안내하고 서툰 솜씨지만 정성을 다해 차를 우리고 있었는데 그러한 내 행동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엄숙하게 보였습니다.
매번 차를 낼 때마다 느끼게 됩니다만 차를 마시면서 그 이유를 물어보면 머뭇거리다가 역시나 '어색해서 그렇습니다.'고 말하며 계면쩍게 웃습니다. 아마도 그 안에는 차를 든다는 것에 연상해서 다도(茶道)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도라는 글자에 도(道)가 들어가니 수행(修行)을 하거나 도를 닦는 것처럼 신성(神聖)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긴장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부터 차는 신성한 음료로 다뤄져 왔습니다. 나아가 그것에 걸맞은 정신을 부여하고 그 정신을 추구해 왔습니다.
석용운은 '다도(茶道)란 숙달된 차생활(常識的 수준)로 법도(法道)에 맞도록 잘 우려낸 차(科學的 차원)를 마시면서 느끼는 현현(玄玄)한 아취(雅趣)(哲學的 차원)가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 묘경(妙境)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絶對的 眞理 차원)'고 다도를 정의하였습니다.
이렇듯 차의 신성함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 상징성이 갖는 정신을 추구하였습니다. 다도를 철학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이것을 동양 삼국에서는 다도(茶道)라고 정의(定義)하였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는 다선일여(茶禪一如)라 하여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차(茶)와 선(禪)을 한 맥락으로 본 것으로 차 마시는 정신에 선이 있고 그 과정에 다(茶)의 도(道)가 통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차를 마시는 정신과 태도와 정성을 모아 나름대로의 도를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극동을 대표하는 한중일 3국은 고유한 차(茶)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3국은 각각 상이한 차(茶) 역사의 배경을 바탕으로 오랜 동안 상이한 방법의 차(茶)생활을 통하여 차(茶)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당연히 상징하고 추구하는 차(茶)의 정신인 다도(茶道)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차(茶)의 제조방법과 음용방법이 다르고, 다례(茶禮)의 표현형식과 차(茶)를 통해 강조하는 의미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차(茶)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려는 방식 역시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며, 나아가 독특하고 창의적인 언어적 표현형식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도 또한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 안에는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역사관과 사상은 물론이고 민족이 가지는 보편적인 정서(情緖)도 빈틈없게 포함되고 충실하게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언어를 찾는 것이 요체(要諦)이며 이를 위해 다인(茶人)들이 고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식(形式)이란 실질(實質)을 구체적으로 표현(表現)하는 것이지만 실질 내용 또한 표현하는 형식에 의해 그 내용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양쪽을 다 충족시키면서 고유한 다도(茶道)에도 마땅히 일치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질빈빈(文質彬彬=내용과 형식이 함께 빛남)의 요체요, 표리일체(表裏一體)의 미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에서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는 표현을 빌려 다도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센리큐(千利休)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서 화(和)는 화합과 조화이며 경(敬)은 공경과 존경을 표현합니다.
화목을 느끼게 되면 자연히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고, 서로 존중해야 화목해집니다. 그리고 화목하여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면 자기의 주위도 깨끗이 정리되고 누구나 마음이 맑아집니다(淸寂).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다인(茶人)은 '서로 화목하고 존경하며 깨끗하고 고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류(源流)는 일본다도의 창시자인 이큐선사의 근경청적(謹敬淸寂)이었습니다.
이큐선사 이전에는 '다도(茶道)'라는 것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송나라 때 전해진 음다(飮茶)풍속의 일환인 투차(鬪茶, 차 겨루기)만이 성행했을 뿐입니다.
이큐 소우준선사는 차의 살림살이에 대해 '사람이 다실(茶室)에 들어가면 겉으로는 남과 나의 구별을 떨쳐버리고, 안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한 덕을 함양하며, 서로 간에 교제함에 있어서는 삼가고(謹), 공경하고(敬), 사념을 품지 않고(淸), 평온해지며(寂) 결국 온 세상이 평안해진다.'는 말로 다도를 세웠습니다.
이큐선사의 근, 경, 청, 적은 후일 센리큐에 의해 화(和), 경(敬), 청(淸), 적(寂)으로 바뀌었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일본 다도의 핵심사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다도계에서는 정행검덕(精行儉德)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과연 어떠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무엇을 추구하려 하였을까요?
정(精)은 세밀한 선택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수련의 결과로 나타나는 정교함이기에 정행(精行)은 일본에서 말하는 화경(和敬)보다 더욱 엄격한 다인의 행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검덕(儉德)은 소탈하고 검소한 다인(茶人)의 덕(德)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산(茶山 丁若鏞)의 해석에 따라 덕(德)을 '行+直+心'으로 해자(解字) 해본다면 검덕은 곧은 마음으로 행하는 다인의 검소한 행실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의 다도정신인 정행검덕(精行儉德)은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서 논(論)한 후로 시작되었습니다. 다인은 '행동을 바르게 하고 생활은 검소하고 순수하며 성품은 덕(德)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경(茶經) 上 一之源에 보면 차의 기원에 대해 소개하면서 다도(茶道) 정신인 정행검덕(精行儉德)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차의 성질이 매우 차므로 이를 음료로 마시기에 알맞은 사람은 행실이 바르고 단정하며 검소하고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茶之爲用,味至寒,爲飲最宜, 精行儉德之人.)'고 하였습니다.
즉, 차의 한랭(寒凉)한 기운은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며 조용하여 외부의 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일종의 선천적인 대자연의 기질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은 차(茶)는 바로 정행검덕(精行儉德)하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음료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중정(中正)
우리가 내세우는 다도의 정신입니다. '중정'은 윤병상 교수에 의해 연구 발표 되었으며 많은 다인(茶人)들의 지지에 의해 정(定)해지고 현재까지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 내력에 대하여 윤교수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다도정신을 중정(中正)이라고 결정한 내력은 이러하다. 1975년에 한국 차의 정신은 《동다송》에 있는 중정이어야 한다고 연구 발표하였으며 대다수의 다인들이 동의하고 '중정'을 한국의 다도정신으로 삼게 되었다. 효동원에서 모이던 다인들의 모임이 모체가 되어 1977년 1월 15일에 다솔사에서 한국다도회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립되고 회장에 효당 최범술 스님을 옹립하였다. 그때 정식으로 한국의 다도정신은 '중정'이라고 채택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다도회가 발전하여 1979년 1월 20일에 한국 다인회가 결성되고 한국다인회의 회지격이었던 《다원》이란 차에 관한 전문적인 잡지가 창간될 때 한국 차의 정신은 '중정'이란 글을 처음으로 쓰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다인들은 한국 차의 정신은 초의선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중정’이란 것을 따라야 할 것이다.'
중정(中正)은 중국이나 일본의 개념보다 더 먼 거리에 있습니다. 초의(艸衣) 선사의 동다송(東茶頌)에 따르면 차의 본령(本領)은 중정(中正)에 있다고 했습니다.
동다송에는 중정(中正)을 다음과 같이 두 번에 걸쳐 쓰고 있습니다. 즉 본문에서 '체신(體神=몸과 신)'이 '수전유공과중정(雖全猶恐過中正=비록 온전해도 中正 지나칠까 두려우니)하니, 중정불과건영병(中正不過健靈倂=中正을 넘지 않으면 건전한 신령 아우른다)'이라 쓰고, 주석(註釋)에서 '다과의작(多寡宜酌=차의 많고 적음을 가늠하여 마땅하게), 불가과중실정(不可過中失正=中正을 넘거나 잃지 않도록 한다)'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요지는 물과 차(茶)는 각각 차(茶)의 몸(體)과 신(精神)이기 때문에 중과 정이 넘침을 두려워해야 하며 '중정'이 균형을 이룰 때 체와 신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석(註釋)에서는 이를 물과 차(茶)의 양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중(中)이 넘쳐 정(正)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차인(茶人)들에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최적의 균형 상태를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정(中正)의 어원을 살펴보면 근원은 보다 먼 곳에 있습니다. 중용(中庸 31章)에 보면 '제장중정 족이유경야(齊莊中正 足以有敬也)란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은 '엄숙하고 올바름은 족히 공경함을 있게 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중(中)이란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내외(內外)가 가지런하고 엄숙하면 족히 존경받을 만하다.'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중(中)은 외형을, 정(正)은 내면 즉 실제 이치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중정'이란 군자의 덕목으로서 내용과 형식의 표리일체(表裏一體)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주역에서는 중정이 괘효(卦爻)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중은 효의 위치를 보여주고 정은 음양의 이치에서 효의 위치가 바른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즉 중(中)은 형상을, 정(正)은 형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선조들의 다도는 우리민족의 정서처럼 온화한 가운데 정성을 다 하였습니다. 좋은 차를 마시기 위해 새벽에 산길을 걸어올라 가장 맑은 윗물을 길어다 그 물을 차물로 썼습니다.
차물을 끓일 때도 너무 급하지도 않고 너무 약하지 않은 불로 끓였습니다. 차를 마시기 전에 고개를 숙여 잠시 차 빛깔을 감상하고 입술에 살며시 적셔 향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다도입니다.
물이 맑지 않으면 아름다운 빛깔이 나오지 않으며, 불이 급하거나 모자라면 향기가 잘 어우를 수 없습니다. 안과 밖이 똑같은 것을 순향(純香)이라 하고, 설지도 않고 너무 익지도 않은 것은 청향(淸香)이라 하며, 불기운이 고르게 든 것을 난향(蘭香)이라 하고, 곡우(穀雨) 전 차의 싱그러움이 충분한 것을 진향(眞香)이라 하여 향(香)에도 격(格)을 매겼습니다.
불을 다룰 때도 체계를 두었습니다. '차를 달이는 요령은 불을 가늠하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화로에 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면 다관을 얹고 가볍게 부채질 하다가, 물 끓는 소리가 들리면 한층 세게 부치는데 이것을 문무지후(文武之候)라고 한다.
불기운이 너무 약하면(文火) 물이 유연한데, 물이 유연하면 다신(茶神)이 가라앉는다. 불기운이 너무 세면(武火) 불이 극렬한데, 불이 극렬하면 물이 너무 끓어 노수(老水)가 되고 차가 눌리게 된다. 이는 모두 중화(中和=中正)를 잃은 것으로 다인(茶人)이 취할 바가 아니다,'
이와 같이 물을 긷는 과정에서부터 차를 끓이고 마시며 음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중정(中正)을 깨우치며 실천하는 차 문화를 만들고 꽃피었습니다.
차를 마시는 과정에서도 정신의 수행과 중용의 의미를 깨닫는 선조들의 지혜가 바로 우리의 다도입니다.
어느 분의 말씀처럼 '중정(中正)의 의미를 확대하여 한국 차(茶)의 기본정신을 두 글자로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과도한 의식에 빠지지 않으면서 일상사(日常事)처럼 함부로 차(茶)를 다루지도 않는 자연스러움 속에서 형식과 실질면의 균형을 찾으려했던 선조들의 고유한 차(茶) 정신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다도(茶道)는 차를 마시는 방법이나 태도나 몸가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도라고 말할 때는 차 마시는 사람이 지녀야할 정신과 다도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인은 품격을 지녀야 합니다. 차를 마실 때는 물 흐르듯 상대의 이야기에 수긍하는 예(禮)를 갖춰야 합니다. 이 또한 함께 차를 마시는 일이 정신적인 나눔임을 뜻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정감(情感)을 나누는 일입니다. 사발에 물을 따르고 손길로 온도를 식히며 사람의 체온과 비슷하게 되었을 때, 마주하는 사람의 찻잔에 차를 따라줍니다. 따르는 소리가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같습니다. 차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정(情)을 나누어 마십니다. 차 한 잔에서 흐르는 향기와 빛깔이 천수를 살아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차를 마시는 일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둘 수가 있습니다. 재미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1200년 전 중국 당(唐)나라의 조주선사는 '끽다거(喫茶去=차나 한잔 마시고 가시게)'라는 화두(話頭)를 세웠습니다. 끽다거의 유래는 조주선사의 다음의 선문답(禪問答)으로 지금까지 널리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선사가 절을 방문한 한 학승(學僧)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전에도 여기에 온 일이 있는가?'
'온 일이 없습니다.'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
다른 학승에게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 학승도 대답하였습니다.
'예, 한 번 와본 적이 있습니다.'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
원주가 조주선사께 여쭈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무슨 연유로 전에 온 일이 있다는 이에게도 '차를 들고 가라' 하시고 온 일이 없다하는 이에게도 '차를 들고 가라‘ 하십니까?'
'원주야!'
'예'
'차나 한 잔 들어라.'
이것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역설하는 끽다거의 유래입니다. 선(禪)의 맛을 모르면 차(茶)의 맛도 모른다고 불가에서는 말합니다. 그래서 이큐 소우준선사는 주광문답(珠光問答)에서 일미청정(一味淸淨)하고, 법희선열(法喜禪悅)하니 조주선사(조주종=趙州從=조주종심)는 이를 체득했지만, 육우(陸羽, 다경의 저자)는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질타 반을 섞어 말하며 그 의미를 강조하였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에는 어렵고 힘든 일도 많고, 짜증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좋은 일에도 좋지 않은 일에도, 중도(中道)나 중정(中情)에도 평상심(平常心)을 가진다는 의미만큼은 다인(茶人)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되새겨 볼만한 일일 것입니다.
끝으로 차의 정신(精神)에 대한 바른 정의라고 생각되는 석용운의 韓國多藝에서 발췌한 글을 올려봅니다.
차생활에는 법도(法)가 있고 의식(儀)이 있고, 절도(度)가 있고, 예절(禮)이 있고 일거리(事)가 있고 기술(術)이 있고 기교(技)가 있고 즐거움(樂)이 있고 예능(藝)이 있다.
이러한 경지를 초월하여 달관한 경지에 이르면 절대자의 경지인 다성(茶聖)이요 다신(茶神)이요 다선(茶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밥 먹 듯 숭늉 마시듯 하는 생활로 차생활을 한다면 이러한 차생활은 상식적인 수준이다. 여기에는 법도나 예절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갈증을 메우는데 있어야 하는 숭늉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차생활이 오랜 세월을 두고 거듭하다가 보면 나름대로 법도와 체계가 갖춰지게 되는 데 이쯤 되면 과학적 차원으로 승화하게 되는 것이다. 즉 차생활의 일정한 법도와 의식과 예절과 차를 만들고 끓이는 기술과 그에 따르는 제반의 익숙한 솜씨는 모두가 과학적 차원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차를 끓이는 일정한 법도와 관혼상제(冠婚喪祭) 때에 차를 올리는 의식과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예절과 차를 잘 만드는 기술과 차를 맛있게 끓이는 솜씨와 차를 다룰 때 행하는 일반적인 모든 일거리 등이 일사불란하게 잘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제반 행동은 모두가 과학적 차원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익숙한 솜씨와 정돈된 행다법(行茶法)에서 얻어지는 쾌락과 예술적 심미감이 있다면 이는 철학적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평소에 차생활을 통해서 얻는 정서적 안정감이나 정신작용에 의한 자기 구현이 바로 철학적 경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차생활이나 그 발전 향상으로 얻어진 법도와 의식과 예절과 행다에 따른 기술적인 동작은 모두가 행동규범에 따른 육체적인 동작이요, 물질적인 행동반경의 영역에 속하므로 형이하학적인 얘기가 된다.
그러나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동작과 과정을 통해서 승화된 정신세계의 예술적 심미감이나 마음의 편안과 쾌락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로서 정신작용의 영역이다. 그래서 물질적 변화가 정신적 변화를 고무시킬 수 있도록 이루어진 의식과 법도가 바로 차생활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항간에 많이 행해지고 있는 전통다도 강좌나 전통다례의식 발표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더욱이 차를 끓여 대접하는 예절과 방법을 '다도'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생각으로 하루 속히 고쳐져야 할 일이다.
다도(茶道)란 차생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이지 차생활의 예절이나 법도 그리고 차를 끓이는 행다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차를 대접하는 예법이요 차 끓이는 방법일 뿐이지 결코 다도는 아니다.
또 하나는 '다도(茶道)'가 옳다 '다예(茶藝)'가 옳다 또는 '다례(茶禮)'가 옳다고 하여 많은 시비와 논란의 대상이 된 바 있는데 이는 도(道)와 예(藝)와 예(禮)가 의미하는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시비라고 할 수 있다.
도(道)의 경지와 예(藝)의 경지와 예(禮)의 차원이 각기 다르다고 하는 점을 알게 되면 그러한 논란은 자연히 해소될 줄로 믿는다.
예(禮)는 차생활의 예법이요 행동의식인 과학적인 차원이요 형이하학적인 범주이다. 그리고 예(藝)는 과학적 차원인 차생활의 예의범절과 법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정신세계의 심미안적 예술세계요, 그 예술성을 포함한 정신적 만족감 등을 말한다.
그리고 도(道)라고 하는 경지는 형이상학적 경지에서 최고도로 승화되어 이루어진 절대의 경지요 진리의 차원이다.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을 우리는 성인(聖人)이요 군자(君子)요 도인(道人)이라고 말한다.
이 경지는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로서 상대적인 것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의 세계로 선악과 시비와 유무와 색채와 형상과 언어가 떨어진 경지이다.
이처럼 도(道)는 절대 경지요, 예(藝)는 철학적 경지요, 예(禮)는 과학적 차원으로 엄격한 차별이 있는데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조상이 완성해 놓은 차문화에 도(道)와 예(藝)와 예(禮)의 경지가 다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 中(가운데 중)은 ❶지사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물의 한가운데를 상하로 통하는 세로 금으로 중심, 중앙을 뜻함과 형제를 위로부터 차례로 伯(백), 仲(중), 叔(숙), 季(계)라고 일컬을 때의 仲(중)으로서 쓰인 것이다. 또는 깃대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❷상형문자로 中자는 ‘가운데’나 ‘속’, ‘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전에는 中자가 무언가를 꿰뚫는 모습을 그렸던 것으로 해석했었다. 그러나 갑골문이 발견된 이후에는 이것이 군 진영에 깃발을 꽂아놓은 모습을 그려졌던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中자는 진지 중앙에 펄럭이는 깃발을 그린 것으로 ‘가운데’나 ‘중앙’을 뜻하고 있다. 中자가 ‘중앙’이라는 뜻으로 쓰이다 보니 때로는 ‘속’이나 ‘안’, ‘마음’과 같은 사물의 중심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中(중)은 (1)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의 뜻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과정임을 나타냄 (2)등급 같은 것을 上中下(大中小)로 구분할 경우 그 가운데 등급 중등(中等) (3)중국 (4)장기판에서 끝으로부터 둘째의 가로줄을 이르는 말 (5)마음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가운데 ②안, 속 ③사이 ④진행(進行) ⑤마음, 심중(心中) ⑥몸, 신체(身體) ⑦내장(內臟) ⑧중도(中途) ⑨절반(折半) ⑩장정(壯丁) ⑪관아의 장부, 안건(案件) ⑫가운데 등급 ⑬중매(仲媒), 중개(仲介) ⑭중국(中國) ⑮버금(으뜸의 바로 아래), 둘째, 다음 ⑯가운데에 있다 ⑰부합하다, 일치하다 ⑱맞다, 맞히다, 적중시키다 ⑲급제하다, 합격하다 ⑳해당하다, 응하다 ㉑뚫다 ㉒바르다, 곧다 ㉓가득 차다 ㉔이루다, 이루어지다 ㉕고르다, 고르게 하다 ㉖간격을 두다 ㉗해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바깥 외(外)이다. 용례로는 중도에서 끊어짐을 중단(中斷), 한가운데를 중심(中心), 사방의 중심이 되는 곳을 중앙(中央), 사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나 자리 중추(中樞), 일이 되어 가는 동안 중도(中途), 치우침이나 과부족이 없이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나 정도를 중용(中庸), 사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나 자리를 중추(中樞), 두 사물의 사이를 중간(中間), 일을 중도에서 그만 둠을 중지(中止), 중간에서 이어줌을 중계(中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함을 중립(中立), 길을 가고 있는 동안 도중(途中), 하늘이나 하늘 가운데를 공중(空中), 마음 속을 심중(心中), 도시의 안을 시중(市中), 정신을 집중시킴을 열중(熱中), 눈의 안이나 마음속을 안중(眼中), 코의 밑과 윗입술 사이의 우묵한 곳을 인중(人中), 돌에 박힌 화살촉이라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하면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한 큰 힘이 나올 수 있다는 중석몰촉(中石沒鏃), 터무니없는 말로 헐뜯거나 남을 해치려고 속임수를 써서 일을 꾸밈을 중상모략(中傷謀略), 일을 하다가 끝을 맺지 않고 중간에서 그만 둠을 중도이폐(中途而廢), 마음속의 욕망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외부의 사악을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함을 중경외폐(中扃外閉), 중립을 취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중립불의(中立不倚), 보통 사람은 감당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중인불승(中人弗勝), 마음속에 일정한 줏대가 없음을 중무소주(中無所主), 덕성이 발라서 과불급이 없는 화평한 기상을 중화지기(中和之氣), 시작한 일을 완전히 끝내지 아니하고 중간에 흐지부지 한다는 중도반단(中途半斷) 등에 쓰인다.
▶️ 正(바를 정/정월 정)은 ❶회의문자로 하나(一)밖에 없는 길에서 잠시 멈추어서(止) 살핀다는 뜻을 합(合)하여 바르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正자는 ‘바르다’나 ‘정당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正자에서 말하는 ‘바르다’라는 것은 ‘옳을 일’이라는 뜻이다. 正자는 止(발 지)자에 一(한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正자를 보면 止자 앞에 네모난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성(城)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正자는 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正자는 성을 정복하러 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는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正자는 자신들이 적을 정벌하러 가는 것은 정당하다는 의미에서 ‘바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正(정)은 (1)옳은 길 올바른 일 (2)부(副)에 대하여 그 주됨을 보이는 말 (3)종(從)에 대하여 한 자리 높은 품계를 나타내는 말 품수(品數) 위에 붙어 종과 구별됨. 정1품(正一品)으로 부터 정9품(正九品)까지 있었음 (4)조선시대 때 상서원(尙瑞院), 사역원(司譯阮), 봉상시(奉常寺), 내의원(內醫院), 내자시(內資寺) 등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3품(正三品) 당하(堂下) (5)조선시대 때 세자의 중증손(衆曾孫), 대군의 중손(衆孫), 왕자군(王子君)의 중자(衆子) 등에게 주던 작호(爵號) 품계(品階)는 정3품(正三品) 당하(堂下)임 (6)고려 때 전농시(典農寺), 서운관(書雲觀), 사의서(司醫署), 내알사(內謁司), 사복시(司僕寺)의 으뜸 벼슬 품계(品階)는 정3품(正三品)에서 정4품(正四品)까지 (7)신라 때 상사서(賞賜署), 대도서(大道署)의 으뜸 벼슬 35대 경덕왕(景德王) 때 대정(大正)을 고친 이름으로 뒤에 다시 대정으로 고침 (8)정립(定立) (9)정수(正數) 플러스(Plus) 등의 뜻으로 ①바르다 ②정당하다, 바람직하다 ③올바르다, 정직하다 ④바로잡다 ⑤서로 같다 ⑥다스리다 ⑦결정하다 ⑧순일하다, 순수하다 ⑨자리에 오르다 ⑩말리다, 제지하다 ⑪정벌하다 ⑫관장(官長: 시골 백성이 고을 원을 높여 이르던 말) ⑬정실(正室), 본처(本妻) ⑭맏아들, 적장자(嫡長子) ⑮본(本), 정(正), 주(主)가 되는 것 ⑯정사(政事), 정치(政治) ⑰증거(證據), 증빙(證憑) ⑱상례(常例), 준칙(準則), 표준(標準) ⑲처음 ⑳정월(正月) ㉑과녁, 정곡(正鵠: 과녁의 한가운데가 되는 점) ㉒세금(稅金) ㉓노역(勞役), 부역(負役) ㉔네모 ㉕군대 편제(編制) 단위 ㉖바로, 막, 때마침 ㉗가운데 ㉘가령, 설혹, ~하더라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바를 광(匡), 바로잡을 독(董), 곧을 직(直), 바탕 질(質),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거짓 위(僞), 버금 부(副), 돌이킬 반(反), 간사할 간(奸), 간사할 사(邪), 그르칠 오(誤)이다. 용례로는 어떤 기준이나 사실에 잘못됨이나 어긋남이 없이 바르게 맞는 상태에 있는 것을 정확(正確),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성품이 바르고 곧음을 정직(正直), 바르고 옳음을 정당(正當),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정의(正義), 특별한 변동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정상(正常), 올바른 길을 정도(正道), 꼭 마주 보이는 편을 정면(正面), 옳은 답이나 바른 답을 정답(正答), 일정한 격식이나 의식을 정식(正式), 본래의 형체를 정체(正體), 진짜이거나 온전한 물품을 정품(正品), 엄하고 바름을 엄정(嚴正), 옳지 않음이나 바르지 않음을 부정(不正), 공평하고 올바름을 공정(公正), 그릇된 것을 바로잡음을 시정(是正),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서 고침을 수정(修正), 알맞고 바름을 적정(適正), 거짓이 없이 참을 진정(眞正), 잘못을 고쳐서 바로 잡음을 정정(訂正),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침을 개정(改正), 태도나 처지가 바르고 떳떳함을 정정당당(正正堂堂), 소나무는 정월에 대나무는 오월에 옮겨 심어야 잘 산다는 말을 정송오죽(正松五竹), 옷매무시를 바로 하고 단정하게 앉음을 정금단좌(正襟端坐), 마음을 가다듬어 배워 익히는 데 힘씀을 정심공부(正心工夫),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레 함을 정심성의(正心誠意) 등에 쓰인다.
첫댓글 '중정'을 읽고 새벽 시간을 다 쓰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경식 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