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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2a 울산강의-창세기 5장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부터 나오는데 창세기 5장부터 보게 되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라고 사람 창조가 다시금 나옵니다. 이런데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약간의 불만이 있지요.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데 왜 되풀이하느냐? 그렇게 생각할 건데, 그것은 성경에 적는 하나님의 적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술하는 방법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렇게 알려있는 게 아니고,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를 기술하는 미래에 서서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쪽으로 이렇게 적는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돼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과거는 잘 기억하잖아요. 과거 내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어떻게 살았고 잘 아는데. 과거를 이만큼 축적된 상태에서 거기에 미래의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버릇이라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관리하시고 인도하실 때에는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에 있는 우리는 끌어당기는 식으로 인도하십니다. 미래의 관점을 알라는 거예요. 우리 보고. 과거는 저 이랬습니다. 라고 우린 과거에 대해서 굉장히 집착을 하는데 그런 것은 불신자들이 사는 방식이고. 과거에 잘 나갔었다. 뭐 이런 이야기들. 미래에 잘 나갈 것이라고 여기고 살아가시라 이 말입니다. 성도라면.
미래에 이렇게 된다면, 과거의 지금의 어려움과 곤경, 이런 것은 거뜬히 능히 이겨낼 수가 있는 겁니다. 미래를 생각해 볼 때 현재 있는 고난은 고난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현재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이거는 게임이 안 된다. 비교도 안 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7절의 말씀이죠.
세상 모든 사람들은 과거에 자기가 노동한 것을 그걸 토대로 해서 이만큼 내가 고생했으니까 그 보상책으로 미래에 해주세요. 과거를 포기 안 하는데, 성경은 미래에 일어날 영광은 거저 받은 영광이라면, 지금 네가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도 미래의 영광이 왜 거저 줄 수밖에 없는가, 그것이 왜 축복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절차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미래의 관점에서 인생을 살아야지, 과거를 자꾸 그걸 들추면서 살아가는 그런 인생은 불신자들이나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제가 가끔 깜짝 놀라는 것은 스무 살 때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 깜짝깜짝 놀랍니다. 서른 살 때 나라는 인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놀랄 정도의 큰 충격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 과거에 서른 살 때 내가 잘났던 못났던 간에 지금 없는 사람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이에요. 우린 버릇이 이상하잖아요.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해요. 스물다섯 살 때 이렇게 했고, 서른두 살 때 이렇게 잘 나갔고. 그 사람 없잖아요. 그 사람 없고 늙어빠진 이 모습 그대로 아닙니까? 저 늙었지요? 왜 없는 사람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느냐? 있는 사람 이야기하고 앞으로 될 사람 이야기해야지 없는 사람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느냐 말이죠.
그것은 우리가 사는 버릇이 성경적이 아니고, 너무나 세속적이기 때문에 과거 관점에서 미래를 내다보려는 그러한 쓸데없는 버릇이 더러운 버릇이 들어서 그래요. 하나님은 미래에 이렇다. 그러니까 지금 일어난 것에 대해서 그걸 전부로 여기지 마라. 그것 가지고 울고불고 심각하게 자꾸 생각하지 마라. 심각할 게 아니다, 그거는.
미래가 이미 보장되었잖아. 지금은 흘러가는 물결에 불과한데. 여기 서른두 살, 지금 나이가 서른두 살이라면, 삼십이 세라면, 삼십이 세의 내가 계속 삼십이 세 아니잖아요. 내년 되면 삼십삼 세 되잖아요. 결국 내년만 되면 삼십이 세의 나는 이 세상에 없어요. 날아가 버렸어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동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그런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작가가 아주 상상력이 풍부해요. 고양이가 한 마리 나오는데, 그 고양이가 웃음소리만 남기고 꼬랑지부터 사라져가는 고양이가 나옵니다. 뭐만 남는다고요? 웃음소리만 남아요. 이 표현이 상징이 아주 깊은 의미가 있는데, 우리는 뭔가 개그맨이 웃기면 참, 그 이야기 우습다. 이것만 채택하면 되는데, 누가 웃기는데? 꼭 누굴 찾아요.
그게 오늘 본문 창세기 5장에 어긋난다 이 말이죠. 창세기 5장에 아담이 몇 년을 살았던 그 다음에 셋이 몇 년 살았던 상관없이 그거는 웃음만 날려버리는 고양이처럼 하나의 점점으로 토막 내어서 날아가 버릴 존재거든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은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를 잇는 쪽으로 일하신다. 그러니까 너의 과거나 너의 현재도 제발 좀 잊어줘. 라는 그런 걸 믿으라고 우리 보고 성경책을 준 겁니다, 이게.
여기 아담이 몇 년 살았는가? 아담이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으며 셋은 몇 년 살았습니까? 구백십이 세. 야, 노는 가락이 뭐, 칠십 세, 팔십 세가 아니고 구백 대로 놀잖아요. 노는 가락도 구백 대에요. 그리고 제일 오래 산 사람들, 기네스북에 나오는 제일 오래 산 사람이 누구냐면, 므두셀라가 몇 년 살았습니까? 여기 구백육십구 세. 야, 이게 세계신기록입니다.
이 신기록이 신약 오면 다 깨져버려요. 왜냐하면 변화산에서 모세가 천사백 년 계속 살고 있었고, 엘리야가 구백 년 계속 살고 있었어요. 아직도 살아 있으니까 이거는 신기록 세웠잖아요. 미래는 죽는 게 없습니다. 죽는 게 없다는 말은 뭐가 없느냐 하면, 나이가 없어요. 천국에는 나이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나이를 묻지 마세요. 선후배를 따지지, 고참 쫄다구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왜냐하면 천국에는 왜 그러냐 하면,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를 보기 때문에 과거가 몇 년 살았느냐하는 것은 백 년 살아도 그건 무고 십 년 살아도 그건 없는 겁니다. 왜? 없으니까. 목사님, 왜 과거가 없습니까? 원래 과거라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과거가 있는 겁니다. 손에 쥘 수 있는 과거는 없어요.
과거라 하는 것은 원래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의 추억일 뿐인데, 이 추억도 언젯적 추억이냐 하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내가 현재 갖고 있는 현재의 속성에 포함된 추억이지, 지금 내가 또 다음 현재가 되면 다음 또 나의 현재가 되면 이 추억도 이때 서른한 살 같으면 서른세 살 같으면, 서른한 살 때 있던 추억은 추억도 아니에요. 그것도 서른한 살 때 추억은 추억과 함께 서른한 살과 함께 날아가 버리고, 서른세 살 때 추억으로 이것이 일부, 그것도 다 편집당해서 일부만 쪼개져 나온 겁니다.
여러분, 꿈꾸시잖아요. 꿈꿀 때 어릴 적 꿈을 꾼다고요. 어릴 적 꿈을 꾼다는 말은 뭐냐 하며, 어릴 때 그 정경이나 모습이 꿈꾸는 게 아니고, 어릴 때 그때 내가 봤던 골목길과 풍경들과 소풍갔던 그 선생님 얼굴과 친구들 모습을 꿈을 꾸는 거죠. 야, 이거 어렵게 이야기했다. 뭐냐 하면, 꿈에서 나타나는 그 세계관이 지금 나의 세계관이 아니고, 내가 어릴 때 모습 가졌던 그 세계관 속에서 나타난 그것이 통째로 꿈속에 들어와서 나옵니다.
그러면 꿈을 깨라하면 무엇이 꿈이냐 하면, 어릴 적 내 모습이 그것만 깨진 꿈이 아니라 어릴 적 내가 봤던 세계관들 있잖아요. 그것조차도 다 아무것도 아닌 꿈이란 말이죠. 여러분, 일곱 살 때 여러분들이 좋은 선생님과 나쁜 선생님을 구분했을 것 아닙니까? 일곱 살 때.
그런데 서른세 살 때 일곱 살 때 꿈을 꾸었다면, 일곱 살 때 꿈 좋았던 좋은 선생님, 나쁜 선생님, 좋은 친구, 나쁜 친구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서른 살 때 꿈에서 그걸 봤다가 잠시 봤다가 아침에 눈 깨어보니까 일곱 살 때 좋은 선생님, 나쁜 선생님 구분하는 그 구분하는 기준이 있잖아요. 그것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기준인가라는 것은 통감하죠. 아~
그런데 그때 일곱 살 때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지요. 세상 전부가 아름다워요. 일곱 살 때 아름답지 않은 게 없어요. 일곱 살 때 보면 모든 어른들은 천사에요. 모든 어른들은 다 자비롭고. 그리고 어릴 때 보면 어른들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웃기는지. 어른들이 이야기할 때면 그렇게 웃는 게 많아요. 지금 그 이야기하면 썰렁하니, 무슨 옛날에 지나간 삼십 년대 개그를 하고 있다고 놀리겠지만. 어릴 때 보면 어른들이 하는 걸 보면 그렇게 믿음직하고. 모든 누나는 다 자비롭고, 모든 오빠는 다 믿음직하고. 그렇잖아요.
그리고 서른세 살 때 모든 누나는 다 천덕꾸러기고, 모든 오빠는 다 귀찮고. 늙어빠져 가지고. 일곱 살 땐 안 그랬단 말이죠. 그렇게 씩씩하고, 누나 한 솜씨는 다 맛있고. 바지 내려가면 누나가 바지 올려주고. 다 그런 시절 있잖아요. 그런 누나가 지금 늙어서 호호 할머니 되어 있다 말이죠. 지금은 집에 찾아오면 겁나요. 빨리빨리 가소. 우리 아들 과외 보러 가야 되고 밖에 나가 학원에도 가야 되고 가서 보내버린다고. 이제는 천덕꾸러기고 귀찮아요.
열두 살 때 그 어머니의 김밥이 그렇게 맛있었지만 사십이 되어서 늙은 어머니는 이제는 천덕꾸러기에요. 귀찮아요. 어떻게 처리할까 처리방안만 생각해요. 장례를 하나, 안 그러면 그냥 화장을 해버려. 뭐, 매장을. 그것만 생각해요. 모든 게 귀찮아요. 누가 나쁘냐가 아닙니다. 그때는 아름다웠고 낭만적이었지요. 지금은 뭐냐? 보다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른세 살 때 보다 현실적이라고 우기던 그것이 나이 육십이 되면 에이, 야 서른세 살 때 그것도 니가 세상관이라고 아이고, 철딱서니 없기로. 그러니까 그렇게 철없이 노니까 맨 날 남편한테 얻어맞지. 나이 육십 돼봐. 나 같으면 맨 날 패버린다. 다시 세월이 지나보면 서른세 살 때 자기 딴에 굉장히 지혜롭고 훌륭하고 반듯하게 산다 하는 그것도 나중에 보니까 세상을 너무 좁게 봤기 때문에 철없는 그때 한 시절의 추억으로만 남기죠.
창세기 5장의 이야기는, 이제 여기부터 그림으로 이렇게 도표로 그리겠습니다. 창세기 5장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든든한 미래가 있기 때문에 과거를 짧게 축소하는 거예요. 과거를. 든든한 미래가 보장되면 상대적으로 과거는 짧아지게 마련이에요. 미래가 길어지면 미래에 우리가 얻어질 축복이 크면, 과거는 그냥 에피소드처럼 짧게 지나가도 무방합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이 과거에 대해서 집착을 해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이게 특징이에요.
미래가 어두운 사람은 과거에 철없던 시절, 흔히 한 마디 더 한다면 이산가족 있잖아요. 수요일 날마다 KBS에서 아침 여덟 시 반부터 아홉 시 반까지 노인들 우는 시간 아닙니까? 제 이야기가 이것 보면서 내가 느낍니다. 이제 와서 만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이제 와서 만나서. 형이고, 동생하고 이제 와서 찾을 필요가.
현재 동생하고 형하고 한 평생 살아도 결혼하면 둘이 만날까 말까. 제사 때나 만나지 그 다음엔 만나지도 않는 게 인생인데. 형, 동생만 만나는 게 아닙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여기의 식솔들이 골치 아픈 식솔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여기에 신용불량자도 있을 것이고, 여기 장애자도 있을 것이고, 여기 온갖 더러운 과거 다 묻어 들어올 거고, 여기에 형은 산다 싶으면 여기 못살면 등 처먹으려고 다가오고, 여기 또 만나자마자 일 개월 만에 보증 서달라는 소리 나올 거고. 그거 왜 만나느냐, 왜 만나나 왜?
같은 형제라도 있어도 나중에 나이 들면 잘 있었나. 특히 제사 안 지내는 집안은 일년에 한번 밖에. 설에 괜히 와서. 조금 있으면 설 되잖아요. 이 주 후에. 그때 해서 정종 한 병 들고 와서 올 때부터 와서 한바탕 형하고 멱살 쥐고 싸움하고. 형수 그래 하는 게 아닙니다. 술 먹고 비틀거리다가 시비 걸다가 형한테 귀때기 맞고. 엄마는 이러려고 만났나. 나중에 헤어질 때는 원수 되어서 헤어지요. 이거는 명절만 되면 싸우는 거야. 형제간에.
특히 취직 못하고 시집 못간 그런 식구 같으면 형제들, 명절만 되면 도망가 버리는데. 니, 요새 뭐하는데? 요새 또 노나? 니, 우에라고 하노? 니, 아직도 혼자가? 니, 그래 콧대 높아서 안 된다, 니. 시집 안 가고 싶어서 안 가나. 좋은 남자 없으니까 안 가는데. 소개도 안 해주고 말이에요. 처녀, 총각들 애 먹어, 애 먹어. 그러다 이혼이나 해 보세요. 그 아, 누가 키우려고 하는데? 내한테 오지 마라. 네 아, 못 키운 데이, 못 맡는 데이. 누가 맡기라 했나. 니 아. 못 맡는 데이. 니, 공납금 없다고 돈 빌리려고 하지 마래이.
나중에 현실적이 돼버리면, 어릴 때는 모든 게 낭만이지. 왜 그러냐 하면, 한번 보세요. 일곱 살 때 되면 현재 일곱 살 때 제가 아름답다 했지요. 이 아름다운 세상관이 이게 확대를 합니다. 그러면 일곱 살 애들 뭐냐 하면, 서른 살 때는 우리 누나가 나한테 잘해 줄 것이고, 내가 서른 살 되면 우리 오빠 나한테 잘하고. 이렇게 지금 아름다움이 계속 갈 줄로 상상을 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게 상상으로 끝나면 다행인데 그게 아니에요. 이게 욕망과 욕심으로 밑에 축적이 돼요. 딱 들어오게 돼요. 왜 오빠는 어릴 때 그렇게 예뻐하면서 와 지금 와서 나 섭하게 대하노? 우리 이 서방 그래 섭하게 대하노? 이렇게 나온다고. 어릴 때 과거에 근거로 해서 어릴 때 과거의 낭만적인 그걸 근거로 해서 지금 그 기준에 맞춰 달라는 거예요. 꿈 깨라, 꿈. 니, 아직도 얼나가? 이렇게 나무라잖아요.
이게 이 세상 현실이 미래에서 환풍기가 미래로 뚫리지 아니하면 사람은 과거를 우려먹는 식으로, 그걸 ‘자기 폐쇄’라 하는데 그게 우울증 가까운데, 자기 폐쇄적으로 거기에 몰입하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로 화~악 숨통을 트게 해서 지금 네가 길다고 생각하는 인생이 감사하란 말이에요. 왜? 싹둑싹둑 잘려나가요. 내 꼬리가. 아무리 좋았던 과거, 참혹했던 과거 어떤 과거든 간에 하루만 지나면 하루가 날아가요. 참, 얼마나 고마운지.
하루만 지나면 하루가 날아가고, 지금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말씀처럼 희미하게 보이나 나중에는 우리를 위해서 구원하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주님을 똑똑하게 눈으로 볼 날이 가까왔으니 모든 걸 잊어버리라. 특히 골로새서 3장 같은 경우에 유명한 말씀이죠. 땅에 것을 잊어버리고 이미 너는 살은 사람이니까 하늘의 것을 생각해라. 빌립보서 3장 끝에 보면, 너,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너의 몸은 영광스럽게 돌변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왜 이렇게 창세기 5장에서 과거 이야기를 하느냐? 이게 창세기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1장부터 2장까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천지창조입니다. 마지막에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3장에서 4장 끝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호와 이름이 나와요.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 이름을 부를 것이다. 5장부터 보면 마지막에 5장 끝에 보면 마지막에 노아이야기 나옵니다. 노아의 새로운 땅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1장, 2장에서 5장이 이게 시작이라면 이게 과거라면, 여기 2장, 4장, 5장, 6장 7장 이것은 이건 미래에 해당되고, 마지막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에 해당되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뭔 뜻이냐?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느냐하면, 현재 네가 어디에 놓여 있나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어떤 자리에 놓여있던지 간에 마지막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우리가 포함이 된다, 합류가 된다는 거예요. 영광 속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 속으로 포함이 되고 결국 우리는 여호와를 부르면서 천국에 가게 되고, 결국은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에 산다는 거, 자꾸 미래 지향적으로 미래를 위해서 과거가 있다는 거예요. 3장, 4장 같은 경우에는 2장부터 3장부터 보면 인간들은 뭐, 범죄하고 따먹고 쫓겨나고 어떤 경우 있더라도 4장 마지막에 보면, 비로소 그때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돼 있잖아요. 이때는 내가 목소리를 낮추어야 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돼있다 이 말은, 과거가 어떻게 타락했던 범죄하던 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책임지고 자기 백성을 5장부터 시작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간다 이 말입니다. 영광의 나라가 어디 있는데요? 그게 5장 몇 절인가 같이 보면, 5장 21절에 보면,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보세요. 이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걸 해준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난 과거의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하나께서 다 이미 아시는 이야기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아는 이야기를 니가 되풀이해서 원한 품을 일이 없지 않느냐? 바로 니도 알고 주님도 아시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미래는 모르지? 모릅니다. 미래는 바로 하나님이 알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호와 이름을 불러라 이 말이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라 이 말이죠. 자꾸 꼬리처럼 날아가는 이미 날아가 없어지는 거기에다가 마음 빼앗기고 거기에다가 마음 다 쏟고 그거 한 못 풀었다고 뒹굴고 이불 위에서 뒹굴고 침대 위에서 뒹굴면서 아이고, 애달다. 아이고, 실수했구나, 실패했구나. 그렇게 과거 때문에 안달 날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여기에 창세기 5장 같은 경우에 보면, 좀 더 이야기해 보면, 이걸 어렵게 이야기해야 돼요. 이때는 어렵게 이야기해야 되는데 뭐냐 하면, 천년 가까이 사는 그 역사가, 역사 처음 나오는데 역사가 하나님의 묵시, 역사를 초월하는 묵시한테 지게 되어 있습니다. 패배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이 땅에서는 갈등이 있고 투쟁이 있어요. 6장에도 나오는데 역사냐, 아니면 묵시냐? 하나님의 약속이 더 세냐, 아니면 우리의 역사관이 더 세냐?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집착하는 역사, 이건 나의 역사 나만의 역사. 둘 중에 어느 게 더 세냐? 싸움에서 창세기 5장에서 누가 더 세냐 하면, 우리의 역사는 패배해요.
오늘 강의에서 처음으로 어려운 게 나오는데, 여기 창세기 5장의 줄줄이 족보를 보게 되면, 마지막 공통점이 있어요. 마지막에 뭐가 나옵니까?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되풀이 되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역사는 패배당합니다. 누구한테 패배 당하느냐? 묵시에서 내뱉은 죽음이란 세력, 죽음한테 인간의 찬란하고 화려한 모든 역사가 패배를 당해요.
이거는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다만 이 묵시에서 죽음만 나오는 게 아니고, 죽음을 전제로 깔고 나오면서 거기에 영생을 함께 줍니다. 영생을 함께 주게 되면, 비록 죽으나 역사로서는 너무나 죽어 마땅하지만 역사를 쥐고 있는 놈은 죽어도 마땅하지만 그냥 역사를 초월하는 묵시가 역사를 이겨서 기어이 영생을 이루게 만다는 그 이야기가 창세기 5장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묵시세계의 시간법이 나와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걸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개념으로 하면 천년이 하루 같으면 오백년은 몇 시간입니까? 천년이 스물네 시간 같으면 오백년은 몇 시간 돼요? 열두 시간, 이렇게 계산되잖아요. 그 계산이 하루가 천년이다. 여기에는 안 맞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꽉 쥐고 있는 시간계산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거 백날 쥐어봤자 어떤 인간도 죽음한테는 그게 무로 돌아간다 이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 몇 살 살았어요? 서른세 살 살았잖아요. 지금 저는 서른세 살보다 더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면 저는 역사적으로 예수님을 이겼지요. 예수님 서른세 살 한창 될 때 돌아가시고 나는 그것보다 더 많으니까 역사적으로 봐선 내가 승리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인 수명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아요.
므두셀라가 최고 구백육십아홉 살 제일 많지만 므두셀라나 아담이나 그거 일단 천국에 가게 되면 문제 삼지 않습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땐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아비도 없고 자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새롭게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만 거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묵시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역사를 덮쳤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 세상에 아담 밖에 없어요. 아담의 한 종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줄 알았지요. 그런데 묵시적인 어떤 분이 있다는 사실을 묵시적인 아담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거예요. 다른 인간형도 있다, 다른 인간형. 아담 같은 흙에 속한 인간형만 있는 게 아니고, 하늘에 속한 새로운 인간형도 하나님이 다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예수님이 육신으로 옴으로 말미암아 그걸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기 5장만 바라봐도 역사에 묻혀서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그게 제가 보기에 안타깝고 불쌍한지, 그 사람은 자기의 역사만 쥐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역사에 자기의 노동이 담겨있고 그 노동의 대가에서 자기의 의를 찾으려하니까 자꾸 과거한 것 끄집어내고 비교하고 경쟁하는 겁니다.
교회는 그래선 안 돼요. 교회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가지고 비교해야 돼요. 장차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형편이 어떻게 나은가 좋은가 그것과 비교할 필요 없어요. 장차 똑같은 주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받아서 다같이 해와 같이 빛나는데, 니는 해와 같이 빛나는데 누리끼리하다. 이런 거 없어요. 너는 약간 색갈이 윤기 나네? 이런 거 없습니다.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괜찮다는데 천국에는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천사와 같아서 천사끼리 미스코리아대회 이런 거 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족히 비교할 수 없어요. 비교가 안 되는 세계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비유장에 보면, 해와 같이 빛난다. 그때는 하나님의 의인들은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13장. 13장 43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해와 같이 빛나는데 니 누리끼리해서 빛이 영 덜 난다든지, 무슨 하늘나라의 차등이 없습니다. 차등이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과거 업적과 논해야 돼요. 과거 업적과 논한다는 말은 묵시를 제쳐놓고 묵시를 가위 가지고 잘라버릴 때는 할 수 있는 이야기에요. 미래로부터 투입된 게 없을 때는 할 수 없이 과거에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 그 성과 끄집어내면 누가누가 잘났는지 우리가 맞짱 뜰까 한판 붙일까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과거의 일 가지고.
그런데 묵시에서 침투해 버리면 지금 소꿉장난하다가도 주께서 불러주시면 가야 되는 거예요. 소꿉장난 하다가 불러주는 방법 중에 여러 가지 방법 있는데 첫 번째는 예수님 구름타고 재림하실 때, 두 번째는 덤프트럭이 브레이크 고장 날 때 이런 거예요. 세 번째는 비행기 추락할 때 이런 경우에. 어쨌든 방법은 약간 거칠지만 까칠하지만 어쨌든 간에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중요하느냐 역사적 문제는 별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약간의 역사적으로 볼 때 약간 화가 나는 대목이 있어요. 뭐냐 하면, 엘리야 죽을 때 어떻게 하늘나라 갔습니까? 이건 주일학교 애들 다 아는 것 아닙니까? 뭡니까? 저 하늘나라에서 대리운전 나왔지요. 하늘나라 불수레, 대리운전해서 엘리야는 술 먹지 않았는데 대리운전해서 천사가 와서 자가용 와서 데려갔잖아요.
그런데 딱 엘리야보다 능력을 두 배나 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엘리사입니다. 엘리사 죽을 때 우에 죽었습니까? 그냥 죽었어요. 그냥 죽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엘리야 죽을 때는 혼자 달랑 죽었지요. 엘리사 죽을 때는 죽은 시체를 던지니까 그 엘리사 시체와 접촉된 먼저 죽었던 평범한 보통 사람의 시체가 살아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죽어가면서까지 남을 살리는 희생적인 십자가의 모습을 끝까지 시체가 되더라도 사용해요. 하나님이 얼마나 지독한지, 엘리사의 시체 가지고라도 예수님이 장차 십자가로 부활의 능력을 증거하는데 재료로 교육 자료로 사용했습니다. 아, 이거 아주 지독해요.
유치원교육에 보면 애들 노는 장난감을 뭐라고 합니까? '은물' 이거 보통사람은 잘 모르는 용어인데, 유치원이나 몬테소리나 이런데 보면 애들 장난감이면서도 교육놀이가 있어요. 은물이죠, 은물. 애들은 이걸 막 때리고 물고 빨고 자기 마음대로 갖고 놀아요.
우리는 철저하게 서비스정신입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묵시가 우리를 주물러요. 묵시가. 그런데 우리는 아까 우리는 어떤 투쟁이 있다? 묵시가 오더라도 우리는 한 고집하지요. 뭘 붙듭니까? 우리의 역사. 그것도 누구의 역사냐 하면, 나의 역사에요, 나의 역사. 나의 과거, 찬란한 과거. 뭐, 찬란하던 안 찬란하던 관계없이. 내가 고생했다는 것이 나한테 그만큼 의미 있다는 거죠.
나의 역사, 나의 과거. 내가 애를 얼마나 키웠으며 내가 얼마나 남편한테 잘했으며 내가 아내한테 얼마나, 나의 역사, 나의 시간사슬, 시간 고리, 이걸 고집하는데. 여러분, 나의 과거를 한번 분석해 보세요. 이게 말이 안 돼요. 이게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이 나의 과거라고 내놓은 걸 이야기 들어보면 과거가 아닙니다. 지금 자기의 기분 따라서 재편집한 거예요, 이게. 옛날 내가 초등학교 때 지금 초등학교고 옛날 국민학교 때 내가 옛날 국민학교 때 공부 잘하고 잘 나갔다. 이거 남들한테 자기 현재 입장에서 과거사슬로 이어서 자랑하지요.
반갑다, 친구야! 하고 손잡고 한번 나와 보지요. 과거에 자기가 그동안 몰랐고 잊어버리고 감추어놨던 것, 걔 친구들이 다 증언합니다. 니, 마 그때 코 흘리고 인간도 아니었다. 말이 니가 인간이지 이렇게 멀쩡한 인간이 될 줄 우린 생각도 못했다. 이런 다른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그 다른 해석은 뭐냐? 그것도 맞지 않아요. 그 친구가 자기 유리한 쪽으로 사슬을 잇다보니까 저 친구의 어떤 면을 집어넣어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기한테 가오가 서고, 자기의 체면이 설 경우에만 그게 재편집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 얼마나 자기 편의위주에요. 자기 밖에 몰라요. 자기 유리한 것 밖에 몰라요.
사람이 양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게 요물이에요. 양심이라는 게. 양심이라는 것은 결국 뭐로 나오느냐 하면, 뭐뭐는 잘 한 짓, 뭐뭐는 못한 짓을 누가 판단합니까? 최종적으로 자기 양심이 판단해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아주 잘 말했는데,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도 모든 것이 결국 윤리적으로 흐른다. 규결된다. 결론 맺는다.
예를 들어서 이거 비타500 뗄 때 어, 잘 안 떼 지네, 안 떼 지네? 하면 비타500 안 떼지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내가 뭐가 잘못되어서 이게 잘, 이래 윤리적으로 나가요. 모든 그것도.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실험할 때도 그 실험을 이만큼 잘 했다, 이만큼 못했다. 반드시 윤리적으로 죄와 의, 선과 악으로 반드시 윤리적으로 흘러가요. 그런데 그 판단을 누가 합니까? 자기 양심이 하거든요. 이 사람이 최종 절대적인 판단자, 진짜 세상을 마지막으로 심판할 그분을 만나지 못하면 결국 마지막 판단자는 누가 됩니까? 내가 되지요, 내가.
판사가 있다가 어이, 교수님, 당신은 성균관대에서 쫓겨나도 마땅합니다. 내가 왜 성균관대에서 쫓겨나도 마땅합니까? 나는 수학적으로 우리나라의 인재고, 내가 그 시험문제 잘못 냈다고 내가 항의했다고 성균관대학이 집단적으로 모함해서 쫓겨났는데 판사가 이 시대의 정의를 살아있는 판사가 그따위로 할래. 에라, 이 석궁이나 맞아라! 쏴버리죠. 그 판단을 판사한테 일임한 그 순간에 사실 일임을 안 했어요. 내 판단과 맞는가, 안 맞는가? 그냥 참고로 했을 뿐이에요. 교도소가면 지, 죄 지었다는 놈, 한 사람도 없어요.
진짜 최종적인 판단자는 뭐냐 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자기의 잘했다, 못했다 이 자체를 뭐로 보느냐? 이걸 죄로 봅니다. 내가 오늘 교회 나왔다. 참 잘한 짓이다. 어제는 지난주에는 교회 못나왔다. 못한 짓이다. 라는 판단 자체가 바로 죄라는 것. 내가 왜 건방지게 내 행동을 내가 판단합니까?
말을 바꿔야 해요. 지난주에는 주께서 못 오게 하셨다. 이번 주에는 오게 밀어 넣었다. 왜 판단자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가 왜 판단하느냐. 그렇게 그 판단하면 판단이 쌓이고 쌓여서 뭘 이뤄요? 나만의 괜찮은 역사, 나만의 대견스러운 역사, 나만의 역사를 만들면 이것은 다가오는 묵시, 십자가 피로 쓰는 묵시를 배격하게 됩니다. 그걸 시답지 않게 여겨요. 배척하게 되어 있어요.
주여, 십자가 피가 뭡니까? 내가 알아서 내가 잘나서 내 힘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반드시 이런 양심의 소리에 더 크게 양심의 소리를 믿는, 내가 나를 믿는 나는 나를 믿습니다. 성경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목사님이 무슨 소리를 하든 최종적으로 나는 나를 믿습니다. 이게 바로 죄에요. 이게 자기 절대성입니다. 이게 자기만의 세계에 도피하는 자기의 영지를 만들어서 가인의 후예들이 자기의 성채를 만들어서 캐슬을 만들어서 거기에 몰입해서 누구든지 나를 때리는 놈들은 죽인다는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왜 최종 판단이냐 하면, 예수님은, 예수님, 저 잘했어요, 못했어요. 잘했어요, 못했어요. 제가 이번에 100미터 세계신기록 세웠는데 잘했어요, 못했어요. 이번에 축구할 때 한 골 넣었는데 잘했어요, 못했어요. 맨 날 자기 행한 것 가지고 잘했다, 못했다 하는데 주께서는 피만 줄줄 흘리고 있어요. 이 피를 흘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광주 안 간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광주강의 들은 사람은 압니다만 화목제물이 뭐냐 하면, 이게 마지막 제물 가운데 마지막 제물이에요.
처음에 드리는 것이 뭐냐 하면, 속죄제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속죄제 그 다음에 속건제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드리고 화목제 드리고 그렇거든요. 그때 번제 드릴 때 소제도 같이 할 수도 안 할 수도 하는데. 이 다섯 가지 제사의 마지막 마무리 마감제가 뭐냐? 마감제가 화목제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화목제가 되었다는 이 말은 더 이상 피 믿고 난 뒤에 제물 바치고 제사 드릴 필요는 일체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 예를 들기를 화목제는 어떤 제사냐 하면, 영화 보고 날 때 '감사합니다' 자막 올라갈 때 이 영화 끝난 거예요. 그 감사합니다가 뭐냐 하면, 화목제물로 자기 아들 독생자 주셨어. 이 뜻이에요. 이미 다 끝났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여러분 뭔가 미진한 것이 있고 우리가 추가될 것이 남아 있으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조건 또 조건 달라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잖아요. 그건 부담이죠.
진짜 사랑은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릴 사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보탤 필요조차 없도록 만들어줬기 때문에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에게 모든 미진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좇아냅니다. 모든 초월해서 예수 십자가 피 믿지만 또 이거 해야 되지 안 됩니까? 그런 마음적 부담에서 우리를 공포로부터 추방시키는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추방시키는데 언제 적까지? 마지막 심판 때까지 밀어붙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까지 주 되시는 화목제물만 있으면 되지, 추가적으로 뭔가 더 첨가해야 될 첨가물이 일체 없게 하기 위해서 화목제물로 '감사합니다'하고 올라와주는, '안녕히 가십시오' 하면서 올라오는 자막이 그게 바로 화목제물이에요.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역사를 쥐고 있는, 역사라는 게 딴 게 뭡니까? 나의 역사 아닙니까? 역사라는 게 우리 알아요? 세종대왕이 아침에 반찬 뭔지 우리 압니까? 다만 세종대왕이 마음에 드는 것 있으니까 세종대왕 훌륭한 사람이라고 내 역사 속에 넣어주는 거지요.
그러니까 내 위주의 내 역사가 어떤 짓을 하던 간에 토략질을 하든 어떤 짓을 하던 간에 일체 거기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과거가 미래로 집어넣는 식이 아니라 미래가 포크레인처럼 집어서 미래의 세계로 집어넣는다는 거, 이거 창세기 5장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미래가 우리의 과거보다 강하다는 거, 미래가 우리를 집어삼키고 잡아당기는 힘이 우리가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내가 나를 밀어 넣는 이 힘을 만드는 것보다 더 세다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매일 같이 과거란 꼬리는 잘리게 돼있습니다.
직장생활 이렇게 해보면 제일 어떤 경우가 제일 우리에게 괴로움이 되느냐 하면, 이렇게 맨 날 농땡이 부리는 대구의 수성구청장이 이런 좋은 말 했어요. 자기가 구청장 돼보니까 제일 무서운 공무원이 누구냐 하면, 승진을 포기한 공무원이 제일 무섭답니다. 그건 뭐냐? 날 잡아 먹으라는 거예요. 나 일 안하겠다는 거예요. 승진 안 할게. 승진 포기했다는 거예요. 승진을 포기한 공무원들이 제일 골치 아프다는 거예요. 당근이 없으니까. 당근 줘도 당근 쳐 버리니까. 일 해, 보너스 줄게. 내 보너스 안 한다. 그걸 철밥통이라 그래요.
요새 교사들도 그래요. 교사도 미술, 음악, 이런 데는 지금 비상 걸렸어요. 자기 과목 잘라내지 말라고. 철밥통이에요, 철밥통.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국어는 아직도 멀었다마는 다른 과목. 요새는 역사가 떠요. 우리 처제도 역사 박사면서도 지금 교사자리도 없어서 결국은 일본 가서 저래 고생하고 일본 교수되려고 고생하고 있어요. 가야 연구하는 사람인데 문화사에서 우리나라 최고라 하는데, 최고고 뭐고 과목 자리가 없다니까.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고 있지 않는 이런 상태에 있으니까 이거는 어떻게 주님께서 와서 건지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가 자기를 포기한다는 게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포기하지 마. 그래 승진이고 뭐고 포기하지 마. 외부의 힘이 너를 구원한 걸 믿어. 네가 포기해서 네가 훌륭한 사람 된 게 아니고, 신자는 역사를 포기한 사람이 아니고, 역사 속에 묵시가 들어온 사람이에요.
이걸 천국이 침노한다는 뜻이에요. 천국은 우리한테 허락 맡지 않고 침투한 겁니다. 그냥 와서 난데없이 미래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소리해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다른 삶을 살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고집에 의해 살지만 우리는 주님의 열심에 의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의 고집과 열심에 의해서. 이렇게 나쁜 놈도 건진다니 그 열성과 고집은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당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믿음이라는 것이 그냥 뭐 예수 믿고 듣기만 하면 잘 믿음이 생기는 줄 알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여러분 속에 침투한 낯선 거예요. '낯설다' 알지요? 낯선 겁니다. 이거는 축복 아니면 진짜 천지창조보다 더 큰 능력이 아니면 이런 믿음이 발생되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진짜 산이 옮겨서 바다에 빠질 그것보다 더 센 믿음이에요. 더 센 은혜가 와서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짜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이 아닌 것을 흔들어버리잖아요. 흔들어버리죠. 여러분들이 바다에 풍랑일 때 제자들이 풍랑 이는 걸 보고 잠자는 주님을 깨웠잖아요. 그때 주님께서 일어나서 뭐부터 먼저 했습니까? 바다부터 나무랐습니까, 제자들 나무랐습니까? 제자들 나무란 거예요. 묵시의 위력을 왜 모독하느냐 이 말이죠. 풍랑이 이는 것은 너희들이 해석해 보니까 풍랑이 일면 그 다음 우리는 죽는다.
그러니까 우리의 찬란한 역사라는 것도 결국은 뭐한테 지게 되어 있습니까? 이 죽음한테 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놀랍게도 죽음을 병행해서 우리에게 함께 다가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죽음 가지고 약을 올리면서. 그래야 우리는 묵시를 그때 알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직전 아니면 그래도 우리는 자존심 있어서 내 힘으로 일어서랍니다. 이런 소리 잘 하거든요.
그러니까 아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디로 통과시킵니까? 광야로 시키는데 이 광야에는 전혀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인간적인 자기의 과거의 역사적으로 해석해서는 이건 완전히 백 번 살았더라도 백 번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도시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에녹처럼 동행하셔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에녹과 동행했다는 것이 여기선 짧게 나와 있는데. 이것이 창세기 5장, 6장, 7장, 8장 뒤에 가게 되면 이 동행이 길어집니다. 길어져요.
자, 첫째 시간 한 것 정리해 봅시다. 1장에서 2장 끝, 2장 아니고 1장 끝이지만 2장 초반까지 2장 4절이니까 1장에서 2장까지는 뭐냐 하면, 모든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된 거룩, 하나님이 안식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라고 끄트머리 여기에 강조점이 있어요. 시작은 빛이 있으라, 뭐가 있으라 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빛을 위함이 아니고 코끼리 위함이 아니고 사람 위함이 아니고, 전부다 뭣을 위함이다? 영광을 위함이다.
두 번째, 2장부터 4장까지는 인간의 범죄하고 타락했지만 결국 마지막은 모든 것은 누가 회복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서서 해야 될 문제다. 그 다음에 5장 쭉 가게 되면 결국 인간의 역사는 누구를 못 이깁니까? 아담은 누굴 못 이겼어요? 결국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음을 못 이겨요.
젊은 분들은 늙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서서히, 서서히 늙기 때문에 자기가 항상 젊다고 생각합니다. 이십대, 삼십대는 못 느껴요. 그런데 사람이 사십대 중반이 되면 갑자기 허리가 아파요. 중반에 허리가 아프고, 오십대 중반이 되면 관절이 아파요. 해서 육십 대 쯤 되면 이제는 사람 만나기가 수치스러워요. 왜? 얼굴을 봐도 주름살을 지울 길이 없어요.
우리교회 어떤 권사님이 쌍꺼풀수술 했는데 부끄럽다고 삼주 동안 교회를 안 나왔어요. 미용 수술했는데. 늙어지면 자연히 내려갈 수 있어서 눈이 감겨서 했더라도 남 보기에는 아이고, 주책이야, 주책. 다 늙어서 그게 뭐냐. 그런 소리 들을까봐 삼주 동안 안 나오던데. 다음 또 어디 수술해서 몇 주 안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십 되면 아침에 거울 보면 깜짝 놀래요. 자기가 자기 모습 보며 놀랜다니까. 무슨 이런 귀신이 있나. 그것도 부시시한 모습. 화장한 모습이 아니고, 부시시한 모습. 그걸 흔히 쌩얼이라 하지요. 쌩얼도 생생해야 쌩얼이지, 혼탁한 얼굴이죠. 혼탁한 얼굴 보고 있으면 육십 대 넘으면 거울 안 보려고 하고, 칠십 넘으면 사진을 안 찍으려고 해요. 송장, 웬 송장이 있느냐 말이죠.
삼십대 그 낭만의 과거를 간직하고 싶지, 칠십대의 현실을 현실로 부인하고 싶은 거예요. 마음은 맨 날 스물여덟 살, 마음은 청춘인데,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이 안 따라준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급속도로 내려 가버려요.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이 무게가 갑작스럽게 크게 느껴져요.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짐 중에 최고의 짐이 뭡니까? 역시 죽음의 짐이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리라. 이 죽음의 힘,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고 역사에서 묵시세계로 옮겨간다 이 말이죠.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세계로 옮겨가게 한다. 그게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세계라 합니다. 예수님은 늙음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괴로움도 없어요.
이 5장에서부터 뭐냐 하면, 중요한 것은 죽었더라. 구백 살면 뭐 합니까? 사람이 보세요. 여러분들이 한 구십 살 살은 사람보고, 아이고, 저, 영감님. 오래 사셨으니까 이제 죽어도 괜찮지요? 미쳤나. 사람이 구십 년을 살았다고 해서 말로는 이제 몸도 아프고 죽는 게 제일 낫다 하지요. 그거는 예의상 멘트고, 지금 당장 칼 들고 죽인다 하면, 돈 줄게, 돈 줄게. 살고 싶어 합니다.
사람이 백 년 살아도 지나간 것은 이미 다 산 게 아니에요. 한 살부터 새로 또 살고 싶은 의욕이 늙은 사람일수록 나타납니다. 그래서 늙은 사람 죽고 싶다 하는 걸 거짓말이라 하지요. 장사하는 사람, 남는 거 없이 판다 하는 게 거짓말이듯이 늙은 사람 죽고 싶다 하는 거 완전히 이거 구라입니다. 교회 목사, 이제 은퇴해야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완전히 구라입니다. 어데서 그런 거짓말을. 은퇴가 어디 있어. 완전히 밀려나면서 은퇴하는 거지. 대통령하기 싫다. 이건 노무현이가 거짓말입니다. 안 그렇습니다. 천 년, 만 년 하고 싶어요.
죽음을 이기는 게 뭐냐? 여기는 동행이에요, 동행. 그 동행이 6장에 들어가면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6장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 6장 8절 읽어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 다음에 여기 6장 9절과 10절 보세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뭐 했습니까? 동행했지요. 이것만 설명하고 10분 쉽시다.
에녹은 동행이란 말을 어떻게? 짧게 했지요. 이제는 그 동행 때문에 그들은 에녹은 이 땅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죽음을 보지 않고 갔잖아요. 이제는 그 동행의 안에 있는 내용을 좀 구체적으로, 동행이 도대체 어떤 일이기 때문에 죽음을 이겼느냐 하는 그 내용을 살피기 위해서 6장부터 개시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걸 알아야 됩니다. 죽음이 5장에서는 개인적인 목숨 끊어지는 걸 말하지요. 이게 6장 되면 죽음을 뭐로 말하느냐 하면, 이게 심판이 됩니다. 그러니까 저, 선악과 따먹은 죽음이란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저주받았다는 말이에요. 점차, 점차 이게 개념이 더 추가되면서 십자가에서는 아하, 진짜 죽음이 저주였구나 하는 것을 확연히 드러나고. 여기에서는 서서히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에 해당되고.
그 다음에 죽음의 이유가 있지요. 뭐 때문에 죽음의 이유가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에. 6장에 보면 6장 몇 절입니까? "하나님의 신이" 6장 3절.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있지 아니하면 결국 이것은 니가 아무리 살아도 사람 취급 안 해요. 하나의 한강의 괴물 취급합니다. 죽여 버려요. 사람 죽일 때는 아깝지만 괴물 죽일 때는 아깝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가차 없이 그들을, 사람 취급 안 한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6장 거기 보면 내가 하나님이 사람 만든 것을 후회한다 하는 것.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들, 사람 취급 안 해요. 하나님이 사람 취급도 안하고 내버리고, 진짜 사람이 어떤 게 사람이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동행하고 사람 취급하고 나머지는 사람 취급 안 합니다.
그 동행이 그 다음 시간에 이어질 뭐냐? 하나님의, 처음으로 나옵니다. 두 자로 뭡니까? 언약. 언약 안에 있다. 신약에는 예수 안에 있다. 구약적으로 언약 안에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행, 그 동행 안에서 하나님의 묵시의 세계, 영생의 세계를 맛보게 되는 겁니다.
10분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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