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멀리 비춰주세요)/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
어긔야 즌데를 드대욜세라(진 곳을 디디올세라).”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다.
행상의 아내가 장사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비는 노래다.
1400년 전 이 곡은 조선시대 음악서적 <악학궤범>에 노랫말이 기록됐지만, 곡은 전하지 않는다.
정읍사는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고려시대 전통을 이어 처용무 등을 출 때 연주했다.
춤과 성악과 기악이 어우러진 음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궁중음악으로 쓰면서, 자연스레 성악 부분은 사라졌다. 이름도 19세기 말에는 ‘정읍’보다 궁중음악 ‘수제천’(壽濟天)으로 더 많이 불렸다.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애절함이 담긴 서민의 가락이 임금과 나라의 안녕을 비는 궁중음악으로 바뀐 것이다.
궁중음악 수제천은 태산준령 같은 위엄과 화려함을 갖췄다.
“쩌르륵!”
정적의 순간을 칼로 베듯 박이 공간을 가른다. 악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낸다.
잠룡(潛龍)이 꿈틀대는 듯한 역동성을 보이는가 하면, 붓끝이 일필휘지로 천근의 무게를 싣는 장중함을 드러낸다.
많은 이들이 수제천을 우리 음악의 백미로 꼽는 이유다.
독일에서 자란 작곡가 정일련은 2012년 베를린에 온 국립국악원 연주로 수제천을 처음 들었다.
‘절제미의 대명사’로 꼽히는 이 곡이 정일련의 귀에는 ‘굉장히 감정적인 곡’으로 들렸다.
그는 수제천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한 여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정일련은 오는 1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수제천을 모티브로 한 ‘천(天)-Heaven(헤븐)’을 초연한다.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로 유명한 임헌정이 처음으로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지휘봉을 잡는다.
그러고 보니, 윤이상(1917~1995) 작곡의 ‘예악’에도 수제천 가락이 들어 있다.
윤이상은 ‘동베를린 간첩단 조작 사건’에 연루됐다.
정일련의 아버지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