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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자료들이 인터넷에 존재하고 급제자 숫자들도 각양각색으로 틀리게 말해주지만 신빙성있고 믿을만한 온라인 문과방목에 의하면 조선조에서 한산이씨는 총189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이것은 최종검증을 거친 통계이므로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곘다. 이중 복수 급제자가 12명 있었는데, 한 번은 세번 급제하였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복수 급제까지 전부 다 포함하면 한산이문의 과거 응시자들은 202번 문과에 등제한 것으로 통계가 나온다.
결과적으로 한산이문의 조선조 문과급제를 말할때, “(개인) 189명이 202번 등제하였다.” 고 말하는 것이 제일 정확하고 올바른 표현이다.
여하튼 한산이문은 한반도에서 조선조를 통털어 가장 많은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문중중에 하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과급제가 얼마나 하늘에 별따기 만큼 어려웠나하니, 연평균 30명 정도가 문과급제의 영광을 안았는데, 응시자는 숙종대에 이미 만 명에 육박하였고, 정조 21년 (1797) 정시 초시에는 무려 어머어마한111,838명이 응시하였다 한다. 한산이문에서 이 과거에 합격한 인물이 한 명도 없다. 문과 응시자가 가장 많았던 시험은 고종 16년 (1879) 정시로 213,500명이 응시하였다. 이 과거시험에서 한산이문에선 딱 한명의 급제자를 내었다. 이런 상상하기 힘든 천문학적으로 어려운 관문을 뚫고 합격의 영광을 누린 사람은 표시도 나지 않을 만큼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의 조상들중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분들이 열 일곱분이셨는데, 이중에 문과급제의 영광을 덥썩 끌어 안으신 분들은 네분에 이른다. 이것도 명문가란 소호문중의 한 가계도에서 그런 것이다. 이만큼 문과급제란 실로 어렵고 어려웠던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럼 몇 천 몇 만 명이 응시하여 불과 이삼십 명을 뽑는 시험에 이삼십년을 매달릴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음서나 추천을 통한 관료의 길이 있긴 있었지만 대부분의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거제도의 정당성/부당성이나 폐단점들, 또는 정치적인 모순성들을 배제하고 누구나 관직 진출을 꿈꾸던 시절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과거가 그 꿈에 도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과거 급제는 집안을 일으키고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다 하더라도 한 집안의 자손이자 가장인 자는 그 길을 피할 수 없었다. 수십 년에 걸친 과거 응시는 그들의 숙명이자 꿈을 위한 끝없는 도전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자자손손 대물림되었던 것이다.
자, 방대한 우리 한산이문의 문과방목결과를 복수급제를 빼고 이해하기 쉽게 분석-통계를 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으니 함께 들여다 봅시다. 그러나 한가지-- 영어권지역에서 잘 쓰는 말처럼, "Take it for what it's worth." 를 잊지 맙시다:
A. 아마도 전부다가 아니면 대부분이 호장공계 후손임
자세하게 계파를 밝힐수 없는 6명의 인물을 빼곤 나머지 183명의 급제자들은 호장공계 후손들로 드러났다. 계파를 밝힐 수 없는 6명의 인물들도 앞-뒤 정황을 살펴볼때 호장공계일 가망성이 아주 높게 보인다.
B.반이상이 양경공파에서 나옴
양경공파는 총189명의 급제자중 무려 절반이 넘는 104명의 (55.6%) 급제자를 배출하여 단연 한산이문의 세 대파중 1위를 차지하였다. 다음은 인재공파로 50명의 (26.7%) 급제자를 내었고, 그 다음이 문양공파로 29명의 (15.3%) 급제자에 그쳤다. 출신을 알 수 없는 미상이 위에 언급되었듯이 6명 (3.2%) 이었다.
C. 문열공파에서 가장 많은 급제자 배출함
문양공파-인재공파-양경공파 세 대파를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하여 들여다 보면 급제자의 분포도를 이해하기가 다소 쉬워지는데, 개인 계파별 급제자 순위는 다음과 같다:
#1. 문열공파 (99인)
양경공파의 급제자 104명중 95.2프로인 99명이 문열공파에서 나왔다. 그 급제자 명단을 급제시기와 등수순으로 열거할때 다음과 같다:
계전 (季甸), 파 (坡), 우 (堣), 봉 (封), 청 (淸), 기 (基), 증 (增), 산해 (山海), 산보 (山甫), 경백 (慶伯), 흡 (洽), 경함 (慶涵), 경전 (慶全), 경류 (慶流), 후 (厚), 구 (久), 경탁 (慶倬), 제 (穧), 적 (𥡦), (興發), 무 (袤), 정기 (廷夔), 선 (瑄), 연년 (延年), 유룡 (猶龍), 정래 (禎來), 홍적 (弘迪), 직 (稷), 인빈 (寅賓), 정익 (禎翊), 동근 (東根), 효근 (孝根), 덕운 (德運), 봉년 (鳳年), 완 (浣), 정억 (禎億), 택 (澤), 심 (深), 기성 (基聖), 자 (滋), 만 (滿), 병상 (秉常), 경석 (慶錫), 거원 (巨源), 형등 (馨登), 병태 (秉泰), 대원 (大源), 집 (潗), 덕중 (德重), 태중 (台重), 사관 (思觀), 수일 (秀逸), 홍덕 (弘德), 우화 (宇和), 현중 (顯重), 해중 (海重), 경옥 (敬玉), 형덕 (馨德), 현영 (顯永), 태영 (泰永), 범화 (範和), 득영 (得永), 수하 (秀夏), 민채 (敏采), 경명 (景溟), 봉서 (鳳舒), 인채 (寅采), 희관 (羲觀), 해린 (海隣), 희갑 (羲甲), 의채 (誼采), 우재 (愚在), 희준 (羲準), 희조 (肇羲), 경재 (景在), 정기(正耆), 정재 (鼎在), 도재 (道在), 우채 (羽采), 겸재 (謙在), 노규 (魯奎), 시재 (時在), 종병 (宗秉), 경재 (經在), 희교 (羲敎), 광정 (廣貞), 승익 (承益), 승유 (承游), 승구 (承九), 운익 (雲翼), 승오 (承五), 승순 (承純), 운필 (雲弼), 승고 (承皐), 용직 (容稙), 경직 (庚稙), 정직 (鼎稙), 남규 (南珪), 경직 (庚稙), 승수 (承壽), 충직 (忠稙)
#2. 광목공파 (33인)
문열공파에 이어 2위를 차지한 계파는 광목공파로 인재공파 급제자 50명중 66.0프로가 되는 33명의 급제자를 내었다. 급제자 명단을 급제시기와 등수순으로 열거할때 다음과 같다:
유청(惟淸), 언호 (彦浩), 덕형(德泂),덕수 (德洙), 성원 (性源), 홍연 (弘淵), 행원(行源), 태연(泰淵), 광직 (光稷), 동직 (東稷), 수경 (壽慶), 수언 (秀彦), 선경 (先慶), 규채 (奎采), 제해 (濟海), 수득 (秀得), 석재 (碩載), 규위 (奎緯), 양재 (亮載), 중 (重), 홍재 (洪載), 상재 (尙載), 우명(宇溟), 심도 (審度), 광재 (光載), 병구 (秉龜), 연구(淵龜), 경부 (敬溥), 명로 (明老), 원정 (源鼎), 희봉 (羲鳳), 대직 (大稙), 명직 (命稙)
#3. 판중추공파 (29인)
판중추공파는 3위를 차지하였는데, 문양공파의 29명의 급제자 모두가 다 판중추공파에서 나왔다. 그 급제자 명단을 급제시기와 등수순으로 열거할때 다음과 같다:
윤번 (允蕃), 희백 (希伯), 현영 (顯英), 기조 (基祚), 기발 (起浡), 생발 (生浡), 흥발 (興發), 흥록 (興祿), 휘진 (彙晉), 유룡 (猶龍), 규령 (奎齡), 효원 (孝源), 명준 (明浚) , 명언 (明彦), 명의 (明誼), 유춘 (囿春), 성채 (星彩), 하종 (萬宗), 상정 (象靖), 의록 (宜祿), 현정 (顯靖), 영목 (永穆), 완 (埦), 장부 (璋溥), 돈우 (敦禹), 헌직 (憲稙), 돈욱 (敦煜), 경직 (畊稙), 양직 (亮稙)
#4.양도공파 (12인)
양도공파는 4위를 차지하였는데, 인재공파 급제자 50명중 24.0프로인 12명의 급제자를 내었다. 광목공파와 양도공파가 인재공파 급제자 50명중 9.5프로인 44명의 급제자들을 배출했다. 양도공파 급제자 명단을 급제시기와 등수순으로 열거하였을때 다음과 같다:
인견(仁堅), 영은 (永垠), 예견 (禮堅), 효문 (孝文), 운 (耘), 자 (耔), 출 (秫), 해창 (海昌), 필중 (必重), 이장 (彝章), 세연 (世演), 동우 (東宇)
한산이씨의 문과급제자의 대부분은 문열공파-광목공파-판중추공파-양도공파 4파에서 나온것으로 확인되었다. 위의 4개 계파들에서 총급제자 189명중 91.5프로에 해당하는 173명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소수의 급제자를 낸 그 밖의 계파로는 직강공파 (3명), 감찰공파 (2명), 집의공파 (2명), 총제공파 (2명), 정랑공파 (1명) 가 있었다.
***알림***
드물게 급제자가 파가 다른 가계도로 출계한 경우가 발견되었을 경우엔 출계한 가계도에 더해 계산을 하였음. 예를 들면 판중추공파 후손이 문열공파 가계에 출계하였을 때는 급제자를 판중추공파에서 빼고 대신 문열공파에 더해 합산을 하였음.
D.평균급제 연령은 타문중에 비교해 좀 젊음
조선조 문과급제자 총 만4천 6백여명의 평균급제연령이 36.4세라고 한다. 한산이문의 급제자 연령은 통계결과 35.4세로 밝혀져 차이는 거의 없지만 전체 평균연령보단 한 살 가량 좀 젊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연소 합격자는 휘 유춘으로 급제당시 17세였다. 그 밖에 십대때 급제한 인물들로 휘 파 (18세), 휘 충직 (18세), 휘 후 (19세), 휘 생발 (19세), 휘 승순 (19세) 이 있었다. 또한 30세 이하의 젊은 나이에 급제한 인물들이 무려 111명으로 통계에서 나타났다.
최고령 합격자는 휘 의록으로 급제당시 63세였다. 그 밖에 고령합격자들로는 휘 대직 (62세), 휘 제해 (60세) 가 있었다. 50세 이상의 고령 합격자들이 22명으로 통계조사 밝혀졌다.
연령분포를 들여다 보면 30-39세 나이에서 가장 많은 합격자인 69명이 나왔고, 그 다음이 20-29세로 52명의 합격자들이 나왔다.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31-35세를 정점으로 26-40세의 분포대에서 104명의 급제자가 집중된 경향을 보여주었다. 물론 비교적 노령의 나이인 40-49세에서도 31명의 급제자가 나왔고, 50세-59세의 분포에서도 19명의 급제자가 나와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조선시대때는 70세 이상의 고령 급제자 가운데는 노인들을 위한 기로과(耆老科) 에 급제하거나 고령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급제를 내린 경우가 많았다 한다. 조선문과방목을 살펴보면50대, 60대, 70-80대까지 급제자들이 이어지고 있다. 개중에는 70-80대까지 응시자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영조대부터는 심심찮게 노인들을 위해 기로과 (耆老科) 를 시행하기도 하였고 특별히 왕명을 내려 고령 응시자를 급제시키고도 하였다 한다. 그만큼 노인들의 응시가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노인에 대한 은사(恩賜) 가 잦아지면서 노인들의 응시가 늘어나는 경향도 있었다. 공부는 죽을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하는 것인가 보다. 그만큼 문과급제에 관한 열망과 애수가 강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E. 평균수명 일반인들보다 길어 장수함
조선시대의 사람들 평균수명이 50세를 채 넘기지 못하였다고 하는 보도를 어디선가 읽은것 같은데, 한산이문의 문과급제자는 평균수명 59.3세를 누려 비교적 장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머리를 계속 쓰며 늙은 나이가 되도록 책을 가까이해서 그런 결과일까? 오히려 정신적으로 피로할 수 있는 관료생활을 오래하고 날마다 바뀌는 예측하기 어려운 정치상황속에서 스트레스 받고 불이익을 당해 단명한 경우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통계결과는 의예로 문과급제자들의 평균수명은 일반인보다 더 길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상류생활을 누리며 생활주거환경이 양호하였던 것도 그 이유중에 하나였지 않았나 생각되어 진다.
평균수명 연령분포를 보면 80세이상 천수를 누린 사람들이 7 명이었고, 70-79세가 27명, 60-69세가 27명이었다. 이와 반대로 단명한 사람들중엔 10대때 세상을 하직한 사람이 한 명, 20-29세가 6명, 30-39세가 6명으로 나타났다. 가장 높은 분포도의 사망률은 역시 50-59세 사이로 35명이었다.
결국에 한산이문의 문과급제자들은 급제한 후 (평균급제연령 35.4세) 근 24년간 (평균수명 59.3세) 가깝게 관료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과거공부가 사실상 4,5세때의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다고 보면 공부한 30년의 기간이 관료생활한 24년의 세월보다 수년 더 길었던 것이다.
F. 최초의 급제자와 100번째 급제자와 마지막 급제자
조선조에서 최초의 한산이씨 문과급제자는 휘 숙복 직강공 (1408년) 이고, 100번째 급제자는 휘 태중 (1730년)이고, 마지막 급제자들로 조선조 500년 과거제도의 마지막 커튼을 장엄하게 내린 인물들은 휘 명직과 휘 충직 (1893 년) 이다.
G.한양이 단연 최고로 많은 급제자들을 냄
출신지역이 밝혀진 급제자 총 168명 가운데 최고로 높은 비율의 102명이 한양거주자 (60.7.5%) 인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은 15명의 보령 (8.93%), 6명의 전주 (3.57%), 5명의 안동과 공주 (2.98%), 3명씩의 예산, 원주, 청주, 덕산 (1.79%) 순이었다. 그 다음으론 2명을 배출한 남포, 충주, 진천 (1.19%) 이 있었다. 1명씩의 급제자를 낸 지역들론 상주, 의주, 홍산, 양근, 죽산, 금천, 장단, 한산, 남양, 임파, 경성, 결성, 신창, 서천, 홍주, 임천 (0.60%) 이 있었다.
한양에 거주지를 둔 급제자들 중 일부분은 사실 지방에 뿌리를 둔 경우가 있어서 한양급제자들의 숫자는 다소 부풀려 졌다고 추측이 되니, 예를 들면 한양거주자라고 밝힌 급제자들 중에도 식솔들은 예산이나 장단에 살고 있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첫댓글 다음 편에는 장원급제자, 차석급제자, 꼴찌 급제자, 부자급제자, 형제 급제자 등등의 흥미있는 내용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관심있게 잘 보았습니다,,,,
문양공 판중추공파 에서는 3위를 하였네요,,,,,ㅎ
판중추공파를 더 상세하게 분석해 보면 대부분의 급제자가 창곡공파와 해산공파에서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단봉공파가 돋보이고 그 다음이 수은공파이네요. 군수공파에서도 소수의 급제자가 나왔구요. 다른 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열공파를 살펴보더래도 몇개의 현달한 계파들에서 (석루공파, 삼산공파, 충장공파, 취암공파 등) 다수의 급제자들이 나왔고 인재공파도 마찬가지이나 그렇게 상세하게 분석을 일일이 다 종중별로 하자면 상당한 시간들이 더 소요되어 일단 작업은 목은 선조님의 손자계파들에서 멈추었답니다. ^^
@이주원 (周遠) 네,,,판중추공파 창곡공파로 내려왔습니다,,,
이런자료를 올려주시니 평소에 잊고있었던 선조님들의 발자취를 다시한번 새겨보는 계기가됩니다,,,,
감사합니다,,,, 부산 진원회장과는 같은 직계로 내려옵니다,,,,
@향산,이완복 향산아재가 문양공파, 더 나아가 판중추공파, 더 나아가 창곡공파 후손인 것은 전혀 몰랐네요. 반갑습니다~~. 저희 수은공파하고는 촌수가 가깝고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도 있고해서 창곡공파하곤 가까운 연대의식을 항상 느낍니다. ^^
좋은 내용 잘보았습니다 조선만 놓고 논하면 최고 중 최고의 문과급제자배출가문입니다 우리가 기록하는 195명은 낡은 잘못된 자료입니다 고려말 부터 늦게 출발한 고려문과방목 조금 더하여 현재까지 정부한 투자하여 조사한 역대인물시스템에 따르면 202명입니다 한산이문이면 놓치지 않아야 할 대목이 생원 진사등 사마방목 급제자는 500명이 넘는다는 부분입니다 무과와 잡과를 빼면 한산이문 전체가 급제하였다라는 의미도 되며 타성씨와 비교해도 최고의 수치라는 점과 그만큼 책임감이 따른다는 의미도 됩니다 광목공파의 일부도 판중추공파에서 계보를 이었던 기록을 본적이 있는데 그만큼 후손이 귀했고
아우님의 말에 동감하는 바이네. 아마 우리 한산이문과 비슷한 프로파일을 갖고 있는 타문중이 명문벌족 연안이씨인데, 연안이씨와 더불어 우리 한산이문이 소-대과 시험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인것 같더군. 전의이씨가 약간 더 못한 것 같았었구. 살펴본지 좀 오래되서 자세하게 기억은 안나네만. ^^ 키포인트는 다수의 합격자가 아니라 높은 비율의 합격률이겠지. 그리고 사실 무과급제 명문인 능성구씨같은 집안도 있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명의 허준께 죄송스럽지만 올림픽의 꽃이 마라톤이듯 과거의 꽃은 대과가 아니겠는가. 대과는 출세하는데 불가피하였고 소과는 신분유지하는데 용이하였으니 우리 한산이문이 그 부분들에 뛰어났지 ^^
@이주원 (周遠) 예 형님 공감입니다 전주이씨제외마면 이씨중에서는 대략 30개중 연안이씨와 1위 논쟁인데 사마방목포함하면 한산이씨가 소대과 합쳐 1위 입니다 ^^
족보 논쟁시 대략 17 ~18세기 목은 족보는 그결과 최고의 가치가 있는 시대 희귀 갈망대상 1호였던적도 있었지요
이씨만 비교해도 전주이씨 제외하면 사마방목 포함 1위 입니다 한산이문 일가님 중 잘못된 온라인 정보보고 이씨중 10위 안이다 이렇게 타성씨에게 이야기하시는 분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데 잘못된 표현입니다 전체성씨 300개이상에서 10-16위 안이라고하는데 잘못된 표현입니다 사실 5 위안입니다 인구수 및 고려 초중 급제자 빼야합니다 조선만 보면 무과잡과제외 사마방목 포함 최고중 최고입니다 저는 한산의 유래 등 잘못 알려진 부분은 없는지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는데 --고맙습니다
전주이씨는 최다수의 급제자를 내세우나 큰 의미는 없다고 보네. 10,000명에서 100명의 급제자가 나오는 것은 100명에서 10명의 급제자 나오는 것에 비교하면 10배나 더 못한 결과지 않는가. 정확한 순위를 어떻게 정하는진 모르겠고 우리가 기죽지 않을 정도는 되고도 남지. ^^ 사마방목 프로젝트는 아마 하게된다면 내년에나 마칠것 같네. 엑셀이 도움을 주긴 하나 작업하는데 시간을 많이 잡아 먹어서..ㅎㅎ
@이주원 (周遠) 고생 많으십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아무도 엄두 못내는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소호문중에 내려오는 전통중 하나로 예전에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것이 ^^후손으로 선조 선양을 꼭 하는것이 도리 및 논해야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얼핏 납니다 좋은 날되세요
문열공의 휘기발 생발 흥발은 판중추공 ㅡ전직공 후손으로 알고 있읍니다 광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작업을 하던중 잠시 집성촌에 관련된 착각을 일으켜서 그런 오류를 범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재검토결과 판중추공파의 총 급제자수는 24명이 아니라 29명으로 재확인되었습니다. 5명이 에러로 문열공파에 합산되어 있더군요. 이젠 거의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지나 혹 잘못된 점을 발견하시면 지적해 주셔서 정정토록 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호장공계라는 표현 자체가 잘 못입니다. 한산이씨 시조는 유일하게 호장공 윤자경자 한분이심니다. 일명 권지공계라는 것은 거짓으로 만든 한산이씨입니다. 이점에 대하여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혹, 여기에 이의가 있으면 공개 토론을 하겠으니 신청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잘 지내시죠? ^^ 백번 공감하는 말씀이십니다. 다만 권지공계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저희들이 "호장공계"라 지칭하며 저들로부터 분류를 해야겠기에 그런 호칭을 빌렸습니다. 국조방목 프로젝트를 통해서라도 한산이씨는 오직 윤자경자 할아버님 후손들뿐이라는 사실을 속시원히 100프로 아무 의심없이 밝히고 싶은것이 저의 작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저희 문중을 위해 맘써주시고 애써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잘지내지죠 항상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부산화수회가 초대하여 좋은 내용 들어보고 정보교류도 해보는 것은 어떤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부산화수회 회장님이하 임원진 회원님 괜찮으신지요 갑자기 그런생각이 듭니다
위에서 202분에서 195분을 빼면 7분이신데 가정공 목은공 인제공 양경공 사윤공 문혜공 휘맹준 등 고려조에서 대과급제분이 해당되는지요 아니면 다른 분이신지요 방대한 자료를 연구하신 분께 미안합니다
잘지내시죠 해당안된 숫자입니다 고려제외 입니다 수정합니다 그런데 미스테리 한산인도 있어서요 몇명을 더 넣은것이 맞을것 같습니다 이외에 계속 추가가 되고 있는데 미상 및 축적인데 안타카운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들 조차도 대충 연구하여 권지공계를 넣고 있습니다 저도 계속 공부중이며 공부시마다 숫자합산이 바뀌어서 한번더 고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호장공 휘 윤자경자 단일성씨 입니다
제가 참고한 온라인 문과방목에서 사사로운 오류도 드물게 발견되었고, 어떤 (중요한) 내용들은 누락되어 있는것을 보았는데 열명의 급제자를 실수로 기술하지 않고 빠트렸다곤 보여지지 않네요. 확실한 것은 문과방목 원본과 비교를 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185명이 정확하지 않나 봅니다. 제가 20년전쯤에 첨 관심을 가졌을땐 우리 이문 문과급제자가 187-8명 정도, 많게는 192명으로 알려졌던 기억입니다만..
@이주원 (周遠) 형님 조선시대 문과자 목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한사람이 두번급제한경우 제외하여도 200명 인데 일일이 대조는 해보아야하지만 시간내어서 다시한번더 검토해 보아야겠습니다 혹시 권지공 가짜 들어있나도 살펴보아야될것 같습니다 전 일단 현재로 200명 두번 중복 및 고려 빼고 그쪽이 더 맞는것 같습니다 ???
'70년대 초반 국회도서관에서 복제한 조선 방목이 있으니 이곳에서 확인하면 되고, 또한 2000년경 수원에 사는 법무사 임모씨가 고려를 포함한 방목을 편찬해 놓은 것이 있으니 이 서적을 참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조선에서 행한 것이니 가정 목은 선조님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조상님계신곳에 안내문 정확한 숫자 글로 적어보려니 공부때마다 과거자 숫자가 바뀌어서요 좋은 날 보내십시요
호장공 계는 없는 계통이지요. 우리 이문은 언제나 시조 할아버지 (휘 윤자 경자) 한 분 뿐이니까요. 등과자 현황을 시대별로 파악은 했으나, 미쳐 가문 별로는 정리를 못했는데, 좋은 자료 대단히 감사합니다. 충주 孝遠
단지 등과한 통계 수치로 가문을 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식민사관의 산물입니다. 그 가문의 선조가 얼마나 국가 사회 백성을 위하여 기여하였는가를 중시하여야 하는데, 민중 사학이란 말로 폄하되고 있으나, 선진국은 위인을 위시한 역사 교육입니다. 어느 특정 왕에 대한 맹목적 충성 보다는 그 사회 구성원(민족)에게 얼마 만큼 기여하였는가로 인물과 가문을 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등과하고도 간신이나 탐관오리가 되면 무엇합니까? 현행 행정 사법 고시에 합격하고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이들을 어찌 옳다고 할 수 있을가요?
가정 목은 선조께서는 우리 민족의 큰 스승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학문을 진작시키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셨고, 또한 가진자만을 위한 정책보다는 어려운 백성을 위한 위대한 일들을 하셨습니다. 가정집 목은집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고려사 고려사 절요 동문선 등등의 사서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 한산이문의 진짜 자랑은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출세하여 관료가 되었느냐보단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진정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몸바쳐 헌신했냐하는 것이죠. 자칫하면 높은 급제숫자를 내세워 조상님들의 업적을 폄하할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좋은 깨우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좋은 내용 제 블로그로 퍼갑니다 며칠전 네이버블로그 한산명가 개설하여 조금씩 한산이씨 알리고 있습니다 젊은사람들이 많이 호응해주네요 파워 블로그를 향하여 ㅎㅎ
@대원 내가 함 들려볼께.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라니 천만다행일세. 앞으로 네이버에서 최고의 블로그로 거듭나길 바람~~^^
@이주원 (周遠) ㅎㅎ 오늘만 200명가까이 접속수 기록하였다 형님 자료는 표편집 시간이 걸리어 원본과 조금바뀐점양해바랍니다
네이버 검색 한산이씨 치면 바로 형님 자료나옴 출처도 밝혔습니다 ㅎㅎ
참고로 급하게 만들고 있는중이라서 사진첨부는 못했습니다 전국에서 부산화수회를 주목할 것도 같습니다 ㅎㅎ 좋은날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