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산
예천-영주 달밭산(974m)
알려지지 않은 예천의 청정 산줄기
39km 산줄기 자구지맥의 최고봉
백두대간은 소백산을 지나서 죽령을 건너 도솔봉~묘적봉~묘적령을 거쳐 저수재로 잇는다. 묘적령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봉현면, 예천군 상리면을 가르는 분기점일 뿐만 아니라, 동남쪽으로 잇는 자구지맥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자구지맥은 묘적령에서 옥녀봉~자구산~부용산~냉정산~남산을 거쳐 한천과 내성천이 만나는 예천군 호명면 담암리까지 이어진 39km의 산줄기다. 지맥이 시작되는 첫머리에 옥녀봉과 달밭산, 자구산이 자리하고 있다.
소백산 국립공원구역에서 약간 벗어난 이 산은 지금이야 영주시와 예천군을 가르는 경계를 이루지만 예전에는 영주(풍기) 땅에 속한 산이었다. 더욱이 영주시 봉현면 두산리의 옥녀봉 자락에 '소백산 옥녀봉자연휴양림'이 소재하는 것도 한몫을 하리라 싶다. 최근 예천의 한 산악회에서 등산로를 정비하고 정상 표지판을 세우는 등 '예천의 산' 알리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아직은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간혹 지맥을 종주하는 사람들만 지나칠 뿐이다. 이는 가까운 곳에 소백산이라는 덩치 큰 산을 비롯해 도솔봉 등 꽤 알려진 산이 많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역적으로 교통편이 원활하지 못한 오지다. 그러다 보니 산은 조용하고 때 묻지 않은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다. 산행 처음부터 끝까지 휴지조각이나 담배꽁초 하나 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등로는 고항리 버스종점에서 도로를 따라 고항치(모래재 또는 고리목재)로 오른다. 그 후 옥녀봉~문곡재~971.3m봉~소목재~자구산을 거쳐 부춘산(732.4m)에 오른 뒤 서릉을 타고 석묘리(돌무덤)로 내려선다. 능선을 이어가는 산행이라 크게 힘든 곳은 없지만 등산로가 단조롭다는 것이 단점이다.
들머리인 예천군 상리면 고항리는 조선시대 초부터 6.25 때까지 '고리목 담범솥' 이라는 무쇠솥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영주로 이어지는 도로가 지난 2008년 확·포장되고, 폐교된 은풍초등학교 고항분교가 '곤충생태체험관'으로 탈바꿈한 이후로 외지인들의 발길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 특히 예천곤충연구소에서 열렸던 지난 '2007년 예천 곤충바이오엑스포'는 당시 많은 관람객으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으므로 한번 들러 볼 만하다.
곤충생태체험관을 나서서 도로를 따라 고항치까지는 2km다. 해발 700m 고갯마루는 야생동물의 이동을 위한 터널이다. 터널 위 능선에 올라 왼편은 묘적령으로 연결돼 대간 길과 만난다. 옥녀봉은 오른편 능선길. 경사가 심하지 않은 오르막 산길로 30분이면 옥녀봉에 닿는다.
우리나라 산 이름 중에는 옥녀봉이 수없이 많다. 이들은 모두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지세의 형국에 따라, 또는 옥녀와 관련된 전설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이 대다수다. 어쨌든 산정에는 쌓다 만 돌탑과 표지판(옥녀봉 890m, 묘적령 2.8km, 자구산 4.9km)이 반긴다.
주변 조망도 탁 트여 북쪽으로 소백산의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이 하나의 능선을 이루며 소잔등처럼 부드럽다. 그 동남쪽에 위치한 영주시, 풍기읍 일대와 남쪽으로 자구지맥을 연결하는 산봉우리들도 훤하다. 오른편은 백두대간의 등줄기가 근간을 이루고, 민초들의 깊게 파인 주름살 같은 산골짜기 따라 고항리, 초항리, 백석리를 잇는 넓고 깊은 골이 뙤약볕 끝자락 너머로 아련하다.
이제 가야 할 달밭산, 달밭재, 자구산, 부춘산의 산봉우리들을 잇는 능선길. 여기서부터는 무엇보다도 주능선의 마루금만 제대로 이어간다면 길을 놓칠 일은 없다. 그러나 주변 조망이 여의치 않아 숲 속 갈림길에서 헷갈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옥녀봉서 봉우리 하나를 넘어 10분이면 문곡재를 지나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에 갈림길을 만난다. 왼편 길로 접어들어 바위 사면 길을 지나 올라서면 971.3m봉이다. 산정에는 삼각점(단양 317, 2003 복구)이 자리하고 주변 조망도 그만이다. 뒤돌아보면 옥녀봉 너머 서북쪽의 묘적봉, 도솔봉은 지척이다.
소백산은 물론이고 묘적봉에서 남서쪽으로 뱀재, 싸리재를 거쳐 저수재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산세도 한눈에 들어온다. 삼각점을 뒤로하고 잠시 오른편으로 내려섰다가 오르면 묘지가 자리한 974m봉(달밭산 정상). 지형도상에는 달밭고개라 표기돼 있지만 자구지맥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다. 영주시 봉현면 천부산(852m)으로 이어지는 등로와 갈라지는 이곳은 차라리 달밭산(月田山)으로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성지문화사에서 발행한 도로지도에도 달밭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1,000m에 육박하는 높은 봉우리지만 주변을 관망하기에는 빽빽한 숲이 장애물이다.
오른편 내리막길로 진행한다. 수풀에 뒤덮인 헬기장을 만나고, 뒤이어 산길 오른편에 자리한 묘지 2기를 지난다.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 쌓인 산길에 군락을 이룬 철쭉나무가 배낭을 잡아끈다. 지형도에 표기된 소목재는 분간하기가 어렵고 양쪽 사면이 깎아지른 바위지대의 날등을 탄다. 정상을 떠난 지 20분 정도면 닿는 821m봉에서 길은 다시 나눠진다.
여기서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직진 길은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길로 나중에는 길이 없어진다. 오른편의 뚜렷한 산길로 내려서야 한다. 처음 경사가 심하다가 차츰 누그러지는 능선길에 '山'이라 새겨진 콘크리트 말뚝이 보이고 길은 능선을 따라 왼편으로 휘어진다. 곧 안동권씨 묘지 4기를 지나 안부다. 왼편에는 임도가 산 사면을 지나고, 오른편으로 고항리 신기마을(2.0km)로 빠지는 산길이 있어 이곳이 소목재가 아닌가 여겨진다.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의 여러 마을도 보이고 멀리 남쪽으로 뻗어가는 용암산 산등성이도 시야에 들어온다.
안부에서 자구산까지는 20분이면 닿지만 임도로 붙으면 안 된다. 직진하여 계속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야 한다. 등줄기가 땀으로 후줄근해질 무렵 자구산 산정에 선다. 예천 흑응산악회에서 세운 정상 표지판이 반갑다. 국립지리원은 757m봉을 자구산이라 표기했는데 표지판은 이곳에 세워져 있다. 이는 아마도 남쪽의 757m봉보다 이곳이 더 높은 봉우리이기 때문인 것 같다.
자구산은 '자구지맥' 이란 이름을 낳기도 했지만, 옛날에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 이 산에서 공을 들이고 자식을 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조망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보이는 산골 마을들. 그 풍경은 번잡스런 도회지에서 느낄 수 없었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물 한 모금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땀이 식으면서 느껴지는 한기가 갈 길을 재촉한다. 여기서 부춘산(732.3m)까지는 1시간이면 닿지만, 고만고만한 봉우리 네댓 개를 오르내리게 된다.
백두대간 자락이라 그런지 능선을 가볍게 스치는 바람은 가슴 속까지 시원하다. 능선을 감춘 짙은 숲은 6월이면 진초록의 색깔로 변해 숲이 발산하는 피톤치드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낙엽이 쌓인 바윗길의 연속이지만 바쁠 것 없이 넉넉하다. 표지판이 서 있는 자구산을 떠나 770m봉을 넘어 오르면 지형도상의 자구산인 757m봉. 계속해서 봉우리 서너 개를 지나 정면의 송전탑을 바라보고 나아간다. 송전탑이 자리한 660m봉을 지난 안부가 지르매기다. 지르매기(질매)는 길마의 이 지방 방언이다. 소 등에 안장을 지운 형상이라는 지르매기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직진하여 된비알의 능선길로 올라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잠시 후 부춘산에 닿는다. 억새와 잡목이 뒤덮고 있지만 정상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주변은 참나무와 조림한지 꽤 오랜 듯한 낙엽송 숲이 사방을 가려 조망은 기대할 수 없다. 덤불 속에 선명한 원형 삼각점이 보인다. 옛 국방부 지리연구소에서 설치한 대삼각점이다. 국방부 지리연구소(1961.2.15까지 운영)는 지금의 국토지리정보원 전신이다.
지형도에는 부춘산 표기가 없지만 이 지방에 전해지는 얘기가 있다. 고려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지방 안동으로 몽진할 때다. 그해 공민왕은 새목(초항)마을에서 피란하고 춘생마을에 이르러 봄이 온 것을 알았으므로 마을 뒷산을 부춘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또 일설에는 신라 경순왕이 경주에서 송도(개성)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봄을 맞았다고도 한다. 공민왕이든 경순왕이든 우리 역사에 기록된 비운의 왕들이 아니던가.
부춘산에서 하산은 서쪽(오른편) 능선으로 나아가 석묘(돌무덤)마을로 잇는다. 왼편 능선길은 한티재를 거쳐 부용봉으로 연결되는 자구지맥 길이다. 일단 삼각점 뒤편 능선길로 접어들면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이다. 2~3분 후면 만나는 희미한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내닫는다. 산길은 희미하지만 그런대로 더듬어 갈 수 있다. 정상에서 20분이면 의성김씨 묘지를 만난다. 상석에 망주석까지 갖췄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지 수풀이 뒤덮고 있다.
묘지를 지나 산길은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제법 뚜렷하다. 햇빛마저 차단할 정도로 울창한 소나무 숲길로 5분. 널찍한 산길과 합류해 왼편으로 꺾어 들면 사과나무 밭이다. 여기서 왼편 마을로 들어서면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고 사과나무가 산자락을 뒤덮은 마을길 따라 내려서면 버스정류장이 있는 석묘리다.
*산행길잡이
○고항리 버스종점~고항치~옥녀봉~문곡재~정상~소목재~자구산~부춘산(732.4m)~석묘리(돌무덤)마을 <5시간30분 소요>
○고항리 버스종점~고항치~옥녀봉~문곡재~정상~소목재~자구산(뒤돌아)~소목재~신기마을 <4시간30분 소요>
○고항리 버스종점~고항치~옥녀봉~문곡재~정상~소목재~자구산~부춘산~한치재~영주 봉현면 노좌리마을 <7시간 소요>
*교통
자구산 산행을 위한 대중교통편은 예천 시외버스터미널(054-654-3798)을 경유해야 한다. 그러나 예천은 대중교통편이 많지 않아 불편하므로 서울이나 대구에서는 시외버스를, 부산에서는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물론 돌아올 교통편도 미리 챙겨야 한다. 예천읍내 버스정류장에서 산행 들머리인 고항리까지는 군내버스(예천여객)를 탄다. 산행 날머리 역시 고항리에서 돌아 나오는 예천여객 군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택시를 탈 경우 요금은 예천읍에서 고항리까지 30,000원 안팎. 예천택시(054-654-3500).
서울-예천 동서울종합터미널(1688-5979 ARS)에서 1일 12회(06:40~20:30) 운행.
대구-예천 북부시외버스정류장(1666-1851 ARS)에서 1일 25회(06:10~20:55) 운행.
부산역-예천역 부산역(1544-7788 ARS)에서 06:40, 14:45, 18:35, 22:10(토, 일 운행) 무궁화 운행.
예천-고항리 군내버스정류장(054-654-4444)에서 1일 8회(06:10, 07:40, 09:30, 11:10, 12:40, 14:10, 16:00, 18:40) 운행하는 고항리행 군내버스 이용, 고항리 종점에서 하차.
*숙식(지역번호 054)
고항리에는 최근 문을 연 펜션들이 있다. 문드래미 산장(010-8904-8941), 산속 소풍펜션(019-9225-0355), 다래와 잣나무펜션(010-4856-7122) 등이 있고, 고항가든(653-2328)과 원골산장(653-5828)은 음식점을 겸한 민박집이다.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는 산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 같다.
예천읍내에는 영남 반가의 음식을 가장 알차게 맛볼 수 있는 별미집으로 60년 전통의 청포묵집(655-0264)이 있다. 잡티 하나 없는 녹두를 깨끗하게 불린 후 맷돌에 갈아 채로 쳐서 가마솥에 끓여 만든 것이 청포묵이며, 조기, 산나물무침, 탕국 등 한상 차린 것이 청포정식이다. 예천군청에서 도보 3분 거리. 숙박은 예천읍내 한성장(654-2262), 로얄장(654-2985), 크리스탈(655-2000) 등이 있다.
글쓴이:황계복 전 부산산악연맹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