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의 원효 禮讚詩
著論宗經闡大猷 馬龍功業是其儔(밝힐 천/猷 꾀 유/무리 주, 짝 주)
如今賴學都無識 還似東家有孔丘(賴 의뢰할 뢰/)
경의 근본(宗)을 생각하며 논을 짓고 대의를 밝혔다.
그 功績은 마명이나 용수와 똑같으나
지금의 후학들은 모두 무식하여 그것을 모른다.
그야말로 우리네 집에 공자와 같은 인물이 있었도다. 48
예찬시 2
唯我海東菩薩 融明性相隱括古今(括묽을 괄)
和百家異諍之端 得一代至公之論
단지 우리 해동의 보살뿐인데
성과 상을 두루 밝히고 고금의 불학을 회통했으니
백가의 다른 논쟁의 끝머리를 화정하여
일대의 지극한 公平의 논을 얻었구나 49
신라원효의금강삼매경론연구/서영애/민족사 2007
첫댓글 원효는 의상에 가려 열반 후 400여년 동안 잊혀져 있다가 고려에 와서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재발견되어 화쟁국사라는 칭호를 얻고 겨레의 스승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신라 화엄은 의상계가 꽉 잡고 원효는 방계로 밀려났다지요
의상도 굉장히 훌륭한 스승님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원효는 못 따라 가요
의상 역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찾아 굉장히 구도를 했으나,
화엄에 딱 가로막힌 느낌.
화엄 이상을 보지를 못하셨던 같습니다.
더구나 의상 때는 40화엄이 없던 때라 화엄을 보현행원과 연결시키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화엄의 교학은 알았는데 실천법을 몰라 무지~~~ 헤맨 흔적이 여기저기 있지요.
당시 중국에 유행하던 동산법문(참선)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관법도 관심 있다가 결국은 정토신앙으로 화엄을 연결시키려 한 듯합니다.
그래서 의상을 엄정융합(嚴淨融合)으로 화엄을 실천의 가르침으로 만든 분으로 봅지요
원효는 여러 경론을 공부한 뒤에 인생 후반부에 화엄으로 갑니다.
공부가 얕을 때는 화엄의 가치를 모르다가 공부가 익어가면서 화엄적으로 변하며 화엄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원효는 화엄뿐 아니라 여러 경론에 열려 있어요.
화엄 말고도 아는 것이 많습니다.(의상은 화엄밖에 모름)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공부가 깊어지면 전부 화엄적으로 변한다고.
화엄을 몰라도 보는 관점, 생각하는 경계, 말과 행동 이런 것들이 전부 화엄적으로 변해요.
원효는 그런 스승님입니다.
원효는 기신론이 경론 중에 최고로 알던 분이지요.
그런데 기신론도 화엄과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후대 중국 화엄종은 오히려 기신론에 영향 받기도 해요.
왜 닮은 점이 많은가?
모두 궁극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경론과 달라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원효대사님~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