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일이니까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여름 동안 어머니와 고향동네 야산을 헤매며 부지런히 고사리를 꺾으러 다녔는데, 그 고사리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여름이 끝날 쯤에 서울로 올라왔다. 당장은 월세방 구할 형편이 못돼서 안산에 살던 이모 집에 얹혀살았는데 낮엔 노량진의 공무원학원엘 다녔고 밤엔 동네 고등학생들이 다니는 독서실에 자리를 잡고 수험서를 들여다보면서 지냈다. 그 동네 고등학생들은 죄다 공부엔 애초부터 관심이 없는지 휴게실이란 곳에 수북하게 모여서 컵라면을 먹거나 드라마 따위를 보다가 자정이 가까워지면 집으로 돌아갔다. 나도 가끔 그 틈에 끼여서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거나 음악을 찾아 들으면서 놀았다.
그날도 음원사이트에서 노래를 찾아 듣고 있었는데 별 이유도 없이 군대 후임병이 알려준 가수의 이름이 떠올랐다. 따분함과 게으름이 만들어준 가벼운 호기심으로 그의 노래들을 검색해봤다. 그런데 제목들이 자못 심상찮았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우리들의 죽음?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천상 농사꾼 아니면 시골 중학교 국어선생 같은데 이런 이상한 제목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가수라니... 그런 생각을 하며 [92년 장마, 종로에서]란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된 지 3분쯤 후에 컵라면을 먹는 고등학생들이 볼 새라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숨죽여 울었다. ‘다시는, 다시는 시청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시청광장에서 물대포를 맞아본 경험이 있을 리 없는 스물 다섯 살의 내가 그 노랫말을 이기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아마도 ‘흘리지 마라’, ‘기다리지 마라’라는 명령형 어미가 아니라 ‘말자’라고 하는 청유형의 어미였기에 그 슬픔의 무게가 나에게 까지 전해온 것이리라. 청유형의 문장들은 노래를 만든 자신을 포함한 그 시대의 동지들에게 그들 모두의 좌절과 절망을 되새기게 하고 그 상처를 보듬는 위로의 노랫말이었다.
자라면서 가난한 사람이 죄인이 되고, 정직한 사람이 웃음거리가 되는 세련된 세상에 어설픈 분노를 느낄 때마다 분노는 낙오자의 전유물이라며 스스로 냉소하고 세상의 부정(不正)을 부정(否定)하려 했다. 모두들 세련된 세상에 더욱 세련되게 적응을 하며 잘들 살아간다고, 게임의 룰을 바꾸려는 시도는 유아적 투정일 뿐이며 더 뛰어난 플레이어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영광의 길이라고 믿으려 애썼다. 그런데 가수 정태춘은 내게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말자고 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여태 살아왔는지 어떤 좌절과 분노를 느끼는지 잘 안다고, 그리고 정태춘 자신도 똑 같은 분노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나에게 말 해주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고마워 그날 밤이 다 지나고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갈때까지 엉엉 울었다. 그의 이름을 찾아 팬카페에도 가입을 하고, 그의 기사들을 검색하면서 언젠가 꼭 직접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여섯 달 후에 지금은 고인이 된 어느 정치인을 위한 집회에서 나는 정태춘의 생생한 목소리로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었다. 미친듯이 무대 앞으로 달려나가 맨 앞줄에 서서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무작정 무대 뒤 행사진행요원들과 기자들 틈을 비집고 그의 앞에 서서는 짧은 인터뷰를 마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누구시죠?” 당황해 하며 그가 물었다.
“네... 저.. 팬..입니다.”
팬입니다. 정태춘님. 당신이 있어 감사합니다.
첫댓글 후아~~~ 그런 사연이...*^^* 가슴이 찡해오네여*^^*
카페를 위해.. 온 힘을 다하시는 모습에..이런 사연이 담겨있었네요..
저 역시 가슴이 찡~~ 오마이 연재 에세이들 보다 저에게는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네요.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멋진 에세이 또한 글재주 보다 어쩜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퍼가도 되죠?
노래에 감동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민제님 고맙습니다.
후~~~ 감동....끝말에 모든것이 합류되있네요...닭살이 파릇 파릇 솥았어요...ㅎㅎㅎ
^^*
흐억....입이 다물어지지안네여...멋지시네여..저에게두 이런 용기가 필요한데..^^
전 대추리에서 바로 코앞에 계신 태춘님께 인사드릴 기회가 정말 많았는데 머플러를 뒤집어쓴채 눈만 내놓고 꿈뻑이고 있는게 전부였어요. 쑥스러워서요. 부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