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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정치의 애증관계
세 번째 축출대상은 허황한 말이나 과장된 요술로 거짓된 말을 늘어놓으면서 마치 신의 도를 깨우친 듯 하는 사람이다. 세상이 어지러워져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 때 누구나 불안해 진다. 그 틈을 노리고 이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유혹한다. 고금을 통틀어 정치가 문란하면 백성들은 종교에 기댄다. 따라서 종교가 본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통치자들을 견제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후한말에 발생한 장각의 ‘태평도(太平道)’는 중국에서 발생한 최초의 종교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다.
후한은 세조 광무제 유수가 31세에 즉위하여 62세에 사망할 때까지 31년 동안 제위에 있었고, 뒤를 이은 현종 효명제는 30세에 즉위하여 48세에 사망하기까지 18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그 후로 제위에 올랐던 황제들은 대개 10대에 즉위하여 30세를 넘기자마자 사망했다. 황제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어린 아들이 뒤를 이었고, 젊은 과부들이 태후가 되어 대부분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태후는 친정의 혈족들을 정치에 참여시켰으며, 황제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길러준 환관들을 중시했다. 따라서 정치와 행정에 문외한이었던 외척과 환관들에게로 권력의 중심이 옮겨가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유가의 이념으로 무장된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외척과 환관들에게 유린당하자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후한의 정치권력 상층부에서는 외척, 환관, 사대부라는 3대 세력이 무자비한 살육전을 펼치며 권력투쟁을 계속했다.
역시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던 환제(桓帝)는 점차 성장하자 이러한 외척의 전횡을 물리치고 친정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는 환관들과 모의하여 외척으로서 권력을 전횡하던 양기(梁冀)를 죽였다. 그러나 권력이 외척에서 환관으로 옮겨 갔을 뿐 여전히 정치와 행정의 전문가였던 사대부계급은 권력의 중심부에 서지 못했다. 이번에는 전문 관료 집단과 환관의 권력다툼이 벌어졌으나 역시 환관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것을 중국의 역사상 유명한 ‘당고(黨錮)의 화’라고 한다. 환관들은 세력구축을 위해 매관매직을 거리끼지 않았고, 이렇게 파견된 지방관들은 자연적으로 본전 생각이 났기 때문에 지독한 수탈을 자행했다. 중앙정부가 흔들리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졌다.
정치의 구심점이 흔들리자, 장각(張角:?-184)이 ‘태평도(太平道)’라는 종교를 창시하고 정치에 염증을 느낀 농민들을 규합하여 반기를 들었다. 역사는 이들을 ‘황건적(黃巾賊)’이라고 불렀다. 중국공산당이 집권하자 진나라 말기에 일어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민란’과 함께 반란이라는 불명예를 씻고 ‘농민기의’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당황해진 중앙정부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다시 사대부들을 불렀지만, 그 과정에서 군사력을 기른 신진사대부들은 이미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황건기의는 군벌이 대두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전두환이 격렬한 학생운동과 광주의 민주화운동으로 집권을 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장각은 지금의 하북성 평양현인 거록(鉅鹿) 출신으로 후대 도교의 원류가 된 태평도의 창시자로서 주술(呪術), 부적(符籍), 영수(靈水)로 악귀를 내쫓아 질병을 없애준다고 하여 민심을 얻었다. 그는 대현량사(大賢良師)를 자처라며 제자들을 각자로 파견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신도를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화했으며 AD184년에 한왕조 타도의 기치를 들었다. ‘방’이라는 말이 도사들을 가리키는 방사(方士)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인지, 지방(地方)이라는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36개의 방을 나눈 것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36개의 군으로 나눈 것을 모방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장각은 오행상생론에 따라서 화(火)에 해당하는 한이 멸망하고 토(土)의 기운을 받은 자가 뒤를 잇는다는 논리를 앞세워 신도들에게 땅을 상징하는 황색의 두건을 쓰도록 했다. 거병을 한 후에 자신은 천공장군이 되고 두 동생을 각각 지공장군과 인공장군으로 임명하여 화북과 화중을 중심으로 강남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핵심세력 1만명으로 36방을 조직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위협을 느낀 보수적인 사대부들의 조직적 반격으로 순식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건군의 몰락 이후에도 흑산이나 백파라는 농민기의가 계속되었다.
군벌들의 세력이 치열한 각축전을 펼쳤던 중국의 동남지역에서는 종교 세력이 무너졌지만, 서북방에서는 장로(張魯)가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창건하여 제정일체의 독립정권을 수립했다. 장로는 ‘천사도(天師道)’를 창립한 장도릉(張道陵-張陵)의 손자이자 장형(張衡)의 아들로 패국(沛國) 픙현(豊縣) 출신이었으며 자를 공기(公祺)라 불렀다. 일설에는 전한의 개국공신 장량(張良)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장로는 AD191년에 신도들을 모아 한중을 차지하고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불렀으며, 한의 관직을 없애고 좨주(祭酒)로 하여금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각지에 의사(義舍)라는 일종의 구호기관을 설치하고 쌀과 고기를 비치하여 행인들과 유랑민들을 배불리 먹였으며, 신도들에게는 속죄를 위해 도로나 다리를 건설하도록 했으므로 소수민족들까지도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천사도에 입교하는 사람은 쌀 5말을 바쳐야 했으므로 속칭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 불렀다. 중국의 도교는 장로의 오두미도로부터 정형화되기 시작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모두 황건기의로부터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게 된다. 그들은 농민군을 평정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합법적으로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조정은 이들 군벌의 힘을 이용하지 않으면 정권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통제력을 잃었다. 조조는 오늘날의 산동성 북부지역인 청주(靑州)에서 황건군을 제압하고 그들을 자신의 휘하에 편입하여 ‘청주병’이라는 정예군을 만들었다. 청주병은 이후 조조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유비도 고향에서 군사를 모아 황건군 토벌전에 참여하면서 명함을 내밀었다. 손권(孫權)의 아버지 손견(孫堅)도 이 전쟁에 참여하여 용맹을 떨쳤다.
한은 초기에 진의 엄격한 법치주의에 반대하여 황로학(黃老學)을 바탕으로 하는 느슨한 통치체제로 국가권력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군주의 권력을 보다 강력하게 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무제 시대에 동중서(董仲舒)가 제출한 시무책이 채택되면서 유교를 통치이념을 정립했다. 동중서는 고대 유가의 질박하고 실질적인 면을 수정하여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황제는 하늘로부터 절대적인 권력을 위임받은 존재라는 이념을 정립했다. 그는 절대적인 권력을 위임받은 황제는 하늘에 대해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천자(天子)’라는 존칭은 동중서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대에 이르러 유학이 유교로 교조화되자, 원래 군주의 절대 권력을 제한하는 덕치(德治)를 주장했던 유학은 건전성을 잃고 말았다. 춘추전국시대의 유가의 사상은 군주의 절대 권력과 패권주의를 강화하려는 법가를 정면으로 비판했지만, 한대 이후로는 오히려 군주의 절대 권력을 옹호하는 이념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유가는 오늘날 개념으로 보면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그들은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패권주의에 반대하고 예와 교로서 민생문제에 치중하는 것이 군주의 임무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통일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던 진시황이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사상탄압을 실시했던 이유도 유가의 이러한 비판적인 측면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한대 이후의 군주들은 대부분 겉으로는 유교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법가의 통치이론을 통치술로 활용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군주의 절대 권력이 강화되자 유가보다 더 진보적인 정치철학이었던 도가의 철학은 급격히 지지기반을 잃고 종교화되어갔다. 도가가 주장했던 ‘무위사상(無爲思想)’은 인위적인 행위를 거부하고 자연의 질서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고 하여 법가의 강제적인 법질서는 물론 유가의 도덕률까지도 부정했다. 이러한 도가의 사상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부정되자, 한편으로는 민간의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현실세계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신선사상으로 발전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불로장생을 위한 의학의 발달에 기여했다. 중국의학의 기본적인 사상은 대부분 도교에서 유래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각의 태평도나 장로의 오두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도교는 통치체제가 문란해질 때마다 개인적인 삶의 고통을 해결해준다는 구호를 내걸고 민중을 규합하여 정치권력에 저항하기도 했으며, 수당시대와 원대에는 정치권력과 밀착하기도 했다. 오늘날 중국정부가 파륜공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수련과 건강을 중심으로 하는 도교가 결국은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도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은 도교사상의 일부에 잠재된 우민정책 때문이기도 하다. 후한시대에 중국으로 전파된 불교는 도교보다 더 심하게 정치권력과 밀착되었다. 초기에 불교의 경전을 중국화한 사람들은 도교의 도사들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불교용어는 도교의 용어와 유사하다. 그러나 도교는 정치권력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불교는 철저히 정치권력과 영합했다. 현실의 신분이나 처지가 전생의 업보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선행과 수양을 통해 현생의 덕업을 쌓아야 다음 세상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불교의 핵심사상인 윤회설과 인연설은 저항의식을 마비시켰으므로 통치자의 구미에 적합했다.
공자, 석가모니, 예수는 신이 특정한 계급에만 강림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일치된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자신이 노력하기만 한다면 피안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공자는 왕실에서만 이루어지던 교육과 제사를 보편화시켰다. 공자 이후로 학문과 조상신에 대한 숭배가 보편화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자의식을 가지고 능력을 배양하여 각지로 흩어졌다. 공자의 제자들인 유가의 사상가들이 개탄했던 패도정치는 사실은 공자로부터 시작된 사립학교가 발전함에 따라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일터를 찾아 천하를 횡행하면서 군주의 야심을 부추겼다. 석가모니는 지독한 브라만교의 계급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이나 초목마저도 열심히 수도를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위대한 혁명이었다. 예수는 유태인들의 선민사상을 부정하고 누구나 하느님을 믿으면 천국으로 갈 수가 있다고 가르쳤다. 유태인들은 그의 파격적인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집요하게 로마인들을 설득한 끝에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러나 이들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권력자들이 되어갔다.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정치적 이상을 변질시켜 국가권력의 앞잡이인 관료가 되었으며,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스승의 소박한 야단법석과 숭고한 해탈에 대한 가르침을 망각하고 거대한 사원과 부처상을 세워 그것을 불심이라 오도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더 참혹했다. 중세 이후 대부분의 전쟁은 기독교도들이 일으켰다. 종교에 관대했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 기독교는 종교 가운데 유일하게 정치권력까지 장악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유럽 전역과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로 약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상적, 인종적, 제도적 포용력으로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가 편협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교황은 과거 로마제국 영토를 지배하는 권력자가 되어 각지의 국왕들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또 이교도들에게 빼앗긴 성지를 수복한다는 명분으로 오랫동안 십자군전쟁을 일으켜 무모한 중동지방 침략을 자행했다. 기독교도들은 불교나 마찬가지로 거대한 교회를 세계 방방곡곡에 세웠으며, 선교라는 명분을 앞세워 다른 민족의 전통종교를 모두 부정하면서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기독교 국가들이 예수를 모함하여 죽인 유태인들이 세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주 우호적이라는 점이다.
공자, 석가모니,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준 행태는 참으로 묘하다. 그들은 정치권력이 자신들을 우대하면 철저히 권력의 시녀가 된다. 심지어 스스로 앞장서서 권력을 지지하기도 한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최대의 불교종단인 조계종의 총무원장이 정권이 바뀌면 따라서 바뀐다는 사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순복음교회의 재산과 소유권이 아들에게로 넘어가는지의 여부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위대한 인류의 스승인 예수나 석가모니를 삼신할머니 정도로 생각하여 주로 신도들의 자식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빌거나 돈 많이 벌어서 헌금이나 하도록 기원하는 일에 앞장선다.
공자의 제자들이야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가족법 개정과 같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보수우익단체와 함께 나서서 핏대를 세우는 것 외에는 각처에 흩어진 향교나 사원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니 비판할 가치도 없는 듯 하다. 그래도 석가모니나 예수의 제자들이 자식 대학시험 합격하게 해달라고 비는 것처럼 공자의 사당이나 향교에서 빌지 않는 것을 위안이나 삼아야 할 듯하다. 종교란 문자 그대로 ‘으뜸가는 가르침’이므로 정치가 해결하지 못하는 각종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위대한 선배들이 쌓은 업적에 기생하며 신도들에게 군림하는 일은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
제갈량은 형주의 융중에서 유비와 함께 합의했던 삼국정립이라는 애초의 과업을 완수했다. 그러나 형주라는 전략적 기반을 잃고 익주라는 서북부의 협소한 곳으로 밀려나야 했으며, 게다가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유비가 죽자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강력한 적국인 위가 언젠가는 촉한을 없애려고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촉한이 선택할 수 있는 생존전략의 범위가 좁다고 생각했다. 대외적으로는 동오와 군사동맹을 맺고 세력균형을 이루는 한 편, 후방의 소수민족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했으며, 대내적으로는 국가비상사태를 맞이하여 강력한 전시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이러한 체제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위의 서북방을 위협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전략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제갈량이 5차례나 변경을 침범하는 동안 위는 동남쪽의 오와 동북지방의 고구려가 침입할 것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펼치지 못했다. 서북지역을 지키던 위의 장군들은 대부분 수비에 치중했다. 제갈량의 위대한 라이벌 사마의가 여자들이 입는 옷을 받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공세를 취하지 않았던 것도 중앙정부로부터 수비에 치중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2부 축악편은 이러한 상황에서 전시체제를 구축할 때 위협이 되는 요소를 열거한 것이다. 익주지역에 어떤 종교가 세력을 떨쳤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유비에 앞서 익주를 장악했던 유언(劉焉)이 익주에 도착하기 전, 장각의 지지자였던 마상(馬相)이 전임 익주자사 각검(卻儉)을 죽였던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에도 태평도가 상당히 만연되었을 것이다. 또 장로가 익주의 북방인 한중(漢中)에서 오두미도를 확장하여 백성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그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종교는 탄압을 하면 할수록 더욱 확장되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지만 태평도나 오두미도와 같은 종교가 여전히 기층민중들 사이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이들이 제갈량의 전시체제 구축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그리 큰 호응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촉한은 변방으로 중원에 비해 문화적으로 미숙했을 것이다. 따라서 토속적인 신앙이 만연했을 것이며, 제갈량의 딸이 신선이 되었다는 민간설화가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선사상이 널리 퍼졌을 것이다. 파촉은 아미산을 비롯한 아름답고 깊은 산들이 많기 때문에 구도자들이 많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오늘날도 대통령 선거나 정치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갖가지 참언(讖言)들이 횡행하는 것처럼 국가적 위기에 처한 촉한에서도 온갖 예언들이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갈량의 전략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참언을 이용했을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상하게도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영적인 것에 의존하려고 한다. 공자도 제자들이 자꾸 귀신에 대한 것을 묻자 살아있는 사람의 일이나 잘 판단하고 처리하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도 명리학이나 관상술과 같은 운명을 감정하는 것을 공부한 적이 있다. 결론은? 이현령비현령이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의 첫 문장은 “천하의 대세는 오래도록 나누어져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고, 오래도록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나누어진다(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는 기가 막힌 명문으로 시작한다. 일종의 숙명론이자 역사적 통찰이다. 이는 만물은 극에 이르면 반드시 변화한다는 《역경(易經)》의 철학적 통찰과 일맥상통한다. Karl marx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역사가 발전한다는 경제적 결정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과 모택동은 이러한 숙명론을 거부하고 인간의 의지로 역사발전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략가들은 대체로 숙명론을 거부하고 철저히 주의주의(主意主義:valuntarism)을 신봉한다. 그들은 객관적인 관찰과 탁월한 지혜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던 제갈량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적장 사마의를 호로곡에 몰아넣고 화공을 퍼부었지만 때마침 내린 비로 실패하게 되자 이렇게 한탄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謀事在人, 成事在天).”
하늘의 의지를 믿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잠재된 본능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명장 이정(李靖)의 문답을 기록한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에는 대표적인 숙명론인 음양오행설과 점술에 관한 두 사람의 토론내용이 있다. 당태종이 음양오행설이나 점술과 같은 수상쩍은 것들을 금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자, 이정은 재물이나 권력을 탐내는 자들이나 어리석은 자들을 다스리기에는 그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으므로 모른체하고 그냥 두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제갈량은 철저한 합리주의자였다. 소설 삼국지에는 그가 적벽대전에서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오장원에서 수명을 비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요행수를 바라는 허무맹랑한 짓을 할 수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도 후대의 이정처럼 이러한 신앙행위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취했지만 이러한 유언비어나 나도는 것을 경계할 필요는 있었을 것이다.
종교사상은 결국 천명이라는 문제로 요약된다. 천명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종교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에서 과연 하늘의 의지가 번영되는가라는 문제는 종교철학의 핵심적인 관념이다. 즉 ‘하늘이 인간의 일을 결정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힘으로 하늘을 극복할 수가 있는가?’라는 문제는 고대 사상가들이 끊임없이 논쟁을 펼친 주제이다. 이러한 논쟁은 이미 선진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천명에 관한 인식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도가는 하늘은 아무런 의지가 없으므로 ‘천도(天道)’에 순응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주장한 천도는 일종의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즉 천도는 이미 정해진 일정한 규율대로 끊임없이 가동되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규율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거기에 순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하늘은 어질지 못한 존재였을 뿐이다(天地不仁). 도가는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을 ‘자연’이라고 규정했으며,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의 행동을 ‘무위(無爲)’ 즉 ‘억지로 자연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묵가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의지를 인정했다. 예를 들어서 《묵자 명귀하(明鬼下)》에서는 상벌을 주재하는 귀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밝혀서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묵자는 은주시대 이래의 귀신을 숭배하는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는 ‘천명’을 믿었다. 공자는 《논어 안연(顔淵)》에서 생사는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이 주관한다고 했으며, 《논어 위정(爲政)》에서는 내 나이 50세에 비로소 천명을 알았다고 말했다. 일종의 숙명론적 견해를 나타낸 것이다. 맹자는 《맹자 진심하》에서 “성인에게 천도가 있는 것을 ‘명’이라 한다.”고 말했으며, 천명이라는 두 글자를 이렇게 해석했다.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이 ‘천’이요,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명’이다.”
천명을 믿는 것은 하늘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즉 크게는 국가의 운명에서 작게는 초목의 생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늘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가의 순자는 처음으로 이러한 ‘천명’을 부정하는 기치를 들었다. 그는 천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자 천론(天論)》에서 사람이 천명을 만들고 그것을 활용할 뿐이며, 시대에 적응하여 그것을 사용하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의 노력으로 하늘의 의지를 이길 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