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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1)
* 이집트·이스라엘 초기 기독교 성지순례기 / 통나무 간
우리 동방인들은 예로부터 추상적 개념에 대한 직접적 정의를 거부해왔다.
인간의 지식은 종교적 세계를 공경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는 데서 성립한다는 것, 그것을 공자가 우리에게 갈파하려 했다 함을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경敬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원遠한 사람이었다. 하느님의 율법으로부터 인간을 원遠케 하려는 사람이었다. 하느님을 경敬할 줄만 알고 원遠할 줄을 모르면 그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다. 하느님은 멀리 볼수록 더 바르게 보인다. 가깝게 경敬할수록 그것은 독선과 아집과 편애와 질투와 부귀와 권세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넘어서 인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살고 있다. 이것은 내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예수의 신념이었다.
나일은 적도 부근의 풍요로운 밀림지역의 극대의 강우량이, 강우량이 극소한 사막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문명의 젖줄이었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의 선물이었다.
이집트문명의 성과를 우리는 파라오라는 독재자 밑에서 신음하던 노예들의 잔인한 노역의 결과로 왜곡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구약의 출애굽드라마에서 유추된 그릇된 인상이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이념에 헌신한 공동체의 단합된 모습의 과시였다.
모든 종교나 진리는 형성 중에 있다. All religion is in the making. 완결은 죽음이다.
학계의 추산으로 따지면 정확하게 1578년 동안 이 항아리의 흑암 속에 갇혀 있었던 인류문명의 한 거대한 보고가 인간세의 광명으로 드러나는 그런 위대한 순간이었다.
13개의 코우덱스codex였다.
공자도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라고 말했는데, 명상만 하고 배우의 규율을 등한시하면 엉뚱한 길로 가기 쉽다는 뜻이다.
개인주의적 에레미티즘에 대비되는 집단주의적 수행방법인 세노비티즘cenobitism을 창시한 탁월한 수행자가 바로 파코미우스Pachomius, c.290~346였다.
AD 346년에 열병이 휩쓸어 약 100여 명의 수도승이 희생되었는데 파코미우스도 바로 이곳에서 346년 5월 9일 열병 속에 그들과 함께 영면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관할 하에 약 7000명의 남녀 수도승이 있었다고 한다.
마가는 이집트 콥틱기독교의 초대 교황
유대인 12지파에서 6명 씩 선발된 석학들 72인이 72일 동안 번역한 희랍어 구약성경을 셉츄아진트라고 부른다.
이 마가의 시신을 AD 828SUS, 이슬람이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베니스 사람들이 훔쳐갔다. 이슬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돼지고기로 그 유해를 덮어 갔다고 한다. 이 마가의 유해를 봉헌 성당이 바로 베니스에 있는 상 마르코 성당이다.
현재 마가는 콥틱교황청의 제1대 교황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 장엄한 파로스 등대 건물은 모든 풍랑과 해일을 17세기나 견디어냈다. 그러나 1303년 동부 지중해 전역을 뒤흔든 지진으로 무너져버렸다. 아직도 그 잔재가 주변 바다 속에 파묻혀 있다.
아랍권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나기브 마푸즈Naguib Mahfouz, 1911~2006도 알렉산드리아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평화공존을 외쳤고, 사회주의, 호모섹스, 신神 등 당시 금기시되었던 모든 테마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325년 5월 20일 니케아에서 대규모 공의회가 열렸던 것이다. 이 공의회에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주교의 비서로서 따라간 사람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 아타나시우스였다.
아리우스Arius, c.250~336하면 우리는 후대의 기술 때문에 그를 무조건 안티크리스트의 이단자, 예수인간론의 수호자로 낙인찍고 만다.
아리우스는 하느님은 절대유일하며 창조될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반면 예수는 분명 생산된 존재이므로 하느님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들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한 실체다.homoousion to Patri
니케아 종교회의의 이러한 결정을 많은 사가들이 반아리우스파의 논리적 승리처럼 기술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전반적 분위기는 친아리우스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감각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결단은 정치사적으로 보면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향후 서방중심의 기독교 정통론을 수립하는 데 매우 결정론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이러한 니케아 종교회의의 결정으로 아리우스는 실각되었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알렉산더 주교와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는 소수파였지만 득의양양하게 개선했다.
대체적으로 본다면 아리우스파는 동방중심이었고 아타나시우스는 서방중심이었다. 아타나시우스의 궁극적 승리는 기독교 세계가 서방 로마기독교 중심으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주교가 되자마자 나그함마디 주변으로 성세를 누리고 있었던 수도승 파코미우스를 방문하여 깊은 우정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아나타시우스는 모습을 감추고 6년이 넘도록 벽지에 숨어 살았다.
그를 보호해 준 것은 체노보스키온 근처, 테베사막에 산재해 있었던 파코미우스의 수도원과 그에 소속된 수도승 집단들이었다. 파코미우스는 이미 저승에 가고 없었지만 사막의 수도승들은 자기들의 헤구멘인 파코미우스와 젊은 날 우정을 맺었던 아타나시우스 주교를 자기들의 교부로서 받아들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율리아누스와의 싸움에서 결국 과로 끝에 병사하고 만다. 361년 11월 3일. 아타나시우스는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당당히 알렉산드리아로 입성하였고, 362년에는 알렉산드리아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삼위일체론을 정론으로 확립한다.
366년 2월 1일 마지막으로 화려한 입성을 한다. 그리고 다음해 부활절 메시지에서 27서 정경안을 권위롭게 발표하기에 이른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지 337년 만에야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서의 모습이 최초로 역사의 지평 위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367년 전에는 기독교에는 ‘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과 그에 관한 사도들의 구전과 편지와 개별적인 전기자료(복음서)들만 산재해 있었을 뿐이다.
2007년 7월 1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 이외의 다른 기독교 종파는 결함이 있거나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가톨릭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선포함으로써 전세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우리가 논의해온 초기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고 기독교의 최후보루인 성서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교황이야말로 성서의 근거가 전무하며 그러한 선언을 감행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 로마교황 중심의 하이어라키는 기독교의 본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를 통하여 비가톨릭적인 사고에 대하여 보다 개방적이고 탄력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세를 넓혀왔다.
예수는 원래 지혜로운 사람이었지 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민중도 원래 지적인 민중이 아니라 소외받고 버림받고 수세대상으로서 착취당하는 하층의 군중(오클로스)이었다.
따라서 아타나시우스가 27서 정경체제를 발표했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긴박한 재림(파루시아)의 꿈이 깨져버리고 지상에서의 교회와 교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생겨났다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아타나시우스의 27서 목록은 그가 임의적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기나긴 박해상황과 이단의 발호에 대한 디펜스로 성립한 호교론적 역사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형성된 관념의 총체적 결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27서 정경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정경을 형성시켜 간 교회’ 즉 에클레시아이며, 그것은 선택받은 인간들의 모임 즉 그리스도에 의하여 규정되는 휴먼 네트워크이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의 27서 정경목록에 제일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이 포함된 것은 미묘한 감상을 자아낸다. 그것은 정경의 대상으로서 가장 논란이 ㅁ낳았던 문학서였다. 그것은 이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영감과 저주의 상반된 색깔로 물들인 문제작이었다.
예언은 철저히 역사적인 반면 묵시는 철저히 비역사적이다.
로마 관원의 박해의 눈길을 피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이 해독할 수 없는 상징언어가 필요했다. 그 언어를 당시 기독교도들은 소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코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코드가 사라져서 해괴망측한 언어로만 들리게 된 것이다.
대체로 유일신론은 지상에서의 권력의 통일과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다신은 자연이요, 유일신은 당위였을 뿐이다.
우리가 서구 문명을 여행할 때 대부분의 유적지가 견고한 석조건축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처참하게 파괴된 폐허로 남아있거나, 박물관의 석상들이 손발이 잘리거나 안면이 손상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단순한 세월의 탓이나 전쟁이라는 재해의 탓이라기보다는 기독교도들의 야만적 파괴로 인한 것이다.
유일신관의 존중이 왜 다원주의의 부정을 의미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진정한 유일신론은 종교적 문제를 포함한 삼라만상의 다원성을 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일一은 곧 다多이다. 진정한 유일신은 오로지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오로지 하나인 신은 전체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탈레반의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은 그릇 해석된 유일신론의 횡포에 불과하다.
AD 367년 부활절, 아타나시우스의 정경목록 발표는 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이 무의식의 바다를 그는 이Id라고 불렀고, 이드야말로 인격의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뿌리이며, 이 뿌리로부터 현실감각reality principle을 지닌 에고와 도덕적 가치관morality principle을 지닌 수퍼에고가 분화된다고 보았다. 이드를 지배하는 본능적 충동을 그는 대체적으로 성적 에너지로 파악하였고, 이 성적 에너지를 리비도libido라고 불렀다. 이 리비도의 억압의 역사가 문명의 역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정신분석학은 억압된 리비도의 해방, 즉 성적 억압을 빙자한 모든 윤리적 질곡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20세기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궁극적으로 성적 에너지를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범색론 汎色論, pansexualism은 그럴듯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는다. 그렇다면 위대한 예술가는 다 위대한 색골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프로이트의 범색론에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한 매우 창조적인 심리학자가 카를 구스타프 융이다.
융은 건강한 인간의 총체적 심리의 이해를 도모한 순수이론심리학을 건설하려 했다.
프로이트는 그가 산 시대의 문제에 충실하려 했지만, 융은 시대성과 무관한 보편적 인간학을 정립하려 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에 있어서 인격의 분열을 주안점으로 삼았지만, 융은 인격의 조화를 주안점으로 삼았다. 프로이트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라면, 융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이다. 융의 학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나는 신화를 창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crdate myth, therefore I am”
이 신화창조의 의식의 기층을 융은 집단무의식 the collective unconscious이라고 불렀다.
신화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이 바로 이제 우리가 영지주의 문서라고 애매하게 불러왔던 나그함마디 코우덱스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이론적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뉴로시스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인의 의식세계를 분석하려 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개인무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집단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뉴멕시코의 드넓은 평원에서 하루 종일 엉덩이와 어깨를 욱시글거리며 끝없이 춤을 추고 있는 푸에블로 인디언들the Pueblo Indians에게 융은 왜 그렇게 열심히 춤을 추는지 그 연유를 물었다. : “태양은 우리 아버님이시다. 아버님께서는 매일매일 기나긴 황도를 홀로 걸어가시는 지루한 여행을 하신다. 어찌 우리가 여행의 반려자로서 아버님께 춤과 음악을 들려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루라도 자식된 도리를 하지 않으면 아버님께서는 십 년 뒤 떠오르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하면 이 우주에는 영원한 밤이 올 것이다.”
융은 그 순간 이 우주의 종말을 걱정하면서 그토록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인디언들의 얼굴에서 숭고한 그 무엇을 발견했다. 최소한, 강남부동산값에 매달려 걱정하는 졸부나, 자녀가 서울대학 못 들어갈까 봐 안달하는 아녀자나, 신도들의 연봇돈만 계산하고 앉아있는 일부 성직자들의 신화체계보다는 더 건강한 신화를 그들은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삶은 우주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태양이라는 아버지를 도와 매일 반복되는 출현과 몰락의 과정 속에서 전 우주생명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 자유, 평등, 통일 이런 따위의 언어는 그것 자체가 하등의 실체로서 파악될 수 없는 신화적 존재의 현대세기적 표출이다.
민주세상을 만들겠다고 많은 사람이 생명을 던지는 현대사회나, 태양이 안 뜰 것을 걱정하여 하루 종일 춤을 추는 원시하회나 동일한 아키타입의 신화적 세계 속의 인간세의 모습이다. 그것은 제각기 우리에게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를 던져준다. 신화적 언어들은 사실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우리의 삶에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융에게 있어서 정신병이란 단지 이러한 신화적 가치의 충돌일 뿐이었다.
너무도 하찮을 수 있는, 한 철없는 여인의 행동이 이토록 장시간 전 국민의 관심을 사로잡고 언론을 도배질하고 중요한 대선 국면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면에는, 국민 모든 개개인 의식의 저변에 “꼴림”이라는 리비도적인 충동이 있고, 그 충동이 삶의 재미를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 국민이 다같이 “꼴림”을 유발하는 재미있는 소설을 같이 읽고 있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문학과 예술의 세계도, 정치·경제·사회현상도 모두 이러한 리비도적 에너지로부터 설명해 들어간다. 매우 일리가 있는 설명방식이다.
그러나 융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충동을 성적 충동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 인간은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찿아야 한다고 본다. 살아야만 하는 이유라는 것은 곧 “삶의 의미”을 찾는 충동이다.
어렵게 무녀독남 외아들을 키워가는 수절과에게 과연 성적 “꼴림”이 더 근원적인 충동일까, 그 자식이 영예로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성공신화”가 더 원초적인 충동일까?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모든 인간이 부지불식간에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할 수 없는 중대한 인간현실이다.
기독교 성서의 세계도 이러한 삶의 의미를 창출하는 신화의 한 유형이라고 융은 간주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나의 상식적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타자the Other에 관한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것의 제일의 조건은 타자 앞에 선 나라는 실존의 겸손이다. 모든 신앙은 존재의 겸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타자는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며,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실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세계는 합리적인 분석을 거부할 때가 많다. 나는 그것을 비합리irrationality라고 부르기 보다는 초합리transrationality라고 부른다. 그러나 초합리적 세계의 인식은 반드시 합리적 세계의 벼랑끝 절벽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합리적 사유를 궁진窮盡한 자만이 진실된 초합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World는 기氣에서 리理로 입하지만 신God은 리에서 기로 진입한다. 이것은 매우 난삽한 형이상학적 언어이지만 신의 타자성을 설명하는 매우 좋은 방식이다. 이 세계와 신은 결국 하나의 창진적 과정Creative Process 속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신이 세계를 초월해 있다면, 이 세계도 신을 초월해버릴 것이다. 신과 세계는 서로 초극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진입하고 서로 해후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신의 실체성을 구성하는 모든 신화적 언어는 궁극적으로 나의 실존적 체험 속에서 의미를 지니는 아키타입이다. 따라서 신앙에 대하여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논하거나, 진가眞假의 평점을 구한다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다.
인간 삶의 자리는 오로지 증오 아닌 사랑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구극적 메시지는 모든 종교제도의 교리체계를 통합하고 초극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코우덱스가 카이로의 콥틱박물관에 안치되기에 이르렀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열정의 소산인 이 문서들이 회록지재 回祿之災를 당하지 않고 모든 위험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것은 20세기 인류사의 최대 축복 중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는 어떤 위대한 창시적 인물을 기술할 때 인류가 공통으로 사용해온 아키타입에 속하는 것이다. 부계사회에서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권위에 소속되기 때문에 아들을 창시자로 만들 때는 반드시 인간 아버지는 사라져야 한다.
인성을 인정치 않고 신성만을 고집하는 생각을 신학사에서는 도세티즘Docetism(독일어로는 Doketismus), 즉 가현론假現論이라고 부른다. 어떠한 기독교인도 가현론을 신봉할 수는 없다.
나사렛에서 태어나고(베들레헴 탄생설화는 후대의 첨가) 성장하고, 당대 팔레스타인 민중과 더불어 기존의 질서와 상충되는 운동을 전개했고, 예루살렘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아 억울한 형벌에 처해짐으로써 생애를 마감한 그 어떤 인간!
역사적 예수의 이해가 없는 신앙은 픽션이다. 한국 교계의 가장 큰 맹점은 교리적 예수를 역사적 예수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오류를 광정하는 데 도마복음서는 한없이 유용한 자료를 제공한다.
운명의 법칙에 의하여 지옥에서 무엇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지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부활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은, 인과적 사실의 규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포의 양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케리그마라고 부른다.
인류의 4대 성인 중에서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자는 오직 예수 한 사람일 뿐이다. 복음서라는 예수 전기문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적miracles과 신화myth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적과 부활이다.
우리가 누누이 살펴왔지만,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는 동서고금의 모든 신화의 전형적 양식이며, 그것은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의 한 아키타입일 뿐이다.
예수는 賢人현이었으며,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으며,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진리의 스승이었다.
기독교가 오늘의 기독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위대한 결단 중의 하나가 바로 동일한 인물에 대한 다른 전기문학을 4개나 한자리에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경전으로서 병렬시켰다는 사실이다.
마태, 마가, 누가는 서로 관점觀이 공유共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공관복음서共觀, synoptic Gospels라고 부른다. 즉 공관복음서라는 개념에는 요한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다.
즉 마태와 누가는 기존하는 책인 마가복음을 책상머리에 놓고 그것을 참고해가면서 자신들의 복음서를 집필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661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600개 정도가 마태복음에 들어가 있고, 350개 정도가 누가복음에 들어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논어>는 공자에 관한 이야기story-telling가 없고 오직 ‘공자 가라사대子曰’로 시작되는 공자 말씀만 적혀 있는데, Q자료는 예수의 논어인 셈이다.
그런데 Q자료가 가설이 아닌 사실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사건이 바로 1945년 나그함마디지역에서 아부 알 마지드Abu al-Majd라는 15세 소년이 사바크를 캐기 위해 곡괭이질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도마복음서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도마복음서라는 문서의 출현은 Q자료를 가설적 허깨비가 아닌 실체 實體로 드러냈고, Q자료라는 실체는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혁명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이 아닌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crucifixtion 다시 살아났다resurrection는 기적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예수를 사랑하고 믿는다는 행위가 꼭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전제는 “사도신경Apostolicum”을 외우기를 강요하는 권위조직 속에서는 매우 유의미할지 모르겠다.
예수가 죽은 후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난 그 부활한 예수는, 예수와 똑같이 생긴 야고보가 예수의 사후 교단을 수습하기 위하여 위로방문하러 다닌 스토리들이 와전되어 기록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 바울에게서 이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다.
이 산상수훈은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것으로 Q복음서에 속하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복잡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맥심maxim 같은 것이 결국 몇 줄의 언설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그들에게 천국을 선포하는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패러독시칼한 정언명령을 던졌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인간에게는 진정한 회심(메타노이아), 즉 천국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아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인 자기 부정이요absolute self-surrender, 자기 던짐이다. 그것은 불교가 말하는 멸성제滅聖言帝, the holy truth of self-annihilation와도 같은 것이다.
현세와 천국은 가치의 전도를 요구하는 사태이다.
천국의 도래에 관한 믿음을 종말론적 환상 속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죄악에 대한 당장의 철저한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러한 믿음 속에서 긴박한 역사의 전변을 결행하려 했다. 그 믿음에 철저한 나머지 그는 죽음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션 임파서블에 대한 정직한 선택이었다. 예수의 삶을 투시하는 시각에는 항상 이와 같이, 지혜로운 윤리적 교사의 너그러운 이미지와 말세론적 투사로서의 긴박한 이미지가 겹쳐 있다.
그러나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예수의 본질은 묵시담론이 아닌 지혜담론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12제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 사후의 초기공동체의 한 창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 Q16)
이것이 바로 지혜담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핵심사상이었다.
내가 한국 기독교에 관하여 바라는 것이 있다면 기독교를 구성하는 모든 문헌이나 언어나 가치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개방된 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다양한 보편적 가치의 지평 위에서 형량되어야 한다.
(필드박사는 말한다.) 그는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대한 혁명적 발상을 한 사람이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그리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해석, 이 모든 것이 종말과도 같은 인간외적 전제와는 다른 인간 실존의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이야기는완벽하게 바빌론의 신화를 각색한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의 창안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자기이해 속에는 ‘신의 아들’이라는 의식과 ‘종말로서의 싲바가’가 반드시 내포된다. 나의 죽음으로써 타인의 카르마業가 완벽하게 해소될 수 있다는 구원의 사상이 예수의 묵시론이었고 혁명관이었다.
종교란 도대체 무엇인가? “땅과 하늘의 갭을 메우려는 노력이다. 그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홍구鴻溝가 있다. 그 도랑을 불교도들은 대각大覺을 통해, 유교도들은 인의仁義를 통해 넘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만을 통해 넘는다.
예루살렘성전 멸망 이후 기독교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은 알렉산드리아의 다이애스포라였다
그러니까 639년 이전의 이집트 역사는 아랍과의 관련성이 전무하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계를 오늘날의 대적적 감정의 색안경으로 들여다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출애굽이라는 문학적 사건의 상징적 이미지 때문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적대적인 관계로 파악하기 쉽지만 모세 이후의 역사에 있어서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끊임없는 교섭의 한 울타리 속에 있었다.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표현한 것은 나일강 주변의 풍요의 꿈을 팔레스타인에 투사한 것뿐이다.
기독교는 예루살렘이나 로마에서 탄생된 것이라고 규정짓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의 리더십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 주류를 가장 적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된다.
야고보는 예수의 형이었고, 예수 사후 예루살렘교회를 주도해 나갔으며 27편 중의 하나인 야고보서의 저자라고 했다.
유다는 예수의 쌍둥이 동생으로, 도마복음서를 지었고, 또 정경에 편입된 유다서의 저자라는 설도 있다.(유1:1)
최소한 예수설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가족의 다양한 전승은 매력적 주제였다. 그러한 환상은 최근의 <다빈치 코드>에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감정일 수도 있다.
도마복음서는 1945년 12월 나일강 상류지역에서 어느 이집트 소년의 곡괭이질에 부딪혀 우연히 발견된 고문서이지만, Q복음서는 신학자들이 문헌 비평의 방법을 통해 공관복음서 속에서 150년 동안 발굴해온 가설적 문헌이었다. 마태·누가복음서 중에서 복음서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가자료를 제외한 부분 중에서, 마태와 누가에 공통된 부분을 그냥 자료Quelle라는 의미로 Q라고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Q에 관한 논의는 철저히 신학이론전문가들의 연구영역 속에서만 머물렀고, Q의 모습이 일반에게 공개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도마복음서가 출현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성적 가설이 아닌 물리적 사실로서 우리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그 드러난 모습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114개의 로기온자료로써만 구성된, Q에 대하여 1세기 반 동안 구상해왔던 바로 그 모습이었던 것이다. 도마복음서는 꿈에 그리던 어록복음서saying gospel이었던 것이다. 이 어록 복음서의 출현으로 Q는 단순한 자료가 아닌, 도마복음서와 똑같은 문헌양식을 지닌 또 하나의 어록복음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최초의 설화복음서인 마가복음의 저성연대를 예루살렘멸망을 전후로 AD 70년경으로 잡는데 신학자들의 이견이 없다(실제로 예루살렘멸망이라는 사건이 내면적으로 심화된 시기. 그러니까 AD 75년경으로 잡아야 한다). 따라서 Q복음서는 AD 70년 이전의 문헌임이 확실해진다.
도마복음서는 Q복음서보다도 그 성격이 전일하다. 즉 지혜담론이 거의 전부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의 핵심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종말론적 암시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이 미래적 사건으로 대방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현재화되어 있다.
@@@ 이 책을 읽고 나의 종교인 카톨릭에 맞춰 ‘하느님’이라고 고쳐서 표기한 다이제스트임을 밝혀둔다. 좀더 내 자신과의 친근감, 소통을 위한 방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