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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군사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곳에 대해 국제조약 등을 통해 군사시설의 설치와 주둔을 금지하는 지역.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단어이다.
전쟁이 끝난지 43년이 지났지만 베트남을 남북으로 갈랐던 북위 17도선 비무장지대에는 전쟁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분단된 땅에서 휴전상태로 살고 있는 나로써는 그 현장을 찾아가는 길이 남다르다.
더구나 미군의 용병으로 명분없이 참전했던 바로 그 땅에서...
해방을 맞이했지만 외세에 의해 멋대로 그어진 한반도의 북위 38도선과 베트남의 북위17도선!
하나의 나라가 되어 평화롭게 살았어야 할 사람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역사!
그리고 여전히 분단과 대립이 진행 중인 한반도의 38도선!
우리도 하루 빨리 철조망과 지뢰를 걷어낸 비무장지대가 평화와 생명의 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벤하이강이 유유히 흐르는 베트남 북위 17도선, 비무장지대로 간다.
문익환목사님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가 생각났다.
비무장지대
시 : 문익환 목사님, 작곡 : 류형선, 노래 : 김용우
비무장지대로 가자 비무장지대로 가자
얼룩진 군복은 벗어라 여기는 비무장지대라
비무장 지대로 오라 비무장 지대로 오라
따발총 계급장 버리고 오라 비무장 지대로
팔씨름 샅바씨름 남정네들은 힘겨루기
널뛰기 그네타기 너울너울 춤추며
너희는 백두산까지 우리는 한라산까지
철조망 돌돌돌 밀어라 온누리 비무장지대로
베트남의 독립과 분단의 역사를 보면 우리와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DMZ투어를 떠나기 전에 베트남의 독립,분단,통일의 과정을 알고 가는 것이 좋을 듯해서 부족하지만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DMZ투어는 훼에서 2시간 가량 떨어진 동하(Dong Ha)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아침 일찍 출발한다.
신투어리스트에서 미니버스로 7시에 출발해서 저녁 6시까지 투어가 진행된다.
호스텔에서 조식을 먹지 못하고 나와서 반미로 아침식사를 한다.
베트남의 대미항전의 현장으로 가는데는 역시 '반미'가 제격이다.
투어를 시작해서 동하(Dong Ha)시까지 가는 동안 기사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보통 투어를 하면 가이드가 먼저 인사를 하고 투어에 대한 소개를 하는데 가이드도 보이지 않는다. 동하시내로 들어가니 차를 잠깐 세우고 여자분이 타서야 본인이 DMZ투어의 가이드라고 인사를 한다. 동하에서 거주하면서 DMZ투어 가이드를 하고 있다고 한다.
1954년 1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물러가고 베트남은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아시아지역에서의 공산화(도미노현상)을 우려한 미국으로 인해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이 된다.
1954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벤하이강을 따라 남북으로 5Km를 비무장지대로 두기로 합의하고 그 후 20여년간 이 곳은 남북을 가르는 경계가 되었다. 당시 북베트남의 최전방 도시는 빈목(Vinh Moc)이었고, 남베트남의 최전방 도시는 동하(Dong Ha)였다.
록파일(Rockpile)
9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도로변에 잠깐 차를 세우더니 모두 내리게 한다. 멀리 보이는 산이 록파일(Rockpile)이라는 곳이라고 한다. 외딴 곳에 있어서 헬리곱터가 아니면 접근이 어려운 곳인데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미해병대의 관측소와 포병기지가 있던 곳이다. 그냥 보기엔 별 것 없는 한적하고 고요한 해발 230미터의 바위산일 뿐이지만 40여년 전에는 포성이 울리고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참혹한 전쟁터 한가운데였던 곳이다.
한때는 울창한 밀림이었지만 미군의 고엽제로 30년이 지나서야 풀들이 자라나고 있다고 한다.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차안에서 가이드가 이 지역의 소수민족마을에 대해서 설명한다.
소수민족마을을 잠깐이라도 방문하는 줄 알았더니 그냥 차안에서 설명만하고 지나간다.
신투어리스트의 여행일정표에는 'Minority R’u village'라고 되어 있는 걸 보니 '루족'인 듯 하다.
전쟁 전에는 화전을 일구며 사냥과 낚시를 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마을이었다.
분단과 전쟁의 접경지대에 살면서도 전쟁을 왜 하는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고스란히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총을 들고 온 사람들이 총부리를 겨눌때 그들은 그 이유를 알았을까?
당시 주월미국사령관은 이 지역 소수민족 청년들을 훈련시켜 보조병력으로 전쟁의 투입시킬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소수민족 사람들은 자진해서 비엣콩과 북베트남군의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념이 무엇인지 모르고 순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마을에 들이닥친 전쟁의 회오리... 영화 '웰컴투 동막골'이 생각난다.
호찌민트레일(Ho Chi Minh Trail)과
다크롱다리(Dakrong Bridge)
소수민족이 사는 산길을 지나면 다크롱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는 일명 '호찌민트레일' 또는 '호찌민루트'의 주요 경로였다고 한다.
호찌민트레일은 전쟁 당시 북위 17도 분단선에서부터 사이공 인근까지 1,600Km에 달하는 북베트남의 인력,군수품 수송경로를 말한다. 호찌민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미군은 9번국도에 캠프캐롤, 록파일, 케싼, 랑버이 등의 기지를 만들기도 했다. 북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경유해서 은밀하게 물자를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빽빽한 정글에 만들어진 수천개의 경로를 미군은 도저히 차단할 수가 없었다.
미국은 보급로 차단을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비밀폭격을 하면서 100만명에 가까운 캄보디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대적인 반전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다크롱교는 미군의 폭격으로 무너지고 재건되기를 반복하다가 2001년 마지막으로 복구된 다리이다.
호찌민이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입성할 때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케산기지 (Khe Sanh Combat Base)
다크롱교에서 13Km 떨어진 케산기지는 DMZ 남쪽으로 25Km, 라오스 국경에서 10Km에 위치해 있는 북베트남에서 가장 가까운 미해병대의 전진기지였다. 고원지대여서 그런지 케산기지가 가까워 질수록 커피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입구에서 파는 커피를 한 잔 사마시고 케산기지로 들어갔다.
이곳은 베트남전쟁 기간 가장 치열했던 포위공격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1968년 구정대공세가 있기 10일 전, 1월 21일 북베트남군은 케산기지를 포위하며 무려 75일간의 장기전에 돌입한다. 프랑스군이 장기 포위 끝에 패배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의 악몽을 떠올린 미국은 백악관 상황실에서 6,000여명의 미해병이 갇힌 캐산기지의 모형을 놓고 매일 상황을 체크했다고 한다.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매일 1면 커버스토리로 다룰 정도로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었다.
미군은 200㎡에 불과한 케산주변에 5,000여대의 비행기와 헬기를 동원하여 10만톤에 이르는 박격포와 네이팜탄 등 온갖 종류의 폭탄을 투하하여 초토화시킨다. 결과는 미해병 500여명과 북베트남군 1만여명 그리고 엄청난 민간인의 희생 뒤에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공격은 계속 되었고 구정대공세(테트공세) 후 미국은 국제적인 반전여론에 몰리게 된다. 그리고 7월 케산기지를 철저하게 초토화 시킨 후 캠프 캐롤로 철수한다. 미군이 떠나자 북베트남은 호치민트레일을 닦아 비엣콩의 생명선을 이을 수 있었다.
케산포위와 구정대공세를 보면 전투는 미국이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결국 북베트남이 전략적으로 승리하는 이상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미국은 전쟁을 하면 할수록 벗어날 수 없는 늪에서 허우적대는 꼴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케산기지에는 늪에서 허우적대던 미군의 무기들이 베트남의 전리품으로 전시되어 있으니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의 꼴도 우습게 되었다.
케산기지의 박물관에는 당시의 사진자료와 무기들을 볼 수 있다.
케산기지를 나와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 가이드가 차를 세우더니 풀숲 쪽을 가르킨다.
길가의 풀숲에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군 탱크가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파괴된 채로 풀과 엉켜 있다.
점심은 닭고기 볶음밥을 주문했는데.. 닭고기가 함께 볶아져서 나올 줄 알았더니 볶음밥에 닭고기가 하나 올려져 있다. DMZ투어팀을 주로 상대하는 식당인지 가게에는 DMZ지역 지도도 걸려 있고... 맛은 더럽게 없다.
히엔르엉교(Hien Luong Bridge)
점심식사 후 빈목터널로 향하다가 벤하이강을 건너면서 그 옆에 놓인 히엔르엉교를 지난다. 가이드가 사진 찍을 준비를 하라고 한다. 뭐지? 안내리는 건가?
사실 이번 DMZ투어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히엔르엉교였다. 남북베트남을 가르는 상징적인 다리로 분단이 되는 1954년부터 전쟁이 끝나는 1975년까지 다리 중앙에 경계선이 그어서 대치했던 곳이다. 현재는 분단 경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노란색, 북쪽은 파란색으로 칠해져있다. 그리고 주변에 기념 조형물들이 보인다.
이 다리는 꼭 걸어서 건너가 보고 싶었고 여기서 사진을 찍을려고 한반도기까지 준비해왔는데... '혹시 돌아올 때 자세히 보는 걸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차에서 보면서 지나가는 걸로 끝이다.
신투어리스트 홈페이지에서 투어일정을 확인해보니 "introduced while driving pass(차에서 지나가는 중에 소개)"라고 되어 있다. 나는 가운데에 앉아서 사진도 제대로 못찍는 자리인데...
신투어리스트... 정말 너무하다. 분단국가에서 온 관광객의 심정을 이리도 몰라주다니..
가이드가 너무 미워진다.
혹시라도 훼에서 DMZ투어를 하실 분들은 히엔르엉교를 걸어볼 수 있는지 확인하고 여행사를 선택하시길...
빈목터널(Vinh Moc Tunnels)
빈목터널로 가는 길에 가이드가 주변 나무들을 가르키면서 후추나무라고 한다. 이 주변으로 후추 플랜테이션이 크게 있는 듯 하다. 후추나무는 처음 본다.
빈목터널에 들어서니 음료수를 파는 아주머니들 많이 있다. 터널을 나와보니 왜 음료수가 필요한지 알 것 같다.
저 아이들이 자라날 세상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만 계속되길....
전쟁 당시 DMZ 바로 북쪽 마을인 빈목은 북베트남의 최전방도시였다.
미군은 이 지역에 9천만톤에 달하는 폭격을 했다고 한다. 그게 어느 정도의 양인지 상상이 안간다. 미친것들!!
주민수가 1천명이니 주민 1명당 9만톤의 폭탄을 맞아야 했으니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었을까?
지구상에서 발생했던 전쟁 중 가장 많은 폭격을 받은 지역 중 하나라고 한다. 미국놈 개X끼들!! 욕부터 나온다.
폭격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주민들은 자신의 집터에 땅굴을 파고 이웃과 주변의 땅굴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민들은 힘을 합쳐 1965년부터 18개월간 농기구만으로 6,000m³의 흙을 파내고 2.8Km에 달하는 터널을 만들었다. 터널은 3층구조인데 주거공간으로 쓰였던 1층은 12m 아래, 군수물자와 식량 창고로 쓰인 2층은 18m 아래, 방공호로 쓰인 3층은 22m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깊이 판 이유는 미군이 땅굴을 파괴하기 위해 10m 아래까지 뚫고 들어가는 드릴폭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내부에는 각 가구의 독립된 공간은 물론 우물, 병원, 회의실, 창고, 탄약고, 회의장 등 목적에 맞는 다양한 공간이 있다. 13개의 입구와 7개의 출구가 있고 출구를 나오면 광찌해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땅굴에서 무려 60가구 600여명의 주민들이 8년간을 살았다고 한다. 출구가 있었지만 언제 폭격이 있을지 모르는 터널 밖으로 여성과 아이들은 나올 수 가 없었다고 하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생활이었을 것이다.
터널을 체험해보기 전에 먼저 조그마한 박물관에 들어가서 터널에 대한 안내와 사진자료들을 볼 수 있다.
"TO BE OR NOT TO BE"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부조의 제목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미제국주의의 폭탄 아래 당시 주민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죽느냐 사느냐'는 단순히 목숨을 이어보겠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살고 싶었다면 미국에 투항했거나 다른 지역으로 피난을 갔겠지. 한순간도 버티기 힘들 지하터널에서 무려 8년을 지내면서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건 무엇일까?
오랜 세월을 프랑스에 대항했던 독립투쟁과 승리의 경험을 가졌던 그들이기에 다시 조국에 닥친 엄중한 현실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결국은 질긴 놈이 이긴다!!!
8년동안 이 터널에서 태어난 아이가 17명이라고 한다. 지금 이들은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어른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박물관을 나와 실제 터널로 들어가본다.
올해 초 호찌민시티에서 찾아갔던 구찌터널보다는 입구나 내부가 넓다. 아무래도 구찌터널은 게릴라전을 위한 용도이고 이곳은 방공호 겸 생활을 위한 용도이기 때문인 듯하다.
터널 내에는 당시 생활하던 다양한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땅굴에서 한참을 걷다보니 언제 출구가 나올지 답답함마저 느껴진다.
이런 곳에서 8년을 살았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드디어 출구로 나온다.
출구를 나와 숲이 우거진 길을 걸어 나오니 믿기지 않는 광경이 나온다.
탁트인 아름다운 해변!! 방금까지 있던 땅굴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바다로 통하는 길은 탈출을 위한 출구이자 공사 중 나온 흙을 몰래 버려 터널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땅굴을 통해 빈목터널 입구로 돌아간다.
빈목터널을 마지막으로 DMZ투어는 끝나고 다시 훼로 돌아왔다.
끝내 히엔르엉교는 걸어보지 못하고 야속한 가이드는 동하에서 바이바이~를 하며 내려버린다.
이번 여행에서 베트남루트는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느껴보는 루트로 고민을 했었다. 그동한 책이나 미디어로만 접했던 곳들을 직접 찾아보니 새삼 통일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다행히 남북관계가 좋아지고 있다. 김정은 국방위원장 연내답방이 성사되고 남과 북은 평화와 통일로 가고, 전쟁과 대결을 조장하는 분단적폐세력들은 하루 빨리 청산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내일은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라오스로 떠나는 날이어서 훼 골목을 돌아다니며 베트남의 마지막 풍경을 담아보았다.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
여행자 거리에는 주로 외국인들이 가는 식당이 많아서 둘러보다가 현지인로 보이는 사람들만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 보았다. 주로 해산물 요리를 파는 곳인데 역시 현지인들이 먹는 곳으로 가길 잘했다.
오늘은 큰 맘먹고 문어요리도 하나 추가 주문해서 먹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