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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회 신라문화제한글백일장 산문수상작
대학 일반 부
장원 경주시 황성동 서영희
고향집 대문
유년 시절, 집 앞에는 대문이 없었다. 두 팔을 뻗어 가족을 안아주듯 두 갈래의 길만 있을 뿐이었다. 오솔길처럼 좁다란 길과 어머니 품처럼 넓은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땅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마을 친구들은 녹색 대문을 넘나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때는 그게 참 부러웠다.
가을 햇살 가득한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는 철없는 딸애의 마음을 읽으셨는지 ‘싸립문이라도 만들어야 겠다.’며 싸리나무를 엮어 집 앞에는 넓은 길 입구에 대문이라는 걸 떡하니 만드셨다.
초가집과 어우러지는 게 참 정겨웠다.
좁은 길은 자연스레 없어지며 텃밭과 한 몸이 되어버렸다. 나지막하게 서 있는 싸립문, 단절보다는 가족과의 소통으로 문은 늘 열려 있었다. 해거름엔 어머니는 늘 대문 앞에서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하고 정겨움이 묻어 있어 편안했다.
싸립문에는 봄이면 냉이가 쌉싸래하게 피어났고 여름에는 잡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가을이면 싸리나무로 다시 엮어 대문을 단장했다. 겨울이면 소복 쌓여있는 눈이 마치 고향의 정취를 느끼기에 더 없이 좋았다.
무거운 하루를 마칠 때 쯤, 고향의 정취가 깊게 베어났던 그 문을 향해 가는 곳은 어머니의 냄새가 내게 오롯이 남아 있다.
몇 년이 지났다. 초가집을 헐고 기와집을 지었다. 낡은 이엉은 싸립문을 통해 수북이 실려 나갔다. 싸립문을 없애고 기와집에 걸맞게 녹색 대문을 달았다. 견고한 벽채에 기와를 얹은 기와집, 조금은 삭막한 듯 한 녹색대문, 뛸 듯이 좋았지만, 그리움을 묻어야 하는 것만 같아 슬픔으로 일렁거렸다. 그 문은 귀갓길에 또 다른 설레임이라는 걸 가슴 한켠에 움트게도 했다.
꿈이 무성하게 자라고 보금자리를 향해 쉴 새 없이 오늘과 내일을 내딛는 곳이 되었다.
싸립문의 그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듯 녹색대문은 점점 낡아갔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지면서 철문의 알몸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흠집이 여기저기서 생겼다. 형제들은 객지로 뿔뿔이 흩어져 외로운 허수아비 마냥, 대문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각박하고 촉박한 시간을 쫓아가기 위해 바깥 세상에 저당 잡혀 버렸다.
해거름엔 가족들이 싸립문으로 하나 둘 모여 따뜻한 고향의 품, 즉 어머니의 품을 열게 해 줬다. 곁이라는 것도 내 준 것이다.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어머니 만 이라도 그 대문에서 자식을 애틋하게 기다렸음 하는 간절한 바램은 허공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지금 어머니는 요양병원에서 어쩜 그 대문을 두 번 다시 밟을 수 없음을 알고 생채기를 내고 있을 것만 같다.
가족의 그리움이 꼭꼭 닫혀 있는 어머니의 가슴을 병원에 자주 찾아뵈어 싸립문 처럼 활짝 열어 드리리라. 따뜻한 세월의 향기처럼...
우수상 경북 칠곡군 왜관읍 박정수
고향집 대문
그집엔 오래 앓은 노모와 시들어 가는 딸이 집과 함께 늙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잘 여문 흙을 이개어 오두막을 빚었고 바람벽 모퉁이에는 흙바람벽에 그늘을 드리운 아까시나무 한 그루 기우뚱 자라나 제법 몸피가 굵어지자 어머니는 끝내 그 나무 윗동을 베어 어둔 오두막에 한 자락 볕을 더 끌어들이고야 말았다. 햇살이 들지 못하는 응달의 그 집 삽짝엔 오래 대문이 없었는데 대문 없는 그곳으로 아버지가 나가시고 끝내 다시 오시지 못했다. 효도란 걸 기대 못할 맏아들의 마지막 효도는 대문 없는 삽짝으로 제 육신을 내가는 것이었다. 부모를 모시지 못한 그 마음이 아비를 따르는 것으로 다하는 것처럼 대문 없는 삽짝임에도 그들은 그곳으로 나가고 다시 들지 못했다.
어머니는 당신이 베어 기우뚱 말라가는 아까시 나무처럼 좀든 나무가 되어서 오래 버티었다. 시퍼런 청춘의 딸이 어머니의 버팀목이 되어 들숨 날숨에도 출렁이는 호롱불 목숨을 지키느라 시간이 세월이 되는 동안 한 겨울 모진 바람을 막아 보겠다고 커다란 함석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삽짝을 기대면 맵찬 칼바람은 슬레이트 고랑을 타고 내려 함석 귀퉁이를 마구 흔들었다. 밤새 몇 번이나 소변을 가려야 하는 딸의 젖은 손은 이따금 함석가리개에 들러붙어 깜짝 놀라곤 하였다.
엉성한 함석대문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기도 하고 인정머리 없는 겨울바람에 몸서리치던 함석대문에 어룽대던 딸의 깊은 한숨에 끙 소리를 내고도 당신의 육신을 옮겨 눕지도 못하던 병든 노모도 더 아픈 숨을 고르는 밤이 길었다.
손수건만한 봉창 하나가 소원이던 딸, 그 딸의 바람대로 손바닥만 한 봉창으로 들이던 창밖의 세상을 몇 번이나 누렸을까 삽짝 없는 그 집 몇 번이 옷을 갈아입었다 비닐문짝이 가려주던 바람이 좋았지만 어머니는 비닐대문으로 업혀나가시고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남은 달 잠금장치가 되는 샷시문안에서 몇 년을 살았고, 어느 날 작은 오라비 그 든든한 문밖을 나서서 영 돌아오지 못한다.
딸을 낳은 그 집에서 딸은 날마다 샷시문을 닦으며 가고 오지 못하는 그들을 생각한다. 엄마 나무라 부르게 된 늙은 아까시 나무 밑동은 비바람에 깎이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고 작은 오라비는 늙은 집을 멋지게 성형하여 동생에게 마지막 선물로 주었고 동생은 그 문을 무시로 나들여 그 집의 아픈 기억을 지킨다. 마음을 뭇 데려온 그 집에서.
우수상 경주시 황성동 오정란
내 고향 완도 작은 섬마을은 아침부터 할머니 기일을 맞이하여 시끌벅적하다.
“큰 애야, 대문 활짝 열어라.”
어머니께서 큰 오빠에게 말씀하셨다.
완도 작은 섬마을 우리 집은 같은 성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할아버지께서는 5대 독자여서 자식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4살이나 많으셨으며 시집 올 때 몸종까지 데리고 올 정도로 양반집 딸인 반면 할아버지께서는 귀양내려와 정착한 이방인의 후손이라고 하셨다.
두 분은 삼남매를 두셨는데 6.25 전쟁으로 큰아버지께서 북으로 납치를 당하셨다고 하셨다.
그 이후 우리 할머니께서는 매일 갓지은 새 밥 한 그릇을 이불 밑에 넣어 두시고 북으로 끌려간 큰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셨다.
오늘도 할머니께서 큰 오빠를 부르신다.
“큰 애야. 이 밥은 네가 먹고 새로 지은 밥 한 그릇 가져오렴.”
우리 집은 끼니때마다 갓지은 새 밥은 언제나 큰 아버지 몫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할머니께서는 매일매일 기도하시며 큰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주무실 때
“큰 애야, 대문은 열어 놓고 자라.”
큰 아버지가 오실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마지막 돌아가신 그 날도 아버지께 두 손을 잡으시면서 유언을 남기셨다.
“갓 지은 새 밥은 언제나 너의 형 몫이고 대문은 항상 열어 놓아라.”
그 때문에 우리 집 대문은 항상 열어 놓게 되었다.
오늘 할머니 기일을 맞이하여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께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신다.
“형님, 이제 밥은 그만 떠 놓고 저 열어진 대문도 닫으세요.”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도 못하시고 눈물만 글썽이시다.
옆에 있던 나도 한 말 거든다.
“아버지, 그만해도 충분합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시면서 큰 오빠께 말씀하신다.
“큰 애야, 오늘부터 밥은 그만 떠 놓고 열어진 대문도 닫으렴.”
그 날 이후 우리 집 대문은 큰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우리들 마음속의 문에선 언제나 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60년 넘게 대문 옆에 서 있는 저 감나무도 우리들처럼 우리 큰 아버지를 기다려 주겠지…….
우수상 경주시 황성동 조임경
고향집 대문
그해 여름 따가운 햇살 조롱하듯 짙푸른 감잎사귀가 하늘 지붕을 만들고 있었다. 마당 한켠에 우뚝 솟은 우람한 자태에 누구라도 한번쯤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어 오랜 세월 꽤 우쭐한 감나무였다. 얽히고설킨 자잘한 자기들이 한 줌 빛도 허락지 않아 초록 이불 덮어 쓴 모양새로 완벽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 아래 나무 평상에 드러누워 잘 익은 수박 한 덩이 뜨거운 감자 몇 알이면 나의 한여름은 자상낙원이 되었다.
10살 무렵이었다. 아마, 내 머릿속 기억 창고에서 울려 퍼지는 장구소리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에 흥얼거리는 노랫가락 흐느적 춤사위가 보인다. 연분홍 치맛자락, 샛노란 저고리가 하늘 빛 머금은 초록 감나무 아래에서 두둥실 떠다닌다. 그토록 뵙고 싶었던 우리 할배 할매가 색색깔 고운 한복 입고 덩실 덩실 웃고 계신다. 두꺼운 돋보기안경 꾹 눌러쓰고 긴 팔 너울대며 거나하게 취하신 우리 할배, 빠글빠글 잘 나온 파마머리 우리 할매, 손닿으면 사라질듯 음악에 취하고 춤사위에 취하여 눈을 뜰 수가 없다. 그 날은 우리 할배의 환갑 잔칫날이었다.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왼종일 먹고 마시고 축하 하느라 웃음이 끊이질 않았던 날, 어린 나도 꽤나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 해 여름, 따갑던 햇살도 감나무 아래의 추억도 낡은 앨범 한구석에 고이 자리 잡고 있는 걸 보니.
“엄마, 엄마. 나 왕 할아버지댁 마당에서 흙장난해도 되요?”
아들 녀석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꿈결인지 현실인지 어슴푸레 기억의 끈을 놓쳐버린 순간, 할배할매의 환영도 사라지고 말았다. 시끄럽던 꽹과리 소리도 나폴대던 치맛자락의 여운도 남김없이 가져가 버리고 우두커니 6살 아들이 서 있었다. 이 무슨 조화속인지.
삐거덕 짙은 색의 녹색철문이 고사리 같은 아들 두 손에 슬며시 열렸다. 언제 페인트칠을 했는지 벗겨진 부분마다 녹이 쓴 것이 세월의 흔적인가. 씁쓸함마저 감돌았다. 두 발로 깡충깡충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아들 뒤에 서서 성큼 내딛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 안 담벼락 밑에는 소담스런 꽃들이 자리 잡아 울긋불긋 붉은 장미꽃 넝쿨마다 어여쁜 봉숭아 꽃 나란히 춤을 추고 흙 마당 곳곳에 돋은 잡초들마저 미치게 그리운 시간들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군데군데 녹이 슬어 세월의 흔적 어김없이 품은 육중한 철제대문 앞에서 선뜻 대문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것이 그리움 그것 때문인 가보다. 마당 한 가운데 감나무 평상 아래에서 꽃무늬 몸빼 바지 입은 우리 할매가 웃고 계신다. 어서 들어오라고. 머하고 서 있느냐고. 여기 와서 잘 익은 홍시하나 먹어보라며 건네시는 할매 두 손이 눈물 나게 그리웠던 a양이다. 대문 삐거덕 소리에 버선발로 달려와 안아주시던 빠마머리 우리 할매가 미치게 보고 싶은 날이다. 아들아. 너에게도 이런 육중하지만 정겹고 그리운 대문하나 품어주고 싶다. 번호만 누르면 자동으로 열리는 아파트의 온기 없는 현관문 대신 하늘 빛 머금고 가을바람 스며들어 우리네 아름다운 매일 매일을 추억하는 이런 고향집 대문 말이다. 엄마는 이제 그리우면 그리운 데로 과거의 여행도 서슴지 않을 것 같다.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다시금 10살 소녀가 되어 웃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함께 하지 않으련. 아들아.
가작 경주시 황성동 신희정
고향집 대문
이런 아침 대문을 나선다.
먼 거리 가까운 거리를 나설 때는 이 대문을 지나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새로 지은 집 대문은 그 앞에만 서면 자동으로 열린다.
어릴 적 내 고향집 대문을 그려 본다. 넓은 들을 지나 작은 들길을 따라 들어가면 외딴 집 한 채가 있었다. 대나무로 엮은 대문은 언제나 열려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단풍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대문과 같이 지키고 서 있던 단풍나무는 해가 거듭할수록 커져 갔었다. 여름에는 단풍나무 그늘에서 쉬어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우리는 그 그늘을 따라 다니며 땅따먹기 공깃돌 놀이도 했었다. 아버지께서 먼 길을 나설 때는 그곳까지 나와서 인사를 했었다. 어머니께 야단을 맞으면 박차고 나가던 그 대문이었다. 학교를 갔다 돌아오면 그 대문과 단풍나무가 나의 발걸음과 목소리를 제일먼저 들었을 것이다. 아주 허름한 대문은 사라졌다 단풍나무가 대문을 대신하여 긴 세월을 살았었다. 가을이 되면 단풍나무에 물이 고게 들면 아주 예쁜 대문이 되기도 했었다. 추석이 지나고 가을 햇살이 따가운 어느 날 그 고향집으로 갔었다. 이제 그곳은 흔적이 없다. 대문은 대신한 단풍나무도 그 집도 사라졌다. 새로운 사업으로 물류창고가 들어섰다. 찾을 길이 없었다. 개천을 지나는 아주 오래된 다리만이 그 곳을 지키고 있었다. 저 다리 건너기 전에 여기 어디 쯤 하며 찾았지만 아스팔트 길 뿐이었다.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흰 구름만 가을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 하늘 위에는 고향집 대문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가을 햇살에 단풍이 곱게 물든 단풍나무는 대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대문을 지나야만 세상 밖으로 나 올 수 있고 피곤한 몸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자동으로 열리는 문도 단풍나무 곱게 물든 고향집 정겨운 대문으로 여기고 오늘도 이곳을 들락인다.
가작 부산시 해운대구 양지영
고향집 대문
친정엄마를 모시고 산지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의 신변정리를 논의 하던 중 엄마는 혼자서는 시골집에 살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의 뜻은 확고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짓지 않아서 굳이 엄마가 시골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평소에 활달하고 건강했던 엄마에게 큰 위기가 닥친 건 지난 8월이었다.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오던 엄마가 허리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온 몸에 땀이 절여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상태였다. 위급했다. 응급실에 실려 가고 바로 입원실로 이어졌다. 입원해도 통증이 잡히지 않았다. 원인도 알 수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긴박감에 하루하루 얼음판을 딛고 있는 것 같았다. 일상이 위태로웠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가 이루어질 동안 나는 기다리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십년동안 엄마를 모시기는 했지만 엄마가 오히려 우리를 거두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나이다. 참 나는 나쁜 딸이었다. 직장을 다닌답시고 바빴던 나는 엄마가 이 낯선 곳에서 얼마나 외로워하며 보냈을 시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잘 살피지 못한 후회감이 가슴을 쳤다. 천식을 앓던 엄마가 어디에서 약을 타 오는지, 평소에 머리는 어디에서 하는지, 엄마가 잘 가는 곳은 어디인지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식사도 하지 못하고, 물로 겨우 연명하던 엄마는 시간이 흐를수록 수척해져 갔다. 다행이 검사 결과엔 아무런 소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삶의 위기에서 큰 행운을 찾은 것 같았다. 그 날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검사해 보니 아무것도 없데. 엄마 이제 겨우 일흔인데 더 사셔야 해요. 더 살려고 준 선물이에요.” 그 후로 엄마는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며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지난 9월 엄마랑 시골집을 찾아 갔다. 엄마는 그 동안 아버지가 안계시신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시다가 어쩐 일로 가자고 하셨다. 마을 느티나무를 지나 골목 안쪽에 위치한 녹슨 철대문 집 유년에도 보았던 감나무가 지금도 붉은 감이 익어가고 있었다. 칠이 벗겨진 허름한 대문, 녹슨 자물쇠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몇 번의 씨름 끝에 꽉 물고 있던 자물쇠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당 앞엔 풀이 수북이 자라있고 부지런한 엄마가 보살피던 정원은 이제 바짝 말라 바닥이 쩍 갈라져 있었다. 빨랫줄에 위태롭게 걸려있던 바지랑대가 바람에 휘청거렸다.
엄마와 내가 나란히 마루에 앉았다.
대문이 정면으로 보였다.
여든을 앞두고 있는 엄마와 이제 인생의 반 백수를 넘어가는 딸이 나란히 대문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엄마의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대문으로 무수히 들락거렸을 수많은 이야기들이 가슴속에 가득 차올라 코끝이 시큰해 왔다.
오빠가 고등학교시험에 합격 되었을 때 엄마는 마당에서 닭을 삶았다. 군대에 입대하러 갈 때 엄마는 한 동안 녹슨 대문을 부여잡고 우셨다. 아버지 돌아가셔서 출상을 나갈 때 엄마는 한사코 대문을 막아서며 애통해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새로운 가족이 생겨 이 대문을 들어설 때 엄마는 거저 감사하고 고마워 하셨다.
철대문은 말이 없지만 대문 사이로 무수히 흐르는 시간들은 이미 우리 가족들이 역사가 되어 지금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랫동안 닫혔던 대문을 열었다. 녹이 슬어 부서지는 붉은 가루조차도 털어 버릴 수 없는 시간들 앞에 가슴이 먹먹 해져온다.
나는 이제 엄마를 조금 이해 할 것 같다. 엄마가 아무 말 없이 기둥에 걸어 놓은 빗자루를 든다. 젊은 모습의 엄마가 보였다.
가작 경주시 황성동 원화로 황서진
고향집 대문
바람 맑고 하늘 빛 고운 가을이면 언제나 감나무엔 말간 주홍감이 열리던 내 시골집에는 그 시절 흔한 색 바랜 녹색대문도 싸리문도 없었다. 앞마당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대문 대신 늠름하게 서 있었고 앞산에 우리 엄마 산소가 훤히 보이는 산 중턱에 있었다. 바쁜 세월을 따라 어느덧 내 나이는 중년에 접어들었어도 내 기억은 10살 소녀의 그 시골집으로 자주 산책을 가곤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슬하에서 자란 내 유년시절은 물질의 풍요로움은 없었지만 추억은 풍족하다. 모깃불 피우면서 먹던 여름 저녁의 푸근한 찐 감자와 제목도 곡조도 없는 할아버지의 퉁소소리처럼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선명히 살아있는 시골집 갑작스레 엄마를 여의고 익숙지 않는 시골생활을 하게 된 어린 손녀를 애지중지 보살펴주시던 할머니, 할아버지. 세월이 갈수록 그 사랑이 가을처럼 깊어진다. 연세가 많으셔서 거동도 못하시는 98세의 우리 할머니는 아직도 살아계신다. 이 하늘 아래 함RP 머물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인데, 드시고 싶은 것도 맘껏 드실 수 있는 세월인데, 이제 더 맘껏 드실 수 없는 우리 할머니.
명절날만 찾아뵙는 야속한 손녀가 뭐가 그리 이쁘시다고 감나무 꽃보다 하얀 얼굴로 아기처럼 환하게 웃으신다. 반가운 이 찾아오면 버선발로 뛰어 나가시며 맞이하시던 우리 할머니의 환한 미소가 나에겐 늘 고향집 대문이다.
가작 경주시 용담로 92번 길 김창숙
고향집 대문
매주 금요일 저녁은 반찬 만드는 날이다. 작년 2월 이후, 어머니가 갑작스레 먼 길을 떠나신 이후, 시아버지 홀로 남겨지면서 내가 자진해 맡은 임무다.
처음 몇 달은
“하지마라, 내도 해 먹을 줄 안다.”
며 아버지가 극구 말리셔서 몇 번 건너뛰기도 했다. 하지만 우연찮게 냉장고를 열었다가 형체도 모를 무언가가 말라붙은 반찬 그릇들을 보게 되면서 결심을 굳히게 됐다.
평소 음식 만들기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안 해서 그렇지, 못하는 건 아니 다고 큰 소리를 치곤했다. 누가 뭐래도 음식을 못하는 편은 아니라고 자부했지만 일흔이 넘도록 어머니 손맛에 익숙해진 아버지의 입맛에 맞는 반찬을 하는 게 사실 쉽지는 않았다.
정성스레 몇 시간씩 공을 들인 반찬에 아버지가 손을 대지도 않을 때는 속상하기 그지없지만 내가 안하면 누가 할까, 마음을 다잡게 된다.
TV 요리 관련 프로그램을 비롯해 만능 양념 만들기 시리즈를 다 찾아 봐 가며 쉽고 빠르게 음식 하는 법을 스크랩하고 금요일마다 실전을 치르며 세 시간 남짓 주방을 분주히 오가다 보면 어느새 녹다운.
7번 국도를 따르다 칠포해수욕장을 지나면 넘실대는 푸른 바다 위에 주인장 마냥 희끗희끗 칠이 벗겨진 대문이 멀찌감치 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대문 앞에 의자를 내다놓고 앉아계신다 골목길로 접어드는 차를 발견하시곤 반갑게 맞아주신다.
올 사람도 없는 대문 앞을 지키고 앉아 아버지는 얼마나 외로우실까. 대문 양쪽을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감나무에 알알이 꽉 들어 찬 감들이 빼곡하다. 대봉 좋아하시던 어머니 생각일랑 이제 접어두시고, 올 겨울도 그저 건강하시길 바랄 뿐.
가작 경산시 백천동 월드메르디앙 정정순
고향집 대문
어린 시절 추억을 되새기며 떠올려본다. 우리 동네는 한재 양지마을 양달에 위치한다고 양지마을이다. 가구 수는 들도 말고 딱 스무 집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시절 그래도 다른 집은 파란색 남색 하늘색 철대 문이 떡 하니 여기는 누구집 이라고 자랑들 하고 또 몇몇 잘나가는 집은 좀 더 화려한 대문을 달고 뽐내듯 자랑하고 있지만 참 우리집은 정말 돌담과 돌벽 사이를 굵은 나뭇가지로 대충 대문 비스무리하게 걸쳐 놓은 것 그것도 대문이라고 혹 친구들이랑 가끔 담임선생님이라도 집에 방문할까봐 마음은 많이 조아렸었다. 여름에 태풍이라도 세게 오면 그냥 확 날라가 버리지 그 땐 나무대문도 허술하게 지은 집도 몽땅 날아갈 줄 알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어느 해 진짜 강한 태풍이 와서 그 나무 대문까지 부셔버려서 아이고 우리 아버지 아예 대문을 없애 버렸다. 학교 갔다 왔을 때 대문을 열고 엄마하고 들어가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엄만 내가 어디에 오고 있는지 다 알고 계셨다. 나무 대문이 부셔졌으니 이제 아버지가 남들 집처럼 저런 대문 하나 달아 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버지도 안 달고 안 되겠지. 히히히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근데 아이고 우리 아버지 그냥 대문 없이 저대로 살지 뭐 하신다. 갑자기 내 초롱초롱한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버렸다. 그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남들 다 다는 대문하나 못 달아 주나 싶은 게 짜도 짜도 너무 짜셨다. 왕소금만큼이나 짜다 짜다 못해 쓰다. 결국 그 때부터 현재 지금까지도 고향집 우리 집 대문은 없다. 밑에 사는 아주머니 아저씨 뒷집 할매 동네 사람들은 그냥 막 들어오신다. 하물며 옆집 소웁댁 아지매는 아직도 우리 집에 돌담 넘어 오신다. 하하하 그래도 도둑한번 안 들어오고 현재까지 잘 버티고 있다. 지금은 내 고향 양지마을에 가보면 참 희한한 게 뭐냐 하면 이제는 대문 없는 집이 더 많다. 대문 없이 살아보지 대문닫고 이웃집이랑 소통 없이 산ㄴ 거 보다 대문 없이 고개만 들어도 저 골목까지 다 내다보여 이웃집이랑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어 그 정이 좋다고 하시면서 너나나나 모두 대문을 아예 없애버린 집이 더 많다.
어렸을 때 그렇게 부러웠던 파란색 대문 이제는 하나도 안 부럽다. 아! 그렇게 짜셨던 우리 아버지 부자 되셨다. 가끔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들을 보고 산다. 히히히
장려 경주시 황성로 69번 길 조수영
고향집 대문
할머니 집 대문 양쪽 옆에는 무궁화나무가 있었다. 어린 생각에 무궁화 꽃에는 ‘진딧물이 왜 이렇게 많을까?’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대문을 열면 널찍한 마당이 있었고 대문 왼쪽으로는 예쁜 꽃밭과 날짜 지난 달력이나 누런 종이가 걸려있던 재래식 화장실, 그리고 철사 줄을 이리저리 꼬아 만든 닭장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당에서는 논 기억보다 할아버지 약방 뒤편에 숨겨진 뒷마당에서의 기억이 훨씬 많다. 숨바꼭질하다가 화장실에 숨었다. 누가 문을 확 미는 바람에 벌렁 넘어져 거의 똥통에 빠질 뻔 한 기억. 장독대에서 밥이랑 고추장 찍은 멸치뿐인데도 꿀맛 같았던 새참. 덕분에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배가 툭 튀어 나온 촌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난다. 대문 왼쪽편 뒷마당이 끝날 즈음에 큰 나무통이 들어 있던 나는 한 번도 못 써본 목욕탕이 있고 물 한바가지를 퍼부어 열심히 펌프질해야 나오던 수도가 있었고 우물이 있었다. 우물 옆으로 드디어 부엌과 방 두칸이 달린 본채가 나온다. 본채 뒤에 있던 아궁이와 감나무도 기억에 새롭다. 다섯 살짜리 기억이 얼마나 정확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선명히 기억나는 건 고모 칼을 가지고 놀다가 칼날과 덮개 사이에서 엄지를 끼운 채 닫아버려 엄청 오래 울었다는 거다. 할머니는 우는 나를 등에 업고서 몇 시간을 마당에서 서성이셔야 했다. 지금도 내 왼손 엄지에 선명하게 남은 흉터를 만지작거리면 그 때 할머니의 따스한 등과 “오야, 괴안타” 하던 할머니의 따스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북적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 경주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 집이 도로에 편입되면서 대문이 뜯긴 이유도 크다 한다. 할머니는 그 아파트에서 오랜 세월 혼자 사셨다.
얼마 전, 할머니를 정말 오랜만에 외었다.
“니는 누고?”
“할머니 저 영인데요.”
(할머니는 나를 항상 영이라고 부르셨다)
“영이 아이다. 영이가 와 안들이고?”
(‘안들’은 할머니가 아줌마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할머니, 저 애가 둘인데요”
몇 번을 설명하면 겨우
“아-!”
하며 알아듣는 듯 하시다 다시 금방
“저 안들은 누구?”
“영인데요.”
“영이가 와 안들이고?”
이런 대화가 한나절 동안 무한 반복된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할머니의 모습이 검은 머리 곱게 비녀 꽂고 앉아 밥상 아래 냉수에 김치 휘휘 씻어 손가락으로 쭉 찢어 내 밥숟가락에 얹어 주시던 모습인 듯 할머니 기억 속의 나는 여전히 할머니 집 뒷마당에서 뛰어 놀던 다섯 살 어린아이인가 보다.
지금은 사라진 할머니 집 대문과 함께 할머니 기억속의 ‘영이’도 그 곳에 함께 봉인되었나 보다. 그 추억의 대문 안에서 할머니도 나도 모두 행복한 모습이길 그리하여 지금의 할머니도 그 추억으로 인해 행복하시길 바란다.
장려 현곡면 금장리 삼성강변타운 김나나
고향집 대문
내 고향은 부산시 남구 감만동.
언덕위에 자리한 우리 집에서 멀리 내려다보면 길 끝에 하늘 빛 닮은 바다가 보였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식구는 여섯 식구. 아빠가 저녁 무렵 삐거덕 대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맨발로 달려 나가 아빠에게 안기곤 했다. 빗장도 제대로 없는 낡아빠진 대문 그 때 당시에는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아도 별로 무섭지 않은 그런 시절이었다. 그렇게 세련되고 소위 말하는 신식대문인 철대문은 아니지만 우리 집 대문은 시계였고 또한 정류 장이였다. 낮에 삐거덕 문이 열리면 이웃들과 인근에 사는 친척 분들이 간식거리를 들고 마실을 오셨고 오후가 되면 오빠들이 들어오는 것을 힘찬 대문소리로 알아차렸다. 저녁이 되면 아빠가 퇴근하셨다는 것을 알려주는 참으로 신통한 대문 이였다. 지금은 현관이 대문 역할을 하는 아파트에서 전자키 소리로 인기척을 알아차리는 시대이다. 때때로 친정어머니께서 딸네 집에 오시면 항상 옛이야기를 도란도란 하시는 게 큰 낙이시다. 아마 그 시절이 우리 식구가 다 같이 모여 살던 마지막 때였던 것 같아 더 애틋한 마음도 있었으리라. 오빠들이 곧이어 군대를 가고 직장을 다니고 그러다 한명씩 출가를 해 버리고 그 때쯤 부모님도 이사를 하고 가게를 시작하셨다. 그 후로 우리 집에 대문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던 것 가다. 가게 문이 곧 대문 이였으니 말이다.
그 시절……. 고개만 들어도 담 너머 이웃과 얘기하고 삐거덕 문 여는 소리가 정겹기만 하는 감만동 낡은 대문집. 아버지의 망치소리가 그치지 않던 그 때가 어머니에게나 나에게나 이제는 눈에 선한 나이가 되었다. 비록 지금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내 어린 시절 고향집 대문이지만 우리 가족의 공통분모가 되어 앞으로도 계속 우리 이야기속에 등장 할 것 이다.
장려 경주시 성동동 김현성
고향집 대문
산 속에 자리 잡은 시골마을…….
녹슨 초록색 철대문 앞에 뱀 한 마리가 몸을 흔들고 있다. 젊은 엄마는 급히 나무 작대기를 찾아 괴성을 지르며 땅에 내리친다. 뱀이 놀라 달아난다.
어렸을 적 동생과 나는 겁에 질린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의 나름 긴박했던 1분은 몇 십 년이 흘러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떠오른다.
그 녹슨 초록색 철대문 앞에서 젊은 엄마는 그렇게 겁 없이 뱀에게 덤벼들었다. 겁 많던 엄마가 겁 없이…….
내 기억 속 그 녹슨 초록색 철대문은 허름했지만 차가웠지만 따스했다.
우리 집 아파트 회색 철대문!
내 딸은 매일 이 대문을 열고 나가고 이 대문을 통해 들어온다.
그 시절 내가 온 몸으로 느꼈던 따스함을 내 딸도 대문을 통해 느낄까?
아직 까지는 내 욕심이리라.
그 녹슨 초록색 철대문 앞에서, 젊고 촌스러운 시골 엄마는 온 몸으로 사랑을 나타내었다. 그 스냅사진 한 컷으로 따스함을 되새김질 하며 흐뭇해한다. 난 그렇게 사랑을 배웠다.
몇 달 전 산 속 시골마을 고향에 갔다.
폐허가 된 으스스한 그 집에. 그 녹슨 초록색 철대문은 색을 알 수 없는 찌그러진 대문의 형태로 간신히 몸을 버티고 있었다. 남편이 보챈다. 뭘 볼게 있냐고. 내 눈에만 보인다.
내 귀에만 들린다.
나의 온 몸으로만 느낀다.
장려 경주시 동천동 박선보
고향집 대문
“삐그덕”
둔탁한 이 소리가 정말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노는 게 좋고 친구가 좋은 시절 늦게 들어 갈 수만 있으면 좋았던 시절!
문소리에 귀 기울여 가슴 졸이며 열었던 그 때가 두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보내는 지금! 고향이란 단어만 생각하면 그 때의 추억이 눈앞에 아른 거립니다.
결혼하고 나서 고향에 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친정에 가면 이야기보따리를 맘껏 풀어놓게 됩니다.
칭찬도 흉도 지나고 나면 재미있는 추억이 되듯이 고향을 생각하면 모든 것들이 지금은 다 좋게만 느껴집니다.
시골에 사는 것이 싫었기에 결혼해서는 무조건 농사짓는 집에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마흔 중반에 접어드니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하나 둘 떠오르면서 고향집에서의 모든 추억이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신혼 초엔 고향집에 머물다 떠날 때면 항상 눈물이 앞을 가렸는데 이젠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게 두 아이에게 미안한 맘이 들어서 속으로 눈물을 삼킵니다.
고향 마을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면서 많이 변하다보니 예전 기와집도 점점 사라지면서 시골마을에도 현대식 건물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을 보면 공부가 최우선시 되어 노는 것도 맘 편히 놀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공부와 연관 짓지만, 저희 어릴 때는 정말 노는 것처럼 놀았고 그 때의 감성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어느 정도 인성의 한 몫을 한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 중 하나가 고향집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행복 했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제가 요즘 느끼고 있는 감정 이예요.
아이들이 어릴 때 시골에서 뛰어 놀 수 있게끔 해 주고 싶어서 이사도 생각해 봤지만 현실을 직시하게 되다보니 결정이 쉽지 않더 라구요.
좀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시골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요.
‘고향집 대문’
문에 기대어 막대를 잡고 타고 놀았던 그 때의 추억은 언제까지나 제 가슴 깊숙이 남아 오늘의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어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장려상 경주시 용강동 마순선
고향집 대문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날 무렵, 갑자기 파안대소하는 마누라를 보고 놀란 남편이 나무란다.
“당신, 절 대문 봤어요?”
“아니”
“그게, 있잖아......”
나를 흥분케 한 것은 우연히 본 싸리나무 대문이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싸리나무는 한 움큼 대충 말아서 만든 빗자루였다.
내가 본 절 대문의 그것은 밑동만 자르고 김밥 속의 밥처럼 편편히 펴서 묶은 다음 비질하는 부분이 위로 가게 해서 비질 할 수 있도록 그대로 살려냈다. 지저분한 하늘을 곧 쓸어 내는 모양새다. 당장이라도 떼다가 쓸어도 될 만큼 정갈하게 잘도 만들었다.
난생처음 하늘(?)대문을 보니, 옛 일들을 생각나게 했다.
지금도 고향집 시골 대문은 두 개다. 하나는 어릴 때 모양 그대로다.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낡은 부분을 조금 손 본 정도다 또 하나는 담을 터서 좀 더 넓은 공간을 만들고 다시 내 단 붉은색 철대 문이다. 농사짓는 부모님이 농기구나 짐을 들고 내실 때 여닫는 데만 제 구실을 한다.
초등학교 때 일이다. 동네잔치가 있어 저녁 마실을 나가신 엄마는 한창을 문밖에 계셨던 모양이다. 문 걸등새를 걸고 잠든 딸 때문에 문 밖에서 그토록 딸을 불렀건만 끝내 내가 못 일어났더랬다. 어찌 어찌해서 문을 부수다시피해서 들어오셨다. 화난 엄마가 소리치시는 바람에 비몽사몽 잠을 깬 일이 문득 생각난다.
이튿날. 아버지는 엄마와 나를 한바탕 혼내시고 뚝딱뚝딱 당신이 고치셨다.
동네 목수일 을 자처하셨던 아버지는 노동의 댓가로 술을 공짜로 드셨다. 눈치 빠른 여우보다 곰에 가까운 엄마를 둔 덕에 취해서 들어오실 때면 의례히 우당탕 무엇이 날아가거나 깨진다. 그 첫 번째가 대문이다. 발길질에 찌그러지고 부서지니 남아 날 새가 있겠는가? 당신이 저지른 대문은 수시로 보정수술을 받곤 했다.
아버지는 마누라 빨래 할 때만 수월하라고 꼭 베개위에 누런 수건을 깔고 주무셨다는데……. 구남매의 맏이로 어린 나이에 시집온 엄마와 홀어미 밑에서 어렵게 살아오신 아버지는 그렇게 그렇게 그 대문 안에서 살아 오셨고 지금도 그렇게 사시다.
아직도 친정에 잘 때면 어김없이 그 대문이 먼저 반긴다. 단지 지금은 나무만 덧 대여 지고 자물쇠 색깔만 화려해 졌을 뿐이다.
고향에 갈 때마다 지금도
“엄마, 아버지?”
하고 대문을 들어선다. 그 문은 그대로고 나만 컸을 뿐이다. 언제나 그 모습으로 다 큰 어릴 적 나를 반겨주고, 부모님을 지켜주고 있다.
우연히 본 절 집 대문이 단지 사람들의 시선을 끌 홍보용인지 주인이 운치를 위해 만든 것이든 하늘(?)대문을 만든 이름 모를 그 분께 감사드리고 싶다. 오랜만에 본 정겨운 대문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속 깊이 대 청소한 기분이다. 지금도 내 고향집 대문은 친정 부모님과 그렇게 하께 늙어가고 있다.
고등 부 산문 수상작
장원 진해 세화 여자고등학교 1-6 김미희
들꽃
들꽃을 생각하면 나는 문득 어마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던지 집에 있는 식물을 가꾸는 것을 좋아하시는 우리 엄마, 그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한결 같았다.
엄마는 항상 자기 자신 보다도 가족, 남을 먼저 챙기시고 걱정하고, 생각하신다. 당신의 기분이나 몸 상태가 어떤지는 전혀 신경 쓰시지 않은 채 점점 늘어가는 나이와 주름 탓만 하며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더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늘 자신을 한탄하시면서도 자신은 챙기지 않으시려고 하는 건 여전하다.
어는 날 밤에 할머니 댁에 다녀오는 골목길에 나는 엄마에게 엄마도 밤에 혼자 다니는 게 무섭지 않냐 는 질문을 한 적 있다. 그러자 엄마는 바로 당연히 무섭다고 대답 하셨다. 그 때 나는 아차, 싶은 마음이 들면서 엄마도 보호받고 싶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늘 당신보다도 주변 사람을 생각하는 게 당연한 엄마의 일인 줄 알았던 나의 큰 착각이었음을. 그 뒤로는 나의 마음과는 반대로 엄마와 다툼이 잦아졌다. 그냥 가끔은 하고 싶은 일이나 먹고 싶은 것처럼 사소한 것은 엄마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 짜증과 신경질로 표출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로도 그런 이유로 다투는 일은 빈번했다.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시고 계신다.
나는 그저 어딜 내 놓아도 아리따운 들꽃 같은 엄마의 처녀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당신을 먼저 챙기고 건강하게 지내셨음을 바라는 것뿐인데 엄마는 아직도 자신이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자라서 피어나는 들꽃인 줄 알고 계시다.
우수 선덕여고 2-5 하바름
들 꽃
얼마 전부터 주말에 언니가 강아지를 데리고 오기 시작했다. 강아지 주인이 같은 과 후배인데 군대를 가면서 강아지를 맡아 줄 사람이 없어서 과에서 주인을 찾을 때까지 돌봐주기로 했단다. 추석 연휴에 강아지를 집에서 돌보게 되었는데 울타리를 열어주니 거실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걸 보니 얼마나 뛰고 싶었을까 안쓰러움이 들어서 언니에게 강변에 데리고 나가서 놀다오자고 했다. 태어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조그만 강아지라서 이렇게 풀밭에 나와 보는 게 처음이라고 했다. 풀밭에 내려주니 처음에는 머뭇 두리번거리다가 풀들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 조금 적응이 되었는지 풀도 씹어보고 작은 꽃들도 씹었다 뱉고 나름 탐색을 하는 것 같았다. 풀밭에서 뒹굴기도 하고 어느새 우리는 아랑곳없고 혼자서 행복해 하는 것 같았다. 이제 가을이 오려는지 낮 햇살은 뜨거운데 강변은 아림 모를 꽃들이 많이 피어있었다. 하얀색도 있고 계란 노른자 같이 노랗고 귀여운 꽃도 있고 보라색으로 작은 꽃들이 길쭉하게 붙은 것도 있고.
평소에 강변을 걸을 때 벌레가 많아서 싫었다. 나는 벌레를 싫어해서 풀 근처에 가는 걸 안 좋아 하는데 강아지 덕분에 처음으로 풀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강아지가 조그만 해서 돌아다니는 데로 시산을 집중하다보니 보니 보이지 않던 꽃들도 보였다. 풀꽃이란 시를 보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참 좋은 시다. 짧은 글 속에 들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들에 핀 꽃들은 보통 크기가 작고 색도 화려하지 않아서 별로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꽃 하나를 꺾어서 손에 들고 보니 정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꽃집에 가면 우리 눈에 속속 들어오는 예쁜 꽃들이 참 많지만 며칠이 지나면 시들진 않아도 처음 볼 때 보다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들꽃은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것 같다. 요즘 이 계절엔 차를 타고 다니면 도로가에 코스모스가 많이 피어있다. 처음에 보면 코스모스구나 했는데 학교 길에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느낀 것은 들꽃도 꺾어다 꽃병에 꽂아두면 덜 예쁠 것 같다. 들판에 제자리에서 피어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게 아닐까? 우리나라 산과 들녘에는 이름도 모르는 수십 만종의 들꽃이 계절에 따라 피고 진다고 한다. 자연은 참 신비로운 것 이다. 누가 거름을 주지도 않고 돌봐주지도 않는데 때가 되면 피었다 지며 땅을 살찌운다. 들꽃은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무심히 밞고 다녀도 쉽게 죽지 않는다. 아무도 예쁘다 봐주지 않고 돌봐주지 않아도 자연의 일부로써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제 각자의 방식으로 씨를 퍼트려서 언제나 그 산 그 들에 가면 살짝 고개를 내밀고 피어있다. 나는 들꽃을 오늘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눈에 띄고 싶고 우뚝 서고 싶은 마음을 많이들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자리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화려한 꽃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 삶속에도 들꽃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신의 길을 가며 꽃 피우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꼭 중요하지는 않다.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의 색깔과 향기를 만들어 가며 살아가야겠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며 사랑스럽고 예쁘게 나도 그렇다.
우수 경남진해고등학교 1학년 6반 이충기
들꽃
나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가슴을 펴고 있는 푸른 들꽃을 보았다. 그 근처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고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이 아이에게서 못내 기죽지 않으려는 듯 살결마다 내 비치는 당당함을 간접적으로 느꼈다. 그 아이에게는 지금 자신의 파아란 순결을 내비치고 있지만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걸, 누구도 쉽게 내가 먼저 나서려고 하지 않는 걸, 하지만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은 마음속의 응어리들을 대신 꺼내주는 들꽃의 형식적인 숨소리를 듣고 잠시 동안 혐오감을 느꼈다.
그 아이는 갑자기 머뭇거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모양이었나 보다. 진한 향기를 풍기며 바람을 타고 내려와 피어진 꽃잎으로 내 다이를 간질이고 있었다. 어느새 내 얼굴에는 흐뭇한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다. 내 손에는 어색하지만 부드러운 마음이 만들어낸 그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오면서 내가 만질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한 손이었다. 언제든지 반가워서 손을 맞잡고 웃으며 지낼 수 있는 건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어서가 아닐까? 들꽃의 마음은 어느 누구도 다르지 않았다. 들꽃 그대로가 존재하여 외롭지만 홀로 이겨낼 수 있는 확고한 마음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나 스스로 파란 불빛이 되어 찬란한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들꽃과 같이 용기를 내어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수 경주여자정보고등학교 2-8 이희숙
들꽃
새하얀 도화지에 하늘색물감으로 어여쁘게 붓질한 듯 한 하늘아래에 닿으려 애쓰는 건물들 사이에서 나오는 소녀는 부서질 듯 한 여리여리한 어깨를 괴롭히는 가방을 가지고 버스정류장이라며 보이는 표지판 앞에 서서는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소녀의 눈망울에는 잿빛의 어두움만이 보이며, 공허한 듯 한 무표정을 가지고는 앞을 바라본다. 많은 차로인하여 막히는 도로를 이겨내고 소녀 앞에 온 버스를 타고는 또다시 내려서 걸어가는 소녀의 손에는 수능정복이라는 두꺼운 책을 가슴에 품으며 끝은 보지 않은 채 잡초들과 보드라운 잔디들이 싱그러움을 만연하게 품으며 자라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회색교복들은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소녀 또한 그 교복무리 안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서 한 교실 앞 3-1반 표지판을 쳐다보다, 작은 어깨를 생명을 품은 채소들이 뜨거운 물 안에서 잠수를 하고 나온 것과 같이 맥없이 늘어뜨리며 교실 문을 열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걸어가 들어간다.
드문드문 한자리씩 보이는 빈자리 말고는 빼곡히 교실을 채우는 의자수와, 열어 놓은 창문에서부터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은 5월의 향기를 가득히 뽐내지만, 소녀와 아이들은 그 누구도 그 향기에 취하지 않은 듯이 묵묵히 책을 펴며 담임선생님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들어와 이야기 한다. “너희들은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 인생에서 말이다 다른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며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남자의 표정에서는 단호함과 매서움이 서려 있으며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을 무렵, 따스하게 햇빛이 내려오던 창문가는 쉬고 있는 해를 대신한 듯 환한 빛을 비추는 달과 별들이 얼굴을 내밀며 아이들은 바라보며 상큼하게 아이들의 귓가를 휘어 감는 종소리는 하교를 이야기 한 듯 어둠이 만연하게 내려앉은 밖으로 나아간다.
소녀는 가로등 불빛만이 길을 비추는 골목길을 무서운 듯 잰걸음으로 걸어가 며 피아노 선율이 소녀의 곁에 춤을 추는 듯 한 벨소리에 휴대폰을 열어 받는 소녀의 입매는 긴장한 듯 굳어져 있다.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래 수업은 잘 했어? 지금이 제일 중요할 때야 알지? 우리 딸.” 새벽바람과도 날카로운 애정의 말들이 소녀에게 다가오고 소녀는 목안에 이상한 서러움을 삼킨 채 나긋이 대답하고 다시 걸어가는 소녀의 표정은 알 수 없는 일렁임이 묻어있다. 그렇게 끊임없이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던 소녀는 모퉁이에 환한 불빛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하며 걸어가다 모퉁이에 기대어 서 있는 가로등 아래에 들꽃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걸어가며 신기한 듯 길에 피어있는 하늘하늘 붉은 꽃망울 속 검은 색은 소녀를 바라보는 듯하고 소녀는 뭐라 말 할 수 없는 따스함에 멍하게 길에 피어있는 들꽃을 보다, 자신의 손끝을 살며시 스치며 잡아오는 꽃향기에 꽃망울이 꽃잎을 살며시 벌리는 듯이 그리 고요하게 웃으며 알 수 없는 따스함에 꽃을 보다 다시 걸어서 집을 향하여 간다.
현관문을 여는 소녀의 손은 왠지 모르게 부드러우며 작지만 맑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다녀왔습니다.” 어두운 하늘 여명을 품은 새가 날아오르자 점점 환한 빛으로 물들여지는 하늘. 소녀가 지나온 그 골목을 지나가는 모자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가 손을 뻗어 가리키는 그 곳에는 어제의 붉은 꽃이 환하게 제 빛깔을 내 보이고 있으며 아이의 엄마는 웃으며 말한다. “어머, 관상용 양귀비네? 붉은 색이 진한 게 이쁘네. 잘 보기 어려운 꽃인데.” 아이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다 입을 열어 물어본다. “이 꽃의 꽃말은 뭐야?” “위로, 위안이야.” 길모퉁이를 지나 다시 손을 잡으며 모자는 지나간다.
가작 덕원고등학교 3-7 이승은
들꽃
분명 수학문제를 풀 거라 다짐하며 책을 챙겨왔는데, 가방을 열어보니 연습장만 덩그러니 있는 날. 독서실을 가려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엄마에게 언제 공부하는 거냐며 핀찬듣는 날. 그런 날이 있다. 마음먹었는데, 잘 되지 않는 날.
그 날도 마찬가지 였다. 나름 잘 견뎌 왔다 생각했는데 손이 쥐어진 모의고사 성적표에 그 믿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떨어진 성적은 마치 내가 대단한 게으름을 피웠음을 입증하는 듯했다. 내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망쳤다고 하는 시험을 누가 그리 잘 쳤기에 내 성적은 떨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보기 싫은 성적표를 가방에 우겨넣곤 털레털레 밖으로 가는 길,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야, 표정도 그렇게 해선 혼자 가고 있어. 같이 가.” 그 말은 분명 날 걱정하는 호의적인 말이었을 텐데 생각처럼 부드러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 오늘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미안.”
한 마디에 친구는 뻘쭘한 듯 돌아섰고 정신을 차려보니 서늘한 거리를 저만치 앞에 두고 긴 그림자 하나만 우두커니 서있었다.
걸음을 서둘러 가는 길, 가로등에 비춰 주황빛인 들꽃이 수도 없이 낮게 깔려 있었다. 시나 소설에선 작가들이 있는 척하며 그들의 글감으로 삼는 들꽃이지만 실상은 보살핌 없이 말라가고 사람에게 밟히기 일쑤인 별 볼일 없는 것. 그 들꽃이 꽤 나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공부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것조차 내세우지 못하는 내가 남들이 시선주지 않는 들꽃이 아닐까. 이과생인 주제에 쓸데없이 감성적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괜히 두리번거리라 하늘을 좀 보고, 몇 걸음을 걷다 빙돌아 서서 찡해진 코끝을 손으로 쓱쓱 닦았다. 그래도 평범한 내가 이 평범한 들꽃을 보고 있는 것처럼, 누군가는 날 봐주지 않을까. 위안을 얻으면서.
물론 그 이후에도 성적이 기적처럼 오르는 일은 없었지만, 울고 싶어도 내일의 생활이 걱정되기에 마음껏 울 수 없는, 벌써 끝이 보이는 이 학창시절에 들꽃의 위안은 힘차게 내딛는 한걸음을 도와준다. 그 땐 그때가 현실이고 지금이 꿈같았는데, 이젠 여기가 현실이고, 그때가 꿈같다는, 또 하나의 추억을 늘어놓는다.
가작 선덕여자고등학교 2-6 박정민
들꽃
“축하합니다.”
화장실에서 문득 나를 마주하더니 꺼내는 첫마디가 저거다. 밑도 끝도 없이 그저 축하한다니.
“고마워.” 나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그에게 밝게 웃어주며 화답하였다.
“자네에게도 분명 조만간 좋은 결과가 다가올 거야.” 상투적인 말이었다. 반복과 학습에 의해 익혀진 듯한.
그러자 그는 잠시 옅게 미소를 띄우며 픽 웃더니 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거울을 보며 내 모습을 점검하기 시작하며 스스로에게 도취되기 시작하였다. 잘 빠진 정장 수트에 얼굴에 만연한 웃음까지……. 이 모든 게 어쩌다 이번에 실시한 프로젝트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가능한 것이니라. 덕분에 회사 곳곳에서도 나의 이름을 조금씩 알리기 시작하였으니 이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인가! 이제 분명 나의 앞길은 순탄할 것이다. 분명 잘 될 것이다. 어느 샌가 나는 혼자 되내이며 나에게 주문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거울 속의 나에게 응원을 심어 준 뒤 화장실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의 문을 나서고 회사 내부를 걷는 종일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끈질기게 따라붙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얼마 만에 받아보는 관심인가! 나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며 어느 샌가 입가에는 스멀스멀 웃음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분명 이대로라면 승진도 멀지 않았으리라. 그저 나는 밝은 미래만 생각하였다. 언젠가 드리워올 검은 그림자 따위 내게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괜찮습니까?”
누군가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얼굴을 슥 들이밀었다. 그에 검은 그림자가 나의술잔에 드리우고 나의 마음을 휘덮은 어지러운 감정이 일순간 폭발하듯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손이 덜덜 떨린다. 억제된 감정은 한 번 풀린 이상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한다. 결국 다 한순간 이였느니라. 어깨를 들썩이는 나를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이상한 말을 건네 온다.
“저는 들꽃이고 싶어요.” 들꽃이 뭐냐 이왕이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 되지 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눈물이 먹어버린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밟히고 치이고 심지어 불러주는 이 한명 없을지라도 그 자리에 언제나 있는 들꽃 말이에요. 들꽃은 죽지 않아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부턴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피는 꽃은 결국 한순간이죠. 하지만 결국 그 꽃은 참혹한 모습으로 져 버리고 말죠. 주변인들을 현혹시키며 관심을 끌던 모습이 사라지게 됨과 도시에 그 관심도 일순간 사라지게 되는 거죠. 하지만 들꽃은 그렇지 않아요. 굳어 누군가의 관심을 받으려고 아둥바둥거리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자리를 지키며 홀연히 피어있죠.” 이미 눈물은 오래전에 그쳤다. 이제 조용한 정적이 그와 나의 사이를 조용히 배회한다.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다. 그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술잔과 눈싸움을 한다. 그때, 갑자기 나의 눈앞에 손을 내민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우리 들꽃처럼 꿋꿋이 살아가봐요.” 그의 얼굴이 왜이리 눈부신 걸까. 그의 얼굴이 너무도 밝고 아름다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살며시 미소를 조용히 띄우고 그의 손을 맞잡아 일어선다. 고난과 시련에 잠시 누웠던 들꽃이 다시 일어난다. 밝고 아름답지 않으면 어쩌라. 강인하게 피어 자신의 생명력을 꿋꿋이 알리며 어두운 밤을 밝히듯 그렇게 피어있는데……. 들꽃이 핀다.
가작 경주여자고등학교 2-9 임소현
들꽃
가느다란 줄기를 가진, 보드란 잎과의 촉각, 수많은 나뭇가지들 속에서도, 그 숨겨진 공간속에 또다른 생명이 탄생한다.
산에 올라가다보면 무심코 지나왔던 그 길 속에서도 잠재되어진 빛이 있었을 것이며, 거기서 또다른 연이어진 생명의 흐름이 있을 것이겠지.
난 한번 또다른 풍경을 상상해 보다. 도시 안의 공간속에 있던 나에게 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정다움을, 그냥 지나왔던 공간속을 또다시 되돌아가며 주변을 여유롭게 걷고있는 내 모습을.
나무가 하늘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는 자연 속에서도, 양분이 많은 갈색 빛의 흙과의 만남이 있는 자연 속에서 우리가 몰랐던 자그마하고 조그마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생명 속에는 우리가 흔히 알던 장미꽃, 해바라기, 국화꽃이 아닌 들꽃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결과, 큰 것만을 보려고 하며 과정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들, 모로 가면 서울로 가면 된다는 말 속에서도 분명히 들꽃처럼 숨겨진 과정이 있기에 결과라는 기쁨을 얻지 않았을까.
흔히 지나가고 보았던 물 품속에서도 누군가의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하는 발상이 스며들어 발명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 발명이 더 큰 곳으로 확장되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라고, 들꽃이라는 존재가 숨겨진 공간속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가작 경남진해고등학교 1-9 조성현
들꽃
사람은 누구에게나 힘들거나 아픈 순간이 있다. 나도 아픈 최근에 있었다. 마치 사람이 없는 드넓은 들판에서 혼자 피어 있는 들꽃처럼…….
나는 올해 고등학교를 처음 입학하였다. 처음 입학한 갓 신입생이고 내가 잘 알던 친구들은 모두 다른 반으로 가다 보니 나는 고등학교 생활이 많이 힘들었고 다른 중학교 출신 친구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는 한 다른 중학교 친구는 뒤에서 나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했었다. “쟤는 왜 친구가 없어?” 라고……. 그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래도 고등학교에 반에 친한 친구와 아는 친구가 없는데 한 친구가 그리 말하니 나는 짜증 동시에 우울감이 내 마음 속에 왔었다. 그러고 한 달 후, 자리를 바꾸면서 내 앞에 있던 김도현이라는 친구가 나에게 처음에는 달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안돼서 그 친구가 나를 심하게 장난치듯이 대하고 하니 내가 한번 짜증을 내니까 그 친구는 나보고 “니는 친구 없제?” 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때 또 하나의 우울감과 힘듦을 느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깨달았다. ‘내가 이 반에 못 있겠고 내가 고2가 되면 우리 반 애들이랑은 연을 끊어야지. 다만 몇몇 애들은 빼고’ 라고……. 그 이후로 난 학교생활을 힘들게 하였다. 그러고 몇 달 후에 짝지를 바꿨는데 그 짝지는 나를 진심으로 맞이하고 나를 재미있게 해주며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옆에 같이 앉겠다는 애가 있었는데 그때 김도현은 “왕따가? 쟤랑 왜 앉는데?” 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때 기분이 안 좋았다. 그 이후로 나는 그 친구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김도현은 나에게 와서 “니 왜 나 무시하는데? 이유가 뭔데?” 라고 하자 난 속으로 화가 더 많이 났었다. 그 이후에도 그 앤 계속 나에게 그렇게 계속 묻자 나는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과는 못 받았지만 그냥 철없는 애라 생각하고 너그럽게 받아줬다. 그 이후에도 힘든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학교생활이 잘 풀려나갔다. 그래서 지금 들꽃을 주제로 하고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 아무도 없는 드넓은 벌판에서 들꽃은 거센 비와 바람을 만나 온갖 고난을 다 격지만 나중에 꽃으로 피어나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처럼 나도 고등학교에서 온갖 수모와 고난을 다 겼었지만 지금은 희망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들꽃이라는 것이다. 온갖 고난과 역정을 겪어야 빛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사는 이치다. 그래서 나는 힘들고 지치게 사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힘내요! 당신들은 언젠가 큰 별이 될 것입니다. 힘내요.’ 라고…….
가작 선덕여자고등학교 2-6 김지연
들꽃
햇살이 참 맑다. 조금만 시내 변두리로 가면 황금빛으로 물든 몸짓들이 제각기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집은 시내라고 하기에 너무하고 그렇다고 시골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그런 곳에 위치해 있다. 우리 집은 작지만 아늑한 내부와 내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어하는 노란 지붕이 있다. 내가 도심지에서 옮겨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도 이 애매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이 집을 계약한 것도 노란 지붕이 이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 동네는 주변에 높은 건물이 몇 없었다. 그 점 또한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나는 가끔씩 바람이 신선한 날 집 주변으로 밤 산책을 가곤했다. 희미한 달 빛에 의지하여 걷다보면 길목에 작은 들꽃들이 강아지풀과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저 들꽃. 나에게는 잠깐 시선을 뒀다 떼어내면 그만인 의미 없는 것이었다. 딱히 이렇다 할 일은 없었지만 주말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나는 직장과 멀어져 버린 집으로 인해 조금 더 일찍 눈을 뜨게 되었다. 힘겨운 출근 뒤에 하루 종일 여러 사람에게 시달리다가 결국 야근까지 하는가 싶더니 상사 한 명이 내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김대리. 내 이름을 묵직하게 부르며 그는 말문을 틔웠다. 조금 무겁게 시작한 말에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이 무섭게 맞아떨어졌다. 내일까지 짐을 좀 빼줬으면 한다는, 그런 말이었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 야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무겁게 다가오는 현실에 더 힘이 들었다. 눈물이라도 날 줄 알았더니 허탈감이 너무 심했는지 기운만 빼졌다. 사무실에는 아직 몇 사람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리더니 뒷모습에 대고 힘내라 가벼운 말을 건넸다. 나는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오늘 아침에 보았던 하늘은 정말 희망적이었는데 왠지 지금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시선을 발끝으로 고정하고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해는 점점 기울어 형체를 흐리며 번져가고 그림자는 더욱 짙어갔다.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뒤에는 길게 늘어진 어둠이 보인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햇볕이 들지 않는 길로만 가고 있었고 그렇기에 당연히 내 뒤에는 남들에게 다 있는 것이 없었다. 끝없는 그림자 속에 나는 파묻혀 있다.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자 시선의 끝에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작은 꽃 한 송이. 볕 하나 들지 않는 이 골목에서 그 꽃에만 볕이 들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 광경에 눈시울을 울컥하고 붉게 물들이고 말았다. 저 조그만 생명체도 저리 살아가는데 나는 왜, 불평할 입도 외부의 위협을 피할 다리도 없는 저 들꽃 한 송이는 저렇게 옅은 빛에도 생명을 이겨내며 살아가는데 그 동안 나는 어떠했는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것에 비해 나의 그 동안은 그저 살아지기에 살아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심했다. 내가 회사에서 나오게 된 것이 이해가 안 된다며 속으로 불평만 늘어 놨던 잠깐이 너무 부끄러웠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걷는 동안 집에 다다랐다. 손에 들었던 상자를 바닥에 아무데나 내려놓았다. 그 다음 신발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집 주변을 누가 보면 미친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나는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찾았다. 며칠 전 밤 산책을 나왔을 때에 보았던 그 들 꽃. 그것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두 손 안에 그 것을 조심히 담았다. 살아가야지 들꽃처럼.
장려 경주 여자 정보 고등학교 1-3 이 진
들꽃
최근에 들꽃이 공원이나 숲 그리도 잔디에서 많이 보기가 어려워졌다. 들꽃대신 잡초나 잔디가 우리 주변에 많이 생겨났고 빈 공터나 잔디등을 새롭게 만들어 건물을 세워 오늘 날 들꽃은 더욱 보기 어려워졌다. 내가 어렸을 때 지금보다 언덕이나 공터가 훨씬 많았고 나는 거기서 뛰어 놀았다. 주변에 널린 들꽃으로 친구와 꽃반지, 꽃목걸이 등을 만들고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바빠지고 어릴 적에 놀던 공터나 언덕은 크고 높은 건물로 변했고 자주 만나 수다를 떠는 일 조차도 사라져 버렸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많이 있었던 꽃이 더 많이 생겨나고 주변에 걸어가다가도 쉽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황성공원에서 가끔 개최하는 꽃이나 나무심기 행사에 여러 번 참여하여 많이 심기도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밟고 다닌 꽃을 보면 아깝고 더 많이 참여해서 많은 꽃과 나무를 심고 싶었다.
들꽃 대신 잡초가 많이 생기면서 주변에 꽃, 나무를 심는 행사도 많이 사라졌고 없어졌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잡초처럼 더 많은 들꽃과 자연을 보존하기, 꽃과 나무심기 등의 행사가 많아져서 지나가다 흔하게 들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장려 경주정보고등학교 2-8 손명준
들꽃
어떻게 보면 하잘 것 없는 꽃에 불과 하지만 이름마저 없기에 내면에 무궁무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들꽃이다. 그런데 이런 들꽃을 죄의식 없이 꺾고, 밟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어디 안 아픈 손가락이 있을까? 한낱 개미도 밟히면 괴로워하는데 꽃이란 들 어떠할까? 우리는 항상 곁에서 지켜봐주는 들꽃에게 좀 더 예의를 가질 필요가 있다.
거친 비바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인내하여 가꾸어 낸 들꽃의 향기야 말로 ‘진정한 꽃’의 향기가 아닐까?
중등부 산문 수상작
장원 경주중학교 2-3 전형도
노을
노을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도와 밝게 비추어 주고 쉬기 위해 내려가는 모습인 것 같다. 시험기간에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나오면서 경주의 남산 사이로 내려가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노을과 만나면 열심히 했다고 격려해 주는 것 같다. 나에게 그런 노을은 부모님 인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힘들 때도 힘내라며 격려래 주시고 아플 때도 금방 나을 거라며 돌보아 주신다. 예전에 남산을 올라 갈 때였다. 그 때 열심히 올라가고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렇게 포기할까 망설이며 지쳤을 무렵 부모님께서 잡아주시며 계속 올라가자고 했다. 그렇게 열심히 올라가며 정상에 다다르자 내가 해났다는 성취감에 부모님께서 도와주셨던 것은 잊어 버렸다. 정상에서 내려올 무렵에는 점점 해가 기울고 있었다. 산을 다 내려왔을 때는 해가 남산 뒤로 내려가며 마지막으로 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그런 태양을 보니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운을 쏟아 밝게 비추어 주고 쉬기 위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올라가는 동안 부모님께서 나를 도와주신 것이 생각났다. 그제서야 나는 노을을 볼 때 마다 부모님을 떠 올리게 된다. 부모님과 노을 모두 내 앞길을 밝혀주고 격려해 준다. 그리고 나면 노을은 쉬기 위해 달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부모님께서는 나를 위해 하루하루 늙어가며 쉴 날을 바라보신다.
우수 화랑중학교 2-4 임수정
노을
노을은 잠시 동안 머물다 곧 어둠에 가려진다. 온 세상을 붉게 물들 때 그 잠시 동안은 하루 동안 심란하고 힘든 일들이 모두 잊혀지고 용서가 되는 것 같다. 어릴 적 노을은 꼭 시계 같았다.
이상하리만치 노을이 질 때면 어김없이 엄마께서 저녁을 먹으라고 하셨다. 나는 결국 엄마 손에 끌려 집으로 잡혀가 맛난 식사를 하고 얼른 나와 보면 어둑해져있는 하늘을 보고 실망을 하곤 했었다. 지금은 하늘 한번 쳐다보기가 힘든 시간의 연속이다. 학교와 학원을 번갈아 갔다 집으로 오면 밤이다. 며칠 전 중간고사를 끝내고 엄마랑 동생들이랑 기차를 타고 부산을 다녀왔다. 우리 어머니는 참 즉흥적이시라,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부산 보수동 책골목. 입구부터 책들로 가득한 가게들과 골목들을 누비며 모처럼 정신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마침 축제 기간이다. 거리 공연도 보고 앉아서 책도 읽고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기차 안……. 한참을 눈감고 있다. 눈을 뜨니 창밖으로 빨간 홍시 같은 노을이 갤러리에 걸려있었다.
이 얼마 만에 보는 노을인지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잠깐의 붉은 기운이 어느새 쌓여있던 내 긴장과 피로를 씩 녹여 주었다. 노을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굉장한 힘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어 내 사진첩 속에 새겨두었다. 노을은 태양이 남기는 마지막 선물인 것 같다. 남은 힘을 다 해 황홀하고 예쁜 기운을 나에게 주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힘들고 내일도 나는 힘들겠지만 노을이 주는 잠깐이 치유를 나는 계속 받아들일 것이고 나는 계속 성장 할 것이다.
우수 계림중학교 3-8 박채연
노을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는 황금 들녘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듯 그 순간만큼은 농부네 마음을 부자로 만든다.
동이 트면 허술한 밥 한 숟가락으로 허기를 달래시고 누군가 기다리기라도 한 듯 들녘으로 나가시는 할머니, 굽어진 헐에 온 삭신이 쑤시듯 얕은 신음소리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할머니의 들녘은 보상이라도 하듯이 황금물결 출렁인다. 그 순간이 할머니에겐 밥 안 먹어도 배 부를 만큼 행복하신 걸 알기에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 할머니에게 그곳에서의 하루는 자식도 만나고 하소연도 하면서 당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신다. 해가 지기 전 찾아오는 노을은 들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더 빛나게도 하지만 할머니의 얕은 신은소리마저 멎게 하는 만병통치약이 되는 순간이다. 그제서야 허리를 펴시는 할머니. 노을이 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신다. 노을이 짙어지면…….
지난 세월이 그림처럼 그려지시는 듯 긴 한숨과 함께 ‘노을 저편 너머 내 누울 자리가 있나…….’ 순간 못 들은 척 하지만 한없이 작아 보이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슬프기만 했다. 할머니께서 왜 노을이 지는 순간까지 들녘을 지키시는지 조금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 삶의 이야기는 그렇게 노을이 찾아오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던 것이었다.
동이 트고 노을이 질 때까지 그 안에서 또 한 번의 행복을 느끼신다는 할머니, 세월이 야속하다며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이 가슴 아프면서도 아주 많이 존경스럽다.
우수 경산 삼성현 중학교 2-4 김수지
노을
붉게, 또 검게 물들어 가는 형산강에 담긴 하늘을 본다. 그렇게 붉게 또 검게 물들어 간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 사진은 3년 전 이맘 때 찍은 것이었다.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금장대 터와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노을을 등지고 우리는 강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였다. 사진에 관심이 많고 전문적이던 아빠는 어딜 가던 큰 눈알이 달리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녔다. 아빠는 나지막한 산을 찍더니 카메라 렌즈를 나에게로 향했다. 문득, 어릴 적사진 속에 엄마와 나는 있어도 아빠가 없던 생각이 나서 함께 찍자고 했다. 손사래를 치던 아빠는 결국 내 손에 이끌려 어정쩡한 자세로 서게 되었다.
며칠 뒤, 아빠는 내게 사진 두 장을 건넸다. 그 때 직은 사진이었다. 한 장은 손바닥 크기의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꽤 큰 크기의 사진이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분께 부탁했는데 아빠만큼이나 잘 찍으셨다. 우리는 엄마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다가오는 붉은 또 검은 노을을 모른 채…….
노을이 담긴 지갑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초점 없이 눈으로 노을을 응시했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 보았던 노을은 우리 둘이 주인공이 된 소설 속의 ‘복선’이였을지도 모른다. 찬란했던 시기를 뒤로하고 지는, ‘죽음’이라는 복선. 노을과 함께 죽음으로 물들어 가던 아빠를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삶의 일몰직전까지도 몰랐다. 그 일몰이 너무도 빨라서,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행복했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밖에 할 수강 벗었다.
생각하는 사이 어두워져버린 주위를 둘러보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지 군데군데 묻은 건조한 낙엽을 털어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작은 외침으로 말했다. 걱정 말라고 엄마도 민지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지갑을 한 번 열어보고는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힘찬 발걸음으로 발을 디뎠다.
가작 서라벌 여중 3-3 공민희
노을
형용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붉고, 따뜻한 것 같으면서도 차가운 밝게 다시 떠오르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저만치에 서 있곤 했다. 시리도록 밝은 빛이 눈앞으로 펼쳐진다. 잔잔하게 붙어오던 바람은 어느새 거센 바람이 되어 검은 하늘과 함께 바닷가를 물들인다. 남들에겐 따뜻한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며 얘기도 몇 마디 나누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신간이지만, 또 누군가에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존재였다.
「저들은 하루 종일 해가 그들을 비춰주지 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아. 뭐, 그렇다고 잘못된 건 아니야 우린 달이 우릴 비추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들과 우린 그 차이 뿐이지.」
글쎄, 그 차이 뿐일까. 하늘 저 쪽에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낮이든 밤이든 가게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인해 밝은 번화가는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같다. 눈을 뜨면 보이는 어두운 모든 것들로부터 잠시나마 도망치고 싶어서 그런 그들은 ‘우리’이다. ‘저들’과 다른 우리에겐 한 줌의 햇빛이 있었고 그건 지금 ‘우리’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었다.
초등 고 산무 수상작
장원 유림초등학교 6-4 정서린
아버지
우리 아빠는 하숙비를 많이 내는 하숙생이다. 솔직히 지에서 하숙생 아저씨를 보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 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 아빠는 평일마다 경기도로 출장 가시거나 회사에서 늦게 들어오신다. 할머니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후로는 1년 반 째 주말마다 칠포에 계신 할아버지께 가신다. 아빠의 하나 뿐인 아버지를 외롭지 않게 해드리고 싶으셔서 그러시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론 아빠가 밉다. 아빠는 아빠의 아버지를 외롭지 않게 하고 계시지만 나의 아버지는 나를 외롭게 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작년 까지만 해도 나와 아빠는 아주 친했다. 우리는 캠핑도 자주 다니고 밤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같이 쎄쎄쎄도 했다. 아빠가 편의점에 가면 꼭 따라가서 먹을 것을 건지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얼마 전 우리 아파트 앞에 전통과자를 파는 트럭 한 대가 왔었다. 난 그 과자를 먹고 싶어서 엄마에게 사달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 곧 있으면 아빠 오니까 아빠한테 사달라고 해.”
그런데 난 아빠에게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어쩐지 아빠가 평소보다 서먹했다. 나는 여전히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데!
오늘은 아빠에게 일찍 오시라고 장문의 문자를 보내야 겠다. 아빠가 구워주는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말이다.
우수 동천초등학교 6-3 전민성
아버지
“아버지 저도 자전거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저희 반에서 저만 자전거 못 탄단 말이에요”
“ 오늘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안 될 것 같아. 다음 주 일요일에 꼭 가르쳐 줄게”
“약속해요”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을 맞대어 약속을 했다. 그렇게 다음 주 일요일이 되었다.
“약속대로 자전거 가르쳐 줄게. 밖으로 나가자.”
나는 신나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아버지가 뒤에서 잡아 주시면서 따라오셨다.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못해서 그만 일이 터지고 말았다. 뒤에서 아버지께서 손을 떼고 박수치면서 뛰어오시는데 내가 중심을 못 잡고 넘어져서 다리가 까져서 빨간 피가 보였다. 점점 아파져서 바로 집으로 갔다. 집에 가서 아버지가 소독약을 발라주셨다. 다리는 거친 시멘트바닥에 넘어져서 그런지 흉터가 생겨버렸다. 3일 후 밤에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잠이 너무나도 안와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내 방에 들어오셔서 책상에 무언가를 올리고 가셨다. 아버지가 나가시자마자 일어나서 책살을 보니 꼬깃꼬깃 접힌 편지가 있었다. 편지를 펼쳐보니 볼펜 잉크가 번져 있었다. 편지 내용은 자전거에서 넘어질 때 잡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쓰여 있었다. 자는 내낸 아버지가 생각나 꿈에서 아버지와 함께 노는 꿈을 꿨다. 그 흉터를 보면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 생각이나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에 눈물이 고인다. 2년 전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다가 허리를 다쳐서 편찮으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철없이 대해서 너무 죄송스럽고 지금부터라도 아버지께 잘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존경해야 한다.
우수 용강초등학교 6-1 이상진
아버지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 네 식구다. 아버지는 근무지가 대구라서 주중에는 대구에서 근무하시고 주말에만 집에 내려오신다. 주말에 내려오신 아버지께서는 거의 매주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신다. 할아버지께서는 농사를 많이 지으신다. 쌀, 부추, 감자, 배추 등등 일 년 내내 쉴틈없이 농사일을 하신다. 하지만 지금은 연세가 많으셔서 힘들어 하시고 요새는 편찮으셔서 입원 하기도 하셨다. 아버지께서 주말마다 할아버지를 거들러 가신다. 전에는 난 주말마다 아버지와 같이 캠핑가거나 가족 여행을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할아버지 댁에 가는 것 보다 솔직히 놀러가는 것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께 주말에 할아버지 댁에 그만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 해 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데 자식들 고생 안시키겠다고 젊었을 때부터 몸을 돌보지 않고 일만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열심히 일 한 덕분에 아버지와 삼촌이 학교에 잘 다녔고 건강하게 컸다고 하셨다. 이제 할아버지께서는 연세도 많으시고 위 수술도 하셔서 쉬셔도 되는데 자식들에게 직접 농사지은 쌀과 채소를 먹이기 위해 열심히 일하신다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희생 덕분에 아버지가 나와 동생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니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감사했다. 그래서 이제는 주말에 아버지께서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시면 나도 가끔 따라가서 아버지 일을 거든다. 얼마 전에는 들에 가서 고구마도 캐고 고추도 땄다. 나도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아버지께 한 것처럼 나중에 아버지 연세가 많아지시면 내가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는 주말 마다 할아버지 일을 거들러 가시는 아버지가 참 자랑스럽다. 나도 우리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우수 계림초등학교 4-1 김재혁
아버지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아버지는 늘 일찍 회사에 출근하시고 안 계신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숙제를 다 끝내도 아버지는 일하시느라 내가 잠든 다음에 퇴근해서 오신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아버지가 보고 싶다.
수학시험 백점을 맞은 날 나는 스르르 감겨오는 눈을 비비며 하마 입처럼 하품을 하면서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시험지를 안고 그냥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내 베개 옆에 천 원짜리 세장이 놓여있었다. 나는 좋아서 음료수랑 과자를 사먹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고생하시는 아버지가 백점 맞은 내 시험지를 보고 기뻐하셨을 걸 생각하니 나도 기분이 좋아서 바보처럼 웃음이 나왔다.
주말엔 집에서 잠들어 계시는 아버지 얼굴을 나도 실컷 볼 수 있다. 주무시는 아버지를 깨워서 공도 차고 황성공원까지 자전거도 타러가고 싶지만 주무시고 계시는 주름진 아버지 얼굴을 보면 슬며시 내 손은 나도 모르게 아버지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그러면 아버지는 잠이 들 깬 목소리로
“어이구 예쁜 내새끼”
하시며 꼭 안아 주신다.
나는 아버지가 나랑 같이 공을 차지 않아도 좋고 같이 자전거를 안타도 괜찮다. 항상 내 옆에서 환하게 웃어 주시는 사랑하는 내 아버지가 나는 좋다.
아버지 힘내세요.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 항상 웃게 해 드릴게요.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가작 유림초등학교 5-3 조경훈
아버지
친구들과 골프를 하러 중국에 가신 나의 아버지. 중국에 가시기 전날 밤에도 동생과 싸우지 말고 잘 있어야 한다는 우리 아버지시다. 언제나 무심한 척 하시며 가족 생각을 하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게 다 나의 잘못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파진다. 내가 무심코 뱉은 한마디가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것일까? 힘들어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히든 것이 당연한데도, 그 일 중에서도 이 일을 떠올리니 마음이 갑갑하였다.
내가 6살쯤 되었을 때 나는 친구를 데려와 미꾸라지를 죽였다. 그 날은 정말 끔찍하였다. 밤에 아버지께 혼이 나고 아버지와의 사이가 나빠졌다. 생물의 목숨이 소중한 것을 올랐던 나는 괜히 아버지께 짜증을 내고 만나기를 꺼려했다. 요즘도 그렇다. 아버지께 혼이 난 후에 아버지를 만나면 아주 두렵고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진다. 그 때도 요즘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꾸중이 돌고 돌아 나에게 돌아오는 행복이라는 것을. 그 꾸중은 미래의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나를 위해 기도를 하시고 나로 인해 우시고 웃으셨다. 이렇게 느껴지는 가족의 사랑은 아주 따뜻했다. 늘 차갑게 보여지던 아버지시지만,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가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우리를 생각하시고 계실 아버지의 사랑이 시랑하지 않게 가족 사랑을 실천해야겠다.
아버지 늘 감사하고 사랑해요!
가작 나원초등학교 6-2 임 경우
아버지
“경우야, 어서 일어나.”
“아빠가 떡볶이 했어, 빨리 먹자.”
아빠는 나한테 계속 뭘 먹자고 한다. 그렇지만 난 먹는 것이 좋아 늘 먹는다.
아빠는 나와 동생이 뭐 먹고 싶다고 하면 대부분 사 주신다. 아빠는 우리한테 많이 베풀어 주신다. 나도 아빠를 위해 안마하고, 발 씻겨드리고 요리 해 드리고 등등 이런 일로 아빠를 돕고 싶다.
하지만 늘 공부해서 해 드릴 시간이 없어서 죄송하다. 이제 휴일엔 우리 아빠를 쉬게 해 드려야지, 그리고 맛있는 음식도 해드리고 자고계씰 때 깨우지 않고. 하지만 동생은 철이 없어 아빠보고 놀자고 한다. 그래서 난 늘 동생을 말린다. 난 아빠를 늘 도와드릴 것이다. 난 아빠가 제일 좋다.
가작 유림초등학교 5-2 김은서
아버지
황성공원에 왔다. 소나무도 많고 매미들도 합창을 한다. 우리 어머니의 아버지는 소나무를 키우신다. 할아버지는 조경을 하신다.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 중에 나를 가장 사랑하신다. 나도 할아버지를 많이 사랑한다. 나는 할아버지가 멀리 사신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대신에 매일 매일 통화를 한다. 저번에 태풍이 불었을 때 할아버지네 나무가 잘렸는데 할아버지는 안 다치셨는지 걱정도 되었다. 방학 마다 일주일씩 있는데 일주일이 화살같이 빨리 지나가 버린다. 경주로 내려 올 때마다 슬프고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내려온다. 가끔씩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도 나중에 죽으면 하늘나라로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는데 왜 그런 걱정을 하니? 라는 생각을 하면서 위로를 한다.
우리 어머니도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을 것이다 외손녀인 나도 이렇게 보고 싶은데 말이다. 어머니의 고향에 바다도 있어서 찰랑거리는 바다도 함께 볼 수 있다. 방학동안의 일주일 그 일주일이 기다려진다.
가작 포항초등학교 5-1 김상은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식물 가꾸기를 좋아하시나. 그래서 우리 집은 거의 식물원이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난 아빠는 식물들에게 잘 잤냐고 인사를 하고 물을 주신다. 언뜻 보면 우리보다 식물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샘이 날 때도 있다.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가꾸는 아빠의 얼굴은 내가 좋아하는 레고를 조립할 때처럼 웃음 가득하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모두가 참 즐거워진다.
월요일 아침 나도 늦잠을 자고 싶고 학교에 가기 싫듯이 아빠도 회사에 가서 일하기가 싫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를 보면 무척 고맙다.
나도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하지 않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고 힘들게 일하는 아빠처럼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사랑해요! 고맙습니다!
가작 삼성현 초등학교 4-3 장해림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무리 불러도 대답해 주시던 아버지가 아무런 대답이 없어 얼른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다고 따뜻했다. 어머나, 아버지가 없다. 왜 없지? 어머니도 하필 집에 계시지 않으셔서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얼른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전화기를 내려놓고 기다리는데, 쪽지가 보여 열어 보았더니 잠시 나갔다 올게. 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박으로 나왔다. 마침 저쪽에서 아버지가 부스럭 부스럭 곱게 물든 단풍잎을 밟으며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 왔다.
“아버지,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그냥 뭐.”
나는 아버지가 어디 갔다 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그 어느 대보다 더욱 더 포근하고 따뜻했다. 나는 이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영원히 이 날을 기억 할 것이다. 또 하나의 멋진 추억이었으니까.
초등 저학년 산문 수상작
장원 금장초등학교 3-4 변서영
귀뚜라미
“으악!”
할머니댁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벌레 한 마리가 내 발등위로 폴짝폴짝. 내 비명소리에 할머니가 뛰어 나오셨다.
“우리 서영이가 귀뚜라미 보고 놀랬구나.”
“네, 너무 징그럽고 무서워요.”
“생긴 건 그래도, 귀뚜라미는 나쁜 벌레를 잡아먹는 이로운 곤충이란다.”
하늘에 떠 있는 환한 달을 보며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이젠 가을인가 보다.”
며칠 뒤, 화장실에 가려는데 뭔가 폴짝 내 앞을 지나 재빨리 도망간다. 내가 또 소리를 지를까봐 귀뚜라미도 놀란 걸까?
조금 뒤, 풀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쓰르르르 쓰르르르”
내가 혼자라서 무서울까 봐 귀뚜라미가 노래를 불러 준다. 이제 난 내 가을 친구가 무섭지 않다.
우수 용황초등학교 1-1 박지홍
귀뚜라미
가족들과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밥을 먹고 우리 집에 도착 했을 때였다. 아빠께서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시고 내리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귀뚜루루 귀뚜루루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다리가 길쭉하고 등이 까만 벌레가 한 마리 있었다.
엄마께 여쭤보니 귀뚜라미라고 말씀 하셨다. 풀에 사는 귀뚜라미가 왜 지하 주차장에 왔을까? 밖이 추워서 따뜻한 지하 주차장에 들어 왔을까? 아니면 지하 주차장에 뭐기 있는지 궁금해서 들어 왔을까?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모습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우리 가족은 귀뚜라미를 밖으로 내보내 주기로 했다. 아빠께서 손으로 잡으셨다.
내가 귀뚜라미를 잡으려고 하면 귀뚜라미가 이리저리 도망을 갈 것 같았다.
우리는 풀이 많은 놀이터로 갔다. 풀숲에 귀뚜라미를 내려놓으니 귀뚜라미가 펄쩍펄쩍 뛰어 갔다. 밖에 나와서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귀뚜라미가 우리 가족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귀뚜라미야! 이제는 지하 주차장에 들어오지 말고 풀숲에서 친구들이랑 놀아. 나는 귀뚜라미를 보호해 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다음에도 귀뚜라미가 아니어도 다른 곤충들을 보호 해주어야 겠다.
저녁에 놀이터에 나가면 귀뚜루루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에게 반갑다고 인사라는 것 같았다. 내년 가을에도 귀뚜라미 친구들을 또 만났으면 좋겠다.
우수 유림초등학교 2-6 김민혁
귀뚜라미
나는 곤충 박사다.
친구들이 유치원 때부터 그렇게 별명을 지어줘서 나는 그 별명이 좋다.
나는 그래서 지금 가을이 제일 신나고 행복하다. 쉬는 날이면 엄마랑 누나랑 동생이랑 채집통을 들고 황성공원에 온다. 잠자리가 날고 메뚜기와 방아깨비가 뛰어 다니고 귀뚜라미가 빼꼼히 얼굴을 보여 준다. 새까만 망토를 쓴 것 같아서 꼭 드라큘라 같다. 피를 빨아 먹을 것 같지만 죽은 곤충의 시체를 먹는다. 그리고 꼬리 쪽에 여치처럼 새까맣고 뾰족한 가시 하나가 달려있다. 어제 황성공원에서 완전 커다란 거미줄을 만났다. 아무런 곤충도 걸려 있지 않고 잠자리의 부러진 날개만 있고 호랑거미가 있었다. 귀뚜라미가 잡혔다면 거미가 먹어 치웠을 거다. 저녁이 되어서 잡았던 나비랑 잠자리를 모두 놓아 주었다. 차에 타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면 황성공원은 곤충들의 아름다운 음악회가 열릴 것 같다. 귀뚤선생이 지휘를 하고 땅강아지가 노래를 하고 방아깨비와 메뚜기가 춤을 추고 풍뎅이들이 북을 치고 나비들이 꽃가루를 뿌릴 것 같다. 밤에 몰래 와서 조용히 듣고 갔으면 좋겠다. 별똥별 떨어지는 날 조용히 숲 속의 가을 음악회가 기대된다.
우수 나원초등학교 2-2 임수진
귀뚜라미
“어 이게 무슨 소리지?”
“귀뚤 귀뚤”
“귀뚤 귀뚤”
시골 할머니 집에서 자게 되면 난 이렇게 깨어난다. 마당에 나가보니 추석 보름달 때문에 바깥이 환하다. 호박 꽃 위에 귀뚜라미가 나를 부른다.
“수진아 나랑 놀자”
“귀뚜라미야 우리 뭐하고 놀까?”
“음, 술래잡기.”
나는 귀뚜라미와 함께 술래잡기도 하고 귀뚜라미호에 타고 달나라도 보았다.
“귀뚜라미야 오늘 밤 지나면 추석이잖아”
“그래서 추석을 너 한테 소개를 하고 싶어.”
“그래, 고마워.”
“귀뚜라미야 그런데 나는 잠이 와.”
“다음에도 같이 놀자”
“안녕.”
“그래, 너도 안녕. 내년에도 또 만나자.”
가작 용강초등학교 3-2 이훈석
귀뚜라미
가을하면 떠오르는 곤충은 귀뚜라미다. 하지만 요즘 나는 귀뚜라미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귀뚜라미는 귀뚤귀뚤 운다고 하지만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직접 들은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전에 귀뚜라미에 관한 과학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에는 귀뚜라미는 소리를 무릎으로 듣는다고 했다. 귀뚜라미는 귀로 듣지 않고 무릎으로 소리를 듣는구나 하니 형이
“야, 그럼 귀뚜라미는 음악 들을 때 무릎에 이어폰을 붙이겠네”
하며 큰 목소리로 웃었다.
또 얼마 전에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갔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형이랑 같이 들에 갔다. 형과 나는 할머니랑 같이 고구마를 캤다. 내 팔뚝만한 굵은 고구마가 줄줄이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그 때 논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가 나왔다. 그래서 형과 나는 귀뚜라미를 잡아서 정말 귀가 무릎에 있는지 관찰하려니 보이지 않았다. 나와 형은 귀뚜라미가 불쌍해서 다시 논으로 보내 주었다.
다음에 할아버지 대에 가면 귀뚜라미 무릎에 있는 귀를 다시 찾아 봐야겠다. 그리고 작지만 아름다운 귀뚜라미의 노랫소리를 꼭 들어보고 싶다.
가작 흥무초등학교 3-3 한다현
귀뚜라미
귀뚤귀뚤귀뚤 어디선가 낯익은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가을을 알려주는 반가운 목소리입니다. 뜨거운 여름동안 찌르찌르 찌르르 매미들에게 내어 주었던 어여쁜 가수왕의 자리를 다시 되찾은 귀뚜라미가 돌아 왔습니다. 지난 주말, 아빠 엄마와 함께 찾은 곤충 생태 체험관에서 마침 귀뚜라미에 대해 본 적이 있습니다. 까맣고 작은 몸이 얼핏 보면 바퀴벌레 같아 보여 몸이 부르르 떨리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곳에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계가 있었는데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귀뚜라미 소리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모습은 비록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는 어떤 유명한 가수의 노랫소리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빌라에 살고 있어 흔히 들을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아빠 엄마와 함께 즐겁게 나들이 갔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긴 겨울 동안 모진 추위 다 이겨내고 찾아 온 귀뚜라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참 소중하게 들립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다했던 제 자신도 조금 부끄러워집니다. 앞으로는 보이는 아름다움 보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가작 나원초등학교 1-2 임현정
귀뚜라미
내가 제일 처음 알게 된 귀뚜라미는 에릭칼 선생님의 울지 않는 귀뚜라미이다.
책 속의 귀뚜라미는 자기도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한다. 잠자리. 애벌레, 매미……. 등 다른 많은 친구들에게 소리를 들렸지 못하고 실망을 하지만 제일 멋진 소리로 운다는 내용이다. 나는 귀뚜라미 소리를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서 많이 들어 보았다. 꼭 메뚜기 친척같이 생긴 게 잘도 도망을 다녔다. 밤에는 밤새도록 울고도 지치지도 않나 보다. 귀뚤귀뚤 귀뚜라미 오늘 밤에 우리 집에도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지 귀 기울여 봐야겠다.
가작 흥무초등학교 3-3 정민유
귀뚜라미
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시원한 가을이 되었다. 우리 집 꽃밭에 낮에는 붕붕 벌들이 날아다니다가 해가 지면 귀뚤귀뚤 귀뚜르르 소리가 들려온다. 밤색인 작고 배 뽈록 귀뚜라미 소리가 내 귀를 간질간질 거린다. 엄마 어릴 때에 귀뚜라미 소리는 자장가처럼 많이 들었다는데 요즘에는 많이 안 들린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안 울었으면 좋겠다. 잘려고 하면 귀뚤귀뚤 거린다. 귀뚜라미 너도 나처럼 밤에 노는 걸 좋아하나보다.
귀뚜라미야! 우리 집 꽃밭에서 마음껏 노래 불러! 엄마 어릴 때 귀뚜라미 음악회보다는 작지만 말이야. 작아도 괜찮아 내년 가을에도 우리 집 꽃밭에 친구 많이 데리고 놀러 와.
가작 진해도천초등학교 1-6 이다원
귀뚜라미
언젠가부터 우리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 왔다. 찌르 찌르 찌르르 귀뚜라미 울음소리. 우리 아빠 낚시 가방타고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어디 숨었는지 보이질 않는다.
깜깜한 밤에도 잠도 안자고 울어대는 통에 나는 엄마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꼭 저 귀뚜라미도 우리 다원이 닮아 엄마 속 많이 섞이겠네”
엄마 말 안 듣는 청개구리처럼 에휴 나는 귀뚜라미 때문에 밤새 엄마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어디 숨었는지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너를 꼭 찾아 푸른 들판에 나가 마음껏 놀아 보자꾸나. 나랑 닮은 내 친구 귀뚜라미야.
장려 용황초등학교 3-3 이솔민
귀뚜라미
가을만 되면 찾아오는 곤충이 있다. 바로 풀숲에서 귀뚤귀뚤 우는 귀뚜라미이다.
귀뚜라미가 울면 이제 가을이구나! 하는 것이 실감 난다. 집에 가는 길에 귀뚤귀뚤하는 귀뚜라미 소리가 나면 가을이라는 게 갑자기 생각이 나면서 괜히 추워진다.
가끔 귀뚜라미 소리가 아주 크게 날 때가 있다. 그러면 꼭 귀뚜라미들이 풀숲에서 음악회라도 연 것이 아닌가 싶다.
“찌르르 찌르르 떼굴”
우는 소리에 반해 잠깐 쪼르려 앉아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는 했다.
이제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왔다. 이제는 곧 가을도 끝나고 귀뚜라미 소리도 들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거리를 걷다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소리를 들어 봐야 겠다.
장려 입실초등학교 2-2 박수빈
귀뚜라미
우리 집은 시골이다. 가을이 왔나 보다 문밖으로 나가면 들판은 거인들이 큰 붓을 들고 휙휙 노란색 물감을 칠하고 있고 벼들은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거인들의 힘자랑으로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나무들은 옷을 갈아입고 가을바람에 춤을 춘다. 여름 내내 울던 매미는 어디가고 귀뚜라미가 소풍을 왔나 보다.
나는 귀뚜라미가 무섭다. 밤이 되면 귀뚤귀뚤 귀뚜라미의 노랫소리가 조금 시끄럽기도 하지만 아주 재미있는 노래가 되기도 한다. 나도 귀뚜라미처럼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 내년 가을에는 노래 대결을 해보자.
장려 탄금초등학교 2-2 이가은
귀뚜라미
귀뚤귀뚤 누가 밤에 울지?
‘잘 잤다’하는데 누가 귀뚤귀뚤 하고 울지?
‘아하’
그건 바로 귀뚜라미.
메뚜기 친구야 동이 트고 질 때 나타나는 귀뚜라미 눈에 잘 안보이지만 눈을 감고 들어 봐 귀뚤귀뚤 어디선가 들려.
아침 일 때 울음소리가 없어져 낮일 때 소리가 나.
낮에는 어디에 꽁꽁 숨었다가 나오는 거니?
장려 경주 용강초등학교 2-1 박유정
귀뚜라미
모두가 잠든 가을 밤 나의 귓가에 나의 귓가에 귀뚤귀뚤 귀뚜르르 귀뚜라미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는 작고 귀여운 귀뚜라미와 친구가 되었다.
나의 비밀 이야기를 들어주는 비밀 친구 귀뚜라미는 내 고민을 듣고서는 걱정 말라고 귀뚤귀뚤 귀뚜르르 대답해 준다.
나도 너의 걱정을 들어 줄게
겨울이 오는 게 걱정이니?
나도 너에게 걱정말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어.
귀뚜라미가 점프하면 나도 깡충 점프하고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노래하면 나도 같이 노래한다.
새 친구 귀뚜라미와 즐거운 가을을 노래한다.
장려 용황초등학교 3-4 박채윤
귀뚜라미
추석 때 할머니께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주셨다. 나를 주려고 온 집안을 뒤지면서 찾으셨다고 하셨다. 기대를 하게 되니까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상자를 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실망감에
“이게 뭐야!”
진심이 새어 나왔다. 먼지투성이 지우개, 몽당연필, 처음 보는 딱지들…….
모두 아빠가 쓰던 거란다. 요즘 우리가 쓰는 캐릭터 연필도 아니고 촌스럽기만 한데 상자를 자꾸만 내 손에 쥐어 주셨다. 할 수 없이 상자를 받아들고 상자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볼펜아 끼어진 몽땅 연필이 눈에 들어 왔다. 신기하게 쳐다보는데 아빠가 웃으시며 이야기 해 주셨다. 형편이 어려워서 친구가 버린 몽땅 연필을 주워오면 할머니께서 이렇게 다 쓴 볼펜을 끼워서 편하게 쓸 수 있게 해 주셨단다.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그 몽당연필을 잡아 보니까 신기하게도 편했다. 나는 조금만 짧아져도 연필 잡기가 불편한데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할머니가 주신 상자는 아빠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첫댓글 28회입상자 인데요 제글이 궁금한데 없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