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 9. 딤후 2:8-15 군인처럼 농부처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긍휼이 많으신 주님은 항상 긍휼이신데 어떻게 우리가 부인한다고 우리를 부인할 수 있는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항상 미쁘시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항상 미쁘신 주님이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을 부인할 수 있는가?
바로 앞 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주님 때문에 오는 고난을 참아내면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주님을 우리가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문장과 연결하여 해석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왕 되심을 부인하면 주님께서 우리가 왕노릇하는 것을 부인한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과 왕 노릇 한다”는 말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왕직을 수행할 때에 권세가 뒤따른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세를 주십니다. 인력자원,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부인한다는 말은 우리가 주님이 주신 직분을 수행할 때에 그 직분의 권세를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영원토록 사랑하시만 우리들이 땅에서 수행하는 주님의 직분에 주님이 권세를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앞에 직분자로서 서야 할 것인가?
직분자는 첫째, 최고의 군사령관 앞에 명령을 받은 군인처럼 되어야 합니다. 군대 생활에서는 오직 최고사령관으로부터 내리는 명령에 따르기 위해 모든 얽매이는 것을 버리고 내무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군입대할 때에 훈련소에서 입고간 모든 옷이며 소지품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군부대에서 주는 군복을 입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얽매이는 것에서 다 해방입니다. 군에서 제대하는 날까지 해방입니다. 학교 다니다가 온 자들, 직장 생활하다 온 자들, 결혼해서 신혼 살림을 차리다가 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내려놓고 오직 군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군에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사령관이신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여러 모양의 생활을 하다가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최고 사령관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먼저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둘째는 농부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농부는 충성스럽게 농사일을 합니다. 그러나 농부는 그 모든 일 삯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한 사역자와 직분자는 주님께서 주시는 보상이 보장된 것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목요일 저녁에는 여주 제일고 선생님들이 회식하는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앞자리에 교장선생님과 남자 부장들이 앉았습니다. 군대생활 이야기를 하니까 서로 통했습니다. 대화 중에 예전에 군 생활하면서 매 맞으며, 구타당하며 군 생활했어도 큰 문제가 없었는데 요즈음 군인들은 상황이 훨씬 좋아졌는데도 더 많은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군대 생활은 훈련소에 입소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에 모든 옷을 벗고 소지품을 다 집으로 보내고 군에서 주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 때 부터는 나이든 사람 부자 소용없이 모두가 다 군대 규율에 따라야 했습니다. 모든 생활을 군대규율 최고의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인권이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디모데후서에는 “좋은 군사처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비유로 나온 말입니다. 최고의 사령관이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생활이 군대 생활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2,0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기독교가 생존해 왔다고 할 때에 지속적으로 하나의 목표와 하나의 방향으로 나온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의 생각과 의견을 강조했다면 오늘까지 오기가 힘든 것입니다. 거기에는 최고의 사령관의 명령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한 것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전달할 뿐입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 차이가 있습니다. 대충 믿어도 되는 것처럼 하여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충성스럽게 믿어야 한다고 하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러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은 참으시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우리가 올 수 없는데 용서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반드시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에게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할 수 없습니다. 이 용서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사랑과 긍휼에 있어서 변함이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행동에 따라 반응합니다. 우리에게 하는 행동에 반응하여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늘 사랑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성경에서 한 가지 있습니다. “참으면 우리가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요.” 이게 사랑입니까? 내가 부인하면 주도 나를 부인하는 분이 하나님입니까? 애가 부인한다고 엄마가 같이 부인하고, 애가 때린다고 엄마가 애를 때린다면 그 분이 엄마입니까?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일 저녁에 목사님들이 한 참 논쟁을 벌인 부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한다고 주님이 우리를 부인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큰일 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왜 이런 말이 나왔는가? 바로 앞 구절을 읽어 보아야 합니다. “참으면 우리가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요” 우리가 주님이 주신 직분을 잘 수행할 때에 왕 노릇하게 한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에 일을 하면 사람이 필요합니다. 왕 노릇할 때에 신하를 보내주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다가 고난을 당하면 필요한 사람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직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력 자원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도 먹을 것이 더 필요합니다. 사람을 부리는 데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물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신하를 불러놓고 사례비를 주지 않는다면 데모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해 감옥 가니까 사람들이 줄을 서고 물질이 풍성하게 공급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양화진에 순교지가 있습니다. 순교자들 뒤에는 순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순교하기까지 많은 물질을 숨어서 공급해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일을 당하는 여기에 신자들이 사랑하므로 기도하고 물질을 나누며 협력합니다. 도리어 평안한 시대에는 다 도망갑니다. 순교자는 왕 노릇합니다. 순교자의 가족을 모두가 도와주었습니다. 교회 직분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온 교우들이 기도하고 힘을 얻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권세가 있습니다.
요즈음에 큰 교회 목사님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관심을 받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왕 노릇하는 권세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감당할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명 감당하고 일하면 힘든 일이 많이 생기는 자리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영적 권세를 주셔서 왕 노릇하게 합니다. 교회 장로님, 권사님, 안수 집사님, 이름 자체가 힘 받는 자리입니다. 장로가 되어가지고 그 모양이냐고 합니다. 이름의 무게가 무거운 것을 내가 압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은 무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직분을 가진 자에게 왕같은 능력을 주십니다. 왕은 무엇으로 살아요? 왕은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입으로 합니다. ‘금 나와라’ ‘은 나와라’하면 금도 은도 즉각 나오게 됩니다. 주님 앞에서 직분 가진 자들은 우리 모두의 입에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우리 모두는 입을 벌려야 합니다. 필요할 때에 입을 사용하는 자가 왕 노릇하는 자인 줄 믿습니다. 입을 벌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입을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몸도 발도 사용하지 않고 입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입의 권세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입을 사용해도 먹히지 않으면 난감한 일입니다. 골치 아픈 일입니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왕 노릇하고 있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언제? 우리가 내가 살겠다고 주를 부인하면 아무도 우리에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왜 내가 가난해지고 왜 내가 외로와 지는가요? 내가 주님을 부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 앞에 권세있게 살려면 주님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왜 유대 나라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고생스럽게 살았는가? 예루살렘 거리를 밟지 못하고 성전도 무너졌는가? 왕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은 왕인데 아무도 대답하는 신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고 살아 계시기 때문에 인맥과 사랑의 줄을 끊고 모든 물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UN이라는 기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나라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가? 국제법을 어기고 혼자 살겠다는 나라가 있으면 제재하는 일을 합니다. 그 통제를 받지 않는 나라를 통제합니다. 핵통제를 받지 않으려는 나라는 제재합니다. 북한이 탈퇴하고 핵을 개발합니다. 북한에게 UN은 강한 제재를 합니다. 북한으로 들어가는 모든 돈줄을 차단시킵니다. 북한에 관리들이 도망쳐 나옵니다. 탈북자들이 많이 나오고 권력층에 분열을 일으킵니다. 김정은이 왕 노릇을 잘 못하게 합니다. 왕을 제거한 것은 아닙니다. 활동에 제약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에게 왕노릇 못하게 인권, 물권을 제약합니다. 이 땅에서 군인처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지라도....주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인맥도 많아야 좋습니다.
그 다음에 기독교인들은 군인처럼 살아야 되고 뿐만 아니라 농부처럼 살라고 합니다. 오늘날 농부와는 개념이 다릅니다. 농부가 주인이 아니고 소작인입니다. 농사짓기 위해 고용된 일꾼입니다. 농부는 밥도 먹지 않고 일만 합니까? 6절에 보겠습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삯을 받지 못하면 농부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역을 하는 분들에게 양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할 수 있으나 목사가 되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몇 년간 기도했습니다. 주를 위해서 순종하는 자들에게 농부처럼 일삯을 주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