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모라는 '라디오 매니아'가 있었다. 그의 별명은 '선생님 한 가지만 더'. 8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라디오 제작부, 편성부, 생방송 주조정실 등에 수없이 전화문의를 해 오고 있는 그는 원래 정부 모 부처의 꽤 높은 직위를 가진 공무원이었다고 전한다. 그가 방송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대충 이러하다. 현재의 KBS가 국영방송이라는 타이틀로 운영되던 70년대, 그는 국가 기관의 장비 발주를 의뢰받던 부처에서 일을 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외제 일색의 고가인 방송 기재는 C모씨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신비스럽던 방송 프로그램이, 눈 앞에 놓인 이런 장비를 통해 제작이 되다니! 그의 방송에 대한 동경은 점점 더 깊어진다. 굳이 표현을 달리 하자면, 방송 장비(Hardware)에 대한 호기심이 방송 프로그램(Software)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는 과정이니, 일종의 내재적인 근대화를 이룬 셈이다.
처음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단순히 즐기는 차원에서 출발했던 그였지만, 이윽고 변화무쌍한 편성이나 운행 쪽에 관심분야가 바뀌어 간다. 그래서 스스로 각 방송사의 편성표와 진행자를 노트에 기록하거나, 매일 매일 달라지는 생방송과 녹음 리스트를 뽑고, 스포츠 중계가 편성된 날에는 방송사가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 파악해 간다. 그리고 그 습득 방법은 오로지 전화. 하지만 방송사 제작진이 한두 번도 아니고, C모시의 궁금증을 일일이 만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굉장히 예절이 바른 사람이다. 집요한 질문 그 자체가 문제였을 뿐, 허튼 말투나 기분 나쁘게 하는 어휘 사용, 반말 따위가 문제가 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게다가 그가 더 이상 전화 걸기를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쪽에서 아무리 인간적인 모욕을 주거나 욕을 해 대고,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등 공갈 협박을 해도 그는 단 한번도 맞대응을 하거나 화를 내는 적이 없다. 단지 잠시 후에 감정 따위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는 듯. 먼저와 같은 톤으로 준비된 질문을 해 갈 뿐이다.
그는 방송사에 전화를 걸면 PD든 아나운서든 엔지니어든 그저 허드렛일을 하는 청소 아줌마든 언제나 상대방을 '선생님'으로 호칭한다. 그리고 자신의 호기심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의 반복된 질문은 '3곱하기 3'의 시스템을 유지한다. 세 번을 잇달아 물은 다음에 전화를 끊고. 다시 질문거리 세 개 준비한 후에 또 전화를 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질문과 질문 사이의 접속어는 반드시 "선생님,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이다. 과연 오늘의 주인공 C모씨가 도대체 어떤 질문을 그렇게 했냐고? 지금부터 '시추에이션 다이얼로그'(상황대화)로 재현을 해 보겠다. "선생님, 오늘 야구중계가 몇 시에 편성이 되었나요?" "네, 6시30분부터 9시까지입니다." "선생님,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그러면 경기가 9시를 넘기면 어떻게 됩니까?" "네, 스코어를 보고 차이가 많이 난다 싶으면, 도중에 끊고 9시 정시 뉴스로 넘어갑니다." "선생님, 그러면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만, 만일 스코어가 2점이나 3점차로 애매한 상황이며 중계가 어떻게 됩니까?" "그거야 운행책임자가 재량 것 알아서 처리를 하죠." 이쯤 돼서 얘기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고 안심을 하면 오산이다. 2,3분 후에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그의 질문은 이어진다. "선생님, 우천으로 경기가 취소되는 경우는 보통 몇 시에 통보가 오나요." "네, 오후 4시쯤 결정이 납니다." "선생님, 그럼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비가 와서 게임 중지(서스펜디드 게임)가 선언되면, 그 때부터 정규방송으로 돌아가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그 때 정상적으로 돌아간 방송은 녹음입니까? 아니면 생방송입니까?" 여기까지 오게 되면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도 정수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개는 이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C모씨가 언제나 방송사 관계자를 괴롭혀 온 것만은 아니다. 그는 때로 결정적인 공로를 세우기도 했으니 대표적으로 한 가지만 소개할까 한다.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이 있던 때의 일이다. 밤 8시부터 11시까지 우리나라와 라이벌 국가(일본 또는 중국으로 기억함)의 배구중계가 들어 있었다. 11시까지라면 라디오 밤 프로그램의 고전인 '별이 빛나는 밤에' 가 반 토막 방송으로 편성이 된 셈이다(방송쟁이들은 이를 '별밤 1.2부가 죽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담당자가 실수를 범해 '배구중계' 라고 써야 할 것을 '야구중계' 라고 편성표에 기재했던 것이다.
사실 배구이든 야구이든 현장을 연결해서 중계를 내 보내면 그 뿐이겠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배구는 야구에 비해 시간이 훨씬 짧다는 것. 그 차이가 1시간으로 결국, '별이 빛나는 밤에'는 정상 방송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자칫 대형 방송사고를 불러일으킬 뻔한 이를 일깨워 준 것이 바로 C모씨다. 당일 오후 6시쯤에 벌어진 상황을 다시 재현해 본다. "선생님, 오늘밤에 야구중계가 편성이 되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한 가지만 더 여쭙겠는데요. 혹시 그것 배구중계 아닙니까?" "아닌데요. 편성 상으로는 분명히 야구중계인데요." "선생님, 한 가지만 딱 더 묻겠습니다. 오늘 한국팀의 야구경기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야구중계 맞습니까?" 워낙 '악명이 높은 그'(?)였던지라 성의 없이 답변을 해 주던 운행 담당자도 이쯤 되면 의심이 될 터이다. 과연 확인을 해 보니 '배구중계' 였던 것이다. 그 때서야 1시간 만 녹음해 놓고. 지방에 쉬러 갔다는 별밤지기인 '이문세'를 10시 이전까지 부랴부랴 대령해야 했는데,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가 없으니 방법은 요원했던 것이다. 결국 집 나간 미아 찾듯 이 방송 저 방송에 대고 "별밤지기 이문세는 즉시 돌아와라! 스튜디오 비어 있다!"고 외치는 헤프닝 끝에 무사히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퀴즈를 하나 내면서 마무리할까 한다. 5공화국 초기만 해도 오후 5시 정각에는 애국가와 함께 국기 하강식이 방송됐다. 어느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C모씨가 전화를 걸어 왔다. "선생님, 오늘은 비가 와서 국기 게양식도 없었을 텐데, 국기 하강식이 방송됩니까?" 이 퀴즈에 대한 정답은 과연 무엇일까? 모범답안은 '국기 하강식이란 상징적인 행위로 봐야 하며 정상 방송됨' 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난다면 살아있는 전설 C모씨의 에피소드가 아닐 것이다. "선생님,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국기 하강식은 로컬(지역마다의 자체방송)입니까? 아니면 릴레이(전국방송)입니까?"
그만!!! 제발 그만~~~~~!!!
조정선 MBC-FM 4U PD
출처 : MBC FM 91.9MHZ MAGAZINE 10월 호
혹시 중복인가요?
저는 오늘 아침에 스타벅스에 갔다가 MBC FM 매거진을 봤어요.
MBC FM 91.9MHZ MAGAZINE → 이런 잡지가 나오는지도 몰랐는데 재미있네요.
저 C모씨라는 분도 정말 강적이고 ㅋㅋ
첫댓글 낼 모레 면접. 긴장만 되고, 준비도 이렇다하게 못하고 여기만 들락날락하다... 배꼽빠지게 웃고 기분 좋아져서 나갑니다. 재미있네요. C모씨 원츄 *^^*
이 글도 재미있군요.. 저도 면접을 준비하고 있는데 오늘 이 글과 정형근, 한나라당 제거대상 1호란 글을 읽고 참 많이 웃었습니다. 기분 아주 좋아졌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