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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제 18강 (이 근호목사, 2008년 8월 15일-b, 서울의존교회)
지난시간에 한 것을 요약하겠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자기가 내세운 자기약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십니다. 사람은 자기 약속을 저버리지만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어기는 적이 없습니다.
창세전에 약속한 것이 있는데 그 약속한 것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제가 앞에 있는 여학생에게 편지를 주었듯이 그렇게 편지를 주는 것처럼 주게 되면 ‘이것을 읽고 똑바로 해. 다 지켜’, 그게 아니고 주어진 편지의 내용대로 온 몸에 그것이 버터 녹듯이 퍼집니다.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물에 빠져 죽지요.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가 자동적으로 말씀 속에 빠져버려요. 말씀 속에 빠져 버리면 그동안 나만 사랑하기 때문에 몰랐던 그 말씀의 깊이와 높이의 풀장, 말씀의 풍성한 세계가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그 말씀에는 ‘네 속에 내가 들어가서 살겠다’는 그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요.
“현재 네 마음 안에는 누가 있지?”
“내 마음속에 나 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 마음속에 내가 들어간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버리면 뭐가 따라 옵니까? 이 포도 보세요. 포도를 먹었는데 세상에, 씨가 따라 들어와요. 포도(예수님)를 먹었는데 세상에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었어요? 씨(피)가 들어 있었어요. 그 피는 에베소서 1;7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어요. 포도 먹을 때 그 씨가 내 몸 안에 딸려 들어오는 것 같이 예수님의 피가 내 온 마음에 퍼지면 마음으로 지은 죄까지 그 피가 죄사함, 용서를 해 준다는 거예요. 이것은 사법고시 합격하고 전문의 시험 통과한다고 해서 될일이 아닙니다.
혹시 의존교회에서 사법고시 준비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공무원 시험은? 그것도 없으면 운전면허 시험은? 그것도 국가고시잖아요. 사람이 시험을 보는 것은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가능성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라는 거죠.
그것은 어렵지만 하면 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피를 통해서 그 성경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이 아니면 그런 혜택이 안돌아옵니다. 이것은 돈 바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전도 1000명을 해도 구원 못되고 예배 참석해도 안 되고 그러면 그게 어떻게 되는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어렵기 때문에 다 시 하번 더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그 예수님 안에 씨앗 같이 뭐가 있다? 피.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씻어준다는 것은 에베소서 1:4에 의하면 창세전에 계획된 거예요. 창세전에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포도 안에 씨앗 집어넣는 것 사람이 집어넣었습니까? 아니지요? 사람하고 관계 없지요.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된 것이 있었어요. 그 계획된 것이 뭐냐?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게 된다는 것은 창세전에 계획된 일입니다.
지금부터 어렵습니다. 창세전에 계획된 그 피가 담긴 포도알갱이가 인간 역사 속에 들어올 때 감추어져서(점선으로 표시) 왔다가 언제 이것이 실제로(실선으로 표시) 나타나느냐 하면,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실 그 때인데 그때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 점선표시가 계속해서 점선으로 점선으로, 감추고 감추고 감추고 계속 감추어 오다가 마지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면서 ‘다 이루었다’ 할 때 그 감춘 것이 다 공개된 거예요. 창세전부터 감추어온 비밀이 이 역사를 통해서 들어오게 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피를 흘려도 내가 안 믿으면 그만이죠.
‘아저씨, 어디 아프세요? 피를 흘리시네. 병원에 가보세요.’ 그러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나 하고는 상관없지요. 예수님이 피를 흘려도 나에게 죄 용서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흘리신 그 피가 내 안에 들어와야 돼요. 예수님의 피가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니까 이것을 크게 쓰겠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조건을 묻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사랑을 주시는 분이 어떤 조건을 묻지 않고 그냥 줘 버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그냥 줘버리는 것.’ 제가 이 안경을 이렇게 주면서,
“자, 이 안경 받아라.”
“목사님, 왜 안경을 주시는데요?”
“묻지 마. 사랑이다.”
“주님, 왜 저를 사랑합니까?”
“묻지 마. 내가 너를 사랑하면 그것으로 끝난 거야.”
도망쳐도 끝까지 따라가요. 지하실에 숨어도 반드시 찾아내요. 사랑의 화살은 반드시 꽂히게 되어 있어요. 양궁으로 치면 10점 만점입니다. 9점의 선에도 안 걸렸어요. 확실하게 10점 만점입니다. 에베소서 1:4에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반드시 사랑 받는다’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편지입니다.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반드시 사랑받는다. 그 주체가 누구냐? 예수님의 피다. 그 피로 말미암아 네가 용서를 얻으리라’는 이 편지가 여러분에게 배달되었어요. 그 내용대로 그대로 될 겁니다. 이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이제부터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는데 그 피가 사랑인데 그 피가 그 사랑이 우리 속까지 어떻게 들어오는가? 그것이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렸다.”
“예,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사랑이다.”
“예, 인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태어나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의 일이고 우리가 사는 때는 2008년도 8월 15일에 살고 있습니다. 시간도 그렇게 멀고, 지리적으로도 예수님이 살던 곳은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지방이고 우리가 사는 곳은 아, 대한민국 아닙니까? 시간대도 다르고 공간대도 다른데 어떻게 해서 그 사랑이 나에게 전달되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학생들에게는 아주 어려울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포도알맹이를 옆에 있는 친국에 줄때는 팔을 쭉 뻗어서 ‘얘야, 먹어라’ 하고 주면 됩니다. 포도 알맹이는 팔만 뻗으면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흘린 피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될 수가 없잖아요.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예수님은 대략 서기 30년경, 우리는 서기 2008년, 시간의 간격이 이렇게 먼데 어떻게 죄용서가 됩니까? 신약 때는 실제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고 구약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어린양, 또는 소, 염소등의 제물이 피를 흘려서 그 피로 말미암아 그때는 죄 용서를 받은 거예요.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 준 겁니다.
제가 아까 시간과 공간이 예수님하고 안맞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옛날 구약에서 제사 드리는 장소를 가지고 성소, 또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제사 지내는 장소는 거룩한 곳이고 여기에는 피가 있고 누구든지 여기에 들어오면 죽습니다. 제사지내는 그 바깥은 더러운 곳입니다. 이것을 옆에서 보면 이렇게 되고 위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시내산에는 누가 올라갔습니까? 모세가 올라갔습니다. 그 모세가 여기서 하나님을 만났지요. 산위는 거룩한 곳이고 산 밑에는 더러운 곳이죠. 아까 이야기 했듯이 산 밑에는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산위에는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산위에서는 모세가 물도 안마시고 떡도 안 먹어도 40일동안 거뜬하게 살았어요.
그러면서도 영광스러웠어요. 에베소서 3장에도 ‘주님의 영광을 풍성하게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대목이 나와요. 모세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해처럼 눈이 부시도록 광채가 났어요. 모세가 41일째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산위에 있었나요, 밑으로 내려왔나요? 모세가 41일째 밑으로 내려오면 모세와 더불어 산 밑으로 함께 내려온 것이 있어요.
모세가 양팔에 쥐고 내려온 것, 율법이고 말씀인데 그 앞에 뭐가 붙어 있어요. 거룩한 율법, 거룩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40일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모세가 무엇과 함께 있었기에 그렇습니까? 거룩한 말씀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안 죽고 거룩하게 살게 된 거예요.
그런데 산 밑에 내려오니까 더럽지요. 더러우니까 모세가 뭘 깼습니까? 들고 있던 말씀을 깨버렸어요. 깨니까 산 아래는 무슨 세계? 죽음의 세계입니다. 여기서 레위사람들이 3000명 가량을 죽여 버렸어요.(출 32:28) ‘이 더러운 인간들아, 너희들은 말씀을 들을 자격도 없다.’ 그 후에 모세가 다시 산위로 올라가서 또 말씀을 가지고 내려오죠.
그렇다면 왜 모세가 또 말씀을 가지고 내려와도 이 사람들이 안 죽습니까? 그 말씀, 돌판에 뭐가 묻혀 있기에 그렇습니까? 피가 묻혀 있지요. 이제 감추었던 하나님의 비밀이 풀렸습니다. 말씀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그냥 있으면 나만 생각하는 더러운 우리는 죽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뭐가 가미되면, 뭐가 붙으면 우리가 안 죽어요? 피.
그러면 말씀대로 하면 우리는 죽어야 되는데, 율법대로 하면 우리는 죽어야 되는데 옆에 붙어 있는 피가 죽어야 될 우리 죄를 씻어 내는 작용을 하지요. 빨래할 때 하이타이 한 스푼 넣지요? 그 하이타이가 세탁물을 하얗게 하지요. 나중에 옥시크린도 넣지요. 나중에 냄새 좋으라고 또 넣는 게 있지요.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너무나 더러워서 빨래를 하시는 거예요. 세제로 뭘 사용합니까? 피를 사용해요. 피가 빠져버리면 더러운 인간이 거룩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죽습니다. 사사기에 마노아가 나오는데 그가 거룩한 천사를 만나고서 ‘이제 우리는 죽었다’고 했어요. 왜? ‘더러운 내가 거룩한 천사를 만났기에 우리는 죽었다’(삿 13:22)고 했어요.
지금 천사 나타나고 예수님 나타나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뭘 믿습니까? 천사가 뭘 보고 넘어갑니까? ‘죽여버린다’고 하다가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뭘 보고 넘어간다? 피를 보고 넘어가는 거예요. 그게 유월절입니다. 피만 보면 그냥 넘어가요. ‘목사님, 왜 그렇습니까?’ ‘창세전에 사전에 약속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피만 있다면 우리는 담대하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돈 몇 푼 헌금하고 십일조 한다고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돈을 안무서워해요. 돈을 무서워하는 것은 인간만 그래요. 돈 없으면 인생 실패한 것으로 알고 돈 좀 가지면 인생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둘 다 실패한 겁니다. 돈 보고 놀아나는 하나님이 그게 하나님이겠습니까?
그것은 무당들이나 점쟁이들이나 좋아하죠. 부채도사 같이 ‘서울대학 들어가겠…다!!’ 이런 것은 돈만주면 다 해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 돈에 헬렐레, 하는 그런 예수님이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신 분이 어떻게 돈에 현혹되고 돈에 놀아나는 그런 주님이겠습니까?
돈에 놀아나는 것은 목사들밖에 없어요. 목회 성공하려고 미쳤어요. 그게 다 누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그게 우상숭배자들입니다. 한국교회가 썩은 정도가 아닙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썩었다고 하면 교회인데 좀 문제가 있다고 되지만 처음부터 교회가 아니었어요. 피를 이야기 하면 사람 무시한다고 교회 다 안 나옵니다.
‘여기가 도살장도 아니고 교회에서 왜 피를 이야기하느냐?’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은 그들의 정성도 아니고 노력과 기도도 아니었어요. 뭘 보고 천사가 넘어갔습니까? 피를 보고 넘어갔어요. 그게 창세전부터 감추어둔 하나님의 뭐기에?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시간과 공간을 극복해서 용서가 되는지 그 이야기는 안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창세전 비밀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시간과 공간은 죄송합니다만 우리 인간이 만들었습니다. 칸트가 이것을 정리했지요. ‘인간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인식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그것을 재해석해서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아인쉬타인은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에너지장에 의해서 변형된다’는 상대성원리를 이야기 했어요. 상대성원리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간에 2000년이라는 간격과 공간이라는 간격을 인간이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극복되는가? 하나님의 피의 말씀이 그 어떤 그 시대에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이렇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은 거룩해요. 성전에서 말씀대로 제사가 돼요. 말씀이라는 것은 모세언약인데 모세가 받았던 계명대로 이루어지면 그것이 성전 되고 제사되는데 이 성전이 있는 공간을 떠나서 이스라엘 밖으로 도망치면 이 성전의 효과가 있느냐,없느냐 하는 그 문제가 있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이스라엘이라는 경계, 국경을 넘었어요. 배를 타고 방향을 다시스, 오늘날의 스페인인데, 그쪽으로 죽 내려갔어요. 그렇게 내려가면서 ‘이쯤 되면 성전, 여호와께서 안 보이는 곳까지 내려왔겠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스로 보낸 것이 아니고 죽음의 골짜기, 바다 깊숙하게 집어넣고 말았어요.
수평적으로 가던 요나가 수직적으로 바다 밑 속에, 죽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죽음에서도 과연 사랑의 화살이 꽂히겠느냐, 안 꽂히겠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요나가 바다 속에서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았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피의 특징이 뭐냐?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무시하고 시간이 어떤 시간대이든지, 공간이 어떤 공간대이든지 상관없이 주님의 사랑은 터지게 되어 있어요.
향수라는 화학물질은 얼마나 전파성이 강한지 만약에 제가 향수를 뿌렸다면 저 끝에 앉은 분이 ‘지금 우리 중에 누가 향수를 뿌렸지?’라고 합니다. 지금 포도열매의 향기가 온 교회당에 다 퍼졌어요. 주님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극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데 어떤 저항이나 방해도 있을 수 가 없어요.
요한복음 4:46을 보세요.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님, 그렇게 먼 장소에 계시지 말고 우리 아들 입원실에 있는데 직접 오셔서 안수를 하시든지 해서 그 병을 고쳐주소서. 우리 애 죽습니다’라고 했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신하가 죽기 전에 예수님 보고 내려오시라고 부탁했는데 아까 요나가 죽을 때도 성전에서 내려온 사랑을 받았지요? 이 사람은 그런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 왕의 신하는 ‘말로 하지 마시고 직접 와서 기도를 하시든지 해야 병이 낫습니다. 공간이 가까운 곳에서 해야지 병이 낫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고 ‘가라. 내가 말만 하면 끝난다’라고 했더니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합니다.
아직 자기 집에 가는 중인데 ‘저 주인님! 기뻐하세요. 주인님의 아들이 살았습니다’라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마중을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 나은 시기를 물었지요? 그러자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합니다. 전에 예수님께서 ‘네 아들 병이 나았다’고 말씀한 것이 오후 세시라면 오후 세시에 아이의 병이 나은 거예요.
사람들은 시간에 갇혀 있고 공간에 갇혀 있는 거예요. ‘주님이시여! 내 식대로 해야 병이 낫습니다’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내 말이 내뱉어진 그 순간 이미 다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이걸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믿음은 뭐예요? 믿음이란 현재 ‘이것은 내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내가 유지하고 있던 시간과 공간을 부수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만 부수는 것이 아니에요. 또 하나 부수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11부터 보세요.
요한복음 11:11-16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예수님이 ‘지금 나사로는 잠자고 있다. 깨우러가자’ 고 하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자고 있는 인간을 왜 깨웁니까? 자게 놔두지’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이 ‘아니다. 죽은 것이다’라고 하니까 제자들이 ‘그럼 우리도 죽으러 갑시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잠자는 것 따로 죽는 것 따로 이렇게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죽음은 없고 잠자는 것 밖에 없어요. 여러분, 잠자는 것이 무섭습니까? 저는 어릴 때 잠자는 것이 무서울 때가 있었어요. 잠만 자면 귀신이 나오는 꿈을 꾸니까 잠자는 것이 무서울 적이 자랄 때 한때 있었어요. 지금은 다 컸으니 그런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잠자는 것과 죽는 것을 같이 봅니까? 아버지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면서 웁니까? ‘아이고, 아이고, 우리 아버지가 잠을 주무시다니…’ 하면서 곡 합니까? 아버지가 화가 나서 ‘너 왜 그래? 내가 죽었나? 왜 울고불고 난리야’ 할 것 아닙니까? 잠자는 것 보고는 안 울지요. 죽는 것을 보고는 울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뭐가 없을 경우에? 믿음이 없을 경우에는 그런 거예요. 믿음이란 뭡니까? 나의 상태가 안 깨진 상태가 믿음이 없는 것이고, 나의 상태가 깨어지면서 예수님의 상태가 밀려들어오는 것, 창세전의 비밀이 밀려들어오는 그게 믿음이잖아요. 거기서 예수님의 입장이 밀려 들어오니까 예수님이 죽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죽는 것이 아니고 잠자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믿는 순간부터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죽는 것은 뭐다? 잠자는 것이다. 깨우시는 분은 누구다? 예수님이 깨우시는 분이다. 우리는 잠자는 것이 주특기고 예수님은 깨우는 것이 주특기이고. 그러니까 믿음이란 시간도 깨어져야 되고 공간도 깨어져야 되지만 아예 사람을 삭제합니다.
사람 말을 믿으면 안돼요. 이것 중요한 겁니다. 지금까지 의존교회에서 중요한 것을 많이 했지만 이것도 참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의 말을 믿었습니까? ‘도마야, 네 말이 맞구나’ 그랬습니까? ‘아이고, 저 철딱서니 없는 것.’ 예수님이 나사로를 깨우러 갔거든요. 그런데 그의 누이동생이 달려 나오면서 ‘아이고, 예수님! 이제 오십니까?’ 하면서 오빠 죽었다고 난리 피워요.
뭐가 안 깨졌어요. 시간과 공간이 안 깨진 거예요. ‘내가 오빠죽기 전에 오시라고 기별을 보냈건만 주님은 들은 척도 안하고 이미 모든 것이 다 끝나서 한 번 가면 못 온다는 저승의 길로 가버렸으니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주님께서 ‘내가 다시 산다고 했지 않냐?’ ‘그거야 재림할 그 때의 이야기지 지금 죽은 우리 오빠 당신이 책임지소’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믿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네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너는 그냥 잠이나 자라’ 이 말입니다. 지금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자는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사고방식이 우리 마음에 들어올 때나 일어나는 이입니다. 예수님의 사고방식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자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 깨우러 갔더니 세상에 나사로의 침실을 돌로 막아 놨네요.
죽은 나사로를 막아 놓은지 나흘이 되었어요. 나사로를 베로 칭칭 감아 놓았어요. ‘나사로야, 자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누이동생을 위해서 한번 깨어나 줘야겠다. 나사로야! 일어나라. 이리 나오너라.’ 예수님의 관점에서 나사로는 그 말을 알아듣습니다. 왜? 나사로는 이미 그 믿음이 있으니까 일어나서 나왔어요.
예수님이 걸어 나온 나사로를 보고 ‘풀어 줘라’해서 풀어주니까 튼튼하고 멀쩡한, 썩은 것이 아니고 근육이 이두박근 삼두박근 불끈 나오는 사람이 나왔어요. 그래서 오빠하고 동생하고 생존층에서 다시 만났잖아요.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창세전에 계획된 세계, 그 계획된 세계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밀려 왔습니다. 밀려와서 하는 소리가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새로운 수직적인 약속의 층이 우리에게 밀려온 거예요. 이것을 좀 더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여름에 대구 우리교회는 문경의 오미자체험 마을에서 수련회를 했는데 거기서 호세아, 아모스서를 강의했습니다. 거기 보면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고 그림 말고 실제로 보여준 것을 하나 그리고 그 두 가지를 했습니다. 그 두 가지를 하고서 이 강의를 마치려고 합니다.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하고 있는데 그분들에 따르면 우리 위에는 약속 층이 있고 우리는 무슨 층에 있느냐 하면 내 생계, 생존만 생각하면서 죽을 때까지 밥이나 먹고 사는 생존 층에 있어요. 생존 층에 약속의 층이 뚫고 들어오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매일 같이 밥이나 먹고 살려는 이 생존의 층에 약속의 층이 뚫고 들어오게 돼요. 뚫고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 컵에 물을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물인데 이 물이 하나님의 창세전의 약속, 포도 알이라고 해 봅시다. 포도알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씨, 씨는 뭐라고 했고요? 피, 그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담기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생존 층에서는 ‘이것은 내가 애써서 돈 벌어 놓은 것, 이것은 내 돈이야. 이 펀드도 내 것이고, 이 자식도 내 남편과 함께 낳은 내 새끼야. 이 아파트는 내가 분양받았어. 이것은 내 교회야. 이것은 내 건물이야.’ 이렇게 전부 다 내 것이 있어요.
항상 내 것을 주장하는데 아모스는 말하기를 내 것을 고정하지 말고, ‘이것은 내거야. 내거야’ 하지 말고, 고정된 이것에서 뭐가 나와야 하느냐, ‘하나님의 공의가 흘릴 찌어다’(암 5:24)가 나와야 합니다. 뭔가 내 것은 아닌데 내 몸을 통해서 흘러 내려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 것은 아닌데 뭔가 흘러 내려가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너 아파트 몇 평이야? 한 달 수입이 얼마야? 자식, 아들과 딸 합해서 몇 명이야? 교인 몇 명이고 교회 건물 건평이 몇 평이야?’ 이런 고정성을 묻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뭘 묻는다? 유동성을 묻는 거예요.
나이든 노인들이 흔히들 말하기를 ‘사랑이 많다’고 하잖아요. 안 그렇습니다. 사람이 연세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 바나나 내꺼야. 누가 가져갔어? 이 신발은 내 꺼야. 누가 맘대로 신었어?’ 자꾸만 뭔가 앞에 흐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흐르는 것이 없고 이 빈껍데기만 쥐고 있어요.
‘이 사주단자는 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인데 이걸 누구에게 빼앗겨. 이걸 팔자고?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팔아?’ 자기 것 쥐고 안 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꼭 어린애 같아요. 많이 힘들어서 약간 졸기도 하시지만 오늘 참석하신 노인 두 분 에게는 해당 안 되고 세상 노인들에게 다 해당됩니다. 뭔가 흐르는 것이 있어야 돼요.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사랑입니다.’ 이렇게 뭔가 내 놓는 것이 있어야 돼요. 우리 어머니께 제가 전화로 이렇게 했어요.
“어머니, 어머니 연세가 지금 81세이신데 앞으로 어디가실 겁니까?”
“천국가야지.”
그런데 천국 가려면 ‘이것은 내꺼다’ 이래서 천국에 갑니까? 천국에 가려면 안에 뭐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이 주신 피, 사랑이 흘러야 되는 거예요. ‘얘야, 내가 너에게 줄 것은 없지만 예수의 피를 믿어라.’ 이렇게 흘러나오는 것이 있어야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답고 하나님의 자녀답습니다.
‘이것은 내 꺼다. 이 슬리퍼 내꺼다.’ 슬리퍼를 강아지가 물고가든 누가 물어가든 그게 뭐가 대수입니까? 이제 내일 모레 천국 갈 사람이 자세가 그렇습니까? 요새 보니 나이 많은 사람이 더 심해요. 누가 잡아먹나? 연세 많아지면 ‘죽는 것이 속 편하지’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나이 많든 적든 사람이 죽는 것은 싫어해요. 나이 80된 노인에게 물어 보세요.
“할머니, 앞으로 몇 살까지 사실 겁니까?”
“앞으로 백살 까지는 더 살아야지”
아이고, 귀신 될 때까지 사세요! 백 살 살아서 뭐할 겁니까? 나이 먹은 것 자랑하려고 합니까? 뭔가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 죽더라도 낙원에 갑니다. 창세전에 담긴 그 사랑, 그 사랑, 주님이 주신 그저 끝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 사랑은 무엇을 묻지 않는다? 조건과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줘버립니다.
바라기는 그냥 주시는 이 사랑이 여러분가운데 유초등부 아이들부터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고 저에게도 넉넉히 흐르고 넘치는 의존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려고 예수님을 미리 준비하시고 보내셔서 귀한 피를 흘려주시고 그 피로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가 가능케 했사오니 앞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랑이 흐르고 넘칠 수 있도록 충만할 수 있도록 주님의 약속의 층이 이 의존교회에 가득 차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