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시끄러운 속에서 공부하라 又
讀來書에 乃知 四威儀中에 無時間斷이어 不為公冗에 所奪하고 於急流中에 常自猛省하여 殊不放逸하며 道心이 愈久愈堅固하니 甚愜鄙懷로다. 然이나 世間塵勞는 如火熾然커니 何時 是了리오 正在鬧中에 不得忘却竹椅蒲團上事이니 平時 留心靜勝處는 正要鬧中用이라. 若鬧中에 不得力이면 却似不曾在靜中做工夫로 一般이니라.
보내온 편지를 꼼꼼히 읽으면서 그대가 “평소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에서 공부가 조금도 끊어짐이 없이 쓸데없는 일에 매달리지를 않는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속속들이 스스로 살펴서 조금도 게으르지가 않다. 도를 향하는 마음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 굳세어지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제가 매우 즐겁기만 합니다.
그러나 세간의 번뇌는 활활 타는 불과 같으니, 그 불길이 어느 때 멈추겠습니까. 시끄러운 곳에서 바로 공부하는 일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평소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두는 까닭이 바로 시끄러운 곳에서 마음을 잘 쓰려는 것입니다. 만약 시끄러운 곳에서 힘을 얻지 못했다면 거꾸로 이는 고요한 곳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承에 有前緣이 駁雜하여 今受此報之歎이라하나 獨不敢聞命이라. 若動此念이면 則障道矣라. 古德이 云하되 隨流認得性하면 無喜亦無憂라 하고 淨名은 云하되 譬如高原陸地에 不生蓮花이나 卑濕淤泥에 乃生此花라 하며 老胡 云하되 眞如는 不守自性이나 隨緣 成就一切事法이라하며 又 云하되 隨緣赴感靡不周하나 而常處此菩提座라하니 豈欺人哉리오.
편지에서 “전생의 인연이 복잡하여 지금 이 과보를 받는다”고 탄식하나, 이것만큼은 제가 감히 인정하지를 못하겠습니다. 이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도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라나 존자는 “세상 인연을 따라서 그 성품을 알면 기뻐하거나 근심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 정명(淨名, 유마거사)은 비유하여 “좋은 땅에서는 연꽃이 피지 않으나 낮고 습한 진흙탕에서는 이 꽃이 핀다”라고 하였으며, 부처님께서는 “진여는 자기 성품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연을 따라서 모든 법을 이룬다”고 하셨으며, 또 “중생의 인연을 따라서 감응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늘 이 보리좌에 계신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들이 어찌 사람들을 속이겠습니까.
若以靜處로 為是하고 鬧處로 為非이면 則是壞世間相하고 而求實相이며 離生滅하고 而求寂滅이라. 好靜惡鬧時 正好著力이니 驀然鬧裡에서 撞翻靜時消息하면 其力이 能勝竹椅蒲團上 千萬億倍리라. 但相聽이니 決不相誤니라. 又 承에 以老龐兩句로 為行住坐臥之銘箴이라하니 善不可加로다. 若正鬧時 生厭惡하면 則乃是自擾其心耳라. 若動念時 只以老龐兩句로 提撕하면 便是熱時 一服清涼散也니라.
만일 고요한 곳을 옳다 하고 시끄러운 곳을 그르다고 하면 이는 세간상을 없애고 실상을 구하며, 생명을 여의고 적멸을 구하는 것입니다.
고요한 것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할 때가 바로 힘써서 공부해야 할 좋은 시기입니다. 시끄러운 속에서 갑자기 고요할 때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 힘이 방석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 천만억 배 더 뛰어난 것입니다. 오직 제 말만 귀담아 들으셔야 합니다. 결코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편지에서 “방 거사의 두 마디로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에서 공부 길잡이를 삼는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만일 시끄러울 때에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면 스스로 그 마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만약 생각이 움직일 때, 다만 방 거사의 두 마디를 가지고 마음을 챙기시면 바로 더울 때에 시원한 청량산을 한번 먹는 것입니다.
公이 具決定信하니 是大智慧人이라. 久做靜中工夫기에 方敢說遮般話이나 於他人分上에 則不可니라. 若向業識이 茫茫한 增上慢人前에 如此說이면 乃是添他惡業擔子리라. 禪門의 種種病痛은 已具前書이거늘 不識커라 曾仔細理會否아.
그대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추었으니 슬기로움이 큰 사람입니다. 그대가 고요한 곳에서 오래 공부했기에 비로소 감히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업의 분별이 많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면 나쁜 업만 그에게 더 보태 주는 것입니다. 禪門의 온갖 잘못된 점은 벌써 앞 편지에서 다 써 놓았습니다. 꼼꼼히 이치로서 잘 알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 공부를 하는 사람은 공부를 한만큼 생활 속에서 그 모습이 드러난다. 애를 쓰며 아무리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생활 속에서 슬기롭지 못하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공부를 잘못한 것이다. 잘못한 공부는 공부를 하지 않은 것과 같다. 참선한 만큼 나의 모습이 달라져 있는지, 나의 모습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항상 점검할 일이다.
출처: 禪 스승의 편지 , 대혜 종고 『서장』, 원순 옮김
첫댓글 이번 편지는 짧은 편이라 다행히 한번에 공부할 수 있네요.
조금만 집중하여 읽으면 이해가 가능한 글입니다.
참선에 보현행원을, 부처님 공부를~ 넣어도 통하는 말입니다.
나와 주변의 변화된 모습을 점검하는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서장이 어려운 편이라 일기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저도 서장을 처음 봤을 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된 곳이 많았거든요?
지금 와서 보니, 서장의 가르침이 굉장히 높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서장의 경계는 화엄, 그리고 보현행원의 경계입니다.
대혜선사의 공부가 그만큼 높았던 것이지요.
또 그런 경계니 보조지눌스님이 서장을 보고 마지막 응어리가 풀렸을 겁니다.
그런 서장이니, 어찌 쉽겠습니까
대혜의 편지를 보면 찬탄, 공경이 밑바닥에 깔려 있지요?
그리고 가르침도 공양의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드립니다.
문체에서 느끼실 수 있지요?
오늘 가르침은 분별, 일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편지에서 “전생의 인연이 복잡하여 지금 이 과보를 받는다”고 탄식하나, 이것만큼은 제가 감히 인정하지를 못하겠습니다. 이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도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 공부 잘 하다가 일념을 일으키지요?
그래서 선사께서 주의를 주시는 겁니다.
마라나 존자는 “세상 인연을 따라서 그 성품을 알면 기뻐하거나 근심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 정명(淨名, 유마거사)은 비유하여 “좋은 땅에서는 연꽃이 피지 않으나 낮고 습한 진흙탕에서는 이 꽃이 핀다”라고 하였으며, 부처님께서는 “진여는 자기 성품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연을 따라서 모든 법을 이룬다”고 하셨으며, 또 “중생의 인연을 따라서 감응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늘 이 보리좌에 계신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들이 어찌 사람들을 속이겠습니까.
---> 공부가 잘되면 좋다 나쁘다 잘된다 안 된다 이런 분별이 없어요
잘되면 잘되는 대로 못되면 못되는 대로입니다.
좋은 것도 없는 속에 좋음을 느끼고,
나쁜 것도 없는 속에 나쁜 걸 봅니다.
허망한 분별, 한 생각이 일지를 않아요
그대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추었으니 슬기로움이 큰 사람입니다. 그대가 고요한 곳에서 오래 공부했기에 비로소 감히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업의 분별이 많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면 나쁜 업만 그에게 더 보태 주는 것입니다. 禪門의 온갖 잘못된 점은 벌써 앞 편지에서 다 써 놓았습니다. 꼼꼼히 이치로서 잘 알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남에게 조언을 하는 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못 알아 들으면 오해만 하거든요?
화엄경에서 문수가 선재에게 '선지식의 허물을 보질 말아라'라고 당부하는 거, 기억나십니까?
공부가 안 된 분들, 안 하는 분들에게는 대혜같은 스승님도 말을 할 수가 없다, 는 대목이 참 안타깝습니다.
현실이 그래요
대혜선사께서는 꼭 질문한 분을 칭찬하는 말씀을 하시고, 말씀 하시고는 또 다른 예를 들어가며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는 하실 수 없는 일인것 같아요.
보현선생님의 댓글 가르침도 마찬가지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_()()()_
오래전에 잠시 들여다 보았던 어록인데 원문의 어려움과 번역의 매끄럽지 않음에 정신이 팔려, 대혜종고 스님께서 보현행자이심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다시 들여다 보니 과연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벌써 입적하신
불교계 문학도 이신
스님 상좌스님 도량을 7개월 정도 선수련회 참석.
스님께선 참나,본래면목을 본후 점수로 보현행원 하는거라고.
스님 광적으로
모시는 몇십명들
선수행 도량 이라지만 행동들이 너무 거칠고......
스님께 화두만 깨치면 자비가 저절로 생기신다기에
깨치는 길 가는 중간에 불자들 중도포기 하고 못올것 같다.
질문 드리니
제 눈에 그리 보일뿐
아무 문제 없다고
그런 눈으로 계속 바라보면 도량 못올수 있다고~~
결국 안갑니다만.
스님앞에서
한 신도 덩치 크다고
앞 가려진다고 앉지말라고 방석도 빼고 작태들이
차마 입에 다 담기힘들어....
절이 싫음 가벼운 중이 떠나야지
하고 그만 갑니다만__
불자들 조차
배려,눈웃음 한번
주는걸 그리 하기 싫어 하면서
화두 깨치면 뭐하노?
싶어 도량 발 뺐습니다.
에구...현 우리나라 절집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