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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자본.국가.이스라엘, 선.악의 역전)1 (엘도라도)
급속한 인간 문명 발달의 4대 축을 소유권, 합리적 사고, 자본, 수송과 통신수단이라고 제럴드
다이아몬드는 설파합니다. 특히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에 등장한 자본의 개념은 인간 문명 발달의
획기적인 토대를 제공합니다. 그만큼 자본의 기능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수많은 혜택과 문명의
이기들을 제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자본은 적절한 도덕적 가치가 배경이
되어주기만 한다면 인류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구속이 아닌 해방으로 나아가게 하는 훌륭한
도구로서의 잠재력은 인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의 속성은 인간의 양심과는 쉽게 양립할 수 없는 근본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적절한 가치 있는 철학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 인간의 탐욕을
배가시키는 증폭기와 같은 역할을 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자본의 집중 현상, 자본의 독점
등 자본의 거대화에 따른 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쏠림은 도덕적 가치가 개입되지 않는다면 결코 막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막을 수 없는 적절한 모든 규제 조치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거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대중의 부를 보호하기보다는, 극소수의 부를 늘리고 극소수의 부가 침해되지 않도록, 대중의
정당하고 기회균등의 권리를 파괴하는데 앞장을 서왔다는 것은 결코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
하나의 유용한 도구로서 많은 국가들은 극소수에 의해서 이용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요즘의 대부분의
정부들은 이러한 누명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 적절한 영적 배경이 없다면 자본이 타락의 길로 쉽게 빠져버릴 수 이유는, 자본의 근본적인
속성이 이익추구라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영성적 배경이 근거되지 않는다면,
자본을 통한 이익추구는 커지면 커질수록 탐욕을 더욱 자라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류를 해방케
하는 근본적인 기술과 과학에 집중하기보다는 오로지 최대의 이익을 낼 수 있는 타락한 과학과
기술문명에 집중케 함으로써, 문명의 혜택이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인류를 이롭게 하는 듯 행세를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극단적인 양극화, 자연의 대파괴, 인류를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으로
황폐한 상황으로 극단적으로 몰고 가게 한다는 점에서, 결코 결코 자본의 책임은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실물의 경제의 발전을 통한 인류의 삶의 질의 점진적인 향상보다는, 오로지 현재의 불환화폐
제도처럼 전혀 근거 없는 종이돈을 그저 찍기만 함으로서 매우 손쉽게 대중들의 부를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 자본은 본래의 진정한 가치인 인류의 삶의 질과는, 특히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결코
많은 부분을 기여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즉 원래는 우리 인류를 점진적으로 해방시키는
순기능의 역할을 충분히 할 기회도 많았지만, 이익추구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휘두른 일군의 엘리트
군에 의한 주류 자본의 장악은, 모든 경제 시스템과 정치조직 화폐제도를 통하여, 자본의 타락의
결정적인 역할의 주범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의 이익 추구에 대한 속성을 가속화 시키는 것은, 대부분의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당연히
전 세계적인 극 상층부의 국제 엘리트의 야망으로 인해, 진정하고 순순하게 응용될 수 있는 진정한
자본의 뜻을 왜곡되어 버렸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즉 결코 이것은 자본이 주는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심리와 그리고 인류를 위한 자본의 선한 속성과는 결코 쉽게 양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끝없는 이익추구에 대한 갈망은 결코 자비로움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고, 이익추구에 대한 탐욕은
결코 양심과 공동선 그리고 최고의 가치인 사랑의 개념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일반인들이 인식하듯이, 자본은 문명의 혜택을 가져온 주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인류의
폐해를 불러오기도 한 장본이기도 합니다. 당연이 자본의 그 근본적인 속성상 양심이 자리하기에는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추구할수록 탐욕은 더욱더 증폭되는 것이며, 적절한 영성의 뒷받침이
없는 이익추구는 결코 만족을 모른다는 것이며, 인류에게 유익한 요소로보다는 악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쉽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역시 우리 대부분의 보통인들도 이러한 자본의 속성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즉
자본은 먹을수록 그 욕망의 크기는 더욱더 커진다는 것이며, 그것을 향한 집착을 내려놓기라는 것은
매우 여럽다는 것이, 자본의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큰 부로 이웃과 세계를
향하여 진정으로 모든 것을 주고자 하는, 이로운 일을 하는 분들을 폄훼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끝없는 이익추구를 향한 자본의 보편적인 속성과 인간의 양심이 함께 하기는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이르기 위함인 것입니다.
역시 사랑이 없는 이익을 추구한다고 봤을 때, 이러한 의미의 이익추구는 결코 양심적이고 선 적인
행동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결국 이것의 의미는, 자본가 그룹(여기서는 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일군의 국제적인 엘리트 그룹을 의미함)은 근본적으로 끝없는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결코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무자비한 자본을 통한 이익추구에 대한 철학이 없다면, 결코 이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 흑막의
주인공으로는 군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외관상으로 보이기에, 그들이 보이는 자선사업과
같은 인류의 대한 자비로움을 보이는 선한 행동은, 거의 대부분 그들의 선한 의도를 드러내는 것은
결코 아니며, 단지 그들의 철저하게 오염된 사악함과 무자비함과 몰염치함과 인류에 대한 패악을
가리기 위한 단순한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본의 천한 속성은 인류를 향한 따뜻함으로 달려가는 것보다는, 분열과 계급의식 그리고 끝없는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근본 원인을 제공하기가 더 쉽다는 점에서, 극상층의 국제 엘리트 자본가 그룹의
목표는, 끝없는 이익추구라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양심을 바탕으로한
인류를 향한 진정성과 공동선 그리고 사랑은 결코 기대할 바가 못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자본가 그룹에겐, 최고의 최선의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결코 자비라는
것은 없으며,
당연히 이익에 반하거나 이익을 깎아내리는 모든 규칙들은 제거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이익을 최고로 추구하는데 있어서 모든 부분에서 그들의 입지는 최대한 자유스러워야 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입지가 좁아져서는 결코
않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끝없는 그리고 최고의 이익을 추구하는 어떤 자본가 그룹 내지는 어떤
특정 그룹이 있다면 결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필사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모호하게 하고 흑막에 가려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계를 움직이고자 하는
일군의 그룹은 흑막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국가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그 국가의 대변인으로 역할을 해버린다면, 그들의 입지는
확 축소가 돼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주인공은 그리고 세계를 주도해 오는 진정한
주도세력은 결코 그 모습을 쉬이 내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입지가 좁아진다면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많은 이익을, 한계 없는 이익을 추구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제약을 받을 것이기에 그들은 결코 영속적인 국가 따위나 애국심 같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다만 필요에 따라서 그들은 국가와 애국심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른 것으로 갈아입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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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으로 접근을 하자면, 예를 들어 이스라엘을 세운 진정한 주도 그룹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리고 정말로 이스라엘을 세운 주도 그룹이 혹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추구하는 어떤 자본가
그룹이라면, 설득력이 있다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만약에 시중의 대부분의
인식과 같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겉으로만 나타나는 것이었지 국제적인 핵심자본가 그룹의
진정한 의도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주도해 온 그룹은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그 진의는 어떤 다른 곳에
있었다는 의미이고, 이스라엘의 국가를 주도해 온 그룹은 시중에 이해와는 달리,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성경의 유대인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지 유대인 탈을 쓴 또 한
부류의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이익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2000년을 거슬러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순수 혈통의 이스라엘 유대인의 염원에 이루어진
것보다는, 순전히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에 의해서 일군의 또 다른 국제 엘리트 그룹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 상기의 관전으로 접근한다면
당신이 최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국제적인 자본가라면, 특히 결코 드러내지 않고 세계 국가들을
조종할 수 있는 흑막의 집단이라면, 한 국가에만 굳이 예속될 필요가 있는가? 여기서 진정한 자본가란
자본 그대로의 속성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을 얘기합니다. 즉 끝없는 이익추구, 가장 효율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당신이 스스로를 진정한 자본가라고 한다면, 굳이 한 국가에 예속될 필요가
있을까요?
즉 영토.국가에 대한 소속감이나 애국심 따위가 필요가 있을까요? (대중들이라면 이러한 소속감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심리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결론적으로 얘기한다면, 만약에 국가가 이익에 반하거나 최대의 이익을 주지 못하는 식으로,
효율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면, 국가는 단지 거추장 스러울 뿐입니다. 즉 현재의 국가를 버리고 또
다른 국가라는 집을 향하여, 또는 지역을 새로 만들어서 새롭게 정착하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냥
다국적인 것으로, 그냥 무국적으로 거주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영토주의. 애국주의.국가주의는 진정한
자본가 그룹에 있어서는 거추장스러운 개념일 뿐입니다. 다만 필요할 때마다 국가라는 타이틀을 잠시
입고 있거나 이동할 뿐입니다. 단지 그들에겐 이익을 최고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상에서 국가도 애국심도 그리고 영토도 단지때에 따라서 필요할 뿐입니다. 만약
이러한 필요성들이 모두 없어진다면, 바로 다시 다른 지역 다른 옷으로 갈아타면 그만인 것입니다.
즉 국가는 이익을 효율적으로 취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익을 대중들로부터 보호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효율적인 방패막이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여러 관점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즉 역사적으로 그리고 역사 뒤의 이야기로는, 유대인의 흑막의 대부인 로스챠일드그룹의 주도하에
이스라엘을 세웠고, 그리고 역시 유대인의 시온주의를 발흥으로 해서 2000년 만에 세워진 유대인의
국가라고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는 달리, 로스차일드가의 본심은 그렇지 않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그는 진정한 자본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그들의 이익추구에서 오히려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여러 면에서 많은 제약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적절히 필요한 때도 있었지만은 지금은 결코 그렇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자본가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얘기를 한다면 결코
그 추종 자본가 집단의 이익추구방식, 그리고 다극화의 주도 역으로서의 세계 재편 구도의 계획 역시
그 근원적인 의도는 결코 선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중간적인 입장에서 양쪽 모든 것으로부터 이익을 흡수하게 되려면,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국가나 조직을 취한 상태에서는 최고의 이익을 뽑아내는데 많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정체가 모호한 가리개라는 흑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흑막의 정치는 어느 국가. 어느 조직에서나
늘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상위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하위 서민층들이라는 가리게가 필요하다. 정부와 연계된 상위계층은
굶지 않을 만큼, 밥을 하위층에게 제공함으로써 하위층은 기득층의 성향을 절대적으로 닮아가고 지지하는 골수층으로 변한다.
상위계층과 연계된 정부는 하위계층의 지지로, 정부. 기득권의 횡포를 향한 중간층의 저항을 아주 쉽게 막아 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일종의 임시 눈가리개로써 단지 한때의 작용에 불과하다. 즉 모든 이치가 그럿듯이, 한계에 다다르면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1%로의 흑막의 유대인세력(스파라디계 세력 10만명)의 여러 표면적인 지원과 그리고 8세기
이후 개종세력인- 성서의 아브라함의 후손이 전통 유대인과는 전혀 다른 러시아 우크라이나계의-
아슈케나지(독일계로도 분류됨대략 1000만명)계의 종교상의 유대인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세워진 국가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슈케나지의 기원은 훨씬 더 먼곳으로 부터 유래되고 있습니다. 즉 성서 속의 이야기인
가나안족의 이야기까지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훨씬 더 깊은 기원으로 중동의 수메르인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금융 유대인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성서상의 이집트 재상였던 요셉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로스차일드를 대표하고 있는 스파라디계열이 유대인의 진정한 흑막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스파라디계열간의 신.구세력의 갈등, 스파리디. 아슈케나지 간의 갈등) 바로 이들 세력이 영토주의 논리를 완전히
벗어나, 국제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따르는 다극화 주도세력중의 하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스파라디 계열도 사실은 역시 성경상의 전통 유대인의 뿌리는 아닌 것으로 나타납니다.
현대의 유대인 맹주라고 알려진 스파라디(쉐파르딤)계열의 기원도 역시, 고대 카르타고. 가나안
(페니키아인) 그리고 아슈케나지의 원류인 고대 수메르인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실은 알고 보면
현재 세계의 헤게모니를 주름잡고 있는 유대인 종족은 정통 유대인 종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고대
수메르 지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수메르 지역의 갈데아 우르지역의
유목민 족장 출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시기는 4000천 년 전의 시대이고, 현재 세계의
주도권 그룹의 가짜 유대 종족은 최소 5천 년 전의 정통 수메르인을 기원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구분은 참 의미 없는 한가한 짓이다. 본질을 흐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본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를 노리는 흑막의
거대집단이 있어 왔다는 것이 바로 본질인 것이다. 그것이 유대인이던 비유대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유대인
음모론으로 인해서 대중의 분노는 분명한 목표가 생겨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량한 성서 상의 정통 이스라엘. 유대민족이
2천 년의 역사를 걸쳐 수없이 탄압을 받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즉 실질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본 것은 대부분의
선량한 전통 이스라엘.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사도의 숭고한 의무를 지니고 있는 선량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현대의 이스라엘 국가를 만든 주역, 그리고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를 두고 한말은 결코 아니다. 즉
지금의 이스라엘은 순수한 민족운동을 바탕으로 한 국가는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집단이익을 위해 급조되 단순한 정치
.이익집단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사실은 성경은 많이 오염되었다. 특히 구약은 그 본질이 심각히 훼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통치적.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 그리고 특정 집단의 오염된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 그렇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이스라엘은 성서 상의 정통 이스라엘. 유대인의 국가와는 질적으로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크게는 진정한 민족상의 후손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작게는 이스라엘(야곱)의 후손인 12지파중에서
유다계의 전통유대인 종족이 주도하는 이스라엘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음모론이며,
지금의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모든 유대인의 정체는 인종상으로 결코 전통 유대인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유대인의 탈을 쓴 엉뚱한 민족을 기원으로 하는 족속들이라고 분석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의 근본도 인종상으로는 사실은 성성의 전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니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성서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가 결코 아니며, 단지 그들의 탈을
쓴 한무리의 개종 유대인들에서 세워진 순전히 정치적.경제적 목적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국가는 시온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모세가 전파한 유일신인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선민의식을 부여한 이스라엘이 하느님이 아닙니다.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전 세계 사도 역할로서의 하느님의 도구로서 의미를 두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 유수 이후 돌아온 지도자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이후로 본격적인 선민사상이 도입되고,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뿌리 깊은 선민의식의 뿌리가 내리게 됩니다. 이집트와 시나이반도에서 유일신인 하나님 종교를
들여오게 되는 선지자 모세의 이상은, 이스라엘 민족을 디딤돌로 하여 전 세계에 하나의 보편 종교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원래의 의도였습니다. 즉 원래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은 전 세계의 하느님(신)의
뜻을 전파한다는 숭고한 이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사무엘 이후 그 순수한 본질은
점차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즉 성경의 수많은 번역 등, 상기에서 언급한 이유 등으로 인해 그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성경의 원류는, 최소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천 년 전에 그리고 예수가 태어나기
3천 년 전의 것으로, 최소 기원전 3000년경에 기록된 수메르 점토판에도 나와있는 내용을 원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수메르 점토판 자체를 원본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도 없고 또한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인류의
문명을 훨씬 뛰어넘어서는 초고대의 일어났던 사실을 상징적인 내용으로 원본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쨌든 유대인의 유일신 종교는 제사장이면서 족장이면서 또한 예언자의 역할을 하던, 솔로몬 이전의
사무엘 시대까지는 숭고한 인류의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사뮤엘 이후 왕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특히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극적으로 타락을 하게되고, 바빌론 유수 이후 모세의 숭고한 신앙은
극적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사무엘이 세운 일군의 예언자 집단은 모세의 정통성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마지막 예언자 집단 구성원 중의 한사람인 세례자 요한과 그리고 예수에게로
까지 연결이 됩니다. 이 이상은 언급을 피합니다.
일단 이 부분에서의 결론적인 얘기는 결코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는 성서상의 정통 이스라엘. 유대인에
세워진 국가는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카르타고(페니키아인->슈메르인)유대인과 아슈케나지
(바빌로니아->수메르인)유대인의 합작품에 의한 순전히 정치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짜 진짜의 유대인을 떠나서, 서로의 동지이면서도 역시 최대의 적은 서로
그들 자신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분명한 것은 유대인의 최대의 적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랍인 등 전 세계인을
속이는 것은 너무도 쉽지만, 진짜 적인 그들 유대인을 서로 속이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외부인인 그 누구라도 그들 간의 피. 아를 구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문제는 현실을 넘어서, 결국 영적인 문제로까지 올라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명확히 보인다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아는 만큼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유대인끼리의 싸움은 비밀 전쟁이며, 외부인은 누구와 누구의 싸움 인지도 결코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지하여야 합니다.
즉 이러한 문제는 파고들수록 오히려 더 본질적인 구도와 문제를 벗어나기 쉽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대인의 음모론이라던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예수회, 300위원회 등의 각종
음모론 등은 그들의 진짜 모습을 매우 쉽게 가려버리고, 혼돈의 모습으로, 단순한 흥미 있는 얘깃거리로,
황당한 상상의 얘깃거리로, 정신 이상자의 터무니없는 얘깃거리로 치부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을 둘러싼 전쟁은 또는 세계 헤게모모니를 둘러싼 전쟁은 또는 영.미.이스라엘의 1극
달러 패권주의와 다극주의 싸움의 주역은 과거의 공산국가와 민주주의 국가, 또는 미국과 소련과의
냉전대결, 또는 지금의 중국과 미국과의 패권대결, 또는 브릭스와 미국과의 패권다툼 등 표면상으로는
전혀 개념이 다른 두 사상의 대립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본질은 유대인과 유대인간의 암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인종상으로는 진정한 유대인
(즉 성경상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좁게는 야곱의 12지파중의 유다지파)이 결코 싸움의 중간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간의 암투라는 이 유대인들에는 ,결코 진정한 정통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의 성서가 의도한 이스라엘 민족은, 오히려 인류의 사도역활로서, 빛의 민족으로서
인류의 진정한 디딤돌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부분은 더 이상 깊이 다루지 않겠습니다.)
한마디로 세계패권의 주역은 유대인의 탈을 뒤집어쓴 가짜 유대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스파라디와 스파라디계, 그리고 스파라디계와 아슈케나지계 등 복잡한 파워게임의 양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스파라디계는 약10만명 아슈캐나지는 약1000만명으로 오랜 역사를 통하여 힘의
이동을 보여주었던 것은 바로 스파리디계입니다. 즉 보통 이들을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베네치아 스페인 네덜라드 영국 뉴욕 등을 본거지를 옮기면서 힘의 이동을 주도하여왔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언급했듯이 근본을 추적하면, 역시 패권 주도 역인
스파라디 핵심 유대인은 성서상의 12지파 유다계 또는 아브라함의 후손과는 대부분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 원류는 훨씬 전의 기원 3000년 이상의 수메르문명까지 흘러갑니다. 또한 페니키아
카르타고 등 순수 이스라엘 혈통과는 근본이 다른 혈통 등에서 출발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이 둘의 합작품으로 생긴 만큼, 성경의 약속된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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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스라엘 형성과정
1. <1915년 후세인-맥마흔 협정>: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과 샤리프 후세인 간의
서한(書翰)을 발표한 것으로 아랍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 선언.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 A. H. 맥마흔(Henry Macmahon)이 독일 편에 서 있던 오스만제국 내 아랍인들의 반란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독립국가 건설 지지를 약속한 선언이다. 맥마흔은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샤리프 후세인과 전시외교정책에 대한 서한을 주고받았는데, 그 내용은 아랍인들이 참전하면 전쟁 후 오스만제국지역 내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1916년에 사이크스-피코협정(The Sykes-Picot Agreement)을 추진한다. 이 협정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사이의
비밀 협정으로 오스만제국을 분할하여 영국이 이라크ㆍ쿠웨이트를, 프랑스가 시리아ㆍ레바논을, 러시아가 터키 동부지역을
차지한다는 내용으로 이중외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1917년에는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가 맥마흔선언과 모순되는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하였다. 이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민족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미국 내 유대인을 움직여 미국을 제1차 세계대전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영국의 대중동정책은 전쟁의 불씨를 만들어 향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맥마흔 선언 [McMahon declaration]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2. <1916년 사이크스-피코혐정>:1916년5월 영국의 중동전문가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피코에 의해 원안이
작성된 영국 프랑스간의 오스만붕괴후인 대전후 팔레스타인 점령계획. 지금의 레바론 시리아지역은 프랑스가, 그이하
남부지역인 이스라엘 요르단 이라크남부지역은 영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비밀협정을 말함.
3. <1917년 밸푸어 선언>은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 인을 지원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 인을 위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동의한다고 발표한 선언이다.
유대계 영국인 은행가 겸 시오니즘운동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힌 이 선언은
시오니즘의 지도자인 카임 바이츠만과 나훔 소콜로프의 끈질긴 노력이 낳은 결실이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유대민족의 모국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했던 시온주의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당시에 영국의 의도는 유대 인의 여론을 연합국측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유대 인을 활용한 중동 정책의 포석을
굳히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이 선언은 아랍 인에게 독립 국가 건설을 약속했던 〈맥마흔 선언〉과 중동의 터키 영토의
분할을 결정했던 사이크스 피코 협약 모두와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지지를
표명했고,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영국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그 후 〈밸푸어 선언〉은 1922년 7월 24일에 국제 연맹의 승인을 받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안에 포함되었다.
1939년 5월 영국 정부는 정책을 바꾸었고, 추가로 이주할 유대 인의 수를 7만 5,000명으로 제한하였으며, 1944년에는
이주를 끝낼 것을 발표하였다. 이에 시온주의자들은 아랍 인을 회유하는 영국의 새로운 정책에 반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인과 아랍 인 간의 분쟁의 씨앗이
뿌려지다 (세계를 바꾼 연설과 선언, 2006.1.15,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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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표면적으로도 기술된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로스차일드가 주도적으로 개입된 흔적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본심은 이스라엘의 확대과정은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에서도 이스라엘을 영향력을 크게하려는 시오니스트 강력한 우파(영.미.이스라엘.
군산복합체 등)와 그리고 작은 이스라엘로 만족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지 않으려는 좌파(로스챠일드가,
다극주의 등으로 표현됨) 지속적인 갈등이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부갈등상황입니다.
이러한 갈등의 구도는 극 상층의 핵심층들의 갈등과 직접적인 연계된 것으로 지금까지에 이르는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분쟁, 환경파괴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끊임없이 유발하는 원천적인
문제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부터 1967 년 3차 중동전쟁전까지 좌파가 강하고, 67년의 중동전쟁 압승을
계기로 시오니스트 우파가 강하게 되었지만, 이에 맞서 좌파와 국제 사회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화해를 시작으로 평화의 방향으로 국제적인 분위기를 가져 가려하고, 결국 1978 년 이집트와의 화해를
성립시켰습니다. 이에 맞서 시오니스트 우파는 미국에서 세뇌된 젊은 활동가 집단을 정책적으로
이주시켜 점령지에서 이스라엘 정착촌 운동으로 식민지 운동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미국에서
AIPAC(미.이스라엘 공공문제 협의회, 한마디로 미국 내 이스라엘 로비단체)등을 기관을 사용한
이스라엘 우파에 대한 지지 활동을 집중적으로 활성화시키면서, 이러한 식의 속고 속이는 그들
사이의 암투로 인해, 세계정치.경제는 갈등과 탐욕의 도구로 극도로 타락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냉전구도의 대립, 민족분쟁, 이념전쟁, 기독교(선) 이슬람(악)교등의 종교전쟁, 기타 수없는
국지분쟁 등,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정글 자본주의, 국가의 벽을 허무는 세계화주의. 신자유주의,
택스헤이븐 지역의 합법화, 국제적인 자선단체를 가장한 합법적인 탈세화, 파생상품의 금융병기화,
본질이 쓰레기이고 붕괴 할 수 밖에 없는 불환화폐의 절대적인 신격화, 그로 인해 오히려 진짜 돈들은
위험상품으로 분류되는 등, 결국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처참한 빈익빈 부익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로
은연중에 이어지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경향은 더욱더 가속화 되가는 경향을 띠고 있으며, 사실
지금은 전 세계의 모든 주체가 헤어날 수 없는 부채라는 굴레를 안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했을때,
즉 부채라는 완층지대가 없어져 버린다면 실질적으로는 지금까지 우리자신이 '부' 라고 여겨왔던
거짓 자산들은 순식간에 그 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의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인이, 사실은 역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국제엘리트간들 그들 사이의 공조나 또는 갈등 사이에서 놀아나는 고도의 전략적이고도 전술적인
산물의 폐해로써,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보통의 인류가 받게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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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아주 오랫동안 미국은 선. 소련은 악, 또는 민주주의는 선, 공산주의는 악, 또는 이스라엘 선,
팔레스타인 악이라는 공식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개념이
모호해져 가고 있고 심지어는 반대의 개념으로도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완전히
바뀌었다고도 할만큼 세상은 은근히 변하고 있습니다. (이념의 선.악은 결코 없다. 단지 세뇌되는 것 뿐이다.
또한 실험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잘못 운용하는 인간이 나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의 자신이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어떤 이에게는 가장 가혹한 형벌로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공통이익을 눈앞에 둔 대중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잔혹한 독재형식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난폭한 폭군으로 언제 어느
순간에 우리 자신을 향하여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정신적으로 이념을 소화해낼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할 때에는
민주주의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을 것이다. 가장 현자 중의 한 사람인 피타고라스도, 소크라테스도 민주주의에 의해서 희생됐다.
또한 군중들의 광기 어린 집단 판결에 의해 예수도 그러하였다. 또한 수많은 혁명과정의 무수한 희생자들도 다수결의 이름으로
그러하였다. 또한 중세의 수십만의 희생을 낸 마녀사냥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 모든 것은 교활한 의도를 가진 몇 사람의 전술에
대중들이 아무런 통제없이 휘둘리는 전형적인 사례들인 것이다. 즉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죄 없고 현명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여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수결은 오히려 독재정치보다도 대중들을 다룰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도구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즉 오히려 한 사람의 독재보다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빌어 대중을 우민화시키는 방법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어떤 때에는한 사람의 지혜롭고 영성이 깨인 한사람이, 공통의 이익에 한순간에 양심을 저버리는
수많은 대중들보다는 더 나은 정치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념의 선.악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을 향한 공격을 보면서 그리고 무수한 희생자들의 양산을 보면서
더욱 선.악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이제는 이스라엘은 악의 축,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선량한 희생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의 변하가 진행되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즉 은연중에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왔다는 것입니다.
역시 이러한 실질적인 움직임은 스웨덴을 비롯, 유럽 대부분의 이스라엘 비난, 팔레스타인 국가로서의
승인 등 예전의 상황과는 완전히 바뀌었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이스라엘 대 정책에
대해서도 예전의 든든한 지원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역시 이러한 의미의 변화는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권과 민주주의 상징적인 개념이 미국을
선의의 국가로 보게 만들었지만, 역시 언제부터인가 미국은 인권의 사각지역으로서 그리고 중산층이
무너지는 나라의 하나로서 오히려 반대되는 야만적인 행위가 세계적으로 보도되는 경향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의 미국은 가장 살기 어려운 국가들 중의 하나로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미국 주의 거의 60%가 법적으로 실질적인 파산상태라고 보면 맞습니다. 근본적인 치유가
없다면 아무리 돈을 찍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경기 회복은 없습니다.
무한정 찍어서 경기를 일으킬 수 있다면 인간의 먹고사는 문제는, 결코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어느 정도의 사이클까지는 돈을 찍어서 원기회복을 할 수가
있다지만, 무한정 반복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하에서 돈 찍는 식의 경제살리기의
해법은, 단지 강제로 약을 먹여서 살을 붓게 만드는 기형적인 결과만을 낳고 결국은 그 파멸의 크기를
지속적으로 크게 하기만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크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리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아주 오랫동안 민주주의. 인권 등 각종 명분을 들이대서 영.미. 이스라엘을 기반한 달러패권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 간섭의 정치를 실현하여왔던 것입니다.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대표적이고도
정통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은 매우 효율적으로 잘 통용 되었 왔습니다.
그러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방식은 잘 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미 국가들을 단합시키는
촉매제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또한 탈 달러화를 촉진시키는 단초로 작용이 되기도 합니다. 최근의
중동의 갑작스러운 isis 출현으로 지속적인 중동의 혼란을 일으킴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사태를 중심으로
러시아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미국의 각종 시도는, 오히려 이러한 일련의 각종 조치들이 비미.
반미국가들의 결속력을 강화시키고 그들의 힘을 더욱더 단단히 결합시키고, 연합을 강화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낼 뿐, 미국이 얻는 직접적인 소득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미.이스라엘이 유발하는 각종 제재와 갈등 유발책으로 인해, 각 지역의 맹주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이란은 오히려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형상으로는 모든 경제지표가 보여주듯이,
역시 미국의 경제지표들(미국채 강세, 달러 초강세, 미국증시 신고가 등)이 완벽한 미국의 승리로
이끄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는, 역시 외형적으로는 미국달러의 패권의 재
강화인 것처럼 보이고, 특히 현재의 달러화의 초강세와 미국증시의 사상 최고가 그리고 러시아 루블화의
끝없는 추락과 더불어 지속적인 하락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는 러시아 증시 등은 달러화의 위상을 그대로
드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외형상의 지표와는 관계없이 이 모든 실질적이고 실물국면은 미국.
달러패권을 질식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달러의 국면은 자산의 함몰기간을 가져올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전 세계인의 모든 부채자산은 순식간에 쓰러질 것이기도 하겠지만, 역시 미국민과 미국
자신도 미국채의 선순환의 달콤함을 맛보는 것보다도 먼저 숨통이 끊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는
국면을 맞닺뜨릴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러한 식으로 미국은 스스로 은연중에 극 상층부의 핵심세력에 의해서, 오히려
세계를 다극화 시키고 지역화 시키는 고도의 숨은 전략을 전개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갈등
수법을 구사함으로써 미국의 달러 패권을 강화시키려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러한 전략을 과도하게
구사함으로써 오히려 그 반대의 효과를, 즉 미국의 패권을 더욱더 약체화시켜버린 결과를 낳고, 반대로
상대방의 세력을 더욱 확대시켜 다극화의 구도로 몰아가는 고도의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국은-- 내부의 극 상층 일군의 그룹에 의해서--스스로 달러의 패권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도록,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시 지금의 이스라엘의 문제도 그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그러한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그 진실을 잘 알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즉, 핵심 상층부의 국제엘리트 그룹은, 그리고 미국의 핵심 상층부의 어느 일군의 그룹에게는
이스라엘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보다도 이스라엘에 아예 중동에서 사라져버린다거나 그 영향력을
최소화 시킨다거나, 그게 아니라면 세계적인 다극화 흐름에 참여하는 것으로, 중동지역의 통합의
흐름에 편승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지금의 과격한 전술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더욱더 빨리 국제적으로 고립화하려는 것
이외의 것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단 두 가지 선택만 있을 뿐입니다. 다극화 흐름에 참여함으로써
생존의 길을 모색하느냐, 아니면 지금처럼 과격화의 길을 계속함으로써 자멸하느냐의 길인 것입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의 길을 터놓음으로써 나름대로 고심을 한 흔적은 보인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과격한 행보는, 정치나 경제 그리고 주변 국가와의 모든 외교적인 측면에서, 지금의 일본의 아베의
뇌 없는 어리석은 행동과도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인간사.만물 넘어의 시선으로 접근, 즉 영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인류의 선.악은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결국 영적 관점으로 눈을 돌릴 때만이 그 윤곽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보이는 만큼이니, 실질적으로 영적으로 얼마나 성숙해지느냐에 따라서 그 크기도 달라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느끼는 만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절대적인 근원과 합류하지 않고서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을 말하기에는 우리 인간의 시각은 대단히 불완전하다는 것이며, 더불어 의식 과학이 아닌, 인간의 탐욕으로 물든 과학, 즉 자본의 과학으로는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와 신의 원리를 찾는다는 것은 요원하다고 할 것입니다.
진리는 끝없는 탐구의 과정 그 자체로 문을 열어가는 것이며, 그것은 곧 종교의 길이기도 하며 또한 신앙의 길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인 진리는 신을 체험하거나 합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함부로 진리를 들먹일 수는 없다는 것이며, 또한 그 누구를 함부로 비판 하거나 평가할 자격은 그 누구에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각 개인의 인간 자신 스스로가 모든 업을 안고 간다는 의미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즉 지옥의 벌은 신이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 자신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가혹한 형벌로써 언젠가는 그대로 자신의 업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당연히 내가 언젠가는 가져가야 할 나 자신에 대한 마땅한 가혹한 형벌이었을 수도 있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에 인간이 판단하는 선.악은 늘 언제나 결함이 있는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절대적인 선.악은 없다는 것이며, 인간이 내리는 선.악 개념은 카르마의 작용 등,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서 개인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늘 변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진리의 길을 제시해주지 않는 어떠한 악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즉 아무리 악한 악이라도 신이 의도하는 것은 그곳에도 진리의 길은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악은 인간이 완전한 신의 길을 가기 위한 과정의 경험의 단계로써, 결코 인간의 길에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역으로 결코 종국에는 용서되지 않을 어떤 악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류의 입장에서 아무리 극악무도한 악이라 할지라도 결국 용서되지 않을 악이 없다라고 한다면, 결국 신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신의 속성은, 사랑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즉 신은 사랑이고, 사랑은 신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신의 속성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결코 신은 모든 인류를, 모든 만물을 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인간사회의 정의의 구현이라는 좁은 의미의 인간적인 신으로 축소되버릴 것입니다. 즉 악한 사람은 처벌하고 착한 사람은 상을 주는 식의 권선징악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바램이 만들어내는 분노의 신과 정의의 신의 개념으로서 너무나도 인간적인 개념으로 신은 추락을 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용서이고 인내이고 자비로움입니다. 단지 모든 악에 대한 처벌은 언젠가는 새로이 정화되는 양심과 사랑의 거울에 비춰질때 오염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스스로 자신을 처벌하는 가혹한 카르마의 작용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은 결코 처벌함이 없습니다. 단지 신의 법으로 카르마의 법칙만 작용할 뿐입니다. 그리고 카르마는 양심과 사랑으로 치유된 인간 영혼의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의 악업에 대한 수치심과 슬픔으로 인한 스스로에 대한 처벌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 사회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미명하에 함부로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서도 않될 것이며, 결코 타인을 함부로 평가해서도 안될 것이며,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은 인간 영혼의 스스로의 책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신의 자연스러운 섭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에게 작용하는 하나의 악 또는 지독한 고통은, 우리가 진리의 길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암시일 수도 할 것이며, 영적진화를 이루기 위한 필요한 단계로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번데기가 되기까지 애벌레는 하루에 자기 몸의 300배를 먹어치운다고 합니다. 수많은 대량파괴가 있고 난 후의 번데기를 걸쳐 결국 나비로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영적으로 진화하고 신의 본성에 합류하고자 열망하는 것도, 결국 이러한 인간의 사회의 부조리와 자신의 내면의 고통이 없이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결코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으로 인간의 영혼이 창조되서 그대로 아무런 악의 고통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신의 본류와 합류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곧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영적 수련의 과정을 밟아감으로써 출발점인 사랑이라는 신의 원천으로 다시 완벽하게 귀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지금 인류에 일어나는 선.악을 접근하는 것입니다. 즉 전 세계적인 지금의 경제 혼란기, 그리고 지속적인 극단적인 양극화 그리고 대량살상, 환경파괴 등 , 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핵심적인 국제 엘리트 그룹(일종의 악의 세력)의 인류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으로,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극심한 혼란의 길을 거쳐 전 지구적인 인류의 영성의 길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필요 과정으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악의 그룹은, 애벌레와 같이, 매우 필요한 촉매제로서 작용을 한다고 넓은 시각으로 한 발짝 후퇴해서 보는 것입니다. 욕망에 가리워진 참 진리는, 결코 그 어떤 물질적인 큰 성공과 권력. 부유함으로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며, 오히려 생존과 같은 큰 시련의 길에서 더 쉽게 참진리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세계적인 정치.경제문제는, 이미 인간의 문제를 넘어서 영적인 문제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의 접근은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대부분 허황된 것으로 보이길 것이기에, 현실의 차원인 현 경제시스템의 등의 위기의 주 원인중의 하나인 이스라엘 문제를 다룸으로써 큰 시각을 제공하려는 마음으로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황한 서두를 늘어놓는 이유는, 한마디로 지금의 전 세계를 불행으로 몰아넣고 있는 사악한 무리들의 이익추구행위도 결국은 우리 인류의 탐욕이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인류 스스로에게 저질로 놓은 각종 패악, 자연을 향한 무자비한 파괴 등의 카르마적인 이치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포와 극단의 과정을 통해서 영적으로 조금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며, 이 사악한 집단들도 역시 하나의 도구로서 결국에는 이들도 선의 세력으로 돌아서거나 용서의 대상으로서 신의 이름으로 포용이 되어질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세계적 지역적 갈등과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원인은 , 국제 엘리트 극 상층부의 두 주요 세력 (이익의 근본적인 기반을 수많은 세계적. 지역적인 갈등들을 모멘텀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즉, 군.산. 이스라엘 복합체 또는 시오니스트을 가장한 세계 평화주의, 또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명분으로 수시로 타국가의 내부를 휘젖는 세계적인 간섭주의 또는 영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미. 이스라엘 복합체 등, 이들의 공통점은 달러기축을 기반으로 이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달러패권주의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적인 엘리트 집단을 의미하는 한축의 그룹과, 그리고 좀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약간의 지역적인 균형과 그리고 지속적인 중산층을 유지케 함으로써 끊임없는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방식의 세력을 총칭하는 다극주의 방식의 이익추구를 의미하는 국제엘리트의 한 축의 그룹 등의 두 개의 그룹을 의미함)간에 의한 헤게모니 전쟁으로 인해 지속 인류를 위기의 구렁이로 몰아넣고 있는 형국입니다.
핵심은 이익의 극대화를 향한 노선의 달리함인데, 인류의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이 두 그룹은 인류에게 결코 선의 세력으로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다만 누가 더 악으로 작용을 하고 , 그에 비해 누가 좀 더 인류에게 좀 더덜 악한 쪽으로(다른 의미로는 좀더 선한쪽으로)보이냐의 문제이지, 결코 인류를 위한 진정한 선한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좀 더 한 단계 더 높은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다극화 전략에서, 이 두 전략적인 차원을 넘어선 선한 의도를 읽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누구도 모르게 작용하는 영성적인 개입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다극화의 전략의 표면은, 인류의 결코 선하지 않는 한축의 국제 엘리트 세력의 궁극의 세계통합을 바라는 다극주의세력의 전략적이라는 측면에서, 역시 그 궁극적인 의도는 결코 선하지 않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한단계 시선을 더 위로 돌리면 즉 영성적인 측면에서는 지금의 자본주의 패턴,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긍긍적인 선의 영향력이 은밀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아쉽게도, 우리 현 세대 인류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크나큰 시련의 시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고통과정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인 것을 넘어서, 우리 인류는 커다란 영적인 성장을 하는 질적인 계기가 주어지지 않겠나 하는 개인적인 판단을 내려본다는 것입니다. 주제가 처음 글을 쓰려고 의도한 것보다는 너무나 매우 확대된 느낌이 드는군요. 자 이스라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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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기사를 인용합니다.
1. 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2979983&ref=A 2. 이스라엘군이 발사한 미사일에 어린이 9명이 목숨을 잃어 충격을 주고 있다. 떨어졌다”고 보도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스라엘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강조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휴전을 촉구했다.한편 이스라엘 가자지구 공격이 3주째 계속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1100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명 사망, 너무 안타깝네요" 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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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2000년 전에 조국을 잃어버렸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3년경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후 그 민족들은 어디론가 ? 완전히 사라졌으며, 남유다(야곱의 12지파중 베냐민 유다지파 등= 유대인으로 지칭) 최종적으로 서기 140년경에 완전히 멸망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보통 남유다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 유대인이라는 공식은 역사적으로 이렇게 분석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종교적인 개념은 매우 광범위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은 2천 년 전에 망했지만, 또한 전체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박해를 받아왔지만, 핵심 상층부 세력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이름으로 여러 국가를 집을 삼아 이동을 하면서, 전 세계 정치,경제를 디자인하는 주도 그룹으로 또는 보조세력이나 배후그룹으로, 흑막의 세력으로서 오랜 역사의 흐름을 주도해 왔습니다. 즉 힘의 흐름 뒤엔 반드시 핵심 상층부의 유대인들의 이동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지난 2천 년 동안 국가라는 안정적인 집은 없었지만, 오히려 외부적으로 보이기에는 그러한 불안정한 조건들이, 핵심 상층부 유대그룹에게는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하는 호조건으로 둔갑이 돼버립니다.
즉 내세울만한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핵심세력은 부담없이 큰 돈을 벌 수 있게 됩니다. 돈이 된다면, 전쟁에는 적과 아군이 분명히 갈리지만, 국가 없는 국제 자본가들인 핵심 유대세력은 양쪽으로 돈을 벌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돈이 된다면 어떤 국가와도 거래를 할 수가 있었고, 어떤 사상도 수용할 수가 있었단 것입니다.
이처럼 국가가 없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민족의 대중들에겐 절실하게 필요하겠지만, 진정으로 최대의 이익,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국가라는 것은 결코 필요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한 국가에 고정되어있다면 많은 면에서 최대 이익을 뽑아내는데 있어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익추구를 향한 끝없는 갈망이 유대인 극상층부의 핵심적인 본질이였던 것입니다. 즉 극 핵심 상층부에겐 결코 국가라는 영토주의 개념은 오히려 거주창 스러울 뿐입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끝없는 최대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으,며, 그러한 관점에서 국가가 필요하다면 국가라는 칼을 때에 따라서 쓰기도 하였지만 오로지 그것은 이익을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지, 그들의 민족을 위한 순순한 목적은 결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목표인 최고의 이익에 거추장스럽다면 국가는 그냥 버려도 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국가는 결코 진정한 최종의 목표이자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이 바로 지금의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핵심 극 상층의 시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금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국가는 성경의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세운 국가가 절대적으로 아니며, 순전히 경제적인 이익의 극대화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 급조된 거대한 정치집단이라는 것을 간파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현 이스라엘 국민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세뇌된 이주 정치집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전 세계적인 종교적 국가적 갈등을 끊임없이 양산해내고 있는 갈등의 근원지로 간주한다 해도 결코 무리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극 상층부의 유대인은 카르타고 , 페니키아 유대인,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휘둘림 당하는 슈메르, 바빌로니아 유대인의 극상층부가 성경의 정통 이스라엘. 유대인과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 즉 아랍 전역에 펼쳐져 있는 중동의 대부분의 지역민들과 팔레스티나. 현 이스라엘 구성원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만약에 민족을 앞세운 국가가 세계의 주역이 된다면 이스라엘의 보통의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겠지만, 그러나 국제적인 핵심 멤버에겐 큰 제약이 아닐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세계를 디자인하고 원하는 대로 이익을 갈취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있어서 외형상으로 들어난 체로는 효율적으로 행동을 취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외형상으로 드러난 상태에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악을 덮어버리는 수단으로서, 대다수의 선량한 유대인 탄압 등의 희생양을 스스로 양산해 내면서 본질을 덮어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즉 가짜 핵심상층부의 유대인에 의한 진짜 대다수의 선량한 유대인 탄압을 의미한다)
최고의 이익을 추구하는 핵심 상층 세력에게는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자유로 울 수 있는 것은, 민족을 앞세운 국가가 없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는 것입니다. 국가는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단지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부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언제든지 버리고 바꿀 수 있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가를 앞세우면 그들의 입지가 매우 좁아져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 세계를 디자인하고 원하는대로 전 세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흑막의 존재로 남아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체를 드러낸 채로 한다면, 최대의 이익을 줄 수 있는 것들의 대부분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인류를 해치는 극단적인 이익의 추구는 전 세계인의 비탄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한이라도 이익을 위해서 노골적으로 인류를 해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정체가 모호한 채인 상태에서 하였다면 , 단순한 음모설이나 아니면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것들로 치부해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국제 엘리트의 핵심 상층부에게 있어서, 국가는 필요한 때마다 바꿔입을 수 있거나 필요에 따라 버릴 수도 있는 일종의 사용하기에 편리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는 것이고, 또한 매우 낭만적이라고 할만큼 매우 유치하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국제적인 자본가에게는 한 영토에 얽매인 영토주의나 그에 따른 애국심과 같은 단어는 매우 거추장스럽고, 어른들이 바라보기에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과 같은 매우 하찮고 코메디 같은 개념에 불과할 정도의 우스갯소리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은 우리가 유대인을 음모론의 중심으로 보고 있지만, 상기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유대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본질을 흐리게 한 하나의 전략적인 차원으로서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긴요하게 사용된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성경이 의미하고 정통 유대인. 이스라엘인은 이익을 추구하는 일군의 세계적인 정치. 경제적 국제 엘리트에 의해서 희생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며, 유대인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흑막의 정체를 지속적으로 모호하게 이끌어가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진짜 최고의 파워는 유대인, 비유대인의 개념을 넘어선 상위 차원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이처럼 국제적인 엘리트 자본가에게는 국가라는 개념은 정말로 하잖은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국가가 필요한 것은 단지 그들의 재산을 불려줄 기회를 줄때라던지, 그리고 그들의 재산을 보호해준다든지, 돈을 벌 기회를 준다라던지나 할 때에는 필요한 개념이고 결코 한 국가의 부가 강해지고 그 국가가 자기자신들의 재산을 손해를 끼치면서도 강대국이 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강대국이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이익에 부합될 때까지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익을 넘어서는 영토.애국주의는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국가는 결국에 붕괴의 국면을 초래하게 되는 필연성을 낳게 될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이익을 해하는 국가의 부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며, 반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의 상황으로 유도가 된다면 국가의 부도는 그 얼마나 환영받을 만한 것인가로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국제적인 자본가들에게 있어서 국가는 한마디로 이익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최대한 주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로 문제입니다. 이러한 기준이기에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국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중국적기 다국적의 의미는 폭넓은 국제적인 감각의 능력의 인물을 포용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세련된 의미를 준다지만, 그 근본적인 배경은 극 상층 국제 엘리트의 무국가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극히 간단한 한 예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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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역시 이제 상기의 관점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전 세계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국제적인 자본가라면, 즉 최고의 이익만을 추종하는 또는 가장 효율적인 이익을 추종하는 국제적인 엘리트들라면, 2000년전에 잃어버린 국가를 찾기를 진심으로 원하는가? 당신이 최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추구하는 핵심 상층부의 일원이라면 진정 국가가 필요하겠는가?
상기에서 여러 얘기를 했지만, 아마도 직접적으로 국제적인 자본가의 심리가 어떤 것인가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래도 국가가 필요하지 않겠는가의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국제 엘리트를 제외한 보통의 국민은 당연히 국가없는 서러움을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지금의 중국의 소수민족, 쿠르드인들, 그리고 팔레스티나인들처럼 말이다.)
어쨌든 이 물음의 취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흑막의 국제적인 엘리트 자본가라면, 결코 민족을 앞세워서 국가를 굳이 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또는 아예 국가를 세우는 것을 반대를 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흑막의 정치를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미련한 이가 있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자신의 민족과 인류에 해를 끼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 만약에 국가를 세워야 할 피치 못할 상황에 처해있다면, 최선의 방법은 가장 작게 설치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애국심이나 민족을 위하는 것과 같은 대의 명분에 떠밀렸을 경우에 말입니다. 즉 표면상으로는 국가를 세우는 것을 반대하지는 못하겠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가를 못 세우게 하거나 세우더라도 극히 영향력이 작은 국가로서 표면에 내세울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외관상 정치상의 이유로 그들의 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애국주의적 세력으로 부각됨으로써 그들 민족의 선한 본보기로서 영원히 존경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로한 관점에서 20세기에 시오니즘 운동을 시작으로 하여, 이스라엘 국가를 갑자기 세웠습니다. 이때 주도적으로 역할을 한 인물이 로스차일드가입니다. 이것은 정확한 사실입니다.
여기서 단지 의문사항은, 그렇다면 과연 로스차일드가 그룹이 그들의 민족 숙원인 이스라엘을 건국하는데 있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가? 즉 최대한 이스라엘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진심으로 노력을 했는가? 이다. 최소한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건국을 하는데 있어서 오늘날처럼 쥐만큼 작은 지역이 되도록은 하지 말았어야 할 것입니다.
역시 결론은 결코 로스차일드가는 혼신의 노력을 하지 않았고, 단지 국가가 필요했을 뿐이고, 하지 않았어야 했다면 하지 않았었을 것입니다. 단지 시오니스틈의 조류에 편승해서 최소한의 영영향력을 줄이면서, 이스라엘 건국의 대한 흉내를 냈을 뿐이다라고 말입니다. 간단히 얘기하면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급조된 국제적인 정치집단의 한 본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진정으로 2000년전의 민족의 숙원을 풀어주기 위해서 세워진 국가가 아니며, 단지 어떠한 정치적. 이익집단(영국의 시오니스트. 그리고 영.미1극권세력)세력의 정치적 도구로서 필요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세워진 국가일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이유때문에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분쟁이 있어왔습니다. 국제적인 큰 분쟁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꼭 포함되었다는 것을 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19세기 ~ 20세기 초에 영국을 집으로 삼고서, 이익과 국제적인 모든 면에서 세계적인 전략을 구사하던 핵심 국제엘리트집단 중에서, 일부 극상층 핵심 자본가 세력이 영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서서히 본거지를 옮기기 시작하자(주로 국제 자본가집단.다극화세력), 이에 위협을 느낀 영토주의인 영국을 기반으로 하는 핵심 국가주의자들은 영국중심의 패권을 지속 유지하기 위해 재빨리 미국을 포섭하게 됩니다(영.미.이스라엘 1극패권주의- 이들의 주된 무기는 바로 급조된 시온주의, 시오니스트라는 이념이였습니다. 좀더 깊게 들어가자면, 카르타고 유대인들에 의한 카자르 유대인-시오니스트유대인-을 이용한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에 대한 여러 수십 가지의 설은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알면 알수록 본질은 더욱더 흐려질 것이다. 본질은 유대인 비유대인을 넘어서 초국적 이익집단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도 급작스럽게 급조됩니다.
즉 영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기존의 영국 중심의 패권을 중심으로 이익을 지속유지하기 위해 (1극패권주의), 유대의 시오니즘(주로 러시아계 아슈케나지, 상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별로 의미를 두지말자)을 선동하여 결국 이스라엘 국가를 급조하였고, 이것은 지금까지 영.미,이스라엘 중심의 1극달러패권구도를 연장시킬 수 있는 주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달러의 1극 패권주의를 유지하는데, 영국의 또 다른 제국주의자들을 상층부(시티 오브 런던)로 하는 군산복합세력과 함께 지금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은 거의 순전히 정통 유대인 의지와는 관계없이 거의 주로 러시아계.독일계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의, 영국중심의 1극패권자들의에 의해 선동된, 시오니즘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급조는 19세기말 프랑스 유대출신 군장교가 독일 스파이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을 원인으로, 테오도르 헤르츨이라는 기자의 시오니즘이라는 민족운동, 정치운동으로 시작으로하여, 결국 유대인의 대부 로스챠일드가의 결정적인 지원을 받아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가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결코 국가라는 집 또는 민족이라는 집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즉 겉으로는 로스차일드가의 주도적인 이스라엘 참여로서 역사적인 기록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속내는 결코 아니였다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건국 운동인 시오니즘이라는 민족운동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기에, 피동적으로 참가하면서 그 국가의 규모를 될 수 있는 대로 최소한으로 줄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동의 석유패권을 장악하고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서 교두보로서의 역할로 이스라엘 건국을 로스챠일드가가 주도했다고 음모론가들은 물론이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속내는 결코 그것과는 매우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영향력을 최소한도로 그치는 선에서 그 국가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세계 근본적인 갈등구도는 유대인과 유대인의 구도로 진행을 하게되는 셈입니다. 즉 정치적인 유대계(아슈케나지. 대략 유대 90% 차지, 일종 1극 달러패권주의) 그리고 상업.자본가적인 유대계(세파르딤,대략 10%차지. 일종의 다극주의)와 대결구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은 이들 두 핵심 상층그룹은, 결코은 기독교 성경에서 묘사된 진정한 민족상 유대인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즉 이들도 단지 필요에 의해, 개종한 유대인을 뿌리로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코카서스를 기반으로 해오던 하자르족->바빌로니아. 수메르, 하나는 기원전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양 국제도시를 풍미했던 페니키안의 족속인 카르타고인의 핏줄이 흐르는 것으로 결코 정통 유대인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둘에 의해서 선량한 정통 유대인들은 역사속에서 끊입없이 탄압을 받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로 가난한 쪽을 많이 차지한 아슈케나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크게 본다면 세계적인 갈등현상의 뒤에는 근본적으로 유대인과 유대인(가짜 유대인들)사이의 끈임없는 암투의 현상으로 표출된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결론은 이스라엘은 결코 순수한 민족정신에 세워진 국가는 아니며, 거의 순전하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급조됐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 중심에는 1극 패권주의자들의 다극화 세력의 다극화를 막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이 동원됐다는 것이며, 그 결과 지금까지도 영.미.이스라엘 중심의 달러패권구도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1946년 처칠의 철의 장막 발언을 계기로, 한국의 6.25 이후로 굳어진 냉전시대는 1극 달러패권체제의 대표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1극패권주의의 대표적인 국가간섭의 대표적인 도구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무기입니다. 간단하게 영.미국.이스라엘은 선을 대표하고 구 소련.러시아.중국. 기타 민주주의를 따르지 않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악으로 상징되어왔습니다. 그렇기에 필요하다면 민주주의와 인권으로 이름으로 즉 선의 이름으로 악을 징벌하기 위해 수많은 국가의 간섭을 해왔습니다. 원조라는 형식의 이름으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결국 그 원조라는 것도 결국 부패구조에 연결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가난을 벗어나는 길은 요원했으며, 단지 선.악의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국가들의 발전은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 철저한 자본의 논리와 정치적인 논리로서 한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는 시기가 1극패권의시대의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어찌됐던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의미가 매우 강하므로, 역시 1극 패권세력에 약화되고 다극화 세력이 우세한다고 했을때 국가의 존망마져 위태롭다고 할 수 있는 매우 곤란스러운 상황에 처할 것은 뻔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즉 다극화 흐름에 편승하여 중동의 통합과 평화에 참여하느냐 아니면 일본의 운명처럼 대륙속에서 고립, 내지는 존립 자체마저도 위험스러운 상황까지 내몰리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오해할 수있는 것은, 서두에서 암시한 것처럼, 마치 다극화 세력이라고 해서 매우 좋은 의도로 해석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로스차일드 그룹은 모든 음모론의 대부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다극세력의 주축으로 판단 간주됨으로 인해서 선한세력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다극화의 의도는 어느정도의 균형적인 세계 경제발전을 의미하고 양극화보다는 그래도 중산층을 많이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1극패권시스템보다는 좀더 긍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제도 자체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주도하는 집단의 의도가 선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한차원 위로 눈을 돌리면, 다극화의 세력의 의도가 인류애에서 출발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 속에서 진정으로 인류를 향한 영성이 매우 높은 집단들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가고자하는 길은 같으나 의도는 하늘과 땅차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계 다극주도의 국제엘리트 그룹의 궁극적인 목표인 단일정부의 의도라는 목표는 있지만, 그것을 향항 진정한 속내는 역시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영적인 개입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형국은, 영적으로 깨인 일련의 집단이, 국제엘리트 그룹의 등에 타고 있는 형국으로 묘사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세계는 매우 음모론적이면서도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성을 높이는 선한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세계경제의 붕괴를 피해 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분명한 것은 결코 물질적인 부의 크기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인간의 근원적인 갈증을 결코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만족만 한다면 욕심을 버린다면, 행복은 우리 안에 당장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앞으로 다가올 충격적인 상황은 인류에게 물질적으로 깊은 상처를 남기겠지만, 그 극한 시련의 과정에서 얻게될 영적인 성장을 희망해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떠한 악한 세력도 구원받지 못할 것은 없으며, 그 어떠한 악한 것도- 인간의 법으로는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은 궁극적으로는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의 의미는, 악한 죄업의 대가는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 스스로를 철저하게 정화하는 카르마 원리를 결코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의 길이 우리의 한 육체가 끝남으로써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멸의 영혼의 신성의 불꽃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진정으로 균형을 이룰 때까지 그리고 원수를 향한 극한의 복수심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의 속성을 완벽히 체득할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는 또 이 세상을 돌고 돈다는 것입니다. [출처]흑막(영성. 국가. 이스라엘)2|작성자 엘도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