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6월 17일 미국의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했다. 이어서 미국 횡단비행과 상업비행 발전을 위한 운동에도 참여했다. 1935년에는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까지의 위험한 항로를 단독으로 비행하는 데 최초로 성공했다. 2년 후에는 조종사 프레드 누넌과 함께 쌍발기 '로키드 엘렉트라'로 세계일주 비행을 시작했는데, 국제 날짜변경선 근처 태평양 중심부에서 실종되었다. 남편인 출판업자 조지 P. 퍼트넘이 그녀의 전기 <솟구치는 날개 Soaring Wings>(1939)를 펴냈다.
1906년 6월 17일 일간신문 <만세보>가 창간되었다. 대한제국 말기 천도교에서 펴낸 신문으로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의 발의로 이인직이 신문발행 허가를 받았다. 사장은 오세창, 총무 겸 주필은 이인직, 편집 겸 발행인은 신광희·권동진·장효근 등이었다. 블랭킷 배판 4면 체재에 7단제를 실시했고, 한자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한글 토를 달았다.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이인직의 <혈의 누>·<귀의 성>을 연재해 국문학사상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남겼다. 경영난으로 이듬해 이완용 내각의 친일기관지인 <대한신문>으로 개제되었다.
美 워터게이트 사건 政街 강타/1972
1972년 6월17일 새벽2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됐다. 단순 절도죄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 사건이 미 정가를 강타한 사건으로까지 비화한 것은 한 사내가 워싱턴포스트지 편집국장 브래들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였다. 취재지시를 받았으나 막막하기만 했던 신참내기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딥 스로트(Deep Throat)’란 사람이 결정적인 제보를 해왔다. 백악관이 관련됐다는 것이다. 닉슨 대통령과 워싱턴포스트지의 쫒고 쫒기는 추격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건의 파장이 커져 FBI가 나서자 닉슨은 CIA를 통해 수사를 중단시키고 사건에 연루된 참모들도 해임시키며 자신의 무관함을 강변했다. 그러나 닉슨도 이 사건의 은폐공작을 알고 있고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모두 녹취된다는 증언 등이 속속 등장하면서 닉슨을 궁지로 몰아갔다.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제출한 녹음 테이프도 일부가 빠진데다가 결정적인 대목까지 지워져 오히려 의혹만 키웠다.
결국 하원이 대통령 탄핵을 가결하자 닉슨은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해야 했다. 1974년 8월8일이었다. 이때부터 역사는 닉슨을 ‘중국을 처음 방문한’이 아니라 ‘재임 중 물러난 대통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딥 스로트’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쌓여있다.
소설가 채만식 태어남, 사망/1902-1950
◀ 채만식
1930년대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 등 일제하 식민지 현실을 비판한 ‘풍자소설’로 주목받았던 작가 채만식이 1950년 6월 17일 6ㆍ25직전 고향 근처에서 병고로 사망했다. 이날은 그가 세상에 나온 지 꼭 48년째 되던 날이었다.
전북 옥구에서 태어나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중퇴한 그는 귀국 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도 활약했다.
그는 1924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세 길로’라는 작품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했으며, 식민지 하의 왜곡된 사회와 경제질서를 풍자하는 소설들을 주로 썼다. “시대의 허위에 대해 민감했고 또 진지했던” 그는 초기에 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 동반자 작가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끝내 카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적인 기반을 굳혔다.
대표작으로는 ‘탁류’와 ‘태평천하’ 등이 있으며 ‘치숙’ ‘소망’ ‘패배자의 무덤’ 등 풍자성이 짙은 단편집도 계속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은 창작활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사립학교 교원으로 또 기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2002년 8월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5개 단체에서 발표한 ‘일제시대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기도 했다.
구노/Charles(-Francois) Gounod
1818. 6. 17 프랑스 파리~1893. 10. 18 파리 근처 생클루.
프랑스의 작곡가. 아버지는 유명한 화가,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 치는 예술적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1836년 파리음악원에 입학, J.F. 알레베에게 대위법을, F. 파에르와 르쉬에르에게 작곡(作曲)을 배웠다. 39년에는 칸타타 《페르낭(Fernand)》으로 로마대상을 받았고 3년간 로마에 유학했다. 로마에서 종교음악에 관심을 갖는 한편, 팔레스트리나의 지도 아래 음악을 깊이 연구했으며, 41년에 초기의 중요한 작품인 미사곡을 로마에서 초연, 이어서 레퀴엠 등의 종교곡을 썼다. 독일을 거쳐 파리에 돌아온 그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와 합창장이 되어 신학을 연구하는 한편 합창곡을 썼는데, 오페라는 우연히 사귄 폴린 비아르도를 주연으로 하는 《사포(Sapho)》를 쓴 것이 최초이다. 이 오페라는 51년에 공연해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10여 곡의 오페라곡을 쓰는 동기가 되었다. 그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한 프랑스 오페라의 명작 《파우스트(Faust)》는 그의 네번째 오페라로서, 59년에 초연되었는데, 10년 후에 다시 손을 대어 발레를 첨가시킴으로써 확고한 성공을 거두었다. 《파우스트》 이외의 것으로 제일 성공한 《로미오와 줄리엣(1867)》은 정성들여 쓴 아름다운 음악이 담겨 있으며, 관현악이 성부(聲部)를 잘 살려 주고 있다. 그러나 구성적 균형에는 신경을 쓰고 있어도 형식에는 별다른 신선미가 없다. 70년에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는 런던에 피난, 5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로열 앨버트 홀을 위해 칸타타를 썼다. 75년에 파리에 돌아온 뒤에도 오페라를 썼으나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고, 만년의 10년간은 조용한 생활을 즐기면서 종교에 심취하여 3개의 오라토리오 《토비》 《속죄》 《죽음과 삶》 등을 썼다. 《아베마리아》 《세레나데》 등의 가곡이 유명하다.
스트라빈스키/Igor (Fyodorovich) Stravinsky
1882. 6. 17(구력 6. 5)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오라니엔바움~1971. 4. 6 미국 뉴욕 시.
러시아 태생 미국의 작곡가.
특히 〈불새 The Firebird〉(1910 초연)·〈페트루슈카 Petrushka〉(1911)·〈봄의 제전 The Rite of Spring〉(1913)·〈오르페우스 Orpheus〉(1947) 등의 발레 음악으로 유명하다.
러시아 태생 미국 작곡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스위스·프랑스·미국 등지에서 거주하였으며, 20세기 음악의 흐름의 선두에 서서 예술음악의 전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마린스키극장의 유명한 베이스가수인 관계로 일찍부터 음악과 친숙해졌지만, 양친의 권유로 관리가 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20세에 작곡가가 될 결심을 하고 N.A.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의 기초를 배워 1907년 4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 E장조(op. 1)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발표한 《환상적 스케르초(1908)》와 《불꽃(1908)》이 1909년 2월 러시아발레단의 주재자 S.P. 디아길레프에게 인정받아, 이 두 사람의 콤비에 의해 발레단은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파리에서 초연된 그의 3대 발레작품 《불새 (1910)》 《페트루슈카(1911)》 《봄의 제전(1913)》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민화풍의 제재를 사용한 것으로, 러시아민요풍의 5음 내지 6음의 선율과 대편성된 오케스트라의 참신한 연주, 마디를 무시한 복잡한 리듬, 그리고 격렬하고 원색적인 색채감과 힘에 넘친 음악으로 파리와 유럽의 음악계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의 10월혁명으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스위스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우(1916)》 《병사의 이야기(1918)》 등의 작품을작곡하여 다음의 신고전주의의 작풍을 준비하였다. 20년의 《풀치넬라》에서 45년의《에보니협주곡》까지는 신고전주의의 양식에 따라 작곡한 곡들로, 이러한 일련의 작품은 G.B. 페르골레시·J.S. 바흐·F.J. 하이든·L. 베토벤 등의 고전주의음악을 모델로 삼았다. 또한 《11개의 악기를 위한 래그타임(1918)》을 작곡하여 재즈에도 관심을 가지는 한편, 탱고·왈츠 등의 대중음악에도 접근하였다. 34년에는 프랑스국적을 취득하여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 자신의 작품을 연주함과 동시에 레코드나 자동피아노를 위한 녹음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39년 9월 하버드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연인 베라와 함께 미국의 서해안에서 영주할 것을 결심하였다. 미국에서 그는 작품의 개정판을 내는 데에 힘을 쏟았으며, 많은 작품을 편곡하였다. 48년에 만난 젊은 작곡가 겸 지휘자인 R. 크라프트를 조수로 삼아 《난봉꾼의 행각(1951)》 《7중주곡(1953)》 등을 작곡하여 창작활동을 재개함과 동시에 자신의 작품의 지휘자로서 세계 각국에서 공연하였다. A. 쇤베르크가 죽은 51년부터는 12음기법에도 흥미를 가져 《칸티쿰 사크룸(1955)》 《설교·설화·기도(1961)》 《레퀴엠 칸티클즈(1966)》 등의 12음기법에 따른 종교음악을 많이 남겼다. 71년 4월 6일 뉴욕에서 죽었으며, 생전에 그가 사랑하여 《칸티쿰 사크룸》을 헌정하였던 베네치아에 묻혔다.
1703년 감리교회 창시자 존 웨슬리 출생
◀ 웨슬리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창시자이다.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영국 링컨셔(Lincolnshire)의 엡워스(Epworth)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국교회 신부인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잔나 웨슬리(Susannah Wesley)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태어났다.
1714년 1월 28일 웨슬리는 런던의 챠터 하우스에 입학하였다.
1720년 6월 24일 여름에 옥스포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1725년 9월 19일 주일 옥스포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의 교회당에서 웨슬리는 포터(Potter) 감독에 의해 영국 국교회의 집사사제(deacon;부제)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그는 토마스 아켐피스(Tomas a Kempis,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와 테일러(Jeremy Taylar,1613∼1677)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The Rules for Holy Living and Dying)이라는 책과 로우(William Low,1686∼1761)의 "중대한 부름"이라는 책과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이란 명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거룩한 삶(holy living)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하였다.
1726년 3월 17일 웨슬리는 옥스포드의 링컨 대학(Lincoln college)의 특별연구원(fellow)이 되었다. 이로부터 25년 이상을 링컨 대학에 있으면서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학, 시가 신학등 그의 연구 방면은 상당한 범위에 걸쳐 있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웅변가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1727년 8월부터 2년간 엡워드 교구에서 부친 사무엘 웨슬리를 도와 일했다.
1728년 9월 22일 웨슬리는 장로사제(elder:사제)로 서임되었다.
1729년 웨슬리는 옥스포드의 링컨 대학의 부름을 받아 돌아오게 되었다. 그 당시에 웨슬리는 그의 동생 챨스 웨슬리와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을 만들어서 활동했다. 이 모임의 목적은 참된 기독교적 품격을 형성하기 위해, 성경연구, 영성훈련과 명상, 기도와 예배, 사회적 실천 등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실행하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이 모임의 사람들을 규칙쟁이(Methodist)들이라고 불렀다. 이 말음 나중에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이름이 되었다. 이모임은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줄 운동이 되었고, 감리교회를 태동하게 하였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레의 부친인 사무엘은 72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사무엘이 죽은 이후 엡윗교회의 목사직을 웨슬레가 맞았으나 끝까지 하지 못하고 더욱더 큰 꿈을 앉고 옥스포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1735년 10월 18일 오글레돕 장군과 함께 220톤의 "시몬즈"호를 타고 미국선교를 떠났다. 그러나 조지아(Georgia) 선교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1738년 2월 1일 웨슬리는 본국에 도착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잇(Aldersgate)가에서 모인 한 저녁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던 중 8시 45분경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 체험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는 확신을 선사받게 되었다. 그 후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운 은총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1742년 7월 23일 웨슬리에게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정신적인 지주가 되셨던 수잔나 웨슬리는73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1742년 브리스톨에서 처음으로 속회(Class meeting) 제도를 시작하였다. 그의 신도회(Society)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상호 유기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이 체계는 오늘날까지도 감리교회에 존속하고 있다. 속회는 한 신도회를 보다 작은 단위의 집단으로 나누어 거기에 지도자 한사람 씩을 두어 지도 감독하게 한 것이다.
1744년 첫 연회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감리교회의 시작이었다.
1769년에 북아메리카에 메도디스트교회를 창설하였는데 그때 나이는 이미 70고령에 이르렀다.
1791년 3월 2일 오전 6시 88세의 생을 일기로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갔다. 1938년부터 52년간 그는 4만회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대체로 하루에 2회의 설교를 하였고 하루에 4-5회 설교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52년간 그가 여행한 거리는 334,672km(매년 6,436km)였다.
그밖에
1999년 모리스 그린, 남자 육상 100m에서 9초79로 세계신기록
1998년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의사당건물을 점령
1997년 국무회의, 러시아와의 '형사사법공조조약안' 의결
1996년 '패러다임 이론' 창시한 토마스 쿤 사망
1994년 김일성, 카터 전미국대통령과 회담. 남북정상회담에 동의
1994년 미국 미식축구선수 O.J.심슨, 전처 살해혐의로 체포
1994년 제15회 월드컵 미국서 개막
1992년 한글 로마자 표기법 단일안 합의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2호 양주별산대놀이 예능보유자 고명달씨 별세
1989년 헝가리 개혁파의 기수 나지 전총리 복권
1986년 해경, 충남 서산 앞바다서 표류중인 중국선박(선원19명) 보호중이라고 발표
1983년 교황, 폴란드 방문중 계엄해제 자유노조 부활 요구
1982년 갈티에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포클랜드전쟁 패전 책임을 지고 사임
1980년 계엄사, 부정축재 국기문란 혐의로 329명 지명수배
1977년 국무회의, 임시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안 가결
1971년 미국-일본 오키나와 반환 협정 조인
1970년 부산항과 일본혼슈 시모노세키항을 잇는 부관 카페리호 부산 입항
1967년 중국, 수소폭탄 실험
1960년 곽상훈 국회의장.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권한을 대행
1953년 동베를린서 반정부데모 격화
1950년 아랍연맹7개국중 5개국 아랍집단안보조약에 조인
1950년 소설가 채만식 사망
1950년 덜레스 미국 국무성 고문 내한
1950년 신장이식수술 세계최초로 성공
1947년 팬아메리칸 항공, 최초로 세계일주항로 개설
1944년 아이슬란드, 덴마크로부터 독립
1944년 일제 미곡강제공출제 실시
1943년 독립운동가 이원대 선생 사망
1931년 제6대 총독 우원일성 임명
1925년 제1회 전국중등학교야구연맹전 개최됨(~6.30)
1925년 제네바 무기무역국제회의서, 독가스사용금지 조약 조인
1919년 임시정부, 사료 조사 편찬부 설치
1904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 120명 인천 출발
1902년 독일.프랑스.러시아 3국 공사, 러시아공관에 모여 철도, 광산 등의 이권탈취 모의
1902년 채만식 출생
1901년 청나라, 미국 의정서 조인
1895년 일본, 대만에 총독부 설치
1867년 고종4년, 육전조례 간행
1862년 1858년 인도의 초대 부왕 영국의 정치가 존 캐닝 사망
1789년 제3신분을 중심으로 프랑스 국민의회 결성
첫댓글 눈길을 끄는 기사가 많네요..위험한 항로를 단독으로 비행하는 데 최초로 성공한 간 큰 여자 아멜리아 에어하트, 만세보 창간에 채만식님의 글,,워싱턴포스트지의 신참내기 기자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불붙인 워터게이트까지...잘 보고 갑니다..^^
채만식의 단편이 자료실에 있는 거 아시죠?
그럼요~~ 당근..읽어 봤지요~~ 다른 글들도 감사히 읽었지만..특히, 이해인님의 시... 너무 너무 잘 읽었습니다. 다운 받아서 늘 곁에 놓고 있답니다..구름님!! 감사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