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본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암살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지금부터 124년전(1895년 10월 8일). 그날.명성황후의 목숨을 끊은 자객의 칼은 일본 신사의 귀중품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일본인 자객 토오가쯔아키(藤勝顯=등승현)가 신사에 칼 기증
쿠시다 신사 정문
◆ 쿠시다 신사 내부, 신전(神殿)의 모습
쿠시다 신사는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해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은 'MBC 시사매거진 2580' 취재팀과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간사 혜문스님 등 일행에 대해 신사 관계자는 대단히 난처해 했다.
"이 칼을 공개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쿠시다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阿部憲之介) 궁사는 상기된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
자주색 보자기에 싼 칼을 취재진에게 풀러 놓았을 때.
가슴 한쪽에서 피가 울컥 쏠리는 느낌이었다.
전체 길이 120㎝. 칼날 90㎝.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적혀 있었다.
칼주인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라고 한다.
신사의 궁사는 잠시동안의 정적을 깨며 이 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립니다.
16세기에 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입니다. "
"제작 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
다시 말해 사람을 베기위한 의도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는 명치 41년(1908), 토오가쯔아키 란 분이 신사에 기증했다. 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칼을 빼고 있는 궁사의 모습
칼집에 새겨 놓은 글씨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찌르다.'
’쿠시다 신사측 명성황후를 이 칼로 베었다. 고 기록
◆ 기증관련 서류
[좌측상단에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 란 기록,
하단에는 기증자의 이름(藤勝顯)도 보인다.
그러나 기증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문서에는 모든 것이 다 적혀 있었다.
토오가 이 칼을기증할 당시 궁사가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는.서류에는 “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 대목을 우리가 소리내어 읽자 궁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이 사진이 공개되면 혹시라도 몰고 올 정치적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토오가 정말 명성황후를 절명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왕비의 침실에 난입한 사람중 하나란 것은 맞다.
사건 당시 왕비는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가 살해한 사람이 궁녀일 수도 있고 궁사는 그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긴 설명을 늘어 놓을 수록 난처해질 거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런 심경을 반영하듯 그의 얼굴은 취한 술꾼 처럼 붉게 달아 올랐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긴장시켰다. 이곳은 신사이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젠도는 16세기부터 수 많은 사람의 생명을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궁사는 말을 마치고서 이내 칼을 거두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안부외의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 히젠도 : 한 눈에 명검임을 알 수 있다.
사진속의 칼에 방안의 병풍이 반사되고 있다.
* 토오가쯔아키(藤勝顯)는 누구인가? *
토오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 중에 하나이다.
일본의 저명한 문필가 쯔노다 후사꼬의 [명성황후-최후의 새벽]에는 사건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나카무라다테오, 토오가쯔아끼, 데라사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장에 의하면 “나카무라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재되었다.
정리하자면 토오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로 최조 난입한 3사람 중 하나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끝 .
매우 예리하게 연마되어 있다.
첫댓글 전쟁도 하지 않는 나라의 왕비를 칼로 살해한 저 야만 민족을 좋은 나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미친 한국인들이 존재하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친일파에서 친이 친할친이 아니라 아비 친 이리라죠
저게 자랑스러울까?? 난 챙피 할것 같다.
나라말아 먹은 민씨 일파...
@cutian 나라를 말아먹었어도 처단을 했어도 우리가 했어야죠
남의나라 왕비를 궁전까지 쳐들어와 시해하다니
우리에겐 치욕이고 분노할 일입니다.
저걸 구경하러 가는 뇌가 없는 한국인 많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