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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본성 속에는 하나로 어우러져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는 호방한 기마민족의 기질이 내재되어 있다. 북방민족의 영웅적 기질(양: 동적기질)뿐 아니라, 남방민족의 학문과 예술을 즐기는 선비적 기질(음: 정적기질)이 조화되어 있다.
노래부르고 춤추고 잘 놀며 예술을 즐긴 고구려 백성들
“그 나라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이것은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중국의 다른 문헌들도 거의 모두 이와 비슷한 기록을 하고 있어, 고구려 사람들이 유난히 춤과 노래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을 더 살펴보면, 고구려 춤과 음악이 중국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고려무(高麗舞), 고려악(高麗樂) 등으로 불리며 중국 안에서도 크게 유행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중국 문헌인 『구당서』 『통전』 『신당서』 『수서』 등에 많이 나타난다.
『환단고기』 기록에 의하면,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가 단군조선의 국통맥을 계승하는데, 이 북부여의 6대 단군(임금)의 사위가 된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여, 북부여의 국통맥은 다시 고구려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단군조선-북부여 당시의 국풍(國風: 나라의 전통풍습)인, 신교 삼신상제 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아, 하늘(하느님)에 제사지내는 천제, 건국 시조신과 마을수호신, 또 집집마다 조상신 등을 모시는 제사, 추수감사제 등의 제사문화 풍습을 지켰다.
오늘날 축제의 원형이 고대 제사문화인데, 이 제사문화의 뒷풀이로 국중 체육대회(씨름·무술·궁술 등)를 열고 하나로 어우러지는 대동(大同)문화가 뿌리내린 것이다.
『신당서』를 보면, 당나라 측천무후 때 관직이 어사대부인 양재사가 관리들의 잔치에서 즉석으로 고구려 춤을 잘 추었고, 그런 모습을 보고 관직이 사례소경인 동휴가 “공의 얼굴이 마치 고구려 사람 같습니다.” 하며 기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원래 고구려 사람들은 노래와 춤을 즐길 줄 아는 멋스러운 민족이어서, 『당서』에는 고구려 노래와 춤을 ‘고려악’이라 하여 기록했고, 중국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때는 고구려, 백제 기악(악기음악)이 들어왔다고 『구당서』 「음악지」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음악은 중국 수, 당나라 궁정음악으로 자리잡았고, 당 말기에도 고구려의 춤과 음악이 자주 공연되었으며,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에도 이런 현상은 지속되었다.
즉 고구려 음악은 중국역사에서 약 5백년의 긴 세월 동안 ‘아름다운 음악’이란 호평을 받으며, 중국의 예술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구려 기악을 보면, 연주 음폭이 매우 넓어 여러 표현을 마음대로 해낼 수 있었다 한다.
당시는 동양문화가 서양문화보다 훨씬 발달된 시대이므로, 고구려 예술문화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예술문화이며, 세계적 일류문화로서 손색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해양·군사·문화 대제국인 고구려와 상무(尙武)정신으로 충만한 백성들
고구려는 음악·무용 등 예술분야 뿐만 아니라, 원거리 항해술·선박 제조기술·천리장성 등 튼튼한 산성 제조기술·온돌문화·철제방패·철제과녁 분야에서 매우 뛰어났다.
선비족의 남연과 중국 송나라에 말 800마리를 배로 실어다 주었고, 중국 남조와 일본을 대상으로 원거리 항해를 하고, 고구려 사신들이 일본에 철제방패와 철제과녁 등 선진문물을 전해준 기록이 중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남사』「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에서 송나라에 화살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이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인걸 보면, 당시 고구려 철제화살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는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강대국이었기에, 수양제 당태종 등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제국 고구려는 학자·기술자(장인)·예술가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여러 차례 선진문화를 전수해 줬다. 594년에 승려 혜자는 일본역사에서 최고 성인으로 존경받는 쇼토쿠(=성덕) 태자를 가르친 스승이었고, 담징은 일본 법륭사 금당벽화를 남겼고, 5경과 종이·먹·물방아 제조기술을 전수하여 일본의 학문과 농업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얼마전 일본 나라현 아스카의 기토라 석실고분 천장에서 천체도(天體圖)가 발견되었는데, 고구려 옛 땅인 평양부근에서 관측된 별자리를 바탕으로 그려졌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천문 관측기술이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기백ㆍ웅장ㆍ낙천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등 출간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를 소재로 한 TV드라마 등으로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러나 그동안 고구려는 학계에서 비주류로 취급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고구려사 전체를 조망한 단행본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그동안 알려진 고구려 관련 연구 성과들은 대부분 정치ㆍ전쟁사에 치우쳐있다.
그마저도 학자들의 연구 논문에서 발췌한 일부 내용이 언론을 통해 소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와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은
30여 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고구려사 전체를 아울렀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특히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은 고구려 문화사를 다룬 국내 최초의 단행본"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고구려가 무(武)에 못지않은 뛰어난 문화를 이룩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고구려 문화의 특징을 '기백'ㆍ'웅장'ㆍ'낙천'으로 요약한다.
고구려인은 씨름이나 수박희 같은 격투기를 연마했으며 걷기보다 뛰어다니는 경우가 많아
항상 허리띠를 착용하는 등 생활 전반에서 활력과 기백이 느껴진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높이가 6.39m로 같은 형식의 비석 가운데 이를 능가하는 것이 없으며
앞면 길이가 87m, 측면이 27m에 이르는 안악궁의 중궁 1궁전은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 일본의 어떤 고대 궁궐보다도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또 고구려인은 남녀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가무를 즐겼는데
망자를 보낼 때도 북을 치고 춤을 추는 등 낙천적인 인생관을 지녔다고 소개한다.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는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도 독자적인 체제를 마련한 고구려의 자주적 면모를 부각시켰다.
고구려는 전통적인 관습법을 시대상황에 맞게 변화시킨 율령을 반포했다.
율령의 반포는 일원적 법체계로 영역을 통치할 수 있는 집권력을 갖췄음을 뜻한다. 또 역사서 '유기(留記)'를 편찬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는 등 고구려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