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첫 발령은 양재였다. 사당동 지하철 근처에 반지하를 전세로 얻고 살림에 필요한 것들과,
자그마한 냉장고를 구입하여 가져간 짐과 반찬을 정리한 뒤 철원으로 내려왔다.
나는 이 주에 한 번씩 이고 지고 아들 방을 가곤 하였다. 아들은 친구들 중 제일 먼저 발령을 받게 되었다.
자취방은 오가는 선 후배들의 안식처였다. 배고프면 밥해 먹고, 잘 때 없으면 자고 가고,
차비 없으면 찾아오는 반지하 자취방. 마음 약해 친구들을 박절하게 내치지 못하고 월급을 타도 모아지질 않았다.
새벽부터 준비하고 지하철과 버스에 시달리며 출근하는 아들이 안스러웠다.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로 내신 할 것을 종용했으나 문화시설이 없는 시골이 답답하다고 했다.
나는 선 듯 자가용을 사주겠다고 했더니 솔깃해서 50% 마음이 돌아섰다.
서울살이 일 년 근무하고 양재에서 포천으로 오게 되었다. 해주는 밥에 편하게 출 퇴근 하니 한시름 놓였다.
월급도 차곡차곡 모여졌다.
어느 해 여름날 아들은 친구들과 속초로 1박2일 놀러 간다는 것이었다.
누구와 가느냐는 질문에 고등학교 동창 남자 친구들과 속초로 회 먹으러 간다고 했다.
날짜를 보니 같은 날 나도 친목회원들과 속초로 놀러 가는 약속이 잡혀있었다.
누구와 가느냐는 물음에 여자 친구들끼리 등산 간다고 했다. 토요일 아침 아들과 집에서 헤어져 여행길에 올랐다.
우리 일행은 봉고차에 가득 타고 미시령 고개 위 매점에서 커피 한잔씩 마시며 멀리보이는 파도가 일렁이는
푸른 바다를 감상하였다. 아들이 전화를 했다.
“엄마 어디예요, 난 속초 가는 길인데 엄마는?”
“음ㅡ 나는 소백산 가는 길이지, 거진 다 왔어”
소백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본 일도 없는데, 왜 하필이면 소백산이라고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꼬치꼬치 따져 뭇지도 않고 뒤따라와 확인도 안 하는대 엉겹결에 소백산이라고 했다.
사실은 여자만 간 게 아니고 남자도 3명이 함께 있었다. 차 안에선 구린 곳이 있으니,
거짓말을 한다며 모두 한바탕 웃었다. 일부 회원은 하나 콘도에 숙소를 정하고 임원들은
대포항으로 회를 뜨러 다시 차에 올랐다. 그 시절은 대포항 회 뜨러 들어가는 좁은 통로는,
오른쪽엔 각종 튀김 종류의 먹거리를 푸짐하게 해놓고, 왼쪽은 건어물 가게가 즐비하게 있었다.
오가는 손님이 장사진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경기도 좋고 물건값도 헐해 한 해에도 몇 번씩 찾아가던
대포항이었다. 푸른 바다를 배경 삼아 싱싱한 회 한 접시에 구수하고 매콤한 매운탕을 안주로,
쓰디쓴 술을 들어라 마셔라 넘기던 소주,
만나면 한 짝은 기본이고 기분에 마셨는지 술이 술을 마셨는지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우리 일행은 회도 뜨고 시장을 보고 나가던 중 새우 튀김집 앞 초입새에서
어ㅡ 머. ᅳ 나. ᅳ 비명을 질렀다.
“아니, 엄마는 여자 친구들이랑 소백산 간다더니...”
“아니 넌 남자친구들과 놀러 간다더니 웬 아가씨.”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이면 약속도 없었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아들도 옆에 있던 단발머리의 청순한 아가씨도 몸 둘 바를 몰라 쥐구멍을 찾았다.
영문도 모르고 옆에 있던 순자도 영록이 아저씨도 너털웃음만 남기고
서로가 잘 놀다 오라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어머니, 요즘은 소백산 안 가세요”
며느리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놀려 댄다.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때로는 적절한 가면들이 필요하다.
나는 여러 개의 가면으로 벋었다 썼다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대포항 입구에서 만났던 단발머리 그 아가씨, 우리집 며느리가 되고, 그 아들이 장가가서 한 달 뒤면
진 손주를 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 그래도 그때가 재미있었다.
먹어라 부어라 하던 분들은 먼저 가시고 몸 사리며 피해 가든 몇 사람만 남아있다.
‘이번에는 아들에게 어디로 간다고 놀러 갈까’
이제는 산으로 가든지 바다로 가든지 신경 안 쓰는 우리 아들,
에ㅡ잇 날씨는 춥고 무릎도 쑤시는대 따뜻한 집에나 있자.