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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 런던시로 진입하고 있었는데 태양이 어느덧 뉘엿뉘엿 서산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모든 고대도시가 그러하듯 런던도 템즈 강의 굴곡 만큼이나 고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고대문화는 큰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그만큼 물이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일 것이다.
우선 강이 있으면 농경이 유리하고 운송이 편리하다.
웸블리경기장
템즈 강으로 이동하몀서
그런점에서 큰강 유역에서 문화가 형성된 되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아버지라 할 수있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표현 했다.
이것은 범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고 국가가 성장 되었다는 의미다.
인류의 문명의 발생은 4대 강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이집트 “나일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일강 하류는 상류로 부터 운반된 비옥한 옥토가 퇴적되었다.
런던 탑 아래서
더 샤드
해가 갈수록 나일강 하류에 농경에 적합한 퇴적 토가 늘어갔다.
사람들도 이 비옥한 토지를 찾아 나일강 하류로 이동해갔다.
정착해 농경을 하기위해서다.
그러나 나일강 하류는 범람이 잦았다.
그럴때마다 나일강 하류의 경작지는 모래가 휩쓸고 지나갔다.
농민들은 한탄하며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모래가 휩쓸고 지나간 자신의 토지를 보고 그냥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했다.
박물관인 벨파스트와 더 샤드
템즈 강
이것은 황무지를 다시 개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일은 매년 지속되었다.
범람할 때마다 농기구를 가지고 자신의 토지를 찾아보려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토지를 찾는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찾기위한 연구를 했다.
이것이 기하학과 측량 술이다.
이러한 기하학과 측량 술 덕분에 홍수가 휩쓸고지나간 다음에도 자신의 토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것이 이집트 문명이다.
HMS 벨파스트
시티 쿠르즈 유람선
영국도 북대서양의 거센 파도가 브리스톨해협으로 밀려왔다.
해양성기후의 영향으로 비가 자주 오게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북해로 부터 밀물이 밀려들때면 템즈 강은 범람했다.
이러한 자연의 이변은 이집트 나일강 과도 별반 차이가 없다.
템즈 강의 발원지는 코츠월드다.
칠흑같은 구름아래있는 타워브리지
템즈 강 양안
상류의 분지는 구불구불하게 흐르다가 옥스퍼드에 이르러 강폭이 50m로 넓어진다.
그러다가 다시 좁아져서 런던에 분지를 형성시켰다.
런던 분지에서 다시 폭이 넓어진 강물은 런던 다리를 거쳐 하구에서 북해의 거친 파도와 합류한다.
이러한 런던의 자연과 지리를 가슴에 간직한채 저녁식사를 위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사는 영국 어디를 가나 쓰리코스로 진행되었다.
먼져 야채가 제공되고 다음에 닭고기나 돼지고기가 공급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음식은 약간 짭짤하고 간간해서 유럽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이동했다.
강물은 짙은 흙탕물이 넘실거리고
런던브리지 위에 갈매기만 유유히 날아오르고 있다.
도착한 곳은 힐튼 런던 웸블리 호텔이었다.
그런데 호텔 바로 앞에 종합 경기장인 웸블리 경기장이 있었다.
경기장은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잔과 비슷했다.
정면은 아치형태로 둥글게 휘어져 있었으며 관중도 9만명을 수용한다고 하였다.
1층은 34,303명, 2층은 16,532명, 3층은 39,165명을 수용한다고 하니 쉽게 볼 수있는 경기장은 아니었다.
정면의 대형 아치 구조물은 자전거 휠을 연상하게 하였다.
웸블리 경기장은 유럽축구연맹에서 인정한 5성급 축구장으로, 2010-2011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과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경기가 열린 곳이다.
부두도 보이고
런던브리지를 걷는 사람들도 보인다.
웸블리 힐튼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고 있는데 유리창 밖에 있는 웸블리 경기장의 아치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여장을 풀지도 않은채 경기장으로 뛰어가야 했다.
경기장이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이곳 경기장에서 가까운 곳에 웸블리 아레나 경기장이 있었다.
웸블리 아레나 경기장은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배드민턴과 리듬체조가 진행된 곳이다.
점점 시야가 어두워지기시작하더니 밤하늘을 밝혀주는 별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기장 주변 정취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일몰이 되어 경기장은 문이 잠겨있었다.
경기장에서 내려다본 시내는 런던 이라고는 믿기지않았다.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런던의 새벽이다.
태양이 찬란하게 솟구치고 있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인간이 살아가는 곳은 어디나 비슷한 것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때 세계를 지배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고 있었다.
미국을 돌아보고 서유럽과 동유럽을 여행해보았지만 사람들이 사는 곳은 거의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문화 하고는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가 오히려 비정상이었다.
정상적인 행복은 바로 이것 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서두르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의 기준도 달랐다.
과거 전세계에 식민지를 개척 했던 전성기시대 흥청거리는 경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처절 하지는 않았다.
이곳 선진국에서도 노숙자가 눈에 띄었다.
자본주의 속성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보호무역주의 고삐를 당기고 있다.
그래서 약소국의 경제가 출렁이고 있다.
영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세계를 지배했던 열정과 정열이 상실 되었기때문일 것이다.
잉글랜드 역사상 지금처럼 절망적인 시기는 없었다.
런던아이
엘리자베스 타워와 빅벤
스코틀랜드 지역은 영연방에서 탈퇴 하려 하고 있다.
유럽 경제공동체 국가도 영국을 예전처럼 동료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영국은 연방국가이며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브리타니아에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가 있다.
그리고 아일랜드 섬에는 북아일랜드 자치공화국이 있다.
이 모두가 영 연방국이다.
뜻하지 아나하게 브렉시트가 가결되어 영국의 국론이 분열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영국이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시티쿠르즈와 런던아이
웨스트민스터 브리지 위를 서성이는 사람들
힐튼 런던 웸블리 호텔에서 조식을 마치고 영국의 심장이라 할 수있는 템즈 강으로 이동했다.
세계 의회민주주의의 산실인 영국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다.
1689년 권리장전이래 지금까지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는 흔들림이 없다.
그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국민의식이 높았기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는 지금까지도 세계각국의 모범이 되고 있다.
유럽경제 공동체에서 스스로 탈퇴 함으로서 국론이 흔들리는 듯 보이기는 했으나 국론은 다시 안정될 것이다.
템즈 강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도로는 엄청 지체되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이고 출근시간과 겹치고 있기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Tower Of London에 도착했다.
템즈 강 왼쪽에 “타워 브리지”가 보였다.
“타워 브리지”는 런던 시내를 흐르는 템즈 강 위에 도개 교와 현수 교를 결합한 구조물이다.
런던 탑 근처에 있기때문에 “타워 브리지”라고 이름이 붙었다.
1886년에 착공하여 1894년에 완공되었다.
현재는 런던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완공된 달에만 해도 655번이나 다리가 올려졌다.
현재는 500번 정도가 올려 진다고 들었다.
처음은 수력을 이용해 개폐 했으나 지금은 전력을 이용하고 있다.
트라팔가 광장으로 이동하면서
런던 탑 앞에 집결했다.
시티 쿠르즈 유람선에 승선하기 위해서다.
런던 탑 앞 부두에서 “타워 브리지”를 바라보며 서있는데 바람에 휩쓸려 템즈 강으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타워 브리지”는 “빅 벤”과 함께 런던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다.
영국의 호황기였던 1894년에 총 길이 260m로 완성되었는데, 설계자는 호레이스 존스다.
“타워 브리지”는 런던 탑과 조화를 고려하여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교곽 양 옆에 거대한 탑 두개가 높이 솟아있어 우아하게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맹열 여성들
탑에는 1,000t이나 되는 다리를 들어 올리기 위한 동력 장치가 있다.
지금은 증기 엔진이 아닌 전기 모터를 사용하지만 다리를 들어 올리는 유압의 원리는 건립당시와 동일하다고 한다.
탑 안에는 도개 교의 원리를 알 수 있는 “타워 브리지” 전시관이 있으며 탑이 건설 되었던 당시의 증기 엔진을 전시하고 있다.
“타워 브리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나 두 개의 다리를 연결하여 들어 올리는 이엽도개 교이다.
템즈 강의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배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다.
대형 선박이 지나갈 때마다 양쪽으로 서서히 들리 기시작하여 여덟 팔자 모양을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장관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현선박이 지나가는 시간과 맞아떨어져야 하기때문이다.
드디어 시티 쿠르즈 유람선이 타워 부두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서로 먼져 승선하려고 양보는 뒷전이었다.
한국 사람에게 흔히 있는 풍경이다.
나는 맨 나중에 승선하여 2층으로 올라갔다.
시야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 뱃전에 서있을 수 없었다.
템즈 강의 장관을 놓칠 것 같았다.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넬슨제독 동상
결국 2층에 나열된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사진을 촬영 하느라 간판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사진을 촬영했기때문이다.
나도 어쩔수 없었다.
일어서서 주위를 감상했다.
시티 쿠르즈 유람선이 앞으로 나가자 템즈 강 양안의 건물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있었다.
왼쪽으로 시청이 보였다.
건물이 독특할뿐만 아니라 예술이었다.
새처럼 날아갈수만 있다면 타워 브리지를 건너 시청앞을 걸어보고 싶었다
건물이 옆으로 약간 기울어져있어 계란같기도 하고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어서 런던의 새로운 랜드마크 중의 하나가 될 것같았다.
트라팔가 광장
시청으로 부터 한 발자국 거리에 있는 푸른 빛의 유리건물이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롯데월드 서울 스카이 전망대처럼 보였다.
더 샤드였다.
또 강가에 군함이 한 척 정박되어 있었다.
알고보니 이것은 HMS 벨파스트였다.
용도는 박물관으로 사용 되고 있었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조선소에서 건조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덧 시티 쿠르즈 유람선은 런던 교 시티부두를 지나 런던 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템즈 강 오른쪽에 성 매그너스 교회가 눈에 띄었다.
건물이 화려하여 환상 적이었다.
유람선은 계속 런던 교를 지나 사우스워크 교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템즈 강에 유람선이 수시로 왕래하고 있었는데 중국인과 한국인이 전세를 낸 것 마냥 보이는 사람은 모두 동양인이었다.
강 왼쪽에 뱅크사이드 부두가 있었다.
여기서도 많은 관광객이 유람선에 승선하고 있었다.
다시 왼쪽을 바라보니 언덕배기에 높이 솟아있는 셰익스피어 글러브 극장과 데이트모던 갤러리 건물이 낯선 외국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곳은 미술품이 전시되고 영화나, 연극, 무용 등이 공연되는 곳이라 했다.
다시 밀레니엄 대교를 지나니 올드 오퍼레이팅 시어터와 로즈 박물관 건물이 보였다.
좌우를 관람 하느라 정신을 잃은 사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유람선은 워털루 대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워털루대교와 워털루 광장은 워털루전쟁에서 영국이 프랑스 나폴레옹에게 승리한 기념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적으로 워털루전쟁은 1815년 6월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1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Waterloo)에서 벌인 전투다.
이때 프랑스군이 패배하여 나폴레옹 1세의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6월 22일 영국군함 벨레로폰호에 실려 대서양의 외딴 섬인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영국군의 감시를 받으며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가 1821년 5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나폴레옹의 재 집권은 백일 천하로 끝났고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23년에 걸친 오랜 전쟁도 막을 내렸다.
영국은 워털루전투가 영국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승전이었다.
그래서 워털루광장과 워털루대교가 탄생되었다.
유람선은 계속 웨스트민스터 대교로 이동하였다.
왼쪽으로 런던아이가 보였다.
런던아이는 1999년 영국 항공이 새로운 천년을 기념하기위하여 건축한 것이다.
커다란 자전거바퀴 모양을 한 회전 관람차다.
순수 관람 용 건축 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이야기를 자주하고 있었다.
1999년 12월 31일 20시 처음 운행을 시작하였으나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하자 보완한 뒤 2000년 3월에 일반인에게 공개 되었다.
처음은 향후 5년 동안만 한시적으로 운행할 계획으로 건축 되었으나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런던 탑, 타워브리지, 빅벤 등과 견주는 런던의 상징물로 자리잡아가면서 2002년 영구적인 운행을 하게 되었다.
바퀴에 32개의 관람 용 캡슐이 설치 되어 있고 바퀴가 회전 하면서 다양한 방향에서 런던 시내를 관람할 수 있다.
1개의 캡슐에 총 25명이 탑승 가능하고 한 바퀴 회전하는 데 약 30분이 소요되었다.
런던아이를 중심으로 반경 40㎞ 이내의 도시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고하여 타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첬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좌절감으로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유람선은 어느새 웨스트민스터 부두에 도착했다.
부두에 하선하여 웨스트민스터 대교로 올라갔다.
웨스트민스터 대교 위와 엘리자베스타워 주변은 엄청난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자칫 한눈팔다가 일행과 생이별할 것같았다.
웨스트민스터 대교 북단에 팔라멘트공원이 있었다.
이 일대에 엘리자베스타워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사원과 웨스트민스터궁전 등이 밀집되어있었다.
이 건물들을 바라보느라 관광객들이 일시 멈춰 섰다.
행열이 마치 파도처럼 움직였다.
주변에 볼거리가 많았지만 꼼꼼하게 훑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일행은 다시 우회전하여 A3212 도로를 따라 걸었다.
트라팔가 광장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도로주변은 고급 주택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좌측으로 런던 근위병 교대식 등 영국 왕실의 주요 의식이 거행되는 시설이 보였다.
이것으로 보아 가까운 곳에 버킹엄궁전이 있을것같았다.
버킹엄궁전 관람은 이번 여행 계획에서 빠져있다.
그래서 트라팔가 광장으로 이동해갔다.
멀리서도 넬슨제독의 동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영국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그것은 국가를 사랑하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왜군과 싸우다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장군을 평소에 존경 했다는 영국의 넬슨제독의 동상을 바라보니 감회가새로왔다.
트라팔가 광장은 내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넬슨제독의 일생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때문이다.
넬슨제독은 세계 3대 해전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해전사에 빛나는 역대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과 페르시아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하여 격파시킨 아테네 장군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을 들 수 있다.
트라팔가 해전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영국해군이 격파시킨 전쟁이다.
이전쟁을 트라팔가 해전이라 하며 지휘하한 인물이 넬슨제독이다.
넬슨제독은 지중해를 관리해오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했다.
그러나 프랑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제패하고 영국까지 넘보게 되었다.
영국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영국 왕실은 넬슨제독을 다시 불러들였다.
국가의 부름을 받은 넬슨제독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와 스페인 트라팔가 곶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영국의 해군함선은 27척이고,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 함대는 33척이다.
양측은 일촉즉발의 긴장이 지속되고 있었다.
전세로 봐서 영국이 불리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가 5척이나 많았기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숫자에 불과했다.
양측 진영이 “二”자형으로 대치하고 있는듯 하더니 갑자기 넬슨제독이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기습했다.
양측의 함포와 소총사격으로 바다는 화약냄새가 진동했다.
밀고 당기는 공방전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고 양측간의 해전은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집채만한 파도가 영국함선을 덮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위를 쳐다보니 프랑스 함대는 하늘에 떠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프랑스 수병이 집중 사격을 한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넬슨제독의 허파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혀버렸다.
넬슨제독은 휘청거렸다.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넬슨제독은 지휘봉을 들고 함대를 지휘했다.
그의 지휘를 받은 영국 함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를타격했다.
그러나 지휘관인 넬슨제독은 다리가 휘청거리고 초점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부장은 눈물을 흘리며 지휘권을 넘겨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넬슨제독은 끝까지 지휘권을 인계하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설득하며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와 싸우고 있었으나 실제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함성이 울렸다.
수병 한명이 다급하게 제독 실에 뛰어들어와 “제독 님! 우리가 승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넬슨제독은 스르르 눈을 감더니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넬슨제독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국가를 위해 끝까지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트라팔가 해전의 명장 넬슨제독의 동상이 트라팔가 광장 중앙에 우뚝 솟아있었다.
높이는 50m다.
넬슨제독의 평소 기상을 보는 것같았다.
넬슨제독을 기리기 위해서인지 트라팔가 광장은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고 있었다.
또한 내셔널갤러리 앞에서 화가로 입문하기위하여 묵묵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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