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세계를 지으셨다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만들었다는 개념과는 매우 다르다. 인간이 무언가를 만든다는 개념에는 자료가 먼저 필요하고, 만들려는 대상에 대해 지적인 설계를 해야 하며, 손과 발을 이용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지성과 다르며, 설계할 대상이 없으므로 지적 설계를 갖지 않으며, 인간과 같은 손이나 발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 방법은 만드는 것이 아니므로 적절히 표현할 언어가 없으나, '낳는다'고 하는 것이 좀 더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인간 부부가 '자녀를 만든다'고 하는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자녀를 낳는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것이 만드는 행위와 다른 점은, 자료를 사용하는 방법이 물건을 만드는 방법과 매우 다르고, 지성을 사용하는 것 아니라 '좋아함'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며, 설계할 대상도 전혀 없이 단지 자기와 닮은 것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창조론자들은 세계를 하느님이 지으셨다는 표현을 인간이 물건을 만드는 행위와 동일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진화론과 충돌을 일으키며 진화론을 공격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세계를 지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좋아함' 때문에 자체적으로 생긴 것이다. 존재는 바로 '좋아함'이 근원이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기쁘고 행복감을 주며 존재를 유지하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유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인하여 하느님은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이 불행감을 느끼는 이유는 존재 자체가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났을 때,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매우 큰 감사를 느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가장 큰 은혜이기 때문이다. 이 은혜가 지상의 어떤 값어치보다 크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우리는 늘 행복할 수 있다. 행복감은 정신의 문제이므로 이러한 은혜를 망각하고, 타자보다 앞서 가야만 그리고 더 많이 소유 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는 불행의 씨앗을 스스로 안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고, 만들 수 있으며,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여도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복은 안정을 주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원하는 더 많은 것을 이루게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매우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곧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만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이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느냐고 시계탑 종교인들은 반문할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창조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물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진행한다는 사실을 한편으로는 인정하면서 대부분은 인정하지 않는 불합리한 생각을 그들은 가지고 있다. 나의 생각, 활동, 나아가 모든 움직임 조차도 하느님의 활동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의 방법을 초월하는 기적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오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의 방법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추측이며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사물을 통하여 하느님은 작용하신다. 오늘 하루도 하느님이 우리에게 작용하므로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