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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항해 121 독일철학 총정리 (3) 슐라이어마허, 쇼펜하우어, 마르크스, 딜타이, 니체, 후설
독일철학 총정리 3편은 독일 철학사에서 헤겔 후부터 하이데거 전까지 6명의 철학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독일이 근대 국가로 성장하는 시기입니다. 나폴레옹에게 패배하여 기력을 소모한 독일은 그 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국가 부흥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1848년의 시민혁명이 일어 났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런 국민적인 실망감 속에서 그간 인기가 없었던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 철학이 큰 조명을 받게 됩니다. 그 후 프로이센은 비스마르크라는 위대한 재상의 등장으로 강대국이 되고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에게는 복수, 승리한 독일은 그간의 봉건주의를 완전히 물리치고 민족주의,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독일에 산업화, 공업화 그리고 식민지 확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노동운동과 공산주의가 세력을 얻게 됩니다.
이런 시대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철학자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니체는 보불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니체와 마르크스는 그들의 철학을 만들어 갔습니다.
1. 슐라이어마허, 프리드리히(1768 to 1834)
그는 아버지가 목사였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보헤미안 형제단 학교에 다녔고, 경건주의가 설립한 할레 신학부에서 공부하며 여전히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종교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탐구하는 이 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지만, 그 운동에 헌신하지는 않았습니다. 포메라니아에서 첫 목회를 시작한 그는 곧 베를린의 개혁 병원인 '샤리테'의 원목으로 부임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도시의 교육계, 특히 낭만주의의 주요 대표자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었고, 1804년 할레 신학부의 교수로 임명되어 1807년 베를린으로 돌아올 때까지 재직했습니다. 정규 직책 없이 그는 이 도시에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학 강사로서의 활동과 더불어 성 삼위일체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은 목사, 설교자, 대학교 신학 및 철학 교수라는 세 가지 역할이 그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신학자
사상사 측면에서 볼 때 슐라이어마허는 처음에는 플라톤의 번역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로 독일 낭만주의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종교에 관하여, 교육받은 자들 사이에서 그들의 비웃음에 대한 연설”의 저자였습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진정한 종교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며, 종교는 지식이 아니라 도덕이 아니며, 무한에 대한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인식, 신의 무한성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인 의존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제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종교적입니다.” 이 주장에 이어 슐라이어마허는 독자들에게 몇 걸음 더 나아가 보라고 권유합니다. 그들은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내에서는 개신교 형태이지만 성령의 내적 증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현재가 요구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개신교에서 진정한 종교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슐라이어마허의 '연설'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칸트의 도덕적 요구를 넘어서는 구체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종교성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리를 공식화하는 문제를 매우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인데, 교리는 더 이상 계시된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표현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베를린과 같이 루터교와 개혁교 사이의 교리적 차이가 특히 두드러진 지역에서는 이러한 교리의 차이가 동일한 기본 요건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에 해당할 뿐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기본 개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를 통해 루터교와 개혁파가 더 이상 따로 예배를 드릴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또한 프로이센 국왕 프레드릭 빌헬름 3세에게 자신의 지역 교회에서 사용하는 전례의 수정판을 제안했습니다. 이 신학자는 설득 이외의 방법으로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없었지만, 왕은 이 새로운 전례를 강제로 시행하려 했고 루터교회 내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행동 방식을 완전히 거부하면서 당시 프로이센에 존재했던 국가 교회의 원칙을 심각하게 비판했지만, 알렉산드르 비네처럼 절대적인 정교 분리를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후 모든 개신교 신학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신학 저술을 남겼습니다. 가장 중요한 저작은 교리와 혼동해서는 안 되는 그의 신앙 교리입니다. 그의 목표는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일련의 교리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경험하고 살 수있는 종교의 본질에 해당하는 결과를 가진 신앙 개념을 개발하는 것이 었습니다. 또한 그는 해석학, 철학적 윤리, 변증법도 발전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실천 신학의 위대한 대가 중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본당 직무를 수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 기관의 행정에 대한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고등비평
그는 또한 고등 비평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업은 현대 해석학 분야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고등 비평. (higher criticism)이란 기독교의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인 역사적 성경해석에 포함되는 근대의 성경 해석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활용하였던 역사 문법적 성경해석에서 발전한 형태로 "텍스트 뒤에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고대 텍스트의 기원을 조사하는 비평학입니다. 이는 정통 신학에서 볼 때는 성경의 무오류(無誤謬)성을 벗어나서 인본주의적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해석학
슐라이어마허는 생전에 해석학에 관해 광범위하게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이 분야에 관해 광범위하게 강의했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을 특정한 해석 방법 (예: 성서나 고전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었지만 모든 텍스트에 적용할 수 있는 해석 체계를 확립한 후에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과정은 체계적이거나 엄격하게 언어학적 접근 방식이 아니라 그가 "이해의 예술"이라고 부른 해석학을 말합니다. 슐라이어마허는 텍스트를 저자가 텍스트를 만들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전달하는 데 사용하는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즉 글을 쓰기 전에 저자는 어떤 생각 또는 체험 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인 체험의 표현이 텍스트입니다.
슐라이어마허가 그렇게 중시하는 이해 즉 (understanding, Verstehen) 개념은 저자가 쓴 맥락과 텍스트의 원래 독자가 언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해 배우는 역사적 과정입니다. 이해는 또한 직관과 해석자와 저자 간의 연결에 기반한 심리적 과정입니다. 독자와 저자는 모두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그들은 어느 정도 공유된 체험과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공유된 체험 덕분에 독자는 저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의 예술로서의 해석학은 당연히 오해를 피하려고 합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오해를 피하는 것이 해석학의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해의 과정에서 오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는 “현대 개신교의 아버지”(칼 바르트)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문화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목사를 거장, 즉 예술가나 시인에 비유한 그는 기독교와 문화 사이에 너무 명확한 선을 긋는 것을 경계하고 그 대신 밀접한 관계를 고려할 것을 요구하는 신학적 성찰을 위한 넓은 틈새를 열어놓았습니다. 저자: 버나드 레이몬드
2. 쇼펜하우어, 아서 (1788 to 1860)
독일 철학자 중 위대한 산문 작가 중 한 명인 쇼펜하우어는 학문 철학의 주류 밖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주로 19세기 전반기에 저술 활동을 했으며, 1818년에 1권, 1844년에 2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했지만 그의 사상은 1850년부터 반세기 동안에야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영향은 이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 특히 바그너의 작품과 정신분석학의 일부 주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는 니체로, 처음에는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나중에는 많은 부분을 반대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칸트의 추종자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영향은 쇼펜하우어의 이상주의 옹호 및 그의 핵심 개념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칸트에서 근본적으로 출발합니다. 그의 지배적인 사상은 의지에 대한 것으로, 그는 모든 세계가 의지이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노력하는 무의식적인 힘이라고 주장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세계 그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으로 발전시켰지만, 경험적 증거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세계의 일부로서 근본적으로 의지가 있는 존재이며, 모든 유기체에서 나타나는 삶에 대한 선택되지 않은 의지에 의해 행동이 형성됩니다. 의지와 지성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후 무의식 이론의 원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비관론자로서 의지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은 필연적으로 고통으로 이어지며, 고통이 포함된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교리는 종종 심오하고 감동적인 문체로 전달되며,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교리 중 하나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그의 견해인데, 그는 의지를 부정하거나 의지가 스스로를 거스르는 것에서 찾습니다. 그런 경우는 예술을 감상할 때라든지 동정심을 발휘할 때 그리고 금욕주의 종교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무신론자이지만 쇼펜하우어는 여러 세계 종교에서 금욕주의와 자기 포기의 예를 찾습니다. 그의 사상은 초기에는 힌두교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불교에 동정심을 느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작품에서 미적 경험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는 미적 체험이란 세상 사물에 대한 집착을 중단하고 의지 즉 욕망과 고통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무의지적 지각이라고 말합니다. 예술적 천재는 의지와 무관한 객관적 지각 능력을 비정상적으로 타고난 사람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채택하는데, 그는 이데아를 현실의 영원히 존재하는 측면으로 생각하며, 천재는 이러한 이데아를 분별하고 일반적으로 미적 경험을 통해 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특별한 대우를 받습니다: 음악은 온 세상의 근간이 되는 의지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윤리학에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론을 철저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자신의 윤리적 견해를 연민 또는 동정이라는 개념에 기초하는데, 인간은 유기적이고 의지가 있는 존재로서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드문 특성으로 간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연민은 서로 다른 개체의 구별을 최소화하는 세계관을 가진 유일한 진정한 도덕적 충동입니다. 저자: 제너웨이, 크리스토퍼
3. 마르크스, 칼 (1818 to1883)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가장 열렬한 지성적 옹호자였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그의 포괄적인 저술은 후대의 정치 지도자들, 특히 레닌과 마오쩌뚱이 20개 이상의 국가에 공산주의를 강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마르크스는 1818년 프로이센(현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본과 베를린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스물세 살에 예나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청년 헤겔주의자의 일원으로, 그다음에는 조롱적인 사회적, 정치적 내용으로 인해 탄압을 받던 신문의 편집자로 활동하던 그의 초기 급진주의는 학계에서의 커리어를 방해했고 1843년 파리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평생의 우정을 굳혔습니다. 1849년 마르크스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데이비드 리카도와 애덤 스미스의 저작을 많이 참고하면서 공부와 저술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마르크스는 1883년 런던에서 다소 빈곤한 환경에서 사망했습니다. 성인 생활의 대부분을 엥겔스에게 재정적 지원을 의존했습니다.
공산주의 연맹의 요청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에 출간된 가장 유명한 저작인 『공산당 선언』을 공동 집필했습니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을 촉구한 이 선언은 공산주의가 발전할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자본의 소유자 (자본가)와 노동자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계급 투쟁의 연속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소수의 자본가에게 부의 집중이 심화될수록 불만을 품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이 확대되어 유혈 혁명이 일어나고 결국 계급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자신의 철학에 통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명한 경제사상사학자인 마크 블라우그는 마르크스가 “사회 계급 개념, 국가 이론, 유물론적 역사 개념에 관해서는 12페이지도 쓰지 않은 반면, 경제학에 관해서는 말 그대로 순수하고 단순한 10,000페이지를 썼다”고 지적합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스스로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는 봉건제에서 시작되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거쳐 온 진화 과정의 필연적인 종말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이 과정의 경제적 원인에 대해 광범위하게 서술했습니다. 1권은 1867년에 출판되었고, 엥겔스가 대폭 편집한 후기 두 권은 1885년과 1894년에 사후에 출판되었습니다.
노동 가치론, 이윤율의 감소, 부의 집중 증가는 마르크스 경제 사상의 핵심 요소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포괄적으로 다룬 것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피상적으로만 다룬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르크스는 이 두 경제 체제가 어떻게 운영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측하지 않았습니다.
4. 딜타이, 생의 철학, 인문과학, 해석학
빌헬름 딜타이, (Wilhelm Dilthey, 1833 to 1911) 는 독일의 역사가, 심리학자, 사회학자, 해석학 철학자로, 베를린 대학교 에서 독일관념론의 완성자 헤겔 뒤에 같은 위치의 철학 교수직을 역임 했습니다. 박식한 철학자로서 딜타이의 연구 관심사는 과학적 방법론 , 역사적 증거, 과학으로서의 역사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
해석학과 추체험
딜타이는 자신이 되살리는 데 도움을 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에 대한 저작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두 인물 모두 독일 낭만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이로 인해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에 더 많은 중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딜타이 역시 이런 사상을 계승합니다.
딜타이는 인문학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즉 그는 당시 저명한 역사학자들인 드로이젠과 랑케가 제기한 물음 즉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인문과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자신의 개념 즉 이해 즉 understanding를 제기합니다. 즉 이들 과학의 방법론은 이해라는 것입니다.
딜타이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차이를 그 방법론인 설명과 이해를 통해서 풀이 합니다. 즉 자연과학의 서술방식은 설명이고 인문과학 혹은 정신과학의 서술방식은 이해라고 합니다.
설명 즉 explain은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인과율을 밝히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은 자연의 법칙을 핵심으로 전개됩니다. 법칙과 자료가 주어지면 자연현상의 예측이 가능합니다. 근대 이후 자연과학과 수학 등이 무섭게 발전하고 또 거기에 근거한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라서 자연과학이 문명의 핵심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역사학, 법학, 철학, 신학 등의 전통적인 학문의 영역을 평가절하되었습니다. 즉 이들은 과학적인 방법론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학문들은 비과학적이라는 오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맥락하에서 드로이젠, 랑케, 딜타이 등의 인문학자들이 인문과학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딜타이에 의하면 인문과학이 자연과학처럼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가치판단을 내리고, 목표를 설정하고, 규칙을 규정합니다. 이 점이 인문과학 혹은 정신과학의 장점입니다.
우리는 인문과학 혹은 정신과학이 가진 가치판단, 목표설정 그리고 규칙 제정 등의 현상을 볼 때, 인문과학이 인간들이 살아온 경험의 근본적인 현실과 훨씬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자연과학은 삶의 한 부분을 전문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과학 없이도 잘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학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정신이 반영된 실체입니다. 따라서 인문과학 내지 정신과학이 자연과학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명제가 정립됩니다. 딜타이에 의하면 자연과학은 인문과학의 일부라고 합니다. 인문과학은 다른 말로 정신과학이라고도 합니다. 정신과학은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역사와 언어입니다. 인간의 삶은 역사와 언어 그리고 문화 등의 개념을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따라서 딜타이의 삶 혹은 생명 개념은 개인적인, 실존적인 삶이 아니라 어디까지만 전체적인 인간들의 삶 그리고 순간적인 삶이 아니라 역사와 문명을 통해서 축적된 보편적인 삶을 말합니다. 언어란 다른 말로 상징이라고 합니다. 카시러란 철학자는 인간은 상징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딜타이는 과학 역시 언어 곧 상징을 통해서 매개된 관습으로 봅니다. 그러한 이론을 제공하는 것이 인문학적 철학의 목표입니다. 인문학적 철학은 딜타이가 자신의 학문적 경력 전체를 바친 연구 분야입니다.
딜타이는 인간을 역사적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과거의 사실로만 설명되지 않고 "일련의 세계관"으로 설명됩니다. 인간은 반성이나 내성(內省)을 통해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역사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것 즉 결코 객관적인 개념으로가 아니라 항상 자신의 존재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살아있는 경험으로만"을 통해서만 자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역사란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들의 나열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집단적으로 형성된 정신을 말합니다. 이를 딜타이는 세계관이라고 한 것입니다.
딜타이는 "모든 이해의 본질적인 시간성"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즉, 인간의 이해는 과거의 세계관, 해석 및 공유 세계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해와 해석에는 역사와 시간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시간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이 후대의 발전에 큰 영양을 주게 됩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역사를 중시하는 딜타이의 철학에 있어서 역사관은 또한 이해와 해석을 통한 총체적인 진실 규명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딜타이는 그의 스승 슐라이어마허가 개척한 해석학의 영역으로 들어 갑니다. 즉 해석학적 순환 문제가 나타납니다.
해석학적 순환이란 하나의 본문을 이해하는 과정을 해석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본문의 이해를 전체와 관련하여 이해하는 개념입니다. 즉 전체 본문과 개별본문은 서로서로 연관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순환이라는 것입니다. 즉 전체에 대한 암시적인 지식을 우선 직관한 다음 개별적인 부분에 대한 자세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그런 것들을 종합한 뒤에 다시 전체에 대한 초기의 직관이 맞는지를 반성해 본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구분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은 모두 삶의 맥락 또는 "연결점" 즉 독일어로
(Lebenszusammenhang)에서 시작하는데, 이 개념은 삶의 세계 즉
(Lebenswelt)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에 영향을 미쳤지만, 삶의 맥락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따라 차별화됩니다.
자연 과학이 삶의 맥락에서 추상화하는 반면, 인문학에서는 삶의 맥락이 주요 탐구 대상이 됩니다.
여기서 추상화란 제거 혹은 생략 등의 뜻입니다. 자연과학은 그 이론의 전개에 있어서 필요한 인간들의 삶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즉 삶의 맥락을 배제해야 그 학문이 가능해 집니다.
딜타이는 "사회 과학"과 "문화 과학"과 같은 다른 용어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이며 인간의 정신 또는 영혼이 다른 모든 것이 파생되고 분석될 수 있는 중심 현상이라고 지적함으로써 Geisteswissenschaft (문자 그대로 "마음의 과학" 또는 "정신적 과학")라는 용어 사용을 옹호했습니다. 헤겔과 마찬가지로 딜타이에게 Geist 즉 "정신" 또는 "마음"은 사회적 의미보다는 문화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지식이나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개인의 삶을 말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딜타이는 생의 철학자 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딜타이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은 바로 삶은 그 자체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이해의 대상으로 주어져 있고, 지각 가능하며, 이해될 수 있고, 규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관한 학문으로서 정신과학은 따라서 삶의 자기 이해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해와 공감을 토대로 성립된 학문의 원천은 바로 내적 경험입니다. 그 경험이란 내 자신의 고유한 삶의 연관에서 나오며, 언어와 전승을 매개로 역사적으로 형성된 그런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런 전제하에서 딜타이는 인간의 삶이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이성 즉 Reason에 의해서만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성, 기분, 정서와 같은 요소들보다 오히려 ‘원하고, 느끼는’요소들이 인간 존재의 본질 규명에 더 부합하다는 것입니다. 딜타이의 창작 활동이 이성적 학문인 철학에 국한되지 않고, 예술, 시학, 음악에까지 두루 미치고 있는 점은,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딜타이의 정신과학이 왜 ‘삶의 철학’으로 명명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삶의 세계는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접근법보다, 생생한 체험을 통한 내적 접근법이 좀 더 적합합니다. 인간 삶의 세계를 형성하는 '정신의 분야'에는 곳곳에 가치들, 삶의 목적과 행위의 목표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학적 접근방법으로는 그 세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반면 정신과학 즉 (인문학)은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간의 삶 속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정신적 사실들을 다루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영역을 포괄하여 봄으로써 그 삶의 전반적인 이해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삶은 인문과학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거의 선천적 조건입니다. 삶은 모호하고 해명이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경험의 토대입니다. 따라서 "지식은 결코 삶을 넘어설 수 없다" 라고 합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내적 삶 자체가 텍스트와 예술 작품으로 객체화된 것이며, 이 언어ㆍ예술적 표현은 본래의 삶의 체험들로 환원 즉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끼는 '추체험'의 감정이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추체험은 영어로는 re-enactment 라고 합니다. 추체험(追體驗, re-enactment)은 다른 사람의 체험을 상상적으로 다시 체험하는 것 내지는 재구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학 및 해석학에서 비롯된 추체험은 역사의 상상적 이해를 위해 미술사 및 역사교육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어 오고 있습니다. 타자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 타자가 속한 사회를 상상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과정에서 타자의 행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 추체험 학습의 근간입니다. 이는 “마치 ~ 인 것처럼” 살아보는 극적 경험에 기반을 둔 교육연극적 학습 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추체험이 가령 어떤 르네상스 예술가의 본래 체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딜타이는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동일한 '심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의 표현을 자신의 체험으로 감정이입을 해봄으로써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딜타이의 정신과학, (인문학)은 개별적 삶에서 경험하는 내적 '체험'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그 초점이 맞춰집니다. '체험'은 단순한 '경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경험에서 얻는 '지식'과 거기서 느끼는 '감정',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목적을 세우고 행동하는 '의지'가 합쳐진,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삶의 체험을 통해서 텍스트와 예술 작품 속의 생동적이고 역동적인 정신적 삶의 내적 동기ㆍ의도ㆍ감정ㆍ상황 등을 '이해'하는 것이, 딜타이가 말하는 정신과학의 독특한 방법론이 됩니다. 즉 자연과학은 '분석'하고 '설명'하는 방법론이지만, 이에 반해 정신과학은 삶의 내적인 표현인 인문학 텍스트를 다시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론인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의 이해와 해석의 방법론은 이후 가다머에게 가서 철학적 해석학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딜타이는 후기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생생한 체험의 내적 접근'만으로는 '이해'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내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아는 데에는 그가 밖으로 내뱉은 표현을 살펴봄으로써, 그리고 그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사람의 이해를 시작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내적 세계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들까지 추가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5. 니체
니체, 권력에의 의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844 to 1900)는 독일의 고전 학자, 철학자, 문화 비평가로, 모든 현대 사상가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니체는 고도로 교양있는 중산층에서 태어 났습니다. 십대가 되었을 때 그는 음악과 시를 썼습니다.
그는 철학으로 전향하기 전에 고전 언어학자 즉 문헌학자로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독일 본 대학 (Bonn university) 에서의 니체의 스승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의 추천을 받은 바젤 대학이 그에게 교수 초빙을 제의하기 때문입니다. 바젤 대학은 그에게 희랍어, 희랍문학 교수직을 맡깁니다. 리츨 교수는 니체에 대해서
“… 나는 여태껏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토록 빨리 이만큼 원숙했던 젊은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극찬을 하였던 것입니다.
니체는 고전 언어학에 엄청난 재질을 발휘하여 24세의 어린 나이로 스위스의 바젤 대학교에서 고전 문헌학 교수직을 맡습니다.
니체가 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중간에 이를 포기하고 라이프찌히로 갔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인생을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1865년 10월부터 1867년 8월 사이에, 당시 라이프치히 대학의 언어학 학생이었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골동품 가게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라는 책의 사본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서 니체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입니다. 니체는 친구들과 함께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그들의 삶 속에서 반영하는 열렬한 사생펜들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평생 니체의 철학에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시 비관주의 철학자로 알려져있던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간단히 알아 보겠습니다.
* 쇼펜하우어의 사상
쇼펜하우어가 니체에게 남긴 중요한 단어는 의지입니다. 위에서 말한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칸트주의 철학을 이용하여 의지의 형이상학을 완성한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물자체와 현상이라는 이원론을 (보편)의지와 표상이라는 일원론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칸트의 이원론이란 인간은 현상 혹은 표상(表象)에 대해서는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지만 현상의 숨은 원인인 물자체 즉 Ding an sich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보편)의지와 표상의 체계를 일원론이라고 한 것은 표상 혹은 현상은 그 숨은 본질인 의지가 표현된 것이고 숨은 본질은 알려집니다. 따라서 의지와 표상은 존재의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 보편의지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 실체를 오르고 있고 철학자는 이를 간파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그 의지라고 하는 것이 신적인 의지(意志) 혹은 주의 뜻 같은 유신론(有神論)적인 의지가 아니라 맹목적인 의지 혹은 불합리한 의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이를 모르고 선한 목적을 추구하는 경향 때문에 결국 인생은 비극이요 고통으로 나타납니다. 또 철학자들이 의지를 안다고 해도 그의 생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스런 인생 가운데서도 우리는 예술의 직관과 타자에 대한 동정심 등을 통해서 순간적이나마 의지의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 바그너와의 만남
니체의 사상 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또 다른 사람은 당시 독일의 음악가 바그너입니다. 우리에게는 악극이라는 오페라 형식을 창조한 사람으로 알려진 바그너는 사상의 분야에 있어서도 대가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이스 연극에 능통했습니다. 바로 이점에서 니체와 바그너는 서로 크게 공유할 부분이 있습니다.
니체가 바그너를 가까이서 알게 된 것은 1868년 가을 라이프찌히에서 이었습니다. 나이로 보아 니체에게 그는 아버지뻘이었는데 니체는 어렵지 않게 바그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숙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고전 문헌학을 전공한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품과 그 세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비극은 최상의 예술로서,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가 비극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그너는 특히 아이스킬로스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은 오레스테이아 3부작 등이 있습니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는 바그너의 걸작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를 위한 초석으로 작용했습니다.
바그너는 아이스킬로스를 음악정신으로부터의 탄생이라고 명명하고 에우리피데스를 데카당스라고 정의내린바 있습니다.
니체는 바그너와 의견을 같이 하며 에우리피데스의 소크라테스적 경향이 바로 비극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본다고 합니다. 즉 니체는 주지주의를 비판한 것입니다.
바그너 또한 열렬한 쇼펜하우어 추종자였습니다. 바그너는 니체의 새로운 우상이 되었습니다. 바그너에게 헌정된 니체의 첫 번째 저작 『비극의 탄생』은 이 시기에 쓴 것입니다. 그것은 바그너와의 대화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저작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과 함께 보낸 편지에 니체는 “이 책의 모든 내용에서 당신이 제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오로지 감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바그너는 기뻐했습니다. 1872년 니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당신은 내 아내를 제외하고는 내 삶이 내게 허락한 유일한 소득입니다”라고 씁니다.
니체와 바그너의 이러한 교류를 통해 탄생한 니체의 작품이 위에서 말한 비극의 탄생 즉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독일어로는 (Die Geburt der Tragoe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입니다. 그리스 비극과 음악에 대한 니체와 바그너의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았다면 둘의 관계가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니체가 그토록 음악의 정신을 존중한 것은 바그너 못지 않게 쇼펜하우어로부터의 영향력이 큽니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예술 중에서 음악을 가장 훌륭한 예술로 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예술들은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반영인데 비하여 음악은 의지(意志) 즉 삶에의 의지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음악은 리듬을 가진 시간적 예술이고 이런 것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살려고 하는 의지 대신 니체는 권력을 위한 의지를 최고의 가치로 봅니다.
“비극의 탄생”에서 또 다른 재미있는 요소는 소위 아폴론 정신과 디오니소스 정신입니다. 아폴론 정신은 모든 정적(靜的)인 예술 혹은 조형적인 예술에서 표현을 찾습니다. 여기는 조각이나 그림 등이 포함됩니다. 디오니소스 정신은 모든 음악이나 서정시 등이 포함됩니다. 니체에 의하면 아폴론적 요소는 꿈을 나타내고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취함과 흥분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또한 삶에 대한 비관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예술은 이런 대립적인 요소들을 조화시켜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장점이 있었고 니체의 당시에는 바그너가 그런 예술을 보여준다고 봅니다.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는 그 후 악화가 되긴 하지만 비관주의와 삶의 의지 문제는 이어집니다. 단 니체는 삶의 의지 대신 권력에의 의지를 선택하긴 합니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78 to 1880)
프리드리히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은 인간 본성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격언과 성찰의 모음으로,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우리의 욕망, 두려움, 환상을 탐구합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라는 저서에서 우리의 종교적 신념과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에 대한 충동이 두려움과 무지에 근거한다고 추론합니다.
니체는 종래의 신학과 형이상학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종류의 도덕성이 시작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새로운 도덕성을 가진 인간은 초인 사상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는 나중에 “짜르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 라는 외침으로 전환됩니다.
* 즐거운 학문 (1882)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삶이란 예술이다 라는 명제를 주장합니다. 즉 스스로의 생명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각자는 자신의 고유한 관점과 창조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니체는 이를 위해서 신은 죽었다는 명제와 함께 출발을 합니다. 전통적인 종교적인 믿음은 현대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합니다. 개인은 우선 자신의 가치관과 고유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즐거운 학문의 다른 키워드는 아모르 파티입니다. Amor fati는 운명의 사랑입니다. 최근 우리 나라 가요계에서도 이런 제목의 노래가 큰 히트를 쳤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거나 거기서 도망칠 생각을 하지말고 자신의 고통과 숙명을 포함한 삶의 진실을 긍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곱추에게서 혹을 떼내는 것은 그를 정신적으로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곱추는 자신의 운명 즉 척추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그런 조건 위에서 자신의 생을 설계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Amor fati는 달리 말해서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라틴어입니다. 인생의 사건이 전개되는 대로 받아들이는 의식적인 실천입니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생에서 많은 역경을 겪은 절름발이 노예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아마르 파티는 종종 “영원한 복귀”와 연관되어 있는데, 이는 모든 것이 무한한 시간 동안 무한히 반복된다는 개념입니다.
* 아모르 파티의 장점
아모르 파티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고 미래에 성공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어려운 경험을 포함하여 삶의 모든 경험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고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 to 1885)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책, (독일어로 Also sprach Zarathustra. Ein Buch fuer Alle und Keinen)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쓴 철학 소설 작품으로 1883년부터 1885년까지 네 권으로 출간된 책입니다. 주인공은 명목상으로는 역사적 인물인 짜라투스트라이며, 서양에서는 조로아스터라고 더 많이 불립니다.
이 책의 대부분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짜라투스트라의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후렴구로 끝납니다. 짜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은 니체의 초기 저서인 『즐거운 과학』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의 스타일의 특징은 정언적인 철학적 문장이 아니라 예술적, 문학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에 의해 주어진 “설명과 주장”은 “거의 항상 비유적입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초인(超人), 신의 죽음, 권력에 대한 의지, 영원한 반복 혹은 영겁회귀 사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 초인 사상
초인 사상은 니체의 근본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초인이란 기독교적 인간학과 대립되는 니체의 주장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그래서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기독교와 달리 니체는 인간의 자립적인 의지를 강조합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 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위에서 이미 한번 강조가 된 바가 있습니다.
이는 또한 운명애(運命愛) 소위 아모르 파티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사상과 통합니다. 이 역시 “즐거운 학문”에서 선행(先行)한 바 있습니다.
초인 즉 위버멘쉬는 근대적 가치와 도덕 및 신앙을 뛰어넘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니체에 의하면 종래의 규범들은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초인(超人)은 탈아 (脫我)의 도덕을 극복해내는 인간입니다. 이 점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달라집니다. 쇼펜하우어는 동정심과 연민을 최고의 도덕적인 가치로 보았습니다. 또 그는 각종 종교의 특성을 금욕주의로 간주했고 이 역시 좋은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이를 비판합니다. 종교와 금욕주의 그리고 이를 위한 각종 고행(苦行) 개념을 니체는 부정합니다.
탈아의 도덕이란 이기심의 극복 혹은 욕망을 극복하고 선의지와 대의를 숭상하는 도덕적인 가치를 말합니다. 니체의 초인은 이런 정통적인 고귀한 도덕적 영웅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영웅 예를 들어서 예술이나 학문의 영웅들을 말합니다. 초인의 모델로는 당시 최고의 문인이었던 괴테가 손꼽힙니다.
초인 개념은 '풍습의 도덕'과 대립될 뿐 아니라, '인간말종'과도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인간말종, (Der letzte Mensch)'이란 현실에 안주하는 인간형 혹은 권력욕에 물든 인간을 가리킵니다.
혹은 당시 유행한 마르크스의 노동자 운동을 지시합니다. 소외된 노동자를 회복시키려는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서 니체는 무척 반대적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사회주의,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더 높은 문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 평등주의 사회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사회주의 국가의 중앙집권적 권력에 반대했습니다.
권력의지에 대한 인용문을 보시겠습니다.
이 원숭이들을 보라. 이들은 권력을 원하며,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돈을 원한다. 이들 모두는 높은 권좌를 원한다. 그러나 권좌 위에는 똥이 있는데.
니체는 초인을 기존의 인간과 거리가 인간과 짐승 사이의 거리보다 더 먼 존재로 상정합니다. 따라서 "초인은 기존의 모든 인간 관습과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발명하며, 이는 기존의 가치와 관련하여 새로운 가치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초인 즉 위버멘쉬는 초월적, 신적인 힘을 갖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래의 이타적(利他的), 탈아적 (脫我的) 가치를 극복하고 무(無)에서 유(有)를 생성시키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 권력에의 의지 혹은 권력의지, Will to Power
이 세상은 권력에 대한 의지이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권력에 대한 의지이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높은 자는 두려움이 없고 불행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낮은 자와 구별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의지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들의 의지입니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의지입니다. 선과 악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치를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위해서 스스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희망이자 취미입니다.
* 영겁회귀 (永遠回歸) 즉 동일한 것의 영겁회귀는 니체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근본 사상이자 모든 존재와 에너지가 반복되어 왔으며, 무한한 시간을 가로질러 무한한 횟수로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개념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영원회귀의 개념은 키티온의 제논이 설립한 철학파인 스토아 학파와 가장 두드러지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우주가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다시 태어나며, 각 우주는 이전의 우주와 똑같다고 믿었습니다. 이 교리는 자유 의지와 구원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어거스틴과 같은 기독교 저자들에 의해 맹렬히 반박되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영원회귀에 관한 고전 이론이 종식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19세기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해 부활되었습니다. 그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 아이디어를 사고 실험으로 간략하게 제시한 후, 주인공이 영원 회귀 사상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는 소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아이디어를 더욱 철저하게 탐구했습니다.
* 결론
결국 니체의 사상은 종교는 부정하지만 운명 즉 우주의 규칙적이고도 독자적인 진행은 신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한한 반복을 믿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인내하고 살아가는 스토아 학파와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인 사상은 권력의지 즉 높은 자는 두려움이 없고 불행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낮은 자와 구별됩니다. 불행에 대해서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니체 철학의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스스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의 창조입니다.
6. 후설, 현상학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
1). 철학자 후설 소개
에드문트 후설(독일어: Edmund Husserl, 1859년 4월 8일 부터 1938년 4월 27일)은 현대철학의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인 현상학의 체계를 놓은 철학자입니다. 그는 당시 철학의 풍조였던 심리주의, 실증주의 등에 반대하여 엄밀한 과학으로서의 철학을 정초했는데 그것이 바로 현상학입니다. 후설의 현상학은 헤겔의 저서 “정신현상학”과는 다른 학문입니다.
현상학(Phaenomenologie)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은 1859년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 제국의 한 지방인 메렌 (Mähren, 현재 체코의 동부 지방)의 작은 도시 프로스니츠 (Proßnitz)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할레 대학교의 강사, 괴팅겐 대학교의 강사와 교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를 거쳐 은퇴 후 오히려 더욱 왕성한 의욕과 새로운 각오로 연구와 강연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죽고 싶다”는 자신의 유언 그대로. 진지한 초심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수행한 말 그대로 ‘철학자’ 자체였습니다. (위키백과)
2). 후설의 초기의 철학: 기술심리학
후설은 학문의 초기에는 수학자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철학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는 수학의 기초로서 철학을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수의 철학이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수학자로서 출발하여 철학을 공부한 사람답게 후설은 그의 학문적 엄밀함과 명백함에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명백함을 명증(明證)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철학도 “엄밀한 학(學)으로서의 철학”을 지향합니다. 그가 수학에서 철학으로 전환한 까닭은 학문에서 가장 명증한 수학에서도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결코 증명될 수 없는 5개의 공리에서 출발합니다. 철학만이 전제없는 학문의 이상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아직도 철학이 그의 위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시 수학계는 수리철학적으로 심리주의와 논리주의가 대립해 있었습니다. 심리주의는 수학도 인간의 심리에 의존한다 따라서 수학의 기초는 심리학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반면 논리주의는 수학이나 논리학의 진리는 결코 심리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만약 수학을 심리학으로 설명하면 상대주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당시 비인 대학의 브렌타노 교수는 심리주의를 주장했고 따라서 후설도 그의 스승의 영향을 받아 심리주의 입장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독일의 예나 대학 교수인 프레게의 영향을 받아서 논리주의로 전환합니다. 그런 결과물이 후설 초기의 대저인 “논리연구, 순수논리학 서설”입니다. 뒤에도 다시 나오지만 브렌타노는 후설 현상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인 지향성 (intentionality) 개념을 중세철학에서 발견하여 도입한 사람이고 이를 후설 역시 받아들입니다.
3). 현상학의 이념
“현상학의 이념”은 후설이 1907년 괴팅겐 대학에서 행한 강의록입니다다. 후설은 1907년 여름학기에 “현상학과 이성비판 개요”라는 제목의 강의를 열었습니다. 이 강의의 입문에 해당하는 처음 다섯 번의 강의가 “후설전집” 2권으로 출간된 “현상학의 이념” 입니다.
이 책의 목적은 한 마디로 앎 혹은 지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물론 숱한 지식과 정보의 홍수에 빠져 살기 때문에 도대체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거의 무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과 정보의 홍수 시대에도 “올바른 지식은 있는가?” 혹은 “과학적 지식은 삶에 유익하기는 하나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볼 수 없다” 라는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도 상대주의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특히 철학에 무척 중요합니다. 자연과학 내지 실증적인 과학들이 엄청나게 발전함에 따라 철학적 지식은 점점 힘을 잃어 갑니다. 특히 최근에는 뇌과학 (brain science), 인공지능(AI) 등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철학의 입지는 가뜩이나 좁아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종래의 인식론은 뇌과학 혹은 인지과학이 대체하고 있습니다.
후설이 살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도 철학에 대한 실증과학의 공격이 드세었습니다. 당시 발달한 심리학 특히 게슈탈트 (Grstalt) 심리학은 큰 반향을 주었습니다. 후설은 빈 대학에서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에게서 철학적 심리주의를 배웠습니다. 브렌타노의 제자인 베를린 대학의 교수 칼 스툼프(Carl Stumpf)에 의해서 1893년에 설립된 “독일의 베를린 실험 심리학 학교”에서 게슈탈트 심리학이 꽃을 피웠습니다.
게슈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은 심리학, 철학 등에서 심리적 인지적 정서적 현상 등을 개개의 감각적 요소 등으로 분해해서 집합으로 바라볼 때 그 부분들의 합과 총체적인 그 자체가 서로 다를 수 있으며 개개의 부분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전체로서의 구조나 특질을 갖게 된다고 보는 심리학적 입장이다. (나무위키)
4). 대상과 인식의 일치
우리가 흔히 지식 혹은 정보라고 하는 것을 인식이라고 합니다. 또 이를 진리라고도 합니다. 철학에서는 이 진리를 대상과 인식의 일치라고 합니다. 현상학의 이념의 번역자 이영호씨는 이를 “맞아떨어짐”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즉 대상과 인식이 맞아 떨어짐을 진리로 본 것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진리 대응설이라고도 합니다. 하여간 후설의 절대적인 관심은 바로 이런 것 즉 어떻게 인식과 대상이 맞아떨어짐이 가능한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후설은 칸트의 문제의식과 비슷합니다. 즉 지식 혹은 진리가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냐고 묻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는 것입니다. 이를 칸트는 “어떻게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한가?” 라고 도식화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학이나 각종 자연과학의 진리가 존재한다. 철학은 그것이 어떤 근거로 가능한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를 칸트는 선험철학 혹은 인식론이라고 하고 후설도 그냥 인식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것을 철학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일치라고도 합니다.
이런 진리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령 “저 꽃은 국화이다” 라고 할 때입니다. 혹은 “문이 열려 있다” 도 모두 이런 주관과 객관의 일치가 있습니다. 즉 관찰된 사실과 그에 대한 언표(言表)의 일치가 인식이고 진리입니다. 그래서 대상은 사실이나 경험 혹은 관찰에 해당하고 인식은 언표, 진술, 명제, 판단 혹은 말에 해당합니다.
5). 초월적 과학과 내재적 과학
후설은 일체의 학문 혹은 과학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즉 초월과학과 내재적 과학입니다.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등 일체의 과학은 초월과학입니다. 초월(超越) (transcendence) 이란 무슨 신비한 의미가 아니라 그냥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모든 지식의 기준은 나입니다. 그래서 초월은 결국 나 밖에 혹은 나의 의식 밖에 란 말이 됩니다. 삼라만상과 우주 전제가 인식의 대상이고 또 초월자들입니다. 이처럼 철학을 제외한 모든 과학은 그 대상이 초월자입니다. 이를 후설은 또 객관적 과학이라고 합니다.
이런 객관적 과학에 대하여 나의 의식을 대상으로 삼는 과학이 있으니 그것이 후설의 철학 곧 현상학입니다. 이를 후설은 또 생각의 과학이라고 합니다. 생각을 코기타치오 (cogitatio) 라고 라틴어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한다고 해서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생각 즉 개념, 판단, 추리 등이 아니라 직관적 인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국 경험론이 말하는 감각이나 인상 (impression)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모든 지식의 원천인 지각 (perception)과 연관이 됩니다.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후설의 현상학을 이해하려고 할 때 이런 경험론적인 발상이 도움이 됩니다. 즉 경험에서 관념이 나온다 는 사상입니다. 이런 경험적 인식을 후설은 직관적 인식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생기는 인식 곧 사물의 이름을 말합니다.
위의 예처럼 “이것은 꽃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 혹은 대상인데 후설은 이를 종종 소여(所與) data, 독일어로 Gegebenheit 라고 합니다. 또 자기소여(自己所與) 라는 말도 쓰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스스로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연과학에 엄청난 신뢰를 보냅니다. 그만큼 그들이 객관적이다 혹은 정확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후설의 입장에서는 이들 자연과학 혹은 초월적 과학들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외적인 관찰에 의지하는데 이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밖에도 자연과학이나 심지어 수학마저도 그 전제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기하학의 공리 같은 경우입니다. 이는 이미 학문적 탐구 이전에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전제가 누구나 봐도 다 그럴 듯이 보이기는 합니다. 가령 평행선의 공리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공리를 부정하는 기하학도 탄생되었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도 주지 못하는 진리 즉 무전제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현상학입니다.
6). 내실적 내재(內實的內在)와 환원 (reelle Immanenz and Reduktion)
위의 내재적 과학으로서의 현상학의 영역을 나타내게 위해서 후설은 “내실적 내재”라는 말을 씁니다. 의식 밖에 주어진 대상을 탐구하는 초월적 학문들과 달리 현상학은 어디까지나 의식 안에서 대상을 찾고 분석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의식 안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입니다. 후설을 이를 위하여 환원(還元) (reduction) 혹은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말을 씁니다. 환원이란 초월적으로 간주된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은 초월적 정립을 배제하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초월적 정립이란 쉽게 말하면 내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즉 세상을 모두 나의 눈이라는 카메라에 담긴 영상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불교 사상에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라는 것이 있는 데 바로 이 사상이 환원과 같습니다. 일체를 내가 만든 이미지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흔히 관념론이라고 합니다.
필자도 예전 학부 시절 부전공으로 철학을 공부했었는데 후설 현상학의 환원과 내실적 내재 등의 개념을 이해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후설을 알지 못할 때는 내가 보는 세상이 당연하고 자명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는 나의 극장의 스크린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또 두 번 째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스크린을 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환원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불교와의 차이점은 마음 아니 의식의 구조가 단순하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후설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혹은 의식은 몇 겹의 층으로 이루어 집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현상학의 임무입니다. 서양철학의 특징은 일체유심소조의 상태로 들어가야 비로소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불교와 현상학은 일치합니다. 단 현상학의 경우는 해탈이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수련이 아니라 엄밀한 과학적, 철학적 탐구가 생명입니다. 여기서 동양과 서양이 갈라집니다. 즉 일체유심소조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끝이 아니라 거기서 사물의 본질을 직관해야 비로소 학문의 목적이 달성됩니다. 이를 본질직관이라고 합니다.
내실적 내재(內實的內在)와 함께 후설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는 사상을 채용합니다. 아시다시피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는 명제를 철학의 제일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이를 라틴어로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I think, therefore I am 이라고 합니다.
후설 역시 이런 데카르트의 사상을 많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코기타치오. (cogitatio)란 단어를 말합니다. 이 말은 사고, 반성 혹은 사고작용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사고되어진 것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후설은 코기타치오네스.(cogitationes) 즉 사고되어진 것들 이라는 말을 씁니다.
내실적 내재는 나는 생각한다는 능동적인 의식과 생각되어진 것이라는 대상의 영역으로 구별됩니다.
그런데 “내실적 내재”가 가장 명확하다 혹은 명증적이다 라는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실적 내재와 유사하고 더 일반적인 용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부지각”이란 말입니다. 또 영국의 철학자 로크의 용어로 “내적인 경험”이란 것도 있습니다. 외적 경험은 바로 현실입니다. 문제는 내부지각과 외부지각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 따라서 내부냐 외부냐 혹은 후설의 용어로 내재냐 초월이냐가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저 꽃은 노랗다 라고 할 때 이를 객관적인 사실로 간주하면 그것은 초월입니다. 그러나 저 꽃은 노랗다고 내가 생각한다 혹은 나에게 노랗게 보인다 라고 하면 그것은 내부지각입니다. 이 두 언표의 차이점은 전자의 경우 그것은 진위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황달병에 걸려 있다면 나의 진술은 오류가 됩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그것은 절대적으로 참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보인다 라고 하는 데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브렌타노도 내부지각은 명증하다 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브렌타노는 심리현상은 내부지각이고 물리현상은 외부지각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후설은 지향성 개념을 통해서 내부지각, 외부지각의 경계를 파괴하고 이를 태도변환으로 다시 설정합니다. 초월을 내재로 환원시키고 거기서 다시 보편적인 본질을 찾는 것이 후설의 현상학의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이런 태도 변환을 후설은 판단중지 에포케.(epoche)라는 말로 풀이합니다. 에포케(epoché, epokhế, εποχη)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판단중지(判斷中止)를 뜻하는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의 에페케인(삼가다·멈추다)에 유래합니다. 회의론자는 어떠한 생각에도 반론(反論)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판단을 중지해야만 한다고 하여 이를 에포케라고 불렀습니다.
후설의 현상학에선 일상적인 관점, 즉 자연적인 태도를 괄호 안에 넣어 멈추도록 함으로써 순수한 체험, 순수한 의식을 획득하는 방법을 두고 현상학적인 에포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세계로부터 현상학적인 본질 또는 세계에로의 현상학적 환원의 한 단계입니다.
7). 모든 지식의 기초로서의 현상학
후설의 사상을 보면 그 이전의 여러 가지 선배 사상가들의 사상이 녹아 있습니다. 우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칸트가 말하는 지식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비슷합니다. 그래서 후설은 자신의 철학을 칸트와 마찬가지로 “인식비판”이라는 말을 이용하여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성비판”이라는 용어도 칸트와 같이 사용합니다.
그 다음은 피히테의 지식학 개념을 가져옵니다. 피히테는 그의 지식학 science of knowledge, Wissenschatslehre을 모든 과학의 토대를 주는 기초학문으로 정의를 했는 데 이것이 후설의 철학 개념과 일치합니다.
즉 내재과학을 통해서 초월과학을 정초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자연적 입장의 학문이라는 언어를 가져옵니다. 자연적 입장의 학문은 소위 자연적 태도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적 태도란 모든 초월적인 존재를 믿는 태도입니다. 보통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취하는 태도입니다. 즉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삼라만상이 다 내 주변에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태도입니다. 모든 여타 과학들도 모두 자연적 태도 위에서 성립됩니다. 이런 자연적인 태도에 환원이 가해지면 철학적 태도 혹은 현상학적인 태도로 바뀝니다. 이를 후설은 태도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현상학자 역시 자연인이기 때문에 보통은 자연적인 태도로 살아갑니다. 단 그가 철학을 연구할 때는 환원과 타도 변환을 통하여 세상을 다르게 봅니다. 즉 위에서 말한 내실적 내재로 본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마술 비슷하지만 우리들도 이를 해볼 수 있습니다. 일체의 존재 정립을 버리고 현상으로서 사물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나름의 현상학적인 철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꼭 철학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술이나 시를 쓸 수도 있습니다. 색즉시공 일체유심소조의 태도로 세상을 한번 바라보기를 추천합니다. 이런 것들이 실은 현상학적인 태도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내실적 내재를 만나는 것이 현상학의 마지막 목적은 아닙니다. 후설에 의하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질직관 (Wesenschau or intuition of essence)으로 나아 가야 합니다.
환원을 시행하더라도 현상들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실적 내재 역시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 그 변화와 흐름이 의식 안에 있다는 것이 환원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철학자는 혹은 우리는 개체적인 현상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의미의 초월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식의 흐름 즉 체험류를 구성하는 본질이 있습니다. 이런 본질은 객관적이라고 합니다. 혹은 선천적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현상과 거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본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음악과 미술 혹은 음조와 색채 등이 있습니다. 현상학은 본질학으로 규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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