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해방실천협의회 윤여연(아이디;인간해방)의장은 1954년 생으로 1973년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1974년 숭실대 법학과에 입학하여 1974년과 1975년 유신반대 시위를 주동하다가 1976년에 권고휴학으로 군입대하여 하사관 복무후 1980년 숭실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어 "민주화의 봄"시기에 서울역시위 등 각종 시위를 주동하여 "포고령위반"으로 구속된 바 있다.
그 후 1981년 농민운동에 참여하였고 1983년 전국복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1984년 대동인쇄소를 운영하며 당시 전국 각종시국관련 인쇄물의 60%이상을 제작하여 "6 월 항쟁" 등에 기여하였다.
1985년부터 1987년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무국장과 운영위원장을 역임하다가1985년 10월부터 1986년 11월까지 수배를 당하였고 1986년 수배중에도 서울지역 인쇄노동조합 설립 준비에 참여하여 1986년 11월부터 1987년 3월까지 "집시법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89년에 대동노동상담소 소장을 하면서 일용노조 설립에 기여하였고 1992년 인간해방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98년에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고 1999년 인간해방실천협의회를 결성하여 인간해방신문을 발행하며 현재까지 의장으로 있다.
2003년에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며,현재도 전국보험모집인노동조합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기타 9가지 비정규직 조직결성과 관련하여 직,간접적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font color=blue>연재되는 글은 윤여연(아이디 인간해방,인간해방협의회 의장)씨의 글로 1980년 당시 숭실대 총학생회장으로서 "민주화의 봄" 학생운동을 주도,경험한 바를 적시한 것입니다.
충분한 사실성,역사성이 있다고 보여지나 대전뉴스타운의 취재나 의도와는 무관하며 약간의 편집만 하였음을 밝힙니다.<편집자 주></font color>
<b>글을 들어가며</b>
1960년 4.19 민주혁명은 1년후 일어난 1961년 박정희 등이 주도한 5.16쿠테타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후 20여년간 유신헙법과 긴급조치 등 철권적통치하에서 국민들은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1979년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에 비명횡사한 후, 그동안 억눌려있던 전국적이고 전계층적인 규모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졌던 시기를 역사가들은 "민주화의 봄"이라 합니다.
그래서 "1980년 민주화의 봄"은 4.19의 민주화의 꿈을 되살려서 왜곡된 역사는 물론 인적, 구조적, 제도적 청산을 완성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회대청소가 꿈이었습니다.
이러한 민주화의 봄 시기의 상징적인 사건이며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었던 5.15 서울역 시위를 회고해 보고자 합니다.
<font color=red>왜, 우리는 1980년 봄을 "민주화의 봄"이라고 부를까?
왜, 지금보다도 대학생수가 3분의 일 정도도 못되고 운동권의 조직력도 지금의 십분의 일도 안될 만큼 취약했는데도 1980년 5월 15일에는 20만 명이나 되는 대학생이 사회대청소의 구호를 외치면서 서울역으로 몰려든 것일까?
왜, 1980년 이후 운동권의 조직력과 대중운동의 조직력이 몇 십만∼몇 백만 명을 넘었는데도 한번도 그 이상의 숫자가 모일 수 없었을까?</font color>
1980년 이후에도 운동권은 구속이나 해고를 피하기 위해서 격동적 시기에서 수많은 회군을 반복했지만, 유독 서울역회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비판만 받아왔을 뿐, 지도부가 목숨을 담보로 한 무기한 가두투쟁 결의를 하고 전국적 공동투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그 주동자의 한사람으로서 그 진실을 올바르게 평가하고자 합니다.
<b>1. 민주화의 봄 시기 학생운동</b>
1979년 11월부터 학생회 부활논의를 시작한 전국의 대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학생운동은 1980년 봄의 학생회 부활운동에서 시작하여 학원민주화투쟁을 거쳐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을 겨냥한 대대적인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신학기 대학가는 각종 써클이 공개적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여러가지 대자보가 등장하여 연일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유신정권의 비행을 폭로·질타했다. 총학생회 선거 열풍이 지나가자 대학은 민주화투쟁을 준비하는 거대한 기지로 변해갔다.
학생운동은 학생회 구성작업이 마무리된 시점까지 일체의 과격한 투쟁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적인 집회와 시위를 최대한 자제했다. 3월은학생회 구성을 위한 선거운동 기간이었고 4월은 학원민주화투쟁 시기였다.
이 투쟁은 족벌사학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농성으로 시작되었으나 학원민주화투쟁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4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병영집체훈련 문제가 학원민주화투쟁의 새로운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이 본격화되고 이 문제가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이 공방은 조만간 다가올 신군부와 학생의 일대 격돌을 예비하는 전초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보도가 나오고 입영훈련 거부투쟁과 맞물리면서 대학가에 투쟁의 진로와 방법에 대한 이견과 노선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심각한 국면에 접어든 학생운동은 일부대학이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5월 초부터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퇴진", "정부개헌 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학내민주화운동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정치투쟁으로 돌입했다.
5월 초부터 13일까지 열흘 남짓한 기간은 학생운동이 본격적인 가두투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5월 10일 서울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요구"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항간에 유포된 "5월 봉기설"에서 쿠데타의 명분을 찾으려는 신군부에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당분간 평화적 교내 시위만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5월 13일 밤 가두진출을 주장해 온 강경파 학생들의 광화문 일대 시위로 학생운동은 전면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한 가두시위로 나서게 된다.
<b>2. 동상이몽 속의 정치권</b>
1980년 봄의 정치권은 최규하 정부와 정치권 전체의 대립·갈등, 그리고정치권 내부에서 3김씨 사이의 협력 및 경쟁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국민연합"으로 결집해 있던 재야민주인사들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김대중씨를 매개로 정치권의 변화와 맞물려 움직였다.
1980년 1월 9일, 각 신문, 방송에 대서특필된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은 정치권에 심각한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최규하 정부는 공식적으로는부인하면서도 연두기자회견이나 정부개헌심의위원회의 발언을 통해 절충형 정부형태를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원집정부제 개헌론 파문은 개헌의 주체와 권력구조에 대한 정치적 전망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공화당과 신민당 그리고 재야를 기반으로 한 정치권의 3김씨는 최규하 정부의 이원집정부제 개헌주도 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가 개헌의 주체로 나서도록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이런 가운데 "친여 신당설"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1979년12월경부터 퍼지기 시작했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유정회 국회의원, 전직 장관, 김종필 총재와 불편한 관계인 TK출신 공화당 의원,그리고 최규하 정부의 각료들까지 포함한 신당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당설은 혼미를 거듭하던 정국전망을 한층 더 어둡게 만드는 역할을 크게 하였다.
개헌주도권을 둘러싼 관료집단과의 대결국면에서 잠시 협력했던 3김씨는 개헌을 전제로 대권을 향한 경쟁을 시작했다. 1980년 2월 28일 김대중씨가 복권되어 합법적인 정치활동의 권리를 찾은 후 김대중, 김영삼 두사람 사이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고 각자의 정치적인 실력을 겨루는 경쟁이 치열해지자 야당인 신민당은 분열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당시 양김씨의 시국인식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구실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신군부가 정치에 개입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계속해서 인내와 자제만을 요청하고 있었다.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는 김대중·김영삼씨 간의 경쟁을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몰고가는 신군부의 여론조작을 관망하면서 신민당이 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임명문제, 학원사태 등 시국상황을 다루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요구를 계속해서 기피했다.
학생들의 교내 정치투쟁이 가열되면서 5·15총궐기설이 끈질기게 나돌자 양김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계엄령 해제" "임시국회 소집" "정부개헌작업의 중지" 등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의 계속적인임시국회 소집 요구에 대해 공화당은 20일 이후에나 국회를 소집하겠다고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며 시국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렇게 정치권이 미로를 헤매고 있을 때 신군부는 "충정부대"를 전국의주요도시에 투입할 계획을 최종점검하며 일부 병력은 이미 점령목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국의 대학생들의 노도와 같은 가두시위로 1980년 봄의 가장 강력하고 적대적인 두 세력간의 사활을 건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나흘간이 숨가쁘게 지나간 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3김씨는 그날 이후 이 땅의 국민들이 다시금 그들을 부를 때까지 역사의 전면으로 나설 수 없게 되었다.
<b>3. 서울역 시위</b>
1980년 5월 14일 새벽 4시 30분경,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서울지역27개대학의 총학생회 대표 40여명이 모여 14일 오전부터 전면적인 무기한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한다. 1980년대 한국정치의 향방을 결정지은 운명의 나흘간이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대표들이 헤어진 뒤 7시간이 지난 14일 정오를 전후하여 서울시내대학생 7만여명이 일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유신잔당 타도하자" "언론자유 보장하라" "정부개헌 중단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등을 외치며 학생시위대는 영등포, 청량리 등을 거쳐 광화문으로 수만명이 진출하였다. 이 가두시위에 시민들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신말기의 탄압속에서 사회운동세력은 조직적 역량을 제대로 갖출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타오르기 시작한 가두시위투쟁의 불길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15일 오후, 서울역에는 20만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집결했다. 대구, 광주, 부산, 인천, 목포, 청주, 춘천, 천안 등 대학이 있는 거의 모든 도시가 다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이날 서울 이외 지방에는 24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감행하여 경찰과 충돌하였다.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학생들은 역광장을 중심으로 연좌하면서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에 대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벌였다. 학생들의 가두시위라는 돌발적인 사태를 접한 정치권은 황망하고 분주한 모습을 보이며 신민당은「비상계엄 해제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김종필 공화당 총재도 정부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 방법에 의한 사태해결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서울대측에서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고 통보해 버렸다.그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심야에 군과 충돌한다는 것은 현명치 않다고 판단했다. 고위직에 포진된 서울대 동문들을 통해서 입수된 병력이동 정보를 점검해볼 때 곧바로 군대가 투입될 가능성이 짙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두투쟁이 벌어지는 곳과는 무관하게 투쟁의 후방인 서울역 광장에 연좌하면서 고향의 봄이나 합창하고 있던 서울대생들에게는 시가지 공방전이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대가 철수하면서 분위기를 역전시키자 서울역에 있던 다른 대학 학생들도 속속 학교로 복귀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다음날 아침, 대학가는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16일에는 전남대와 조선대, 광주교대 학생들이 도청앞 광장에서 대중집회를 연 후 야간에 평화적인 횃불행진을 벌이는 등 일부 지방대학의 시위가 있었으나 토요일인 17일에는 그나마 자취를 감추었다. 각 대학의 교정은 매우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민주진영의 모든 세력들을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의 유신부활음모 분쇄를 위한 공세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촉진시켰으며표면상으로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마치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였으나 바로 그 무렵 신군부의 치밀하고도 무자비한 공세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b>4. 5·17비상계엄령 확대조치</b>
"10·26사건"으로 야기된 지배권력의 내부적인 혼란이 신군부의 헤게모니 장악으로 일단락되면서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영구화하는 방안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국민들이 민주화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권력의 표면에 나서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신군부는 무력으로 사회운동을 굴복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전면에 등장하여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장악한다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정치권의 각 세력들도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신민당은 5월 14일 소속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비상계엄해제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여당인 공화당 조차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5월 20일경으로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계엄해제안을 양당이 공동처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우기 여기에 유정회까지도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자 계엄령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신군부의 위기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명분상으로나 실질상으로나 궁지에 몰린 군부는 예정대로 무력사용을 통해 위기상황의 정면돌파를 시도하였다. 대학가의 시위가 가열된 5월 12일에는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었다. 이와 더불어 전국의 공무원들에게도 비상근무령이 내려졌다.
17일 10시 국방부에서는 계엄사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② 각급 학교 휴교조치 ③ 국회해산 ④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의 설치 등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회의결과는 청와대에 보고되었고, 군의 결의를 받아들인 최규하대통령은 17일 자정을 기해 제주도가 제외되었던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는 전국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그 자체 내에 이미 새로운 불씨를 안고 있었다.
즉 "5·17계엄확대"는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10·26" 이후의 일련의 개량적인 변화들로부터도 완전히 후퇴한 것이었다. 아무튼 계엄확대와 더불어 발표된 "계엄포고 10호"를 통해 ①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② 대학 휴교 ③ 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④ 직장이탈 및 파업 불허 ⑤ 언론 사전검열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연행하였다.
한편 경찰은 이미 5월 17일 오후 전국학생회장단모임이 열리고 있던 이화여대를 급습하여 수십명의 학생대표를 연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5월 17일 자정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민주인사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행하여 수백명을 강제연행하고 있었다.
군과 경찰이 이미 행동을 개시한 17일 전국의 각 대학은 그동안의 가두시위를 중단하고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한산한분위기였다. 그날 밤 자정을 전후해서 전국의 각 대학은 계엄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전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관련자 상당수가 검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