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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 약용에게는 아홉살에 이승훈에게 시집간 누이와 큰형 약현, 자산어보의 저자이면서 약용에게 형역할과 스승 노릇을 한 약전이 있는 반면 약용 때문에 늘 비교가 되는 문제로 서먹하였던 약종이 있었다. 약용은 15세에 풍산 집안 여식에게 장가를 든다. 당시 화순 현감으로 재직하던 부친을 따라 가 글공부를 하고 18세 겨울에 성균관에서 하는 승보 시에 선발된다. 그리고 바로 이익을 따르는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신다. 22세 2월에 있었던 세자책봉 경축 중광감시에 형 약전과 경의 초시에 합겨 후 4월에는 진사에 합격하여 정조와 첫대면을 갖은 후 정조의 관심과 총애를 받기 시작한다. 23세에 친구들과 향사례를 하고 그해 여름 정조 임금으로부터 숙제를 받아 이벽의 도움으로 숙제를 받쳐 정조의 칭찬을 받으며 반제에 뽑히고 9월 정시, 초시에 합겨한다. 이어서 반시, 별시에 합격하여 정조의 신임을 받고 예문관 검열에 단부된 후 수행하지 않은 죄로 귀향갔다가 열흘 후 풀려나 사헌부 지평에 된다. 31세에는 부친의 임종으로 상복을 입고 여막살이 중 수원화성 규제인성설과 기중가도설을 지어 국고 4만냥을 절약한다.
이어서 34세에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고 동부승지에, 우승부지에 제수되지만 주문모사건으로 정적인 노론에 모함으로 충청도 금정 현재 홍성의 금정찰방으로 좌천된다. 이일은 약용을 보호하려는 정조의 뜻이었다. 당시 한양을 떠나 경기 남부와 충청내포 지방으로 가려면은 銅雀津을 건너 남태령을 넘어 수원으로 나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동작나루를 동재기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조선시대 유명한 산수화가인 겸재는 그 절경에 반해 그림을 남기기도 한 곳이다. 茶山은 좌천으로 동재기 나루를 건너가면서 시를 남겨 자신의 심정을 밝히는데 다신의 유명한 與猶堂集에 남아 있다. 그 당시 읊은 시를 살펴 읊조려 보면 다음과 같다.
晩渡銅雀津( 동작 나루를 건너며)
銅津斜日浪花翻 (해 저무는 동작나루 물결만 출렁이네)
船尾終南是故園 (멀어지는 저 남산은 그리운 옛 동산)
垂柳野橋猶白雨 (드리운 수양버들 비에 더 희고)
澹煙城闕近黃昏 (연기 솟는 성안은 황혼에 젖어 있네)
金門待詔非長策 (궁궐에서 다시 부름심 기다리는 것만 상책 아니로다)
水驛投荒也聖恩 (성은으로 이 몸을 나루터에 보내졌노라)
聞說西人迷不悟 (서학은 들었지만 참 뜻을 모르는데)
此行還似出淮藩 (이 길은 머너먼 귀양길인가 하네)
이 후 다산과 형제들의 삶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우선 금정으로 간 약용은 그곳에서 천주학을 믿는 사람들을 타일러 배교하도록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힝 수행한다. 37세에는 곡산 부살로 발령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입에 오르 내리고 38세에 형조참의 제수되어 명판관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자신의 신분이 위태롭다는 것을 자각하고 마재로 내려가려 하지만 별안간 정조가 승하함으로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노론의 공격으로 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고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된다. 반면 약종과 본처 사이에 태어난 하상의 이복형 철상과 함께 약종은 참수된다. 그리고 바로 유배된 해에 약용은 약전형과 함께 황사영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약용은 강진으로 형 약전은 흑산도로 귀양간다.
강진으로 간 약용을 마을사람들은 외면하지만 동문 밖 주막집 주모의 도움으로 주막에서 기숙한다. 그러다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겨 스님들에게 주역을 가르치며 만덕사 주지 혜장스님과 인연을 맺고 남해 외가의 도움으로 1808년 지금의 다산초당으로 옮겨 제자들을 받아 들인다. 당시 아들 학연이 아버지의 부당한 유배를 항소하여 받아졌지만 홍명주, 이기경의 상소와 대걔의 영향으로 좌절된다. 얼마 후 1816년 흑산도에서 약전의 부고를 받고 서러운 슬픔에 젖어 상실의 시간을 보내다. 1818년 이택순 상소로 해금되어 마재로 돌아와 풍산 홍씨와 결혼 60년 회혼식날 잔치마당이 장례 마당으로 바뀌어 여유당 뒤 양지바른 언덕에 잠이든다.
약용은 예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예가 아니면 보지 않았으며 예가 아니면 듣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은 진정한 참
선비였다. 그리고 공직자로서 정직하고 청렴한 표본이었다.
어느날 개인적인 용무로 등재기 나루에 갔다. 이곳은 16살 나이에 개인적으로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당시 국가가 변고가 생겨
극복차원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자발적인 행사가 있었다. 그 일한으로 동작나루를 중심으로 15kg 모래를 배낭에 넣고 50km 걷는
경보대회가 생겼다. 주최는 한국산악회였다. 당시 한국산악회 회원이였던 나는 팀을 만들어(3인 1조) 참여 하였다. 이수진 - 남태령 -
안양 - 시흥 - 봉천 -노량진 - 국립묘지로 돌아 오는 길이었다. 당시 걸린 시간 7시간 45분 38초였다. 참석 후 몇일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만큼 휴유증이 있었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끔 완주증을 꺼내 보곤한다. 동작진에서 걸을 마음을 세우고 접근 후 다산 선생
생각과 함께 나의 추억이 불현듯 떠 올랐다. 그래서 결심한다. 걸어서 하늘까지가 아니라 목적지 까지 걷기로 ~ ~^^
날이 차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津을 떠나 배나루 앞을 흘러 한강과 합수되는 지점으로 걸어 나가자 물이 흙빛이었다.
청동오리들이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오염인가? 하고 살피자 앤진돌아 가는 소리가 하류에서 들렸다. 그리고 자전거 길 넘어를
유심히 살피자 공사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화단 조성을 다시하고 하천 하류에서는 魚路 시설을 새롭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공사로
인해 생긴 장애물을 피해 길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곧은 길로 들어 섰다. 몸의 방향을 틀어 바람의 방향을 감지해
보았다.서풍이었다 다행이군. 중얼거렸다. 등을 밀어 주는 방향이니 걷기와 체온 유지에 도움이 되기때문이다.
손 끝이 시렸다. 들고 다니던 책도 점점 성가셨다. 포켓사이즈 북이라면 호주머니 넣어두면 그만인데 큰 책이라 참 성가셨다.
장갑은 준비하였지만 책이 미끄러져 벗어버렸다. 동작대교 밑을 지나 뒤를 돌아 보니 구름카페가 보였다. 오늘은 구름과
푸른배경이 참 고운날이다. 어울리는 이름이라 으악새 소리를 들으며 쳐다 보다, 다시 등을 돌려 걸으려다 억새 밭이 너무 좋아
강북 방향을 조망해 보았다.
동작대교 넘어 동부이촌동 고층아파트와 그 옆으로 서울의 중심 남산이 들어 왔다.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산이 남산이다. 이
곳에서 보니 蠶豆峰 처럼 누에를 닮은 형상같이 보였다 붕수대와 동쪽 봉우리 사이 안부가 참 길다는 것을 오늘 새삼 느꼈다. 남산의
옛이름은 목면산이다. 태조가 도읍시 풍수지리상 남산은 安山이면서 朱雀인 중요한 산이었다. 북쪽 북악산, 동쪽 낙산, 서쪽
인왕산을 연결하여 만든 성이 바로 한양도성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내사산을 연결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름은 목면산 이외에
終南山, 引慶山, 列慶山이라 부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주로 부른 이름은 목면산이라 하였다. 또한 조선 중기까지 봄, 가을 초제를
지내던 국사당이 있었고 정상에 조선시대 통신 수단으로 사용되던 붕수대가 정상에 자리 잡고 있어 국방상 중요한 구실을
하였었다. 잠시 남산을 바라보며 남산에 대하여 생각하며 머물던 발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하였다.
억새 길이 휘어지더니 다시 반듯해 지고 다시 곡선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목측 결과 길어 보이고 풍광이 그저 그렇게 보였다. 저
길은 십여년 전 자전거를 타고 자주 다녀 본 길이라 흥미를 끌지 못하였다. 오히려 직선으로 보이는 샛강이 나를 오라 유혹하고
있었다. 성으로 진입하는 정문 입구에 놓여 있는 해저 같은 느낌이 드는 샛강, 다리 난간에 철지난 꽃이 아직도 피고 있었다.
직선으로 난 길을 조급하게 걸어 도착하였다.
서래섬으로 들어 가는 진입로다.
지금의 서래섬 자리는 원래 반포섬이 있었다. 조선시대 재작된 지도에 섬 이름은 箕島(기도) 섬이었다. 1960년대에는 모래언덕이었다. 1981년경 제 2차 한강개발 직전 1981년경 반포에 섬을 만드는 안에 대하여 대부분 담당공무원들은 홍수재해를 염려하여 반대를 하였으나 개발추진본부장 이상연 부시장의 결단으로 만들어졌다. 반포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에 있고 1982년 - 1986년 올림픽대로 공사를 하면서 조성된 인공섬이다. 들고나는 다리는 서래 1,23교가 있다. 봄에는 유채꽃이 장관이고 가을면 매밀꽃이 만개되어 장관을 이룬다.
샛강에는 잉어와 붕어 등 살고 있고 겨울철에는 청동오리를 비롯하여 철새들의 낙원이 된다.
저 멀리 동부이촌동 고층 아파트를가 보이고 그 넘어 세계일보 자리에 들어 선 고층 아파트 군이 시선을 모으게 만들었다. 용산역을 중심으로 재개발 수순을 거쳐 치솟는 고층아파트군 용산역 일대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형성하고 있었다.
위대한 케츠비에 나오는 정원의 그늘막 보다 초라하지만 조화에 불과한데도 붉은 장미 영향으로 그늘막은 호화롭게 보였다. 터어키 여행 중 어느 해안 궁궐에 있던 그늘막이 떠 올랐다. 사랑하는 왕비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아마 이것은 이곳을 찾는 연인들을 위한 포토 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으로 들어 가 흰 의자에 앉아 보았다. 강변도로를 내달리는 굉음이 시끄럽고 일자로 늘어선 옛 아파트군이 멋대가리 없게 다가와 일어서서 다시 옆으로 걸어 나갔다. 강북방향을 앉아 조망할 수 있도록 설치된 장의자의 텅 빈 의자가 초겨울의 강변 정취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이로 흐르는 강물이 있으니 섬이다. 섬은 외부에서 들어오려면 작은 철제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밖에서 안을 보는 것보다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좋다. 샛강 건너 둔치에 심어 놓은 억새가 역광의 영향으로 흰빛이 겨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메밀꽃이 피었을 적에 선달과 동이는 대하장으로 가기 위하여 달빛에 메밀밭을 지나간다. 그 장면을 효석은 소금을 뿌려 놓은 것 같다고 표현하였는데, 강 건너 둔치에 환하게 빛이 나는 억새는 상고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 초겨울에도 잎은 푸르다. 바람이 휩쓸고 갈 적마다 일정한 방향 없이 산발하듯 진저리를 치듯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나무와 달리 샛강 수면은 참고 요하였다. 잔잔한 파문은 잔물결만 이루고 만다. 호안의 모든 것이 평화롭다.
이 까치 녀석은 몰 인정한 놈 같았다. 사람이 다가 가도 미동도 안 하고 시선을 고정한 채 몰두하고 있었다. 얼른 사진 한 장을 찍은 후 까치 시선을 따라 가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줄기와 반사되는 수면과 억새뿐이었다. 그렇다면 까치도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섬 끝으로 걸어 나가자 봄엔 유채꽃, 가을에는 메밀꽃이 장관을 이루는 철 지난 빈 밭에 앉아 있던 각종 새들이 날아올랐다. 얼마나 새들이 많은지 영국의 히치콕 감독이 만든 새라는 영화가 떠 올랐다. 새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연출한 장면이 지금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서래섬에서 새들의 비상을 본 후 다리를 건너 제 자리로 돌아와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예빛섬이라 부르는 곳이다.
솔빛, 채빛, 가빛이 모여 세빛섬을 구성하였다. 넓은 광장 이름 달빛 광장이다. 달빛 광장 앞에는 야외무대도 있다. 그리고 수변 무대도 있다.
세빛섬을 둘러 본 후 가로질러 반포대교를 넘었다.
서울 밤도깨비 야시장 노란 건물이 나왔다. 도깨비들은 붉은 옷을 입고 다닌다 하였는데 온통 노란빛이라 생소하였다. 옛적 어릴 적 외할머니가 오셔서 오래 묵다 가시곤 하셨었다. 막내딸이었던 어머님은 딸 없이 칠 형제를 낳으셨다. 자식들 건사로 늘 분주하시고 고단하신 딸을 위하여 자주 묵어가시며 막내를 도우셨다. 바느질을 하시며 들려주신 이야기 중 도깨비에 얽힌 이야기 중 추운 겨울 김부자 집 곳간에 쌀을 훔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러 찾아온 도깨비가 너무 추워 부뚜막 장작불 지피는 앞에 앉아 졸았다. 그 사이 옷(투명옷)에 불똥이 튀어 작은 구멍이 생겼다. 그것도 모르고 쌀을 옮기는데 김부자가 붉은 점 하나가 쌀을 옮겨 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는 외할머니의 옛이야기 속에 도깨비는 붉은 옷이었는데....
배다리와 관련된 입간판이 있어 다가 가 읽어 보았다. 정조의 배다리와 연산군의 배다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하여 세운 안내판이었다. 합리적이었으며 개혁적인 군주였던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죽에 갇혀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이후 한중록을 작자로 유명한 어머니 혜경궁 환갑잔치를 수원화성에서 치러드리기 위하여 배다리를 건너간다. 혜경궁이 지은 저서는 총 27권이다. 서울의 대표적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난다.
열 살 때 간택되어 궁중으로 들어 가 사도세자와 연을 맺는다. 스물여덟에 남편이 영조명에 위하여 뒤주에 갇혀 죽고 마흔두 살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그렇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외가를 방해 세력으로 간주하고 처벌하였기 때문이다. 환갑 무렵 마음이 돌아 선 정조와 화해로 친정에 서광이 비쳤는데 바로 정조가 승하하자 손주 순조가 등극하지만 또 한 번의 피바람을 보게 된다.
순조가 어린 나이라 정순왕후가 권력을 잡는다. 정순왕후는 혜경궁의 동생 홍낙임을 천주교 신자라 하여 죽인다. 혜경궁은 이러한 첩첩 쌓인 아픔을 피를 토하듯 억울한 마음을 산문으로 표현한다. 이것이 바로 한중록이다. 이러한 아픔이 있지만 정조의 배다리 이용은 사도세자와 혜경궁을 위한 효심과 관련이 깊다.
이에 반해 연산군은 민간인들의 배까지 징발하여 약 800척으로 배다리를 만들어 사냥을 즐긴다. 폭군다운 면모다. 성종의 장자로 태어난 연산은 성종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다. 오른 후 1- 3년 정도는 영민한 부분도 많았다. 친모 폐비 윤씨가 성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는 것을 알고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연산군의 배다리에 대하여 만인보 최종편에 고은 시인은 다음과 같이 시어를 모아 적어 놓는다.
연산군 6년 10월 1일
영의정의 충고가 있었다
농사철 사냥을 삼가셔야 하옵니다
연산군 6년 10월 2일
한수(漢水) 건너
청계산 사냥 나섰다
멋져
봄에는 수(蒐)하고
여름에는 묘(苗)하고
가을에는 선(獮)하고
겨울에는 수(狩)함이니
10월이야말로 사냥철 아니뇨
군사 5만이
임금 사냥길 수행이다
징집군 3만
기타 2만
이 5만 일행
한강 건너는
배다리
배 8백 척
돌아오는 길 꿩 열두 마리였다
꿩불고기 야들야들하였다
녹수야
녹수야
세월 두남두어 본다
연산군 11년 10월 25일
또 청계산 사냥길 나서는데
눈 내릴 조짐이라
과인 대신
정승인 그대가 가거라 하여
좌의정 박승걸과
5만 군사가 배다리 건너갔다
돌아오는 길 꿩 한 마리였다
상감마마께서 슬쩍 비아냥대셨다
정승의 위엄에다
5만 군사의 위엄에다
고작 한 마리 까투리라
이런 세월 있었다 있다 있으리라
그래서 끝내 페주가 되어 강화도 교동도에 위안리치되어 살다 괴질에 걸려 죽는다. 그리고 6년이 흐른 후 부인 신씨 간청에 의하여 남의 묘역 아래 하단에 부부과 함깨 잠든다. 그곳이 바로 강북구 방학동이다. 아주 오래된 샘과 은행나무가 현재도 연산군의 페악을 증거하듯 서 있다. 정조는 효심을 실천하고 능행차 하면서 민심도 얻었지만~~~
한 때 혜은이가 부른 제 3 한강교란 노래가 유행을 끌었다. 당시 강남이 개발되어 가던 시기였다. 남산에 1호터널이 뚫리고 퇴게로 을지로 종로 2가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가 만들어 진 것이다. 버스에 에어콘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터널을 통과할 때 와이샤스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출근하면 화일박스에 미리 넣어둔 와이샤스를 갈아 입던 생각이 났다. 나도 모르게 강물이 흘러갑니다~~ 제 3 한강교 밑을 흥얼 거리며
한남대교를 바라 보고 동선을 따라 시선을 옮겨 지금은 사라졌지만 남산 외인 아파트 옆으로 뚫인 터널을 바라 보았다. 그 동안 강물처럼 시간은 많은 세월을 만들어 흘려 보낸 것이다. 12,12사태 때에는 길이 막혀 귀가할 수 없어 한남동 부근을 배회하며 총소리를 듣던 일도 있었는데.... 세월이 참 무심하다. 추억에 젖어 머물다 다시 한강을 거슬러 올랐다.
시멘트 인공 호안을 허물고 갯버들과 물억새를 식재하여 자연친화적으로 만들어 놓은 호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옛적 부모님과 함께 놀이 다녔던 동대문에서 기동차를 타고 뚝섬 모래톱이 떠올랐다. 그리고 물가 기슭에 핀 참나리 범나리 등이 생각이 났다.
놀이배가 있어 배삯을 내고 지금 탄천 입구 언덕(당시 포도밭이었다)을 넘어 부모님께서 결혼식을 하신 봉원사를 다녀 오곤 하였는데... 자연은 자연의 의미와 깊이를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뤄 나가며 초목을 키우고 건강한 보존을 통하여 극상의 자연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바른 자연이다. 인공호안을 허물었으니 머지 않아 나리꽃을 보게될 것이다.
퇴락한 물 갈대 넘어로 재건축으로 고층으로 올라 가는 건물이 이곳이 도시 한 가운데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서울을 감싸고 있었던 군은 양주군, 고양군,광주군,김포군, 시흥군 등이 전부였는데 그 자리에 전부 구(區)가 들어서면서 전원은 사라지고 도시가 팽창된 것이다.원래 사대문 안 구는 종로구와 중구 정도였지만 동대문 밖 동대문구가 생기지만 중랑구와 노원구 다시 분할되고 북쪽 성북구가 신설되지만 추후 강북구, 도봉구로 분할된다.
남쪽 방향으로 성동구가 새로 생기고 이후 성동구는 강남구, 강동구 송파구, 서초구로 나누어 진다. 그곳은 대부분 경기도 광주역권이었다. 서대문밖으로는 마포구, 서대문구 그리고 은평구가 고양군의 지역을 잠식한다. 남쪽으로는 용산구를 비롯하여 영등포구가 자리를 잡았지만 이후 동작구와 관악구로 분할하면서 서울은 끝도없이 도시를 팽창시킨다. 서울의 역사를 잠시 생각하며 있다가 옆으로 걸어 나가자 작은 말뚝이 보였다. 포토존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S자 호안따라 휘어진 억새길이 다정하게 다가 왔다. 억새풀 상단에 핀 흰색 수염같은 꽃은 초겨울인 지금도 사자의 갈퀴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호안밖으로 목을 내밀어 강을 바라 보니 이미 재건축이 끝난 아파트군이 강끝머리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앞으로 강을 가로지른 반포대교가 한강의 수평선처럼 착각하도록 다가 왔다. 바람의 영향으로 수면은 파문으로 출렁거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제3 한강교, 아니지 지금은 한남대교지 그 다리 쪽으로 다가 섰다. 용산구 한남동과 강님구 신사동을 이어 주는 한남대교는 경부고속도로의 진입구로 국가의 산업동맥 역할을 충실히 한 도로다.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고속버스 시발점은 원래 동대문종합시장 광장이었지만 지금의 반포로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중앙고속을 이용하여 부산에 갔던 일은 바로 제주도 한라산 산행을 하기 위함이었다. 늘 용산역을 이용하여 목포로 가거나 부산을 가서 배를 탔던 일상적인 교통편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로 바뀐 것이다.
한남대교를 중심으로 서쪽은 잠원동이고 동쪽 방향은 압구정동이다. 잠원이 있었던 자리라 잠원동이라 하였다.그래서 그런지 공원 이곳저곳에 누에 모습의 조각상들이 많이 보였다.
유엔 빌리지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한남대교는 지척이었다 금방 한남대교 밑을 통과하다가 다리 기둥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 가 보았다.
어둡고 칙칙한 다리 밑 환경을 극복하려는 듯 그림은 상상화로 나름대로 대체로 밝은 모습을 상기 시키는 그림 위주였다. 點은 그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點에서 벗어나려면 임의 방향으로 나서야 한다. 그래야 비로서 線이 생기는 것이다. 선은 변화를 의미하고 창조의 개념이 된다. 일직선 역시 점처럼 큰 변화를 얻을 수 없지만 다시 임의 방향으로 한 번 두 번 다시 또 걲다보면 面이 생기고 다시 또 꺽고 높이고 닫으면 공간이 생긴다.
무엇인가 담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면 제일 먼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욕심이다. 욕심은 갈등을 일으키고 결심의 향방에 따라 공간의 주 목적이 결정되고~~~ 금새 복잡해 졌다. 성큼 한남대교를 벗어 났다. 공간을 버리기 위함이다.
기둥에 위에 걸터 앉은 수상택시, 당장 끌어 내려 강상(江上)을 질주하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 순간 쌩하고 찬바람이 강심으로부터 다가 왔다, 맴을 돌고 하늘로 흩어졌다. 수상택시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유엔빌리지가 맞은편이다. 맞은편에 보였다. 일제감점기에 일본군 장교 관사가 있던 곳이다. 그리고 50년대 후반과 초반 당시 대통령 우암 이승만에 의해 유엔에서 파견한 직원과 외국인 기술자 등등의 주거공간으로 탈바끔된 후 70- 80년 경제부흥 시기에 기업 총수들의 주거지역과 외국 대사관 관저 등으로 변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강 조망권이 좋은 지역으로 부촌이다.
최근 김백선, 백선디자인 대표가 졸하였다. 건축디자인하며 유엔빌리지 빌라를 설계한 그는 목포출신으로 홍대 동양화를 졸업하고 1989년 중앙미술대전에 대상을 받은 후 1990년대부터 건축디자인 전문 회사를 차리고 건축 가구 전문 디자인으로 변신한다. 대안 공간에 몰두하면서 유엔빌리지 빌라, 페럼타워, 롯데 월드 월드타워 레지던스, 커뮤니티 공간을 구성 설계하고 덴마크 서울주제 대사관등등서울의대표적인 건물을 설계하여 좋은 반응을 얻던 설계자였는데 너무 이른 5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
걸으며 시선을 옮기자 동호대교 넘어로 응봉산이 보였다. 봄철 노란색으로 봄 기운을 화사하게 보여주는 얕으막한 바위산을
서울시에서 암반에 축을 쌓고 홀을 만들어 흙을 채워 개나리를 심더니 산을 개나리 산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다. 조선 초기부터 임금이
이곳에서 매 사냥을 한 곳이라 매봉이라 불렀으나 한문으로 응봉이라 한 곳이다. 깍아지른 절벽으로 천연적인 낚시터로 立石釣魚라
하여 한강 경도십영에 드는 명소였다. 또한 중랑천과 한강이 합수되는 지점이라 먹이가 풍부하여 철새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봄철 응봉산 모습이다.
한남대교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유람선이다. 그러나 요란한 장식물들로 유람선 느낌보다 어느 목적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역은 압구정 지역이다.
1485년(성종 15년) 한명회는 종묘사직을 위해 평생을 바쳤으니 이젠 유유자적하겠다는 뜻으로 한강변에 ‘압구정(鴨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선비들과 함께 시흥을 즐겼다. 갈매기가 노닌다는 뜻의 정자 이름은 명나라의 문객 예겸이 지어 주었다.
한명회는 시구처럼 노년을 보내고자 했다. 여전히 부원군의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압구정에는 매일 조정 신료와 벼슬을 탐하는 무리들이 몰려들었다. 이윤중이란 선비는 다음과 같은 시로 한명회를 조롱하였다.
有亭不歸去 人間眞沐侯(유정불귀거 인간진목후)
정자를 지어놓고도 돌아가지 않으니
이 인간 참으로 갓 쓴 원숭이일세.
목후’란 《사기》의 ‘목후이관(沐侯而冠)’에서 나온 말로 부귀를 이루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은 항우를 일컫는 말이다.
압구정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단아한 숲 사이로 한강이 내다보이는 정취가 고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마 후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이 그 소문을 듣고 구경을 청하자 한명회는 정자가 좁다는 이유로 성종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요청했다. 성종은 당시 한명회의 권력 남용에 불만을 품고 있어 야멸차게 거절하자 빌미가 생긴 대간과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했다. 한명회는 모든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형에 처해졌지만 배소로 가던 도중 사면되어 풀려났다. 아름다운 압구정은 갈매기와 노니는 장소가 아니라 추락하는 권세의 날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압구정 부근에 있는 꿀벌 공원에 설치된 꿀벌 모습이다. 원래는 3 마리인데 한 녀석의 날개가 부러져 흉하였다. 그 녀석을 빼고 찍은
사진이다. 이곳에 게시된 사진은 전부 갤럭시 5, 스마트폰으로 찍은 것 들이다. 요즈음 도시에서 꿀벌을 보기란 쉽지 않다, 대기
환경오염으로 도시에서 자취를 감춘 곤충이 참 많다. 숲에서 새들이 사라져도 문제가 크지만 익충들이 사라져도 단박에
생태계는 교란되고 개체수가 극감 할 것이다. 창조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한다. 당장 그 실천은
시작되어야 하지 늦추면 늦어질수록 그 피해는 인간에게 재앙으로 다가오게 된다.
성수대교 언덕을 넘어섰다. 그리고 위령탑이 세워져 있는 서울숲 방향을 바라보면 그 날을 상기해 보았다. 1979년 10월 21일 오전
7시 41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출근을 제노베파와 함께 하고 있었다. 우선 NMC로 가 내려 주고 나는 나의 사무실로
출근을 하였다. 출근 중에 이 사건을 목격한 것이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경악이란 단어를 실감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무학여고 학생들 희생이 많았던 것은 성수대교를 건너 통학하던 학생들이 강남에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의 원인은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 48m가 붕괴한 사건으로서 유효 단면적의 감소와 응력집중을
유발하게 한 용접 시공의 결함 및 제작 오차 검사 미흡, 피로균열의 진전을 그대로 방치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설물 및 건물 안전관리에 대하여 시스템을 확립하게 된다. 잠시 서서 성호를 긋고 화살기도로서 마음을 정리하였다.
주님! 이 세상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 우리를 평화롭게 하소서 아멘~~
성수대교를 넘어서자 길은 한강을 거슬러 뻗어 있다. 빤히 영동대교를 마주 보고 힘차게 걸었다. 기온은 조금 상승한 기미가 있었지만
바람이 불어 추웠다. 걸으며 소비하는 에너지가 열을 내어 방한복 안으로 습기가 모였다. 지퍼를 내려 순환을 모색하자, 옷 안에서
오리털 특유의 냄새가 새어 나왔다. 참 싫은 냄새라 움직일 때는 잘 입지 않는데, 오늘은 돌발 행동이라 방법이 없었다.
가시권에 롯데 타워가 보이고 팔당 사이 두미강 양 옆으로 돌출되어 있는 예봉산, 검단산도 보였다. 남한산성 자락도 조금 보이고....
영동대교 지나면 바로 청담대교가 코 앞에 다가오고 철교를 달리는 전철을 세 번이나 보면서 그 밑을 통과할 수 있었다.
청담대교를 지나자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상수 이동 급수관 교체공사였다. 공사를 피해 탄천 여물 목이 설치된 공간으로 내려
섰다. 역시 물 가까이 숲이 조성되어 있고 안 부면서 일조량이 많은 지역이라 단풍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낚시꾼도 몇 명이 강태공 모습으로 열중하고 있어 잠시 서서 구경하다 길을 다시 열어 나갔다. 성남시의 옛 지명인 탄리(炭里) 었다. 탄리는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수진동·신흥동 등에 해당하는 곳으로 과거에는 독정이·숯골이라 불렀다. 조선 경종 때 남이(南怡) 장군의 6대손인 탄수(炭叟) 남영(南永)이 이곳에 살았는데, 그의 호 탄수에서 탄골 또는 숯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고 그곳을 흐르는 천이라 하여 탄천이라 부른 것이다.
탄천을 건너 강을 끼고 걸어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초겨울 선착장은 한가롭다. 제철을 지나면 쓸쓸한 것이 물가에 있는 시설들이다.
이곳은 잠실지구다. 잠실동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 초에 이곳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잠실을 두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된 곳이다. 한양 동쪽에 있으므로 동잠실 또는 잠실리・부리도 등으로 불렀으며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 위하여 송파나루를 건너갔으면 부근에 있는 삼전도에서 청 태조에게 항복 의식을 치렀다.
선착장을 지나 잠실대교로 접근하자 멀리 보이던 롯데 타워가 가까워졌다. 스마트 폰에 내장된 카메라를 조작하여 줌인한 후
촬영해 두었다. 그리고 돌아 서서 걸어온 길을 조망해 보니 까마득하게 보였다. 잠실대교 수중보에서 쏟아지는 물은 맑은 포말을
일으켜 보기가 좋았다. 그 가장자리를 유심히 보니 어로가 보였다. 물고기들의 통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수중보 광장을 가로질러
오르자 물고기를 관찰할 수 있는 시설이 보여 다가가 살펴보았다. 어로를 타고 다니는 물고기를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옛적부터 한강은 민물고기의 천국이었다. 잉어와 가물치가 흔하였고 없는 물고기가 없을 정도로 넘치던 곳이 바로
한강이었다. 한강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 사는 어부들이 많았으며 뚝섬이나 광나루 노량진, 행주산성 부근에 민물고기를 요리로 하는
음식점도 많아 가족들의 나들이 공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한강하구가 수중보로 막히지 않았을 때 인천 앞바다가 만조를 이루면
그 영향으로 바닷물이 당인리 발전소 부근까지 치고 올라와 바다내음이 나곤 했었다. 바다와 민물을 오고 가며 살던 물고기들도
올라오고 마포에 내포지방 및 서해에서 올라오는 각종 해산물로 어시장도 열렸었는데 전부 다 사라졌다.
한강에 살고 있는 어류들을 정리해 놓고 그 뒤로 어로를 만들어 그곳을 지나다니는 민물고기를 관찰하도록 해 놓은 곳이다. 다가 가
유리 너머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뒤로 돌아 가 어로를 보니 폭이 넓고 적당한 깊이를 유지하여 민물고기 통행을 쉽도록 해 놓았다.
잘 꾸며 놓은 숲 사이를 걸어 잠실철교로 접근하였다. 이곳도 남한산성 부근에서 시작하여 올림픽공원 북문 사이로 흘러 풍납동
지나 한강과 합수되는 지역이라 낮았는데 새로 놓은 다리는 넓고 높아져 도로와 일직선을 유지하고 건너가기 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동서울 터미널과 테크노마트 사이로 다니는 전철 2호선 철교가 바로 잠실철교다. 그 뒤로 올림픽대교가 보인다.
철교를 지나 올림픽대교로 접근하면서 강변을 보니 포플러 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이 나무들이 성목이 되면 강변 풍광이
아름다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하게 위로 쭉쭉 뻗은 포플러 나무는 여름 풍광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나무다. 키가 커서
태양과 달과 구름들이 꼭 포플러 나무 끝에 걸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강바람에 흔들리는 잎을 보고 있노라면 시원한 강을 느끼게
된다.
접속도로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인 올림픽 대교를 부지런히 걸어 넘었다. 월커힐과 아차산이 드디어 보였다. 20분 정도 부지런히
걸었더니 도착하였다. 약 3만 6000보를 걸은 것으로 표시되었다. 허기가 제일 문제였다. 목도 마르고 더 이상 걷는다는 것은 무리가
다를 것 같아 다리로 올라가 강변 탈출을 시도하여 지하철역으로 접근하여 들어갔다. 잠시 빈 의자에 앉아 거리와 시간 소요 등에
대하여 관찰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걸으며 메모를 한 내용들을 묶어서 바르게 정리하였다. 거의 마무리할 무렵 내가 가야 할 방향의
전철이 도착하였다. 다섯 정거장만 가면 내가 사는 역에 도달한다. 오른 후 눈을 감고 기도로서 걷기를 마감하였다. 당신이 주신
의지가 목적을 성사하였습니다. 감사드리나이다. 아멘하고 잠시 눈을 감은 채로 걸어온 길을 스크린해 보았다. 전철를 타고
환승하고 가면 50 분에서 한 시간 소요되는 길을 걸었다.
첫댓글 좋은글....
아름다운 옛 추억이 담긴 글~
잘 읽고 갑니다~^^
전방 양구 자 ~~ 알 ^^. 다녀오셨습니까? 외손주는 할머니 응원에 힘 입어 멋진 국가의 干城(간성)으로 거듭 날 것입니다. 또한 소중한 경험은 미래의 삶 안에서 소중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호와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감사 합니다,
첩첩산중 백두산 신병교육대대 퇴소식에 자알 다녀 왔습니다.
용감하고 씩씩한 대한의 아들들~
자랑 스럽드라고요.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레이저~
5주간 마니 크고 성장 했는 대한의 군인으로 자랑하고 싶네요.
자대배치는 전방 GOP.
주님! 제대하는 날까지 건강한 몸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지켜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아멘
늘 감사하고 고마운맘 전합니다.
샬롬&샬롬
GOP라~~^^ 정말 진정한 군인의 시간되겠군요. 후방의 가족과 국민들은 용사의 불굴의 근무자세에 힘 입어 평화의 나날을 보냅니다. 용사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