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어느 여름날 온 가족이 지리산에 들렀다가 하동에 위치한 한 농협의 분재원에서 쥐똥나무 분재를 하나 사온 적이 있었다. 구입한지 어언 1년이 다 되었고, 잎과 줄기도 분(盆)의 넓이보다 더 넓게 퍼져 있었기에 분갈이를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른 손바닥만한 넓이의 분에 들어앉은 쥐똥나무가 좀처럼 빠져 나오지 않았다. 조금 무리하게 힘을 주어 잡아당겨도 쥐똥나무의 뿌리는 요지부동이었다. 별다른 수가 없어서 작은 망치로 분을 깨뜨려 쥐똥나무를 빼내었다. 분에서 빼낸 쥐똥나무의 뿌리를 살피는 순간, 나는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가느다랗고 하얀 실뿌리들이 부족한 흙더미를 움키려고 얼기설기 뒤얽힌 채 둥근 분(盆)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 밖으로 힘차게 뻗지 못하고, 좁은 틀에 갇혀 똬리를 튼 실뿌리들을 보는 내 마음은 무슨 커다란 죄를 짓기라도 한 것인 양 쿵쾅거렸다. 난마처럼 뒤얽혀 타래를 이룬 실뿌리들을 보면서, 사람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려고 나무나 꽃을 분에 앉히는 행위가 얼마나 모진 짓인지를 실감하였다. 앞으로 다시는 분재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대지에 힘차게 뿌리 뻗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쥐똥나무를 정원 한 쪽에 심고 거름도 주고 흙도 돋우어 주었다.
분재는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거친 마음을 순화시켜준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분재만큼 틀 짓고 가두고 억누르고 간섭하려고 하는 사람의 성향을 부추기는 것도 없지 않나 싶다. 산에 있어야 할 나무를 파다가 분에 옮겨 심는 행위, 분에 앉혀진 나무의 가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때로는 너무 웃자란다고 가위질을 하거나, 철사로 이리 꼬고 저리 꼬아 기형을 만들거나, 일부러 양분과 수분을 줄여 생장의 악조건을 제공하는 등의 행위는 모두 자연스러움을 훼손하고 강제하는 인위적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랴?
자기의 안목에 남을 맞추고, 가두고, 억누르고, 간섭하는 행위는 비단 분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 우리네 모듬살이를 들여다보기만 해도 저 희랍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쇠로 만든 침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의 수중에 들어온 모든 여행자들을 자신의 침대 위에 결박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여행자들의 키가 침대의 길이보다 작은 경우에는 여행자들의 몸을 잡아 늘여 침대에 맞게 하고, 이와 반대로 여행자들의 키가 침대보다 길 경우에는 여행자들의 다리를 잘라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좁은 틀에 다른 사람들을 가두고, 자신의 제한된 관점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자기의 안목으로 남을 강박하는 사람을 꼬집은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은 남을 새장에 갇힌 새, 진열장에 박제된 동물의 신세로 전락시킨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불행과 슬픔으로 얼룩진 눈물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이런 행위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곧잘 범하는 실수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부모의 욕심이 아이의 숨통을 죄는 것이다. 아이들의 슬픈 눈망울에는 부모의 잘못된 보상심리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옆집의 아이를 보아라. 그 아이는 이번에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단다. 그런데 너는 이게 무어냐? 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 나는 너에게 실망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퍼붓는 이런 식의 닦달은 앞으로 펼쳐질 아이의 미래와 가능성을 박탈하고, 아이를 우울과 절망의 세계로 밀어 넣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달달 볶아댄다.’는 말이 있다. 볶아댐은 남에게 자신의 결점이나 흠을 전가하는 투사(投射)의 행위이다. 남을 있는 그대로 두지 못하고, 남을 뜻밖의 존재로 놓아두지 않는 것, 그것이 투사다. 그것은 또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처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방식, 우리의 태도,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실망을 투사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은 물론이고 남마저 ‘뜻밖의 존재’로 두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과 남을 뜻밖의 존재로 놓아두지 않고, 자신과 남을 들볶는 행위는 자신과 남을 축소시키고 퇴보시키는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는 우리 자신과 남에게서 놀람과 기쁨, 참다운 성장과 사귐을 앗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느 수도원에 제자들 각자가 나름의 보조에 맞추어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스승이 있었다. 그 스승은 결코 ‘강박’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내버려둠’에 관하여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어떤 사람이 한번은 나비가 고치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고서, 자기 마음에는 그것이 너무 느려 보이기에, 거기에 대고 부드럽게 입김을 불기 시작했다. 입김의 온기가 성장 과정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 것은 나비가 아니라 날개가 망가진 벌레였다." 그 스승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고 한다. "성장하는 데에는 과정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유산시킬 뿐이다."(드 멜로의 [일분 지혜]에서). 자라는 것을 도왔는데 결국에는 망가뜨렸다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짧지만 길다란 여운을 준다. 강박과 닦달은 대상을 기형적으로 일그러뜨릴 뿐이다.
우리는 자신과 남을 그대로 놓아 둘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과 남을 지금의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기회를 담고 있는 앞으로의 존재로 여기는 것과 같다. 장미 줄기에 가시와 잎사귀만 무성하다고 해서 가시와 잎사귀들을 싹둑 잘라버린다면, 그 줄기에서는 꽃이 피지 않을 것이다. 가시가 눈에 띌지라도 그것을 두고 용납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만이 장미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정원사라면, 가시와 잎사귀에서 장차 필 아름다운 꽃을 앞당겨 보는 가운데 다만 정성껏 물을 주고 자양분을 대어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박과 닦달로 남을 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을 뜻밖의 존재로 여기고 그대로 둘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길러야 한다. ‘그대로 두는 것’은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의 손길에 맡기는 행위이다. 그것은, 맹자가 말한 대로, ‘있는 것’을 잊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라는 것을 돕겠다고 나서지도 않는 행위이다(勿忘勿助長).
‘그대로 두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큰사랑이다. 그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다. 하느님은 만물을 뜻밖의 존재, 가능성과 기회를 지닌 존재로 두고 보신다. ‘그대로 두고 보는 사랑’을 갖고 계시기에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또한 예수께서는 밀밭에서 자라는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내버려두어야 한다고도 말씀하신다(마태 13:24-30). 하느님은 만물을 그대로 두고 보시면서도 만물이 잘 자라도록 자양분을 대어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삶 속에서 ‘그대로 둠’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버리는 셈이 될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대로 두고 보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그대로 둠을 실천하는 것은 자신과 남을 뜻밖의 존재로 놓아두는 행위이고, 가장 품이 넓으신 하느님께로 뛰어드는 신뢰의 행위이며, 자신과 남을 참된 성장으로 이끄는 행위이다.
b.g.m.: common ground/jeanette alexander
painting : 바람결/안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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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분재 전시를 보면서 예술적 가치를 따져 비싼 값이 매겨지는 것에 참 이상타 생각했습니다. 올리신 글처럼 왜 살아있는 그대로가 아닌 인위적인 것에 그렇게들 흥분하는지...좀 야릇했지요. 같은 생각을 읽을수가 있어서 많이 놀란 양으로 꼬리글 남겨요. 뒤 이어진 말씀들에 신뢰를 더하며.. 그대로 두고 보는 사랑 갖고 .
한번쯤 아픈 마음 가져보기도 하였습니다 얼마나 잔인하면 용트림에 박수를 보낼까도... 어디 분하나 뿐이 겠어요 중국여행중에 곰과 원숭이의 재롱이 아픈마음 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편이랑 약수터를 오가며 대하는 야생화가 너무도 싱싱한 빛을 뿜어내기에 집안으로 캐오고픈 마음이 스쳤드랬습니다. 그러나 사람도 답답한 집안에 야생화가 옮겨오면 얼마나 숨막힐까 염려가 되어 그냥 놔두고 약수터 가는 횟수를 늘렸네요.
저도 분재라는 것을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분재가 싫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그 속에 갇힌 나무가 불쌍했지요. 분재를 보는 제 마음이 그랬건만 제가 다른 사람을 저의 틀에 끼워맟추려 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풀꽃세상에서 제 6회 풀꽃상을 <지리산 계곡의 물봉선>에게 수상했다더군요.. 만물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목사의 구미에 맞는 교인만들기에 공들이는 목사는 되지 말아야 겠지요, 순간이 조심스럽습니다. 행여나 내모습일까 해서 말입니다.
분안에 갇혀버린 분재... 아무리 뻗어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분재... 새장속에 갇힌 새... 왜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는걸까요?
목사님, 저도 그 나무 분제를 좋아하다가 목사님처럼 미안한 마음에 이젠 손을 놓아버렸습니다. 아직도 풍란을 나무 붙임한 것과 돌붙임한 것이 있거든요. 나무에 붙어있는 풍란은 덜 미안한데 돌에 붙인 풍란에게는 좀 미안한 생각입니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되네요....
상록수님!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두고 볼 줄 아는 넉넉한 사랑을 기르는 길, 창조 영성의 두 번째 길(via negativa)에 속해 있지요. 내 멋대로 남을 강박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길이지요.^-^**
사랑의 열매님! 사육되는 동물 역시 분재와 같은 신세일 수 있겠습니다. 그대로 둠의 의식이 동물과 식물, 광물에까지 이르면, 자연스럽게 만물평등의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만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만물이 사람과 어깨동무하고 있다는 의식입니다. 공감해주셔서 고마워요.^-^**
정형란님! 잘 하셨어요. 야생화는 들에 있어야 제 격이니까요. 야생화를 보러 약수터 찾는 횟수가 느셨다니, 제겐 참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지속시키고 있거든요. 제 산책길에는 춘란식구가 벗으로 맞이해주지요. 덕분에 산책을 자주 하곤 한답니다. 그렇게 산에 들에 강에 바다에 우리의 영혼을 푸릇하게
할 벗을 많이 두는 게 우리 삶에 꼭 필요합니다. 일삼아 찾아간 벗들은 우리에게 귀한 에너지를 분출하고, 자신 속에 깃들인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니까요. 그들의 에너지와 말씀을 받은 우리는 또한 갈데없이 푸르러질 테고요.^-^**
자연스러움의 맛, 날 것의 맛을 아시는 파비올라님! 저도 님의 견해에 동감입니다. 언제나 타산지석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답니다. "내가 혹시 저렇게 하지는 않나" 하는 자세야말로 자기의 삶과 사사람 대하는 자세를 검사하고, 훨씬 성숙한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치악산에서님! 풀꽃상을 지리산의 물봉선이 받았다는 소식이 싱그럽게 다가옵니다. 만물은 물론이고 사람 역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물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여기서 있어야 할 곳은 물론 만물에게 존재를 주시는 하느님의 품이겠지요.
목회를 해오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목사야말로 자기의 가치관, 자기의 구미에 맞게 사람을 가위질하려는 유혹에 쉽게 노출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구미를 넘어서 우리를 내신 그분의 계획과 섭리를 구하는 여유로움이야말로 그대로 두는 삶의 실천으로 가는 길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민들레님! 민들레님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가진 재능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곁님의 뒤를 받쳐주는 토대가 약한 것을 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 약한 토대가 사실은 곁님을 가장 잘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마세요. 곁님이 힘들어 할 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품이기도 하고요. 지금은 아무리 뻗어나가려 애써도 뻗어나
갈 수 없다고 느껴지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사람은 분재의 경우와 많이 다르답니다. 뚫고 나가려는 의지가 꼭 필요합니다. 그 의지를 놓치지 않을 때 하느님도 도우실 거고, 곁님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도울 수 있어요. 그러니 힘내세요. 곁님의 앞길에 어떤 놀라운 일이 펼쳐질지 모릅니다. 그 가능성을 붙잡는 거예요.^-^
아굴라님! 저는 분재를 전문적으로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동에서 분재 하나를 구입한 것이 전부지요. 그것이 내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으니 큰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에 갇힌 쥐똥나무를 정원에 심어놓았더니 잘 자라고 있습니다. 돌 붙이 풍란을 어찌할 것인지가 고민이라시니 곁님의 해결책이 자못 궁금해집니다.
저는 동물원 폐지론자입니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에도 동물원 폐지론자들의 운동이 있더군요.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허울도 있지만, 그것 또한 넓게는 인간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나라에서도 이 운동이 자리잡았으면 하네요.
wind님! 저 역시 동물원을 반대합니다. 동물원의 설치는 인간우월주의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영어로 동물은 animal이라고 하잖아요.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뜻인데, 그런 존재를 우리에 가두어둔다는 것은 실로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심판을 받는다면, 피조물 하나하나에게 한 행위로 심판을
받으리라는 확신이 요즘 점점 더 굳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사물을 보는 그 눈으로 나를 보신다."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말인데, 저는 이 말씀이 너무나 고마울 수가 없어요. 피조물 위에서 우쭐거리는 자세가 아니라 피조물과 어깨동무하는 자세를 촉구하고 있으니까요.^-^**
지난 5월 교회행사 때문에 화분이 몇개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모두 죽고 하나 남았습니다. 남은 한 그루의 이름 모를 나무는 너무 키가 커서 천정에 닿는데 어린 새 잎이 말라 떨어지네요. 노천에 내다 심자니 우리나라 사계절을 이겨내지 못하는 나무라네요. 이 마저 죽일까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